고구려의 풍류문화
고구려는 큰 촌락을 지칭해 ‘홀(忽)’, ‘골’, ‘구루(溝婁)’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되면서 고구려의 구려(句麗)라는 명칭이 비롯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여러 부족 집단 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지칭해 ‘큰 고을’ 또는 ‘높은 성’이라 불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 같다.
압록강 중류를 중심으로 일어난 고구려는 일찍이 태조왕 때부터 기본적인 국가체제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후 주변 영토를 복속 시키면서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고, 중국과는 수 없는 분쟁을 일으키면서 국가 위상을 정립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6세기말부터는 오히려 수와 당의 공격을 계속 받아 국가가 누란의 위기를 수차례 겪게 되고,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위기에 처했다. 그 후 연개소문이 죽자 국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초기 사상은 선교(仙敎)였으나 뒤에 불교와 도교가 전래 되면서 결합하였다. 소수림왕대
에 이르러서는 태학을 세워 유교를 교육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372년(소수림왕 2)으로 이해 6월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보내왔다. 그리고 고구려 말엽에 당(唐)으로부터 도교가 전래되면서 차츰 배불정책을 시행했으며, 이에 따라 불교는 쇠퇴하고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 불교의 특징은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그 성가가 더 높았다는 데 있다. 고구려의 승려로서 외국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사람은 승랑(僧朗)이다. 그는 고구려의 요동 사람으로서 북제 말엽에 중국으로 건너가 삼론종(三論宗)의 기반을 닦은 학승(學僧)으로서 유명한 인물이다. 승낭의 삼론종에 비롯되어서 훗날 일본 삼론종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람은 역시 고구려 승려인 혜관(慧灌)이었다.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서 존경을 받았던 그는 625년 1월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해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명으로 기우제를 행하여 효험을 보임에 따라 승정(僧正)으로 임명되었다. 무서보다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는 호류사[法隆寺]의 금당벽화(金堂壁畵)를 남긴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있다.
고구려의 교육기관으로는 경당(扃堂)으로 사학교육기관(私學敎育機關)이다. 태학이 상류층의 자제를 모아 유학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관학(官學)인 데 대해, 후기에 설치된 경당은 일반 평민층이 그들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했다. 여기에서는 경전(經典)과 궁술(弓術)을 가르쳤다. 평양 천도 이후 경당은 각처에 설치되어,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초기 고구려 사회의 사상과 신앙은 선교(仙敎)였다. 그중에서도 고구려의 건국 신화(주몽설화)에 잘 나타나 있는 천신사상(天神思想)은 초기의 지배이념으로 기능했다. 초기 고구려에서는 매년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을 성대하게 열고, 주몽신과 그 어머니인 유화신을 제사지냈다. 이러한 전통사상은 뒤에 들어온 불교·도교와 결합하였다.
고구려의 중심사상을 불교이전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속(巫俗)신앙이었다. 무속신앙은 자연을 중심에 놓고 정신관과 생활관을 연계시킨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구성요소 중에 하나이며, 산천(山川)과 특이한 석목(石木)이나 동물에게 정령(精靈)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또 인간이 죽은 후에도 조상의 영혼과 유명하거나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의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고 여겼으므로 제천(祭天)행위와 조상숭배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 속에서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는 귀신의 정체와 뜻을 알아내 그에 맞는 제사를 지내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해 주는 무당(巫, shaman)의 역할이 자연히 중요시되었다. 무당은 비단 일상적인 신앙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 수용 이후 이런 측면의 상당 부분은 불교 승려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속신앙은 그 뒤에도 당시인의 의식세계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자연스럽게 당대의 불교는 국가 불교와 왕실 불교적인 성격을 띠었고, 호법(護法)은 호국(護國)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이 시기 불교는 재래의 샤머니즘과 융합되어 기복적이며 주술적인 면이 강하였다. 병을 낫게 하고 적군을 물리치는 의식과 현세에서의 복락과 신이(神異)를 추구하는 기복적인 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아울러 현재까지 퍼져있는 내세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인간의 삶이 죽음과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고 저승에서 그대로 계속된다고 믿었고, 영혼의 삶까지 인정하게 된 것이다.
도교(道敎)는 624년(영류왕 7)에 당(唐)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전래된 기록이 있으나, 사실은 고구려 중기 이래 크게 유행하였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는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천인(天人)이나 신선(神仙)의 모습으로 보아 일찍부터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도교는 전통적인 산악신앙과 신선사상 또는 샤머니즘 등과 결합하여 유행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이 집권한 이후 국가적으로 도교가 크게 장려되어 불교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유교(儒敎)는 고구려의 집권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사상으로 중시되었다. 372년(소수림왕 2) 태학을 세워 중앙귀족의 자제들에게 유교를 교육하고 이들을 관료로 양성하였다. 또 지방에는 경당(扃堂)이 있어 젊은이들이 모여 독서를 하거나 활쏘기를 익혔다. 이곳에서는 오경(五經) 등의 유교경전이나 사기 등의 역사책, 문선(文選) 등의 문학책 등을 읽혔다.
상무(尙武)의 기운이 서려있는 고구려는 기복(祈福)으로 무속과 불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으며, 정치와 교육의 기반으로는 유학(儒學)을 택한 것이다. 특히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중국과의 끝없는 전쟁의 역사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 일 것이다.
猖狂 김성태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