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선교사(宣敎師)가 고발(告發)되어 포졸(捕卒)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것을 사전(事前)에 알게 된 姜(完淑) 골롬바는 그를 구할 용감(勇敢)한 생각을 가졌다. 그녀는 자기 집 장작광에 神父를 숨기고, 자기의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洪弼周)필립보에게까지도 모르게, 석 달 동안을 그리로 음식을 갖다 드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神父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避身處)를 마련하여드릴 수 없는 것을 몹시도 괴로워했다. 한편으로는 시어머니가 자기의 용감한 심경(心境)과는 딴 판인 것을 보고는 감히 마음속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볼 계획(計劃)을 세워, 거의 계속해서 울고 탄식(歎息)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를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잃을까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물었다. 姜(完淑) 골롬바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ꡒ신부님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러 여기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신부님은 지금 피신할 곳도 없으십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어찌 몹시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남장을 하고 사방을 두루 다녀 신부님을 찾아내어 구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ꡓ
시어머니는 울면서 대답하였다.
ꡒ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그러니 나도 너를 따라가서 너와 함께 죽겠다.ꡓ
姜(完淑) 골롬바는 다시 말하였다.
ꡒ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이 어느 정도에 까지 이르렀는지를 보고 매우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공연히 위험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천주께서 우리의 착한 뜻을 보시고, 신부님이 우리있는 데로 오시게 허락하실 지도 모릅니다. 신부님이 나타나시면 어머님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이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해주시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저는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ꡓ
시어머니는
ꡒ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ꡓ하고 대답하였다. 姜(完淑) 골롬바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神父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안사랑으로 그를 모셔들었다. 周文謨 神父는 거기에서, 외부 사람들에게는 양반(兩班)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관습(朝鮮慣習)의 보호로 3년 동안 계속하여 머물렀다.
4. 周(文謨) 神父의 사목활동과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활약
① 1796년 9월(양력)에 周(文謨)신부는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처지와 조선천주교회의 현황(現況)을 보고하였다. 경찰의 끊임없는 사찰(査察)과 특히 국경(國境)의 더욱 엄중해진 감시(監視)로 인하여 그 전해에는 周(文謨)신부가 편지(便紙)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② 덕산(德山) 고을 용머리에서 출생한 황필(黃泌)토마스는 1795년 국경(國境)에서 신부(神父)를 기다렸던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 사람 이 밀사(密使)로 뽑혔다. 그는 사신(使臣) 일행 중 한 사람의 하인(下人) 자리를 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황필(黃泌)토마스는 周(文謨)신부의 라틴어편지와 교우(敎友)들의 한문편지가 씌어진 명주 두 조각을 주의 깊게 옷 속에 감추어가지고 길을 떠나, 1797년 1월28일(양력)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③ 구베아(Gouvea)주교(主敎)는 선교사(宣敎師)와 신자(信者)들의 편지를 읽는 동안, 극도의 불안(不安)에서 가장 생생한 기쁨으로 옮아갔다. 周(文謨)신부는 자기의 편지에 조선교회(朝鮮敎會)에 평화(平和)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방법(方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포르투갈 조정(朝廷)에 대하여 사절(使節) 한 사람을 보내어 조선왕(朝鮮王)에게 인사(人事)를 드리게 하여 그와 동맹(同盟)을 맺게 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절(使節)과 함께 수학(數學)과 의학(醫學)에 조예(造詣)가 깊은 신부(神父)들을 보내어 그들이 이 나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고, 포르투갈 왕에 대한 경의(敬意)로 그들을 조선정부(朝鮮政府)가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건의(建議)에 대하여 사절(使節)의 파견을 요청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전혀 파견(派遣)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④ 周(文謨)신부가 조선말과 이 나라의 풍속(風俗)을 넉넉히 알게 되자 이내 신자(信者)들에게 성사(聖事)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조심하며 행해졌다. 그가 나갈 때에는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만이 어디에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거동(擧動)은 조심스럽게 감춰졌다. 그는 가장 확실(確實)한 교우(敎友)들과만 접촉(接觸)을 가졌고, 대부분은 특히 지방(地方)에서는 조선에 신부(神父)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신부(神父)는 그를 맞아들이는 집안의 식구에게도 아무에게나 자기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고, 누구도 신부(神父)가 와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교우(敎友)의 하인(下人)들까지도 그것을 짐작만 하는 때가 많았다. 그 시대의 어떤 교우(敎友)가 쓴 편지(便紙)의 다음과 같은 발췌문(拔萃文)은 비밀(秘密)이 얼마나 엄중(嚴重)하게 지켜졌는지를 알게 하여 준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殉敎)한 신대보(申大甫) 베드로였다. 그는 이 편지를, 조선 천주교의 처음 시기에 관한 모든 기억(記憶)을 정성들여 모으던 샤스땅(Chstan) 神父의 명령에 따라 1838년에 옥(獄)에서 썼다.
⑤『내 친척 이「여진」요한과 나는 5년 전부터 교우(敎友)였으나 별로 열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우리는 신부(神父) 보기를 간절히 원하여, 공직(公職)에 있는 내 친구 중 한 교우(敎友)에게 오래 전부터 진이 빠지도록 질문(質問)을 하였습니다. 하룻밤은 내가 그의 집에서 잤는데, 아침에 내가 조르는 데에 대한 대답(對答)으로, 일어나서 장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 주며 신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이상히 생각하며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ꡒ장난도 심하구만. 왜 어른에게 아이의 버선을 신으라는 거야?ꡓ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ꡒ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에 대해서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그것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비슷한 걸세. 천주교에서는 열심하기만 하면 신부를 볼 수 있네. 그것은 조금만 애를 쓰면 큰 발에도 얼마든지 신을 수 있는 이 버선과 같은 것일세.ꡓ
과연 나는 그것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양(西洋)에서 온 버선으로 양털로 만든 것이어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질문(質問)을 거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도 더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열흘 후에 다시 가서 다른 교우(敎友)들에게 물어 보았고, 이번에는 이「여진」요한을 보냈으나, 어디를 가도 절대적인 침묵(沈黙)뿐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여진」요한과 나는 우리 집에서 140리나 떨어진 서울을 차례로 7~8번을 내왕(來往)했으나, 언제나 허사(虛事)였습니다. 이「여진」요한은 좋은 기회(機會)를 더 쉽게 잡기 위하여, 가족(家族)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살기까지 하였습니다… . 어떤 노력(努力)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부(神父)를 보는 위안(慰安)을 결코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신부(神父)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消息)을 나중에 듣게 되니 우리의 후회(後悔)는 더할 뿐이었습니다.』
⑥ 하느님의 은총(恩寵)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이 같은 시기(時期)에 이와 비슷한 발걸음을 얼마나 많아 하였겠는가? 그리고 천주교(天主敎)의 도움 가운데 살면서, 그것을 이용(利用)할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그 많은 천주교인(天主敎人)에게는 이 얼마나 큰 교훈(敎訓)인가?
그러나 그렇게도 엄중(嚴重)한 조심을 우리는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신부(神父)가 조선에 와 있다는 것은 정부(政府)에 알려져 있었고, 사찰(査察)이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날마다 체포(逮捕)가 잇따랐다. 양떼 전체(全體)의 생명(生命)이 그의 머리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오직 하나인 목자(牧者)를 보호(保護)하기 위하여 어떤 조심을 하였더라도 지나쳤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⑦ 周(文謨)神父가 이런 비밀(秘密)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조선전설(朝鮮傳說)이 그의 사목활동(司牧活動)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우리에게 전하여 주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알려진 것은 다만 그가 서울에서는 정약종(丁若鍾)아우구스띠노와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과 홍익만(洪翼萬) 안또니오 집에 몇 번 갔다는 일이다. 그는 또 양제궁(良娣宮) 혹은 폐궁(廢宮)에도 여러 번 갔었고, 거기에 얼마 동안 머무른 듯 하다.
이궁(宮)은 왕의 서제(庶弟) 이인 (李인) 또는 일왕손(逸王孫)의 궁이었는데,그의 아들 심(심)이 반역(反逆)을 꾸몄다는 죄로 사형(死刑)을 받았었다. 대관(大官)들은 그의 아버지도 죽이고자 하였으나, 王은 그것을 허락(許諾)하지 않고 다만 그를 강화도(江華島)로 귀양을 보내는 데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