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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시편들
여기에 쓴다.
2016년의 시편들이다.
시대를 읽고 고통을 읽고 삼의 근원을 읽고 쓴다.
쓰는 일은 사명 같아서 두렵고 설레고 아플 것이다.
그러나 쓴다.
단단하게 힘 있게 시간 앞에 살아남게 쓴다.
갠지스강의 산다화
산다화는 우물 깊은 여자였다
여자는 백련사를 기억 하고 있을 것이다
오래된 사원의 그늘 속에서
질척거리는 더러운 벽 위에서
슬픔으로 출렁이던 눈동자들은
여자에게 원망과 적의를 묻으라고 했겠지만
바라나시의 카트에 앉아 하루 종일
갠지스강으로 흩어지는 불꽃을
산다화로 보았을 여자다
꽃길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산다화 앞에서 주춤거리던 여자는 끝내 돌아섰다
붉은 꽃숭어리 툭툭 부러진다
용서를 말하지 않았다
배롱나무의 감옥
배롱나무 거목들 뒤엉킨 그림자가 무거웠다
배롱나무 상사는 분홍꽃물로
석 달을 흐르고도 병산에 오르지 못했다
한 계절을 강 건너 서성이던 사람이여
이제는 힘겨운 꽃물을 건너야 겠다
배롱나무는 서원을 꽃으로 채워
핀 꽃과 진 꽃의 경계를 버린지 오래다
나를 버리고 너를 얻어 돌아갈 수는 없겠다
겨울 햇살은 하회에 오래 머물렀다
병산 앞 강물로 뛰어들었던 연분홍 꽃잎들을 위해
서원 어디에도 다녀간 흔적 남기지 않는다
서원의 조용한 시간들 소스라치는 병산 낙조다
배롱나무꽃은 감옥을 이룬다
자소自笑로 갚는 세상
*
그는 춘삼월이면 자신의 이름으로 개관되는 도서관에 매일 출근해 햇빛 잘 드는 창가에서 회고록을 읽고 싶었다 생애에서 가장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간은 너무 느리게 왔다
한 시대의 영웅에게 시간은 가혹했다
영웅의 아내가 무표정하게 하관을 지켜보았다
햇빛 잘 드는 한 자리는 늘 비워놓아야겠다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으면 그가 자소(自笑)로 갚을 거 같다
*
그는 버려지고 묻혀 진 걸 생각하지 않고 돌아가 세상에 알려진 이름만큼 살아 갈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이름에 취한 반생은 달콤했다 술에 취한 반생은 아름다웠다
버려지고 나니 세상은 더러운 진창이었다
날개를 퍼덕일수록 보이지 않는 그물은 그를 옭아맸다
세상 물정을 알았단들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아 그는 자소(自笑)로 갚고 있었다
*
스스로를 비웃는 것으로 세상을 갚는 사람은 영웅이거나 시인이 아니었다
사이
그렇게 한 계절이 떠났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사람이 있었고
산수유꽃이 있었다 아, 산벚꽃이 있었다
산벚꽃이 기적처럼 빈 잔에 한 잎씩 날아와 앉아 있었다
바람 많은 날이었다
별리를 잉태하는 빈잔 속의 꽃잎이었다
빈 잔과 산벗꽃은
계절을 밀고 가는 힘이었다
빈 잔과 빈 잔 사이에 어둠이 있었다
몸과 몸 사이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목숨이 숨어 있는 깊은 언약이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사랑이 있었고
흩날리는 꽃잎이 있었다
사이를 눈빛으로 읽으면 흐느끼는 새벽이었다
사이를 이성으로 읽으면 별빛 쏟아지는
낯선 어둠이었거나 낯선 병실이었다
마지막 말은 새로운 세상을 얻었다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마지막 꽃잎이었다
긴 강이 너를 건너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도 강물소리다
미선나무 아래 웅크린 길고양이를 보아도 강물소리다
서가의 오래된 시집을 꺼내 읽어도 강물소리다
강물소리는 너다
긴 강을 건너는 너를 위한 노래는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유년의 너를 기억하듯
어제까지의 강물소리를 기억한다
강물소리는 누군가의 가슴을 긋고 가는 통증이다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들을 수 없는 강물소리다
긴 강이 너를 건너고 있다
눈길 한 번 머무는 사이
나무계단 밟던 발소리 끊겼다
눈길 한 번 머무는 사이 모든 상실이 왔다
성모상 긴 그림자 앞으로 두려워 떨며 걸어오던 날들이
소문 없이 되돌아나가고
벚꽃길의 우아하던 말들은
낙화처럼 누추해졌다
눈길 한 번 머무는 사이
강물이 마르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꽃이 지고, 길이 사라졌다
혹한 속 상실을 견딘
산국(山菊) 마른 꽃잎을 소한(小寒) 앞서 거둔다
산국향 겨울 숲으로 흩어진다
건드리지 않았으면 봄까지 숨겨갈 상실의 기록이었다
햇살이 아리다
목 놓아 울어야 겠다
꽃 피면 바람인들
진종일 마음 흩날린다
눈보라가 그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길들은 묻히고
그리운 사람은
마음의 난파를 알지 못한다
우수를 하루 앞서
세상 가득 통곡이다
이처럼 통곡 휘몰아치고 나면
온통 멍이어서
꽃눈은 개화의 시간을 잃어버린다
네거리에는 짐승처럼 울부짖던 여인이 차게 서 있다
언 몸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인다
오래된 몸을 청대처럼 세우던 찰랑이는 입김이다
며칠 사이 몸이 얼마나 깊은 건지 잊었다
오늘은 눈보라의 깊이를 모르겠다
어떻게 소멸의 순간을 건너는지
소멸 건너면 봄꽃 피고, 바람은 꽃대 흔들어 상처 내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루, 하루만
잠이 죽음처럼 깊습니다
분노를 생각하면 분노가 밀려옵니다
꽃비를 생각하면 꽃비가 밀려옵니다
잠 속에서 통곡하는 층층나무숲을 만납니다
길이 어디쯤서 단애를 만나 명운을 접을지 모릅니다
내 생은 단애의 자장에 놓여 눈 머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날의 아름다운 눈빛들이 칼날입니다
칼날은 내 푸른 몽상을 저밉니다
검은 말들을 저밉니다
붉은 욕망을 저밉니다
하루하루가 흙관이어서 차령으로 지는 해를 보지 못합니다
층층나무숲으로 보랏빛 어둠이 넘어옵니다
저 어둠 속에 영혼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다면
창은 내지 않겠습니다
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었습니다*
* 김소형 「ㅅ ㅜ ㅍ」에서
달이 차면
*
달이 차면 배꽃 한 몸살이겠지요
배꽃은 달의 비밀이었으니까요
한낮의 배꽃이 작은 죽음이라는 걸 알아버린 죄 있지요
그날 배꽃은 몇 번이고 낙화를 거듭했고 피멍을 늦게 보았지요
*
너를 배꽃 아래 세워 울게 한 일 있다
너,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고 계절로 날아와 쌓였다
너, 끝까지 함께 할 거라고 투신하는 비명으로 선혈이었다
울음은 깊고 그윽해 산음(山陰)이었다
늦봄 배꽃은 얼마나 더디게 쇄골 지나 허리로 내려가
쓸쓸한 자궁에 이를지
달이 차면 나무 그림자 흐려져 하늘 멀리 흘러간다
*
유다의 날을 여섯 번 맞았지요 육백 예순 여섯 번이라도 맞을 수 있었지요
파탄이 어디서 시작되었든 사방이 흰 벽이었지요
사탄과 파탄은 서로를 껴안고 네거리를 건넜지요
달이 차면 묘지에 흐르는 성가를 듣게 되겠지요
해시에서의 한 때
몇 년을 해시(海市)*에 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젊었는지 기억못하지만 수평선을 지평선으로 혼돈하는 일이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을 바다로 보았던 여정의 끝은 수녀원의 포도주와 슬픈 눈동자와 하늘에 떠 있는 붉은 장미였던 기억이 물 속으로 흘러갑니다 해시에서의 아침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해를 물에서 건져올리는 일은 해시에 사는 사람들의 젊은 함성이었습니다 여자는 물로 된 구름과 물로 된 나무와 물로 된 성과 물로 계단을 캔버스에 올렸습니다 캔버스에서 파도소리 사나웠습니다 여자는 물로 된 표정을 수시로 바꾸며 물로 된 말을 흘려보냈습니다 말은 내 가슴에 안개처럼 스며들었습니다 여자의 말은 내 몸의 곳곳을 순례했습니다
물의 눈동자를 가진 여자를 창 앞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창에는 오색의 물빛이 무지개처럼 떠 있었습니다 여자의 흰 목덜미에 달빛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봉긋한 가슴은 언제나 찰랑거렸습니다 여자는 물로 숨쉬고 물로 잠들고 물로 노래했습니다 여자의 나신을 늦게 오른 해가 훔치는 날, 온몸이 붉게 익은 사과향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먼 물빛을 불렀습니다 먼 물빛은 여자를 몽환에 들게 했습니다 몽환에 든 여자는 유독 흔들의자를 좋아했습니다 흔들의자가 흔들릴 때마다 세상이 흘러넘쳤습니다 넘쳐흐르는 세상은 여자를 노래하게 했습니다 여자의 노래로 수평선이 크게 휘었습니다
그 후는 불이었습니다 불은 수평선 멀리서 시작되어 순식간에 물의 성에 이르렀습니다 나무들이 불타고 돌계단이 불타고 침대가 불타고 물로 된 모든 것들이 불타올랐습니다 여자의 흰 발이 불타고 허벅지가 불타고 가슴이 불타올랐습니다 여자의 몸이 수평선처럼 휘었습니다 여자가 떨며 뭐라고 말했지만 불길에 묻혔습니다 물과 불의 죽음 같은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물과 불의 전쟁이 끝나고 해시는 조용히 늙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해시를 떠났습니다
해시에서 목숨 걸었던 시간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시(海市)는 신기루를 이른다.
마주보면
유령처럼 떠다니는 길은 호수로 들고
바람은 죽은 시인의 캐리커쳐 앞에서 움추리고
고무나무는 희고 걸쭉한 생고무을 하루가 지나도록 흘리고
통유리창은 몇 년째 안개를 가두고
나무계단은 통증으로 삐걱거리고
노을을 쏟는 몸은 식지 않고
너는 없다
호숫가 청학미술관은 무명화가의 그림을 걸고
묵집 새 메뉴 광고 프랭카드는 찢겨 너덜대고
수면이 보이는 수모텔의 차량번호 가림판은 남아돌고
가창오리떼는 반쯤 녹아 있는 호수를 떠나려 하고
사설 금광우체국은 붉은 우체통을 바꾸지 않고
농산물 공동판매장 쌩떼는 오디를 더는 팔지 않고
어디에도 너는 있다
붉은 서양양귀비꽃 속에서 안개꽃처럼 웃던
너는
없다
거리
나는 침대에서 저격당했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소음기는 완벽하게 사람들의 귀를 끌어당겨 놓았다
저격 직전 창문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창문은 어둠을 채워 어둠으로 갔다
창문이 있던 자리에 그녀의 일그러진 입술이 왔다
산수유숲 속에 깃들어 살던 동고비가
그녀의 입술에 앉아 있었다
저격은 그 때 일어났다
소리 없이 총탄이 날아들었다
동고비의 부리가 심장에 박혔다
절명의 순간을 현장검증 할 수는 없다
열 번을 검증해도 동고비였다
저격은 그녀의 입술이였다
노래였거나 비아냥이었다
웃기고 자빠졌네
침대에서의 저격은 웃기고 자빠져 있는 형국이었다
승인할 수 밖에 없는 거리였다
새의 부리는 사물들의 눈동자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저격한 것은 나였거나 멈춰 있는 시간이었다
낙하 실험
소년은 지상에 길고양이를 돌보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는 걸 몰랐다
소년의 손에는 깃털과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소년은 돌멩이에게 속삭였다
너는 숨겨 둔 날개를 펼치는 거야 깃털보다 늦게 지상에 닿는 거야 그게 가능할까라고 묻지마 누군가 너의 낙하를 보며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숨겨둔 날개를 보며 눈을 감지 않을까
깃털보다 오래 공중에 머물기 위해 날개를 펼치는 거 잊지마 네겐 깃털이 모르고 있는 비밀이 있는 거야 깃털이 제 그림자에 닿기 전, 네가 먼저 지상에 이를 수는 없는 거야
네가 깃털과 손잡고 뛰어내릴 수 없는 이유를 말해 줘도 될까? 처음부터 너는 둥근 그림자였던 거야 다음 별에서 누구도 만나기 전에 만나야 한다던 깃털의 속삭임을 네 가슴 속에 돌무늬로 남겨서는 안 되는 거야 지금은 네 검은 별의 마지막 섬광인 거야 동반 투신이라는 유혹을 뿌리친 건 용기였던 거야 죽음을 증거 하는 일은 구름도 싫은 거야
소년은 돌멩이와 깃털이
동시에 지상에 닿는 가를 알아보고 싶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년이 잠 못 이루는 영치의 밤 누군가의 창으로 초록별이 진다
헤미트립테루스 빌로수스
예약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삼식이매운탕은
못나서 매력 있는 근친이다
버려지고 나서 먹고 싶은 게 삼식이였다
버려져도 억울할 게 없는 학명은
헤미트립테루스 빌로수스다
그리스 신화에 나올 듯한 이름이지만
꺽지로 더 알려져 있는 못난 놈이다
그래서 신화로 더 끌린다
버려졌으나 잊혀지지 않는 꺽지다
산그늘마다 진달래가 피면 버려졌다는 생각이 깊다
버려졌으나 잊혀지지 않아 봄꽃들은 다투어 핀다
티베트로 떠나며 너는 삼식이처럼 웃었다
나는 입장으로 삼식이를 먹으러가며 울었다
웃고 우는 일이 삼식이의 길이다
버려지고 잊혀지는 일이 삼식이의 길이다
서양 양귀비꽃
하루에 천 번의 입맞춤을 바람에게서 받았던 꽃이었다
그 꽃이 강을 건넜다
강물은 피빛이었다
바람은 꽃술의 달고 쓴맛을 품고 있다
달고 쓴맛이 날개여서
꽃을 건너 꽃을 찾을 수 있었다
바람의 운명이었다
꽃은 바람의 난폭한 포옹을 풀 수 없었다
강물 붉게 물들이며 건넌 짧은 시간은 꽃의 영원한 침실이다
바람은 강물을 세워 하구에 거대한 바람의 집을 짓는다
바람의 집은 꽃잎으로 허망의 계단이고 꽃잎으로 낙루다
서로를 헐어 사월이다
다시 부론에서
잔디운동장을 활달하게 걸어나오는 여자는
남한강 물소리를 따라오던 봄볕이었다
여자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잔디운동장이 저처럼 기울지는 않았을 거다
무엇을 물어도 배시시 웃기만 하던 여자였다
중국집 낮은 간판은 여자가 부론을 떠난 후 사라졌다
여자의 입술은 작은 점으로 시작되었다
깔끔한 입술에 주황색 짬뽕국물을 묻혀 웃던 날이었다
봄비는 종일토록 부론으로 들어오는 길을 지웠다
여자가 조용히 남한강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여자는 하염없이 흐르는 꽃잎이었다
남한강 물소리가 멀리 부론을 돌아나가는 봄날은 잠시 멈춰 있다
<용인문학회 창립 20주년 기념 축시>
그대들 열정 20년이 오늘 여기 있다
김 윤 배/시인
문청들의 반란이었다
1996년 5월 18일, 죽은 자들의 이름 위에 사무사(思無邪)라고 쓰고
시작된 그대들의 반란이었다
그 해가 ‘문학의 해’였으니 도화선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름이 ‘용인문학회’였다
용인문학회는 척박한 말의 그늘이고 싶었던
문청들의 붉은 눈빛이었다
그게 반란의 힘이었다
기성에 대한 분노였고
문학을 위한 광기였고
그대들이 열어갈 작품 세계에 대한 절망이고 희망이었다
뒤돌아보면 많은 회원들의 희원의 발자국이 깊이 보인다
용인문학 초라한 지하사무실 솟구쳐 이룬 이름들
김종경, 안영선, 이원호, 주영헌, 김지원 회원이 공모의 어려운 관문을 뚫어 시인으로 등단했고 김어영, 홍사국, 이민행, 이인숙, 이경숙, 양종석 회원이 시집을 출간하며 당당하게 시인의 반열에 올랐으니
호명하면 일어서는 이름들이
용인문학회 20년의 결실이고 갈채다
오월과 시월의 문학답사는 그대들 언어의 영감을 부르는 찬란한 축제였다
신인등단의 길을 열어 배출한 시인, 소설가, 동화작가가 문단에서 제몫을 하고
‘창작아카데미’에는 풋열매들의 가슴 두근거림 가득 차는데
매월 첫째 월요일의 정모는 창작에 대한 활화산의 분화구였고
반년간지『용인문학』은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간다
용인문학회에서 횃불을 올린 남구만의 ‘약천 문학제’는
해를 거듭 할수록 시민들의 환호고 열띤 동행 아니던가
그동안 그대들, 세상을 향해 외로운 길을 걸었다
이제 세상이 그대들에게 다가서는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그대들 가슴은 세상을 모두 담아 터질듯 부푼다
그대들 열정 20년이 오늘 여기 있다
비익比翼
이대로 여강에 들어 그림자 지우고 싶다는 생각은
강안 연분홍 등 밝힌 벚꽃 길로 흐려진다
저 꽃길 흐느끼지 않고 지나가지 못하겠다
잠시 산허리가 꽃길을 휘지만
벚꽃은 낙화의 순간, 비명 삼키지 않아 강물은 멍 투성이다
출렁이는 마음으로 꽃비 내린다
여강을 거스르는 것은 봄날의 햇살이다
환한 미소였던 길이 강물에 닿기 전
강여울에 날개 파닥이는 호랑나비를 보았다
여강이 어디쯤서 날개를 수장할지, 봄날 깊다
살아 있는 날들의 증오는 비익(比翼)을 꿈꾸게 했을 뿐
죽어서도 매일 문양이 바뀌는 날개가 사랑 아닐까 싶은
증오와 사랑 사이의 보랏빛 비명(碑銘)이었던 여강은
봄날 흐르며 산음(山陰) 흩는다
봄날은 죽음도 가볍다
연민
*
뚜아에무아의 그녀가 목주름 여러 겹을 세우고 돌아 왔다 마른 손가락으로 마이크를 잡고 속삭이듯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가 공허하다
꽃잎 내리는 듯 하던 눈빛은 흐리다
복숭아뼈가 날카롭다
어느 해변인지 그녀를 알아본 올드팬이 그녀의 음반을 언제나 두 장씩 사 모았다는 말에 울컥,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다는 그녀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팬과의 ‘약속’을 지키려했다는 그녀다 ‘세월이 가면’ 모두 잊혀진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는 그녀다
그녀의 청아는 서럽다
청아가 혼탁해지면 세상의 넓이가 보였을 타국은 얼마나 아픈 그림자였는지
맑은 음역에서만 생이 흘러 갔으니
그리운 사람끼리 흘리는 눈물이다
그리움으로 잊혀져갔으면
서럽도록 아린 노래로 잊혀져갔으면
그리하여 젊은 날의 노래로만 기억되었으면
쓸쓸한 미소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조명과 카메라의 앵글이 싫어지는 날이다
*
누군가 내 시를 읽을 것인가 오래 전의 시를 기억할 것인가 청아를 읽을 것인가 혼탁을 읽을 것인가 목주름을 읽을 것인가 흐린 눈빛을 읽을 것인가 상투를 읽을 것인가 절망을 읽을 것인가 욕망을 읽을 것인가 혹 그리움을, 혹 서러움을 읽을 것인가
연민이다
노을
노시인의 작은 어깨가 흔들렸다
말소리에 자조가 묻어 있다
노빨들의 데모였지요 덕수궁에서 광화문까지 위안부 문제 똑바로 해결하라고 굽은 등을 일렁이며 가두행진을 했어요 경찰은 제지하지 않았지요 노인들이 길을 잘못 들었거니 했던 거지요 미소로 격려까지 해주었지요 감동적인 장면이었어요
쨍쨍한 햇살이 궁궐 지붕에 걸려 있었다
노빨들의 데모를 어느 신문도 써주지 않았어요 은회색 구름이 궁궐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우리는 오래 전에 흐린 기록 속으로 사라진 노빨들이었어요
젊은 날 시국 사범으로 콩밥을 집밥처럼 먹었던,
콩밥의 의미 밖에서 흘러간 세월이어서 더 아린,
더러는 먼저 떠난 동지들이 그리운,
서녘 하늘 붉게 물들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늙은 투사들
광장을 붉은 눈으로 지켜보던
청춘이었다
노시인이 홍조를 띄며 자작시를 낭송 한다 목계나루는 사라진지 오래다
떨리는 목소리가 지하 강의실 흰 벽을 노을로 물들인다
모란꽃 지다
이미 꽃들은 졌다
남긴 말들이 방백(傍白)이었다
피멍의 말로 흩어진 모란꽃잎은 무심한 하늘을 노려보고 있다 진보라빛 영혼을 위해 물고기를 기르고 바람을 껴안고 빗소리를 키우던 모란의 말들은 누가 듣고 기록했는지 방울뱀이 모란꽃 그늘에서 오래 기다리다 떠났다 모란의 말들을 귓속에 넣고 차령을 향했을 것이다 불의를 만나지 않는다면 모란의 말들을 층층의 묘비명이나 어둠의 숲에 전할 수 있겠지만 숲은 숲의 말들로 충만일지 모른다
모란의 말들은 누가 듣고 기록했는지 오월의 이름들이 지켜보고 있다
모란은 모란이 듣지 못하게 백송(白松)과 자미(紫薇)에게 방백을 남겼다
모란에게 주는 모란의 말이 죽음이라면 모든 방백이 어찌 삶일까
방울뱀이 모란 가지에 허물을 남기고 떠난 걸 늦게 알았다
허물이 방울뱀의 방백이었다
나는 보라도서관 개가식서가를 어슬렁거리며 죽은 말들의 시취에 취한다
시취에서 시작되는 곡성이 있다
산자들의 방백이다
문장을 종려나무에 적다
나는 내 문장의 만크루트였다
문장의 노예였으니 반성과 참회를 모른다
기억은 아픈 상징으로 종려나무가 배경이었다
문장의 사막에서 만크루트는 태어난다
두개골을 옥죄는 것은 태양이다
문장들의 비웃음은 밤에 종려나무로 흐른다
의식은 녹아 내리고 비명은 모래 속을 파고 든다
참담한 노예의 길을 종려나무가 막아선다
내 문장은 질주였거나 유혹이었다
문장은 기억상실의 고통을 비문의 유혹으로 덮는다
내 삶이 문장의 음모를 읽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나는 사막을 달려나간다
태어난 곳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기억 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만크루트는 종려나무 아래 미쳐 날뛴다
세상의 문장은 더 많은 만크루트를 원한다
검은 고양이가 와야 한다
*
검은 고양이를 위해 데라스 구석에 놓아둔 굴비는 그대로다
며칠 더 기다려 굴비를 감꽃에게 먹일 생각을 한다
감꽃은 닭모가지도 암소갈비뼈도 먹었다
굴비가 감이되고 감이 까치가 되는 과정을 진화라고 말해야 될까
진화는 당돌하고 싸가지 없고 예민하다
*
도다리회를 떴다
도다리는 소주에 얹혀 포구가 되거나 비애가 되거나 고통이 되었다 갈매기가 되거나 파도가 되는 일도 일어났다 비애는 무얼 먹어도 비애고 고통은 무얼 먹어도 고통이이었다
진화하는 식탁이었다
*
대형 냉장고에는 죽은 자의 말들이 얼마나 더 들어 있는지 모른다
간고등어, 실치포, 멸치, 뱅어, 삼치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이 되기 위해 언 몸을 지탱하고 있다
주검의 진화,
그 당돌함과 싸가지 없음과 예민함을 하루쯤 덮고 싶다
*
검은 고양이가 와야 한다
종점 부근
남자는 도시에 매혹되어 신음하면서 거리를 썼다
거리는 무한하지 않아 변두리에 앉은뱅이 책상을 놓았다
시내버스는 도심을 지나 강을 건넜다
강물에 잠겨 찢기는 도시가 아름다웠다
남자는 자신의 오래된 시집을 읽다 가슴을 누르며 몸을 굽혔다
쉰내 나는 활자들이 버스 안을 채웠다
불후가 아니면 쓰레기라고 말하는 승객은 없었다
운전기사가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남자가 의자 밑으로 구겨져들어갔다
동전들이 쏟아져 운전석까지 굴러갔다
미친 새끼
종점 부근의 달빛은 창백했다
달빛 그늘 속으로 길고양이가 느릿느릿 사라졌다
멀리 어둔 강물로 별들이 뛰어들었다
한 사람쯤 죽어도 좋은 밤이었다
남자는 도시에 매혹되어 신음하면서 도시를 품었다
도시는 잔혹한 하루였다
자미紫薇의 침묵
숲의 청록색 그림자 짧아지는 계절이다
자미의 침묵은 길어지고 있었다
아이가 군대 가 있는 2년 동안 천 원짜리 김밥만 먹었어요 그렇게 모아 갚아나간 대출금이 2000만원을 넘겼어요 아이에게 고향을 만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으니까요
몽유처럼 계단을 내려서던 그녀, 자미의 그림자로 혼몽해지는 정신을 흔들어 깨우며 생의 계산기를 두드려 숫자를 맞추던 그녀, 때때로 꿈꾸듯 먼 하늘을 쳐다보던 그녀, 백야의 단발 번개를 펜 끝으로 맞던 그녀, 피 흐르는 허벅지로 거친 문장을 내닫던 그녀,
호수의 물빛을 따라가면 그녀의 오랜 기원이 어느 물길을 열어 꽃잎에 얹히는지 알겠다
고향집 언덕 홀로 앓고 홀로 일어서던 자미는 침묵 속에서 새벽을 맞겠다
그녀에게 자미꽃 백일은 애곡 돌아나가는 고향이겠다
달의 산
밤마다 나일은 닫힌 창으로 밀려온다
달빛이라고 내가 나에게 속삭이지만 나일이 맞다
발원의 작은 샘에 달과 산이 잠긴다
달은 한쪽 어깨가 기울기 시작했고 산은 어둠에 묻혀 창백했다
내 나일의 급류는 조증이고 완류는 울증이었다
나일은 두 유속을 교묘하게 완성하며 장엄한 대륙을 건넌다
내가 오랜 후에 죽은 내 안으로 들면 한 생은 대지이다
대지에는 삼백 예순의 강물이 흐른다
강물마다 다른 유속을 숨겨 비밀한 신음이다
내가 죽은 후에 흐르는 강들은
기쁘고 슬프고 아리고 서럽고 두려운 울음이다
흰 뼈들이 강물을 장엄미사곡으로 기록한다
내 몸속 아프리카는 암컷 원숭이와의 수간이었고
내 몸속 아프리카는 할례의 밀원이었고
내 몸속 아프리카는 검은 대륙에 쏟아져 내리는 별빛이었다
달의 산*은 대륙을 거느리며 무수한 조울을 펼쳐 운명을 알린다
누군가 달의 산이 풀어놓은 조울에 걸려들었는지 달이 붉다
* 나일강의 발원지
전주곡
원양어선은 작은 제국이다
그날의 비극은 제국 때문은 아니다
어장을 이동하면서 선장은 선원들에게 양주 다섯 병을 내렸다
십 오륙 명의 선원들이 나누어 마셨다
취기가 갑판에 폭풍처럼 밀려왔다
“요요요 선장 넘버원”은 비아냥이었을까
요요요를 외친 베트남 사내와 선장은 격한 몸싸움을 벌렸다
오늘 밤 해치우는 거야
깡마르고 작은 몸집의 사내는 어금니를 물었다
갑판은 이튿날 새벽 두 시까지 아수라장이었다
사내는 참치용 칼을 찾아들었다
칼끝으로 증오심이 솟구쳤다
게으르고 느려터진 놈이라고?
어둠 속에서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배는 흔들리며 남쪽으로 달렸다
조타실 흐릿한 불빛으로 어슴프레 타륜에 기댄 선장이 보였다
타륜에 피가 튀었다 배의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사내는 기관장을 찾아나섰다
기관장은 눈을 부릅뜨고 선원들을 노려봤다
기관장이 조용해졌다 피비린내가 선실을 채웠다
사내는 붉은 달빛 흐르는 칼을 들고 갑판으로 돌아왔다
선원들이 두려워 떨며 어둠 속으로 몸을 피했다
반란은 달빛 관절을 꺾어 비명으로 세상을 뒤집는다
모든 반란의 시작과 끝은 지하묘지의 돌계단 위에 있다
연시戀詩 박살나다
오늘 아침 기어이 수박을 땄다
칼날이 깊다
연분홍 속살이 울먹인다
씨는 이제 막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성급한 욕망이다
밋밋하고 풋되고 비리다
붉게 익어 성숙한 몸으로 검은 씨았을 눈동자처럼 갖고 싶었을
수박의 설 익은 은유는 천박할 거고 덜 여문 상징은 유치할,
오늘 아침 연시 한 편을 박살냈다
심는 날 넣은 발효퇴비가 독해서 세 번을 다시 심었다
속 터지게 성장이 더디다 싶었는데 꽃이 피고 수박이 열렸다
수박 속엔 정령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침나절 다르고 점심나절 다르게 커졌다
그 속성이 욕망이었다
욕망이 사랑이었다면 속성이었을, 그리하여 무게의 가벼움은 남을
참람이거나 범람이다 폭우가 대지를 삼키고 눈을 부릅떠 묻는다
끝은 어디냐?
문
안과 밖을 나누며
비는 내리고 어디에 서야 할지 막막한 나이였다
죄와 벌을 겪으며
오월 챙챙한 햇살이 눈부신 청춘이었다
몸과 몸을 건너며
몸이 얼마나 슬픈 건지 알 수 있는 밤이었다
생과 사를 건너는 문이 식탁에, 침실에, 강의실에, 운전대에, 독수리바위에, 셀카봉에, 검사의 집무실에, 살모사의 잇발에, 손목의 정맥에, 조타실의 어둠에, 변기 위의 섹스에, 가습기의 수증기에, 프로포플 주사액에 무수히 나 있다
문은 불길하다
문은 하나가 아니다
닫혀 있는 네가 닫힌 문을 두드린다
너는 달그림자고 작은 죽음이다
어디로 들 것인가
사이는 문이었다
열리지 않는 몸이었다
문은 문 안에 있고 몸은 문 밖에 있다
문은 죽은 자의 흰 발처럼 고요하다
따라 울다
팬션 짓는 사진에, 붉은 서양 양귀비꽃에, 출간 되지 않은 시집 표지에
댓글을 달다 문득 따라 우는 울음을 생각했다
사는 일이 서러워서, 통곡이어서 어깨 들먹이는 공간이 페북이다
페북은 소내(素奈)로 가는 길목의 그늘이다
흰 능금꽃이 피었다
통곡은 수 만 송이의 꽃을 낙화로 이끄는 비밀한 힘이다
낙화 다음에 무엇을 볼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 페북이다
무엇이든 올리는 순간 통곡은 시작되고
꽃이 진다
꽃 진 자리로 통곡은 전염되고
사람들이 가슴을 두드려 곡의 높이를 잡는다
따라 우는 사람들은 자기 서러움으로 통곡 한다
따라 우는 사람들이 소내로 간다
머지않아 흰 능금꽃 핀 계곡의 물소리를 듣게 될
페친들이다
소내로 가는 사이버 공간의 들뜬 갈채들이 갈기를 얻는다
어떤 통곡이 먼저 소내에 들지
가벼운 방들
부레옥잠의 몸이 내게로 왔네
청동불의 딴딴한 허리에 말랑한 수 십 개의 방을 숨겼네
어떤 숨소리에 얹혀 끔직한 사랑을 앓게 될지, 그날 새벽은 빗소리였네
어린 새를 밀어내 첫 날개짓을 가르치던 어미 새의 눈동자를 다시 보지 못하네
빈 둥지를 들여다보는 일로 하루의 상실이 갔네
그때 사랑을 생각했네
사랑이 떠나면 남게 되는 쓸쓸함을 생각했네
부레옥잠은 옮겨 온지 며칠 만에 연보라꽃을 피웠네
방 마다 사랑을 숨겨 몰래 드나들었네
저주할 거라고 외치는 소릴 들으며
새벽 빗소리 속으로 나갔네
부레옥잠의 고백은 선언으로 들렸네
보랏빛 절규였네
영혼은 절규에 묻혀 천 일을 앓았네
가벼운 생의 더 가벼운 영혼을 생각했네
슬픔에 잠긴 내 영혼이었네*
*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의 노래
폐인
나는 옥봉의 몽혼에 중독되었다 나는 나무우편함 속 곤줄박이 새끼에 중독되었다 나는 강진 사의재에 중독되었다 나는 귀향의 은희지에 중독되었다
나는 폐인이어서 나다
나는 산벚나무의 은은한 발정에 중독되었다 나는 아델의 헬로에 중독되었다 나는 조성진의 쇼팽에 중독되었다 나는 산딸기 그늘 속 초록뱀에 중독되었다 나는 쌍뜨페테르브르그의 넵스키 도로에 중독되었다 나는 길의 사라짐과 돌아옴에 중독되었다
나는 폐인이어서 내 안의 나다
나는 화요의 40도 증류주에 중독되었다 나는 모음과 자음의 근친상간에 중독되었다 나는 소월의 복각본 초판시집에 중독되었다 나는 중고 렉스턴 사륜구동의 무지막지에 중독되었다 나는 조명희문학관의 낡은 사진첩에 중독되었다
언젠가는 흰머리수리의 어이없는 활강에 중독 될 거다
언젠가는 풍장으로 어긋나 있는 뼈들의 흰빛에 중독 될 거다
나는 나에게 중독되어 폐인이다
오파쿠쉐
눈은 있는데 가슴은 없다
늦여름 오래된 나무계단을 내려오다 비명을 지르며 진저리치던 뭉클한 미끄러짐과 우기의 칠장사 대웅전 처마 밑 흙바닥을 덮고 있던 축축한 그늘과
그 때 회저였거나 혐오였거나 스스로를 버리며 얻은 치욕의 색이였을,
다시는 색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고 침묵 속으로 숨어들고 싶었을,
그리하여 영원한 안식을 가지고 싶었을 저 죽음의 색,
삶의 오류는 어떤 것인지,
앎의 오류는 어떤 것인지,
시의 오류는 어떤 것인지,
헤아리지 못하는 나는, 나를 혐오한다
죽음도 탄생도 아닌,
어둠도 밝음도 아닌,
증오도 예찬도 아닌,
폭식이고 울분이라면,
백악기고 쥐라기라면,
나는 치매이거나 1 억 년 전의 오파쿠쉐* 일지 모른다
색이 아닌 색으로 생을 덧칠하는
*오파쿠쉐(Opaque couche)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지 않은 색으로 컬러코드 448C
흔적
마지막 말이 가슴을 빠져나가고 분노가 보라색으로 남는다
누구였던가?
벽을 더듬는다 벽이 먼저 흐느낀다
정맥이 곧 끊어질 듯 경련한다
몸의 흔적은 상환불능의 부채다
서로를 파먹던 아메바였다
언약의 치골, 그 야트막한 둔덕의 더럽고 냄새나는 영지는 돌이켜야 하는 흔적이다
애린은 몽혼의, 파탄은 선택의 흔적이었으니 시작보다 끝이 먼저였다
흔적으로 사람인 사랑, 허공을 오른다
음악분수 쇼
포자는 체향을 타고 날아와 독버섯으로 자란다
포자는 우주였거나 사계였다
독버섯 그 황홀한 채색은 증오와 연민, 저주와 비탄을 숨긴다
포자의 궁극은 계절을 앞당겨 새 하늘을 얻는 일이다
포자만으로 죽고 살기를 수 백 번이다
포자는 슬픈 폭력이다
마음이 포자였던 것이다
오늘은 어느 원목에 닿아 종균으로 자랄지 가늠 할 수 없다
여름 날, 음악분수쇼는 의문부호다
모든 의문부호는 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근친상간의 물기둥 쓰러진다
황폐한 자궁의 쓸쓸함이여*
*니체
지음知音
그 밤 저 거문고 소리 들었겠지요
슬기둥 가락 밤새 달빛 수련에 머물게 했습니다 내게 머문 선홍의 시간 당신 가슴 뜯던 밤, 와르르 괘들 무너지는 당신 눈빛 보았습니다 거문고에는 현이 없었습니다 현들은 어느 어둠에 들어 목메였을까요
지음을 말한 일 없습니다
다홍이거나 선홍의 시간 때문입니다 붉은 시간은 순간을 영원으로 채색하고 물러납니다
채도의 계단에 당신 붉은 발자국 흔들렸고 환청은 물 속까지 따라왔습니다
당신은 깊이를 짚을 수 없는 꽃불이었습니다
꽃불로 타오르는 목숨이었습니다
목숨은 늘 지음 근처에 있었는데
성모 앞에 무릎 꿇던 당신이 당신인지요?
거문고 울게 하던 밤의 당신이 당신인지요?
성녀와 마녀는 독법의 차이인 걸 알겠습니다
당신 떠나던 날 독수리 한 마리 산정을 날았습니다
독수리는 일몰을 듣는 지음의 경지는 아닐 겁니다
풍장을 지켜보겠다는 독수리의 눈빛 잊을 수 없습니다
몸이 지음을 알았다면 몸의 저주입니다
청천
생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물소리를 건다
비경이라고 말하면 계곡이 사라질 거 같다
계곡은 청바지에 꽉 끼어 있는 하체다
젖고 부풀고 소리친다
몸의 오만을 말하며 급커브를 돈다
얼핏 계곡물이 역류한다
계곡의 역류는 새벽 질문을 버린다는 의미다
계곡의 어느 지점에도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된다는 결연이다
물소리는 생애를 멀리 돌아나간다
모든 생애는 허술하게 늙어간다
내 생애는 늘 기울어 있었다
고백은 통속이었고 절망은 진실이었다
죽을 수 있겠다 싶으면 또 다른 고백을 이어갔다
물소리를 생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 수 없을지 모른다
청천계곡에서는 고백 없이도 절망 할 수 있겠다
어두운 계단
살려주세요
꽃뱀 한 마리 비명을 지르며 나무계단을 뛰어내려 풀섶으로 숨었다
봄볕 따사로운 나무계단에 올라 몸을 데우던 꽃뱀이다
살려주세요
마지막 한 문장이 비명을 지르며 시행을 뛰어내려 행간 속으로 숨어들었다
시문을 거느리며 은유의 먼 길을 밝혀주던 시행이다
꽃뱀과 마지막 시문이 조우하며 또 한 번 놀라 비명을 지를 것을 안다
갈리리 바다의 거친 파도가 달아나며 비명을 지른다
시간이 시간에 눌려 질식하며 비명을 지른다
살려주세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구원들, 시간들,
내 언어들, 물신들, 절망들은
깊고 어두운 지하실의 계단을 더듬는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구원은 어느 계단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