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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기 묘지(洪重箕 墓誌)」는 모두 7매의 청화(靑畵)백자로 되어 있다. 이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 어유봉(魚有鳳)의 시문집인 『기원집(杞園集)』 卷23 에 「첨정증이조참판홍공묘지명 병서(僉正贈吏曹參判洪公墓誌銘 幷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문집의 묘지명에는 백자묘지명의 제6~7면에 해 당하는 홍상한(洪象漢)의 추기(追記)가 빠져있다. 홍중기(洪重箕, 효종 1~숙 종 32, 1650~1706)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혜경궁 홍씨의 중조 할아버지
<第一面> (01)有明朝鮮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 (02) 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行司僕寺僉正洪公 (03) 墓誌銘並書 (04)往歲參判洪公錫輔良臣氏命其嗣子象漢奉其先大 (05)夫 贈吏曹參判府君行錄一通抵有鳳于守制練堊 (06)室告曰先人之卜德水先兆于今二十餘年墓宅闕幽 (07)誌敢以煩吾子余敬拜受而閱之作而曰盛矣哉其世 (08)閥之華也師友之懿也行業之備而美也子姓之賢且 (09)榮也顧余於公有三世契好而象漢又呼余爲舅情義 (10)之篤且密如此其何說之辭焉雖然良臣氏必欲責不 <第二面> (01)腆之辭作爲銘詩用昭告來後則非今日所宜爲請少 (02)假之以俟其或不死焉可乎孰謂良臣氏不幸奄忽長 (03)逝而余則頑然竟不死今象漢涕泣再三申前請曰先 (04)人之托也噫吾旣不能固讓於當日今豈可食言於重 (05)壤遂卒叙而銘之云公諱重箕字九以系出豊山上祖 (06)之慶高麗朝國學直學歷八代珪組蟬嫣至大司憲 (07)贈領議政諱履祥以經術德行名于世稱慕堂先生卽 (08)公高祖也曾祖諱霙禮曹參判 贈領議政委禽于月 (09)沙文忠李公廷龜之門王考諱柱元永安尉文懿公號 (10)無何堂尙 宣廟朝貞明公主考諱萬容再魁文科禮 <第三面> (01)曹判書貞簡公妣貞夫人礪山宋氏都承旨時吉女也 (02)公之生在 崇禎後庚寅五月二十九日卒于丙戌五 (03)月二十七日得年五十有七初筮仕別檢掌苑署陞主 (04)宗簿廣興簿郞于工戶二曹而再爲郞中地部僉正廚 (05)院及太僕寺所歷諸司功能著稱出而通判平壤府律 (06)己廉治民惠剸煩刮瘼政績益茂居家事親孝久侍文 (07)懿公疾竭誠扶護夜不解帶宋夫人積歲抱痾所進藥 (08)物必手種而口甞之及喪哀毁逾制四弟皆幼撫育勸 (09)課益勤以摯遭貞簡公憂先已病而毁戚猶前幾不能 (10)全奉先尤恪祭之日凡籩豆之品椅卓之設必躬自審- 2 <第四面> (01)飭雖晩年廢疾猶强起伸禮無闕與人款洽和氣藹然 (02)親族曁所識窮乏者救之如不及吊死問疾在踈賤亦 (03)拳拳不怠公之平生履行大略如是也始公生而有美 (04)質大爲文懿公及大主所奇愛十七中司馬峻望傾太 (05)學旣又從事尤庵宋先生門承聞緖論所交皆一時賢 (06)士大夫如遂庵權文純公丈巖鄭相公與之最密金尙 (07)書竹泉處士三淵金公尤敬愛之不衰甲寅以後斯文 (08)厄逮己巳彛倫斁而士禍愈酷輒杜門謝科宦持論明 (09)正守志彌篤鳴呼此所以生長綺紈而不失儒素家風 (10)沈淪下位而爲士流所重也歟配曰貞夫人李氏吏曹 <第五面> (01)判書太學士文簡公西河諱敏敍之女年今八十康强 (02)無恙生二男二女男長錫輔文科吏曺參判次鉉輔文 (03)魁禮曺參判女長適進士李昌輝次適洗馬李顯應錫 (04)輔一男卽象漢進士壯元二女適進士壯元金致萬士 (05)人申晧鉉輔二男鳳漢次幼二女適文科李德重進士 (06)李彦衡李昌輝三男瀣溎漪李顯應三男時中明中最 (07)中三女適正言申晩士人權翯朴相魯象漢有二男皆 (08)幼其銘曰 (09)文懿之門厥有冢孫于何薰德華陽丈席嗟行之修又 (10)才之周于家于邦令聞孔彰于躬有嗇而厥後之昌▨ <第六面> (01)嘉善大夫漢城府右尹兼 世子贊善魚有鳳撰 (02) 男長卽我先君以不肖▨竊崇秩 贈左▨成季 (03) 鉉輔官至禮曹判書李顯應縣監時中掌樂正明 (04) 中牧使最中承旨申晩右議政李▨(▨+▨+奇)縣監曾孫大 (05) 司諫樂性正言樂命樂三夭樂最不肖象漢出也 (06) 金致萬侍直男鍾厚洗馬鍾秀進士女縣監洪益 (07) 弼進士韓用和申晧繼子大權女李顯吉鳳漢文 (08) 科判敦寧次麟漢大司成駿漢龍漢進士三女適 (09) 監司李德重文學李彦衡校理趙曮鳳漢有女冊 (10) 封 世子嬪男樂仁進士樂任樂信樂性二男二 <第七面> (01) 女男義榮餘幼內外曾玄凡六十餘人不肖孫象 (02) 漢追記- 3 <側面> 豊德祖江里亥坐僉正洪公重箕墓誌 第一
(제1면) 유명 조선(有明 朝鮮)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훈대부 행사복 시첨정(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訓大夫 行司僕寺僉正)으로 추 증된 홍공(洪公)의 묘지명(墓誌銘)과 서(序) 옹 지난해에 참판(參判) 홍공(洪公) 석보(錫輔) 자(字) 양신(良臣)씨가 사자(嗣子) 상한(象漢)에게 명하여 돌아가신 조부이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된 부군(府君)의 행록(行錄) 한 통을 받 들어 유붕(有鳳, 어유붕)이 수제(守制)를 위해 마련한 악실(堊室, 흙으로 벽을 바른 상중에 거 처하는 집)에 이르러 고하기를, “선인(先人)께서 자리를 가려서 덕수현(德水縣)에 선영(先塋)<先兆>을 정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20여년이 되었지만 묘택(墓宅)에 유지(幽誌, 墓誌)가 없어 감히 그대를 번거롭게 합니다.” 하였 으니, 내가 공경히 배수(拜受)하여 그것을 열람하고 글을 지어 말하기를, “성대하도다! 세벌(世閥)이 화려하고, 사우(師友)가 훌륭하도다. 행업(行業)이 갖추어졌고 아름 다웠으며, 자손들이 어지니 또한 영예로다. 나와 공의 관계를 돌아보니 삼대가 (서로) 좋은 관 계를 맺었고, 상한(象漢)에게는 내가 장인이 되는 바, 정의(情義)가 돈독하고 친밀하기가 이와 같으니, 어떠한 말로 사양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양신씨(良臣氏, 홍석보)는 반드시 굳게 사양하지 않았다고 꾸짖을 것이다. (제2면) 명시(銘詩)를 지음은 후세에게 훤하게 알리는데 쓰는 것인즉 금일(今日)에 마땅히 해야 될 바 (적당한 인물)가 아니면 청컨대 얼마간 그것으로 임시로 하고, 기다리게 한다면 혹자가 죽지 않는 한 가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양신씨가 불행하게 갑자기 죽을<長逝>줄 누가 생각했겠 는가. 나는 완고하여 끝내 아직도 않았으니, 지금 상한(象漢)이 눈물을 흘리며 재삼(再三) 이전 의 부탁을 거듭하기를 “선인(先人)의 부탁이다.”라고 하니, 아, 오늘에는 내가 이미 사양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지금 어찌 거듭 사양하여 식언(食言)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명(銘)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의 이름은 중기(重箕)이고 자(字)는 구이(九以)로, 가계는 풍산(豊山)에서 나왔다. 먼 조상인 지경(之慶)은 고려조에서 국학직학(國學直學)이 되었고, (이후) 8대에 걸쳐 높은 벼슬아치의 인 장과 인끈이 연속하여 잇닿았다. 대사헌(大司憲)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상(履祥)에 이르면 경 술(經術)과 덕행(德行)으로 세상에 이름났던 모당(慕堂)선생으로 칭한 이가 곧 공의 고조(高祖) 이다. 증조(曾祖) 영(霙)은 예조참판(禮曹參判) 증 영의정(贈領議政)이며 월사(月沙) 문충공(文 忠公) 이정구(李廷龜)의 집안과 혼인하였다. 조부 주원(柱元)은 영안위(永安尉) 문의공(文懿公) 으로 호(號)는 무하당(無何堂)인데 일찍이 선묘조(宣廟朝)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하였다. 아 버지 만용(萬容)은 거듭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제3면) 예조판서(禮曹判書) 정간공(貞簡公)이 되었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여산(礪山) 송씨(宋氏) 로 도승지(都承旨) 시길(時吉)의 딸이다. 공은 숭정(崇禎) 후 경인(효종 1, 1650) 5월 29일에 태어나, 병술(숙종 32, 1706) 5월 27일에 - 5 돌아가셨으니 나이 57세였다. 처음에 장원서(掌苑署) 별검(別檢)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주 종부(主宗簿) 광흥부(廣興簿)로 승진하였고, 공조·호조 이조(二曹)의 낭(郎)이 되었고 다시 지부 (地部, 호조)의 낭중(郞中), 주원(廚院, 사옹원)과 태복시(太僕寺) 첨정(僉正)이 되었다. 제사(諸 司)를 거치면서 공(功)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외직에) 나가서 평양부(平壤府) 통판(通判)이 됨 에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청렴하였고 백성을 다스림에 은혜를 베풀었다. 번잡한 사무를 잘 처리하여 정적(政績)이 더욱 풍성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를 효도로 섬겼으니, 문의공(文懿公)이 병들자 오랫동안 곁에서 정성을 다 하여 부호(扶護)하였으니, 밤에도 대(帶)를 풀지 않았다. (또한) 송부인(宋夫人)은 오랜 세월 숙 병(宿病)을 앓고 있었는데, 약물(藥物)을 올릴 때는 반드시 손으로 확인하고 입으로 맛을 보았 다. 상(喪)을 당하자 애훼(哀毁)함이 법도를 넘어섰다. 4명의 동생들이 모두 어렸는데 무육(撫 育)하고 권과(勸課)하길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정간공(貞簡公, 父 홍만용)의 상(喪)을 당하자 먼저 병이 났음에도 슬퍼함이 전과 같았으나 기미가 어찌 온전하지 못했지만 선친을 받들기를 더욱 공경하였으니, 제사지내는 날에는 변두(籩豆, 祭器)의 물품과 의자와 탁자를 설치함에 반 드시 몸소 살펴서 갖추었다. (제4면) 비록 만년(晩年)에는 폐질(廢疾)이 있었지만 더욱 애써 일어나 예를 펴매 궐함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관흡(款洽)하여 화기(和氣)가 성대하였다. 친족(親族)의 궁핍(窮乏)함을 알고 그것을 구 휼함을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다. 상사(喪事)에 조문하고 문병함에 먼 친척이나 천한 이에 있 어서도 또한 권권(拳拳)하고 태만하지 않았다. 공의 평생 동안의 이행(履行)은 대략 이와 같았 다. 공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지녔고, 커서는 문의공(文懿公, 祖父 홍주원)과 대 주(大主, 貞明公主)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니 준망(峻望)이 태학(太 學)에 온통 기울었다. 이윽고 또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 宋時烈)의 문하에 종사(從事)함에 서론(緖論)을 승문(承聞)하였다. 교유하는 바가 모두 한 때의 현사대부(賢士大夫)였으니, 수암 (遂菴) 권문순공(權文純公, 權尙夏의 시호), 장암(丈岩) 정상공(鄭相公, 鄭澔) 같은 이들과 가장 친밀했다. 김상서(金尙書, 金▨▨), 죽천처사(竹泉處士, 金鎭圭), 삼연 김공(三淵金公, 金昌翕)은 더욱 사랑하고 공경함이 쇠하지 않았다. 갑인(甲寅) 이후에 사문(斯文, 儒道)에 재앙이 미쳤고, 기사(己巳)에 떳떳한 인륜이 무너져 사화(士禍)가 점점 심해지자, 문득 문을 닫고 과환(科宦)을 사양하니 지론(持論)에 명정(明正)했고, 수지(守志)를 더욱 돈독히 했다. 아, 이 사람은 부귀한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유가의 가풍을 잃지 않았도다. 하위(下位)로 묻혔지만, 사류(士流) 가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도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로 (제5면) 이조판서 태학사(吏曹判書 太學士) 문간공(文簡公) 서하(西河) 민서(敏敍)의 딸이다. 금년에 80 세로 강강(康强)하여 병이 없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석보(錫輔)는 문과(文科)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며, 차남 현보(鉉輔)는 문과에 장원급제<文魁> 하여 예조판서(禮曹參判)이다. 큰딸은 진사(進士) 이창휘(李昌輝)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세마(洗馬) 이현응(李顯應)에게 시 집갔다. 석보(錫輔)는 아들이 하나인데 곧 상한(象漢)으로 진사 장원(進士 壯元)이다. 두 딸은 진사장원 (進士壯元) 김치만(金致萬), 사인(士人) 신호(申晧)에게 시집갔다.- 6 현보(鉉輔)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봉한(鳳漢)이고 둘째는 어리다. 두 딸은 문과(文科) 이덕중 (李德重), 진사(進士) 이언형(李彦衡)에게 시집갔다. 이창휘(李昌輝)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해(瀣),연(溎),의(漪)이다. 이현응(李顯應)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시중(時中),명중(明中),최중(最中)이며, 세 딸은 정언 (正言) 신만(申晩),사인(士人) 권학(權翯)·박상노(朴相魯)에게 시집갔다. 상한(象漢)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銘)하여 이른다. 문의(文懿) 가문의 총손(冢孫, 嫡長孫)으로 덕에 물들어 화양(華陽 우암의 문인들)의 선생자리(丈席)에 있었도다. 아, 행함을 닦았으며, 또한 재주가 두루 미쳤도다. 가문과 나라로 하여금 크게 드러났다는 소리를 듣게 했도다. 자신은 인색하였지만, 그 후손은 창성하리라. (제6면)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 겸 세자찬선(漢城府右尹 兼 世子贊善) 어유붕(魚有鳳)이 짓는 다. 장남은 곧 나의 선군으로 불초(不肖)함에도 높은 품질<崇秩>을 외람되이 차지하여 좌찬성(左 贊成)에 추증되었다. 막내아들 현보(鉉輔)는 관직이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사위) 이현응(李顯應)은 현감(縣監)이고, (외손) 시중(時中)은 장악정(掌樂正), 명중(明中)은 목 사(牧使)이고 최중(最中) 승지(承旨)이다. (외손주 사위) 신만(申晩)은 우의정(右議政)이다. (외손) 이의(李▨(▨+▨+奇))는 현감(縣監)이다. 증손(曾孫)은 대사간(大司諫) 낙성(樂性), 정언(正言) 낙명(樂命)인데, 낙삼(樂三)은 요절하였고 낙최(樂最)는 불초(不肖) 상한(象漢)의 자식이다. (손주 사위) 김치만(金致萬)은 시직(侍直)인데, 아들 종후(鍾厚)는 세마(洗馬)이고 종수(鍾秀)는 진사(進士)이며 딸은 현감(縣監) 홍익필(洪益弼), 진사(進士) 한용화(韓用和)에게 시집갔다. (손주사위) 신호(申晧)의 계자(繼子)는 대권(大權)이고, 딸은 이현길(李顯吉)에게 시집갔다. (손주) 봉한(鳳漢)은 문과(文科)로 판돈령(判敦寧)이고, 둘째 인한(麟漢)은 대사성(大司成), 준한 (駿漢)·용한(龍漢)은 진사(進士)이고, 세딸은 감사(監司) 이덕중(李德重), 문학(文學) 이언형(李 彦衡), 교리(校理) 조엄(趙曮)에게 시집갔다. 봉한의 딸은 세자빈(世子嬪)에 책봉(冊封)되었고, 아들 낙인(樂仁)은 진사(進士)이고, 낙임(樂 任)·낙신(樂信)이 있다. (증손) 낙성(樂性)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제7면) 아들은 의영(義榮)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내외 증현손은 모두 60여인이다. 불초손(不肖孫) 상한(象漢)이 추가로 적는다. (옆면) 풍덕(豊德) 조강리(祖江里) 서북쪽(亥坐) 첨정(僉正) 홍공중기(洪公重箕) 墓誌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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