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선’을 넘어야 하나님이 제대로 보인다!
본문 : 사도행전 22장 22절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런 자는 없애 버려라. 살려 두면 안 된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도행전 22장 22절, 새번역>
우리나라 101년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등 4부문에서 상을 받은 영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92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로 된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잘 아시는 대로 ‘기생충’입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수많은 내용과 대사가 회자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저에게 가장 깊게 자리 잡은 대사가 있다면 바로 이선균씨가 말한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들 제일 싫어하는데..’입니다. 이 대사에서 등장하는 ‘선’이란 단어는 정말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계층을 구분하고, 신분을 구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면, 일반적으로는 ‘예절’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을 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절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나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 자마다 이 선의 한계와 크기는 제각각입니다. 그래서 이 선은 자신의 ‘고유영역’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은연중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내가 원래 선을 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여기까지만요!’, ‘하나님, 제가 알아서 할테니 거기까지만 하세요!’, ‘하나님, 여기는 제 영역입니다! 넘어오지 마세요!’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절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삶은 아예 생각조차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도 ‘선’을 긋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많아 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악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코로나시대를 지나면서 마치 하나님을 아주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신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한정하고, 내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내가 평가해야 할 신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만 등장하는 ‘가상현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를 주도하고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입장에서 ‘선을 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사도행전 21장 강해에서 나누었듯이 하나님이 보내신 천부장을 통하여 예루살렘 소동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바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결정조차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신 뜻을 깨달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부탁하여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도 온 도시의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발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22장 강해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동포 여러분,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드리는 해명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2장 1절, 새번역>
그런데 첫 단추부터가 잘 끼워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셨는데, 바울은 ‘해명’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오늘 첫 번째로 나눌 선에 대한 이야기로, ‘바울의 선’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해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자신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가장 열렬하게 응원해준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해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은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버리지 못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혹시 그 순간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그 때 말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호산나’를 외치며 왕의 예루살렘 입성을 소리 높여 찬양하던 무리는, 얼마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며 분노하는 무리로 바뀌었습니다. 어찌 이리도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는 지지하다가, 자신이 필요 없으면 버리는 참으로 ‘토사구팽’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바울에게도 마찬가지 모습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줄 때는 엄청난 지지를 보내면서 다마스쿠스로 보냈다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바울을 향한 분노가 멈출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상황을 대하는 방법은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은 해명을 시작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은 ‘해명’을 해야 할 시간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의 억울함과 자신의 신념 변화에 대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황금 시간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할 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바울은 이 귀한 시간을 아껴 복음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절호의 찬스에 다시 한 번 이렇게 선포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새번역>
하지만 바울 스스로 자신이 정해 놓은 그 ‘선’을 넘지 못했기에 그는 해명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을 전해왔지만, 사실 자신이 더욱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은 여전히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렸노라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아직 바울 마음 속 깊은 곳에, 그 모든 것들이 버려지지 않고, 잘 숨겨둔 채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해명을 시작합니다. 자신이 유대 사람이고,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으며,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봐도 자신에 대한 ‘자랑’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설명할 때 소위 ‘금수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빌립보 감옥에서 쓴 서신과는 참으로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7절, 새번역>
자신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대단한 것까지 다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간증은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간증이 육신에 신뢰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나올 수는 있지만 딱 그 한 번 뿐이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소개가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결국 자랑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기소개를 듣자 사람들은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가말리엘 선생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하니 바울이 달라 보이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더욱 숙연해진 분위기에 탄력을 받아 계속해서 해명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내 말이 사실임을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가 증언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받아서, 다마스쿠스로 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신도들까지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3B~5절, 새번역>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와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은 ‘해명’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이기 때문에 이 해명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의 시선은 이미 바울 시대에도 동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사도행전 20장에 등장하는 유두고 사건 때부터 바울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짧고 굵게 전하던 설교는 너무도 길어져 버렸고, 동역자들의 이유 있는 만류에는 호기롭게 대답하고서는 예루살렘에 오자 두려워 ‘의식’을 제안한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절호의 찬스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급급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넘어서야 할 ‘선’이고, 저희 모두가 넘어서야 할 ‘선’입니다.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게 된 ‘내’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고 나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떤 그리스도인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하고 있는 고백이 지금 현재 바울과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리디아서 2장 20절, 새번역>
바울은 이제 ‘자신’을 이방 사람들에게 보낸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바울을 보내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구체 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택하심, ‘선민사상’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울 역시 ‘자신’을 택하여 보내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1절, 새번역>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잠시 감격에 젖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무엇인가 느낀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1장에서도 그렇고, 오늘 22장 강해에서도 그렇고 이런 바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맙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런 자는 없애 버려라. 살려 두면 안 된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도행전 22장 22절, 새번역>
잠잠히 듣고 있던 예루살렘 시민들은 도저히 더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저 바울의 자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해명같은 자랑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선’을 넘기자마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시 소리를 지르며 분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이 바울의 ‘선’에 이어 두 번째로 나눌 ‘선’, ‘이스라엘의 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이 자신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들은 그저 구원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사실상 믿음이 없었지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자부심, 그것 하나로 지금껏 버텨온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선민사상(選民思想)은 종교, 국가, 민족 등 특정 부류나 집단이 자신들만이 신이나 그에 맞먹는 존재 등에게 선택되었고, 때문에 타 집단보다 더 우월하거나 잘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월의식을 말합니다. 이 선민사상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아니 이 선민사상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사상의 뿌리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택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출애굽기 19장 5~6절, 새번역>
이러한 계약을 맺으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즉 ‘선민’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인류구원을 위한 복음의 초석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여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 중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삼은 것은 선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잘못된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이 사명을 망각하고 타 민족을 하나님이 외면한 사람으로 취급하며 사명을 땅에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페르시아나 바벨론 등 강대국을 통해 그들을 온 세계로 흩으셨습니다. 그렇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나라 없이 떠돌이 나그네가 되어 방랑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오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선민으로서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가 탄생하면서 이미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은 막을 내린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새 ‘이스라엘’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백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복음 8장 5~12절, 새번역>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선민사상으로 가득했던 자신들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이, 그것도 이방인이었던 로마 백부장과 비교하며 말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예수님에게 그저 화만 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선 중 첫 번째는, 바로 ‘고집불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오히려 좋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기에 사명을 감당한다면 선택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명을 이루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민’ 그 단어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소통이 불가능한 ‘고집불통’이 된 것입니다. 특권의식에 취했고, 자신들의 우월함에 어깨는 한껏 치솟았습니다. 자신들이 필요한 말만 기억하고, 진짜 하나님의 명령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집불통이 되더니, 하나님에게도 고집불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모두 놓치고 자기 사랑에만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선 중 두 번째로, ‘자기애’입니다. 자기애는 고집불통인 사람의 결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만을 사랑합니다.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편협적인 사랑입니다. ‘자기애’에 빠지면, 타인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애’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새번역>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선’을 넘는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애에 빠져 사는 것이 낙인 민족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예수님을,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믿지 못하고, 자신들이 져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선’은 바로, ‘무지에서 온 오해’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모세를 오해했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계명을 받으러 올라가자 또 오해를 하고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들은 꿈에 그리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오해합니다. 사사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합니다. 왕도 오해하고, 선지자들도 오해하고, 결국에는 메시아까지 오해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모습은 없고, 무지를 통해 ‘오해’하는 모습 밖에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에서 오는 오해는 언제나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교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해명하는 것도 오해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은 결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선택한 자신들만을 위하는 하나님이라는 고집불통, 자기애, 무지, 교만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훗날 바울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게 됩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혼미한 영을 주셨으니, 오늘까지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로마서 11장 8절, 새번역>
특히 바울은 오늘 사도행전 22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원망과 희망이 함께 녹아져 있는 기록입니다.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설 때에는, 그 복이 얼마나 더 엄청나겠습니까? <로마서 11장 11~12절, 새번역>
바울은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사상이 가져온 병폐로 만든 선, 고집불통과 자기애, 무지와 교만이 만든 오해를 버릴 수만 있다면 온 세상에 엄청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지만, 자기 동족을 위한 복음 선포도 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먼 훗날 로마서를 기록할 때 오늘 사도행전 22장에서 자신이 가진 선을 아직 넘지 못함으로 인해 아쉬운 찬스를 놓쳤기에 바울의 아쉬움은 더 컸을 것입니다.
바울의 해명에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소동하자, 천부장은 황급히 바울을 다시 병영 안으로 끌어들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캐묻기 위해 채찍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채찍질을 하려고 바울을 눕혔을 때에, 바울은 백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밝히게 됩니다.
그들이 채찍질을 하려고 바울을 눕혔을 때에, 바울은 거기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을 유죄판결도 내리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2장 25절, 새번역>
이 말에 백부장을 깜짝 놀라 천부장에게로 달려가 그 말을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에게 와서 사실 여부를 한 번 더 묻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이 자신은 로마 시민이라고 말하자 천부장이 의외의 말을 던지게 됩니다.
천부장은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이 시민권을 얻었소" 하고 말하였다.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22장 28절, 새번역>
자신처럼 바울 역시 돈을 많이 들여서 시민권을 얻은 것이리라 확신하면서 던진 말이었는데 돌아온 바울의 대답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놀라게 하며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을 신문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곧 물러갔다.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결박해 놓은 일로 두려워하였다. <사도행전 22장 29절, 새번역>
그래서 천부장은 혹시라도 바울이 자신에게 위협을 주는 행동을 할까봐 바울에게 도움을 주기로 결정합니다. 무슨 일로 유대 사람이 바울을 고소하는지,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다음날 명령을 내려서 대제사장들과 온 의회를 모이게 합니다. 또한 바울의 결박을 풀어주고, 바울을 데리고 그들 앞에 세워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놀랍게도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바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로 나누어야 할 ‘선’, 천부장의 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선’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열등감’입니다. 돈을 많이 들여 로마시민이 된 천부장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 왠지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태어나자마자 로마 시민이 된 바울은 상상도 못할 기분일 것입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혜택이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돈을 많이 들여서라도 로마 시민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금수저들은 이해하지 못할 흙수저들의 열등감입니다. 그래서 잡혀 있는 바울은 당당해 보이고, 이상하게도 천부장은 초라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어릴 적 부흥회 때 부흥강사님을 통해 들었던 허무맹랑했지만 두려웠던 ‘황금면류관과 개털 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선한 것을 보면 저 역시 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열등감은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지만, 아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패배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람과의 비교에 익숙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흔들리고, 사람들의 평가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로마 시민이 아니었지만 로마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돈으로 시민권을 샀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부장’이라는 큰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할 정도면 로마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만한 중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로마 시민이며, 천부장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늘 천부장 자신은 열등감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민이라는 바울의 말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부러웠습니다. 진심으로 부러웠습니다. 로마에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의 삶에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그래서 ‘비교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과 비교하니 갑자기 자신의 삶이 우울해진 천부장입니다. 결코 우울해야 할 이유가 없는 천부장이며, 로마시민인 사람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열등감을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면 이제 열등감이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누구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며 언제나 ‘V.I.P’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하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만 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39절, 새번역>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시고, 사랑하십니다. 그 어떤 비교의 잣대도 대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만 보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열등감도 싹 사라지게 만들 ‘멈추지 않는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요한계시록 2장 9절, 새번역>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 새번역>
여러분은 지금 이 두 교회 중 어떤 모습이십니까? 에베소 교회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입니까?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어떤 교회를 칭찬하고 인정하고 계십니까? 이제는 ‘열등감’이란 선을 넘어 서서,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야 하는 때입니다. 이렇게 선을 넘어설 때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게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강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강해를 나누면서 한 가지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선’을 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선’, ‘이스라엘의 선’, ‘천부장의 선’을 모두 넘어서야 합니다. 계속해서 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성숙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결국 모든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결말지으려고 하는 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결론이 ‘하나님’이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복음’이 선포되도록 나의 이야기는 과감히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이야기를 너무도 잘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집불통으로 자기애에 빠져, 무지와 교만을 통한 오해가 만든 삶의 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민사상이 자신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더 많이 소통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진리를 삶으로 사는 겸손한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천부장처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열등감’의 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세상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릴 때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예배자 여러분, 선을 넘어서면 하나님이 제대로 보입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선’을 하나님 앞에서 극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각자가 정해놓은 그 ‘선’에 사로잡혀, 더 성장할 수 있고, 더 전진할 수 있고,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손을 잡고 그 선을 넘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놀라운 세상을 경험할 때입니다.
오늘 8월 1일, 주일로 한 달의 문을 열면서, 남은 주일 하루, 내가 넘지 못하고 있는 ‘선’은 무엇인지 찾아내고, 또한 자신이 가진 ‘선’을 넘어서겠다는 결정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과 함께 넘어섬으로, 더 넓은 시선을 가지는 노력을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애벌레가 허물을 벗어 나비가 되듯이, 허물 같은 선을 넘어 아름답게 비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마음 다해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침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3절, 새번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