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본사에서 소장중인 원본 사진.(박민자 총전교님 개인 소장물품)
대한민국 삼년 1월 1일. 상태는 최상급.
1921년 촬영한 희귀 사진자료 [대한민국삼년일월일일 임시정부 급 임시의정원신년축하식기념촬영(大韓民國三年 一月 一日 臨時政府 及 臨時議政院新年祝賀式紀念撮影]
사진 수록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인들
제 1열 左에서 右로
박윤근, 전재순, 김구, 오희원, 미상, 미상, 유기준, 정태희, 김재덕, 김붕준, 엄항섭, 정재형
제 2열 左에서 右로
이규홍, 김철, 신익희, 신규식,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손정도, 이동녕, 남형우, 안창호, 오영선, 윤현진, 서병호, 조완구
제 3열 左에서 右로
미상, 임병직, 미상, 김복형, 도인권, 최근우, 김인전, 이원익, 정광호, 김태연, 이복현, 미상, 김홍서, 나용균, 황진남, 김정목
제 4열 左에서 右로
미상, 왕삼덕, 차균상, 김여제, 안병찬, 장붕, 김석황, 이규서, 김용철, 미상, 송병조, 양헌, 조동호, 이유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의 모태이자 사상적 기반이다.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했던 임시정부를 기억하기 위해 1921년 1월 1일 신년축하식 후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신익희(2열 왼쪽에서 세번째), 신규식(네번째), 이시영(다섯번째), 이동휘(여섯번째), 이승만(일곱번째), 이동녕(아홉번째), 안창호(열한번째) 등 주요 임정요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59명이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에서 찍은 신년축하식 사진이다.
신년축하식은 영안백화점 내 일품향이라는 요릿집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같은 날 오후 4시경 식을 마친 임시정부 인사들은 영안백화점 옥상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미국에서 활동하다 1920년 12월 상하이로 와 부임한 이승만과 러시아 연해주와 북간도를 대표하는 국무총리 이동휘 그리고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던 노동총판 안창호를 비롯해 내각의 국무원들과 임시의정원 위원 모두가 함께 촬영하였다.
임시정부는 신년축하식을 통해 새로운 한 해를 축하하고, 독립의지를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아쉽게도 1921년 이후 신년축하식과 관련된 사진이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재정적으로 힘들었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식을 치를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합 임시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열린 1920년 신년축하회의 사진도 남아있는데 1921년과 달리 내각의 국무위원과 각 부서의 요인만 찍혀 있다. 당시 임시의정원은 별도의 신년축하식을 가졌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 1운동 이후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일제에 조직적으로 투쟁하기 위해 상해에 설립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어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고,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8 15 광복까지 항주(杭州, 1932), 광주(廣州, 1938), 중경(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국내외 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교통국은 군자금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의 국내 전달, 인물 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는 법령 및 공문의 전파,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금 모금운동 등 다양한 활동의 기반이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만국사회당대회 등에 대표를 파견하고, 1921년에는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등 다양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의열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광복군 창설 등의 항일투쟁이다. 대표적인 의열투쟁으로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꼽을 수 있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해군무관학교, 비행사양성소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였으며, 1940년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