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애국계몽 운동가, 또 일제 치하 민족해방을 위해 앞장선 박은식(朴殷植)은 1859년 9월 30일(음력)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밀양 박씨 집안의 박용호(朴用浩)와 어머니 노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성칠(聖七), 호는 백암(白巖)·겸곡(謙谷)·태백광노(太白狂奴) 등이 있다. 집안은 벼슬과는 관계가 없었고, 아버지 박용호가 서당의 훈장이어서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 주위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주자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다고 한다. 17세가 되자 과거 공부에 회의를 느껴 집을 나와 황해도 일대에 명망있던 이들과 교유했으며, 22세가 된 1880년 경기도 광주에 사는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제자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 다산의 저술을 읽고, 그 학문을 배웠다. 이후 26세에는 평안북도 태천(泰川)의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서 성리학에 몰두했다. 박문일은 조선 말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그 학풍은 박은식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885년에는 향시(鄕試)에 응시, 특선으로 뽑혀 1888년부터 1892년 7월까지 숭인전(崇仁殿)의 참봉가설(參奉加設)을 , 1892년 8월부터 1894년까지 동명왕릉(東明王陵)의 참봉(參奉)을 하였는데 , 이것이 박은식이 역임한 관직생활의 전부이다. 이때는 국내적으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과 갑오개혁(甲午改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박은식은 이를 각각 ‘반란’과 ‘사설(邪說)’이라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주자학에 입각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품고 있던 당시의 박은식에게 통치의 대상인 농민의 봉기나 개화를 위한 개혁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는 박은식이 아직까지 민권의 신장이라든가 문명개화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 기존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박은식의 생각은 40세를 전후하여 변화하였다. 박은식 스스로도 40세 이후 한 가지 학설에 집착하였던 사상이 변동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말은 그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박은식은 40세가 되던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협회에서 주관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가, 간부급으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 9월 5일 남궁억(南宮檍), 유근(柳瑾)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장지연(張志淵)과 더불어 지금의 논설위원에 해당하는 주필(主筆)로 참여하였다. 『황성신문』은 유학적 전통에 서서 개화를 추진하는 이른바 개신유학적 흐름을 주도하며, 이러한 생각을 가진 회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신문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민권이나 개화에 대한 박은식의 생각에 획기적 변화가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무렵 박은식은 동서의 각종 서적을 접하게 되면서 세계의 변화에 눈을 뜨게 되며 주자학에서 강조하던 개인적 수양보다 사회적 실천성을 강조하던 양명학(陽明學)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즉 한말의 시대 급변을 경험하면서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며 학문과 실천이 분리되는 주자학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밀려드는 학문과 문화를 수용하고 시대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으로 전환한 것이다. 또 박은식은 유교가 불교나 기독교에 비해 세계적인 발전을 하지 못했다며 그 이유를 유교가 인민보다 제왕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유교는 원래 상하가 ‘대동(大同)’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제왕, 군주에 영합하였으며, 그러다보니 인민 사회에 보급할 정신이 부족했기에 다른 종교에 비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은식이 보여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의 활동이나 유교개신 운동은 이러한 사상적 변화의 결과였다.
한편 『황성신문』은 1905년 11월 20일 을사늑약의 문제점을 지적한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것
이 문제가 되어 정간되었다. 이에 박은식은 잠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지만, 1906년 2월 『황성신문』이 복간되었음에도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황성신문』의 주필로 돌아와 강점 직후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신문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언론을 통하여 대중을 계몽하고자 한 박은식의 활동은 신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906년 장지연 등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창립하자, 이를 지지하며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의 논설 집필을 담당 함은 물론 스스로 앞장 서 그해 10월 관서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서우학회(西友學會)의 창립을 주도하여 그 기관지인 『서우(西友)』에 많은 글을 남겼으며, 1908년 서우학회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되어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거듭나자 그 월보에도 민중 계몽을 위한 논설들을 집필하였다. 특히 서북학회에서 대중 계몽을 위하여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개교했을 때는 직접 교장이 되어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에서도 드러나듯이 그가 계몽을 위해 특히 중요시 한 부분은 교육이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일찍이 1901년 ‘흥학설(興學說)’을 지어 학부(學部)에 올린 것이나 『학규신론(學規新論)』을 지어 교육을 강조한 것은 물론 1907년 2월 지석영(池錫永)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국문연구회(國文硏究會)에도 참가하여 한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국문전용에 의한 의무교육을 주장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즉 민중 교화를 위해서는 교육만한 것이 없고, 교육의 확대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번역과 보급을 위해서는 국문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언론과 교육을 통하여 대중을 계몽하고자 했던 박은식의 활동은 항일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항일과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박은식이 신민회의 결성 당시부터 조직에 가담했던 것은 아니며 또 회에 가입한 시점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신민회의 조직을 주도한 안창호와 박은식은 서북이라는 지역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신민회 설립 이전부터 박은식은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는 등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박은식은 신민회에서 진행한 교육 운동과 출판부분에서 활동하였다. 또 체육 교육을 통해 상무의 자질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회복의 초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던 박은식의 생각은 신민회에서 추진했던 무장투쟁과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박은식은 이와 같이 언론을 통한 계몽활동과 교육운동을 벌임과 더불어 유교의 개신과 민족문화 보존을 위한 고전의 출판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일제가 유림을 친일화 하려 하자 1909년 동지들과 대동교(大同敎)를 창립 하여 대동사상과 양명학에 입각하여 유교를 개신함 과 아울러 일제의 친일화 공작에 대항한 것이나 신민회 사업의 하나로 민족 고전 발행을 위해 최남선(崔南善)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고문으로 참여하여 지도한 것은 개명유학자이자 민족문화의 수호자로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1910년 8월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며 일제의 탄압이 거세짐에 따라 박은식은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1년 4월 박은식은 만주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대종교(大倧敎) 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을 찾아 갔다. 여기서 그는 대종교에 입교하고 1년간 머물려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연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 일련의 역사서를 집필하였다. 이는 현실의 국가는 사라졌지만 국혼(國魂)이 사라지지 않으면 국가는 부활할 수 있으며, 국혼은 곧 역사이기 때문에 국혼이 살아 있는 역사서를 저술하는 것이 곧 독립을 위한 급무라는 생각에서였다.
1912년 이후로는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홍콩을 오가며 교민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고 이들의 교육을 위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기도 하고, 언론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집필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당시의 활동 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1915년 『한국통사(韓國痛史)』의 간행이다. 순한문으로 기술되었으며 총 3편 11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나라의 지리와 역사를 대관한 후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된 1864년부터 1911년에 벌어진 105인 사건까지를 기술한 것으로 일제의 침략과정을 밝히는 한편 국혼(國魂)의 수호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국백(國魄)의 회복과 독립의 희망을 전하는 것이었다. 책이 간행되자 중국과 만주 일대의 교민들에게 널리 읽히며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독립의식을 고취하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이 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한국통사』는 한글로 번역되어 조선 내에도 배포되었다. 『한국통사』가 당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총독부의 대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총독부는 ‘한국통사와 같은 망설’이 횡행한다며 1915년 8월 조선과 일본은 동족이며 조선의 역사는 시종일관 사대(事大)와 정치적 혼란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의 편찬을 계획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통사』는 총독부에서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역사서술을 시도하게 할 정도로 국망으로 실의에 빠진 조선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킨 역사서라고 하겠다.
수많은 박은식의 역사 관련 저술들 가운데 『한국통사』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명저로 꼽히는 것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저술을 시작하여 1920년 12월 상하이의 조선인 출판사인 유신사(維新社)에서 발간된 것으로 3·1운동에 고무되어 쓴 이 책은 상·하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부터 1920년의 독립군 전투까지를 다루는데, 앞부분에서는 한말의 역사적 사건과 일제의 침략과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학정(虐政)을, 뒷부분에서는 3·1 운동을 중심으로 이전의 독립운동, 3·1 운동의 진행과정, 그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만행,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군의 항쟁을 다루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한국통사』와 더불어 가장 널리 읽히며 민족의식과 독립투쟁에 대한 결의를 고취시켰다고 평가되는데, 특히 3·1운동과 관련해서는 지방과 국외까지의 확산과정과 일제의 만행을 많은 통계와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박은식이 전개한 독립운동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바로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이다. 이미 『한국통사』를 저술한 이후 이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고, 이후 6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회(大韓國民老人同盟會)를 결성하며 항일운동을 주도한 박은식은 1919년 8월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통합을 지원하였다. 그렇지만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으로 인한 반발, 독립운동의 방략과 관련하여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의 갈등, 출신 지역이 다른 서북파와 기호파의 대립과 같은 분열이 계속되었다. 결국 1921년 1월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사임하고, 5월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박은식은 이러한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이 제안은 무장투쟁론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베이징(北京)의 박용만(朴容萬), 신채호(申采浩)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후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70여 독립운동단체의 대표 124인이 모여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약 6개월 여간 계속된 이 회의는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는 창조파가 팽팽히 맞섰으며,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6월에 결렬되었다.
더 이상의 분열을 막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운동가들은 임정에서 발간하던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사장으로 박은식을 모셨다. 1924년 6월 임정을 떠나 미국에 체류하던 이승만에 대하여 사고가 있음을 공포하고 국무총리가 그 직무를 대리한다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키고,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였다. 1925년 3월 23일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의 면직과 제 2대 대통령으로서 박은식의 취임을 결정하였으며, 박은식은 대통령 취임 1주일 만인 3월 30일 대통령중심제를 일종의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國務領制)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제출하였다. 이는 대통령 1인이 아닌 국무령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여 운동을 지도하자는 것으로, 분열에 빠진 임시정부를 수습할 수 있는 방책이었다. 헌법이 개정되자 1925년 7월 박은식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전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새로운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미련 없이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원로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지도자들의 화합을 중요시했던 박은식의 이러한 행동은 항일을 위해 민족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고자 했던 의지의 실천이었다.
하지만 당시 박은식의 나이는 이미 70세를 바라보는 고령이었으며 인후염이 심해져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이것이 큰 병으로 번져 대통령 퇴임 4개월 만인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