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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의 만찬
주의 만찬은 초기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적 행위였다. 초기 교회 공동체들은 주의 명령에 따라 매 주일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기념했다(행 20:7). 주의 만찬은 유대교 예배에 없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그리스도의 사건으로서 예배의 핵심이 되는 예배행위로서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 그럼에도 현대 교회들이 주의 만찬의 예배학적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한 몰이해로 매주일 준수를 하지 않고 가끔씩 연중행사처럼 거행하고 있음은 불행한 일이다.
(1) 예수의 최후만찬(유월절 만찬)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최후 만찬으로 유월절 참고, 출 12:25-27. 유월절은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여러 가지 고생 끝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지켜진 축제로서 단순한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회상할 뿐아니라 그들을 해방시켜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는 예배 행위이기도 하였다.
만찬을 행하신다. 유월절 만찬시 주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돌리면서, 앞으로도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구속사역을 기념할 것을 명령하신다(눅 22:19).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축제 속에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Ralph Martin,「초대교회 예배」오창윤 역 (서울: 은성, 1990), 177.
, 바울도 만찬의 기원을 이 최후의 유월절 만찬에서 찾고 있다(고전 11:23-25). 그리고 당시 초대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좇아 주의 만찬을 실시했다. 그 의식의 구속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유월절 의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정치적 해방과 구원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면, 주의 만찬 의식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교회)에게 있어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의 해방, 곧 십자가 구속의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②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면하고 해방되었듯이(출 12:21-30), 십자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고 구속받았음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이런 구속적 의미를 지닌 만찬을 거행함으로써 성도는 과거의 죄로부터의 구속에 대한 감사와 현재의 교제와 장차의 천국 잔치를 소망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1:23의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의 말씀은 주의 만찬의 신적 기원을 설명해 준다. 주의 만찬은 주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③ 주께서 유월절 먹기를 원하셨고(눅 22:15), 친히 이를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출애굽시 행하신 일을 다시 행하시는 미래의 구속행위를 기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I. Howard Marshall,「마지막 만찬과 주의 만찬」배용덕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3), 123.
(2) 초기 교회의 주의 만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첫날에 드리는 주일 예배 속에 주의 만찬을 포함하였다.
① 드로아 교회에 관한 누가의 증언(행 20: 6-7)을 통해서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축복하기 위해 모였다.
② 갈라디아와 고린도 교회들은(고전 16:1-2) “매주일 첫날”이 공(公)예배로서 모이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날에 연보를 함께 드렸다. 이 날이 주일로 이는 당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함께 모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③ 고린도전서 11:20에 보면 고린도의 제자들이 주의 만찬을 떼기 위해 함께 모였다.
2. 주의 만찬의 신학적 이해
1) 주의 만찬의 의미
(1) 언약적 의미
주의 만찬이 언약적 의미를 가진 신약의 증거는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떡을 축사하신 후 잔을 가지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신 말씀에 근거한다(고전 11:25). 예수의 희생은 죄를 사해 주는 새 언약을 가져왔다(히 8:6-9:26) E. Ferguson,「현대인을 위한 성서적 교회」, 342.
① 주의 만찬은 언약적 기념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를 기념할 때 우리는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한다. 이 언약의 영적 실재성은 우리의 기념을 통해 우리들에게 현실로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실재성의 현재적 경험에로 지난 기억으로부터 옮겨준다. 떡과 잔은 예배의 경험 안에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실재성을 현실화시켜준다. 그것은 믿음에 의해 우리가 먹고 마실 때 구원의 경험을 새롭게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기념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언약적 교제의 실재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영적 실재성은 언약식사에서 우리의 기억을 통해 현존한다. 주의 만찬은 우리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기억을 통해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드릴 때 은혜의 순간을 갖게 된다.
② 주의 만찬은 그 의미에 있어 언약의 갱신을 함축한다. 우리가 먹고 마실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언약을 갱신한다. 우리는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서약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순종하기 위한 그것의 의향을 목소리로 나타낸 것과 같이 그렇게 우리는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삶 안에서 언약을 확인한다. 그것은 재헌신이고, 재위탁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은 주께 헌신하는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며, 다른 종교적 열심을 배제하는 것이다(고전 10:26). Ibid.
예배의 경험의 상황에서 우리는 복음의 가치(빌 1:27)를 살리기 위해 우리의 위탁을 외친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들고 절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서 요구하며 순종한 종처럼 세상 속으로 그를 따른다. 만찬은 세례로 만들어진 언약적 맹세를 갱신하는 의식의 순간이다.
③ 주의 만찬은 언약의 현재성을 가진다. 하나님은 항상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창 17:7-8; 레 26:11-12; 렘 11:4, 24:7)이 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언약식사 주의 만찬은 하나님이 새 언약을 확증하시는 식사이다. 이 새 언약의 식사는 옛 언약의 식사인 시내산 언약의 식사와 유월절 식사에서 미리 나타난 식사이다. 박은규,「예배의 재발견」, 212.
안에서 그의 백성들 사이에 실재하신다. 그것은 언약의 주님의 실재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다(출 18:12; 신 12:7, 18, 14:23-26, 15:20; 대상 29:22). 식사와 장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의 현재는 언약적 실재이다. 이 현재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6:19; 고후 6:16)이 되게 하는 그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살아 계신 주님은 믿음을 통해 실재하신다(엡 3:16,17). 교회는 성령(엡 2:22)을 통한 하나님의 거주지이다. 언약식사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리스도 위에 먹이를 먹이도록 끌어올리며, 그리스도에 뿌리한 성령의 실재성을 나누는 성령을 통해 실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린다(빌 3:3). 그리스도는 언약식사를 통해 실재한다. 이 언약식사는 언약의 피를 나누는 것과 같다. 마태복음 26:28의 말씀은 그 언약이 용서와 관련이 있다. Ibid..
④ 주의 만찬은 언약적 친교의 식탁 교제이다. 언약식사는 상징적이고 하나님과 그의 언약백성사이에 친교를 중재한다. 그것은 화평케 하시고 하나님 사이에 현존하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화해를 입증한다. 그것은 기쁨과 교제와 감사의 순간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그들의 화해를 축하한다. 그들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기뻐하신다. 언약식사는 예배자에게 사랑과 구속의 사역을 확신케 하는 감사의 주의 만찬식이다. 믿음을 통해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과 공동체에 참여한다. 주의 만찬은 의심과 불확실성을 가지고 그 시간을 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식사에 대한 증거를 통해 의심과 불확실성이 근절되는 것을 믿음에 의해 받아드려지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것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공동체사이의 교제적 친교의 순간이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식탁에서 주를 부활시킴으로 교제하는 순간이다. 언약식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친교이며(고전 10:17-34), 그리스도의 몸과 교제(참여)이다(고전 11:17-34).
⑤ 주의 만찬은 언약적 약속의 희망을 가진다. 새 언약식사는 희망과 기대의 하나이다.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안에 있다. 그는 우리들에게 역사의 종말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주의 만찬은 그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 너머에 하나님의 승리로 축하된다. 그것은 장례와 같지 않은 비참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희망의 긍정을 축하하는 것이다. 언약식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들 안에 우리의 신앙을 선언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만찬이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종말론적 잔치 Donald G. Bloesch,「목회와 신학」오성춘, 최건호 역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62.
임을 예표한다고 볼 때 이 거룩한 음식에 참여함으로 그의 왕국의 충만함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먹고 마신다.
(2) 기념적 의미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지나간 과업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말씀하셨다. 이 기념 또는 추념은 추억을 되새기는 것과는 판이하다. 이것은 과거를 회복하여 현재가 되고 약속을 가져오는 것이다. J.J. von Allmen,「예배학 원론」, 30.
주의 만찬을 행하는 기본적인 목적이 누가복음과 고린도전서에 기술되어 있다. 누가는 “이것은 내 몸이라 이를 행하여 기념하라”(눅 22:19)고 하였으며, 바울은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고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라”(고전 11:23-26)고 하였다. 이것을 기념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서대로 우리의 죄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셨다”(고전 15:3)는 복음의 첫 번째의 위대한 사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계속 새롭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의식의 목적은 단순히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을 단순히 회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만찬은 굶주리고 갈급한 영혼에게 영적인 영양을 공급하는 매개체가 된다. 만찬에서 기념하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며 그의 죽으심과 희생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은 죄와 사망에서 건져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새기며 예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것이다(눅 22:19).
(3) 감사적 의미
‘성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티아’(εύχαριστα)는 감사란 뜻이다. 이 말은 최후의 만찬시 주 예수께서 떡과 잔을 주시기 전 하나님께 사례(謝禮)하신 사실에서 기원된 말이다(마 26:26-28; 막 14:22-24; 눅 22:14-19). 고린도전서 11:24에는 ‘축사’로, 마태복음 26:26; 마가복음 14:22에는 ‘축복하시고’란 말을 사용했다. 주의 만찬은 ‘축복과 감사의 제사’라는 의미가 있다. 특히 이 말 속에서 주의 만찬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준다. 주께서 십자가 위에 고난 당하심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구속하시는 은총이 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4) 친교적 의미
바울은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고 말함으로써 주의 만찬에 친교적 의미가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을 떼고 잔을 받음은 그와의 영적인 연합으로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누리는 영적인 연합이며 사랑에 찬 영적 교제이다. 바울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1)고 말했다. 이것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여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자가 귀신이 베푸는 잔치에 참석하여 그와 교제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주의 만찬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한 후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초대교회들의 주의 만찬식의 친교 사상은 주의 만찬식의 본질로서 예수의 공생애의 식탁 친교와 최후의 만찬의 친교와 부활 후의 식탁 친교를 회상케 해줄 뿐 아니라 종말론적 메시아 만찬의 성격을 예견케 해 준다. 서중석, “초대교회들의 예배,”「초대교회의 예배와 설교」(서울: 연세대학교 유니온학술자료원, 1989), 173.
2) 주의 만찬의 목적
성서는 주의 만찬의 목적을 명백하게 알려준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주의 만찬에 대해 주께 받은 세부적인 사실들이 나타나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의 만찬은 주님이 주신 새언약이며, 주님에 대한 기념이다(24, 25절).
(2)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선포이다(26절).
(3)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28, 31절).
(4) 떡에 참여할 때 주의 몸에 대한 영적인 분별을 해야한다(29절).
(5) 조심성 없이 참여할 때 주의 징계가 따른다(30절).
여기에서 주의 만찬은 주님에 대한 기념, 주님의 몸에 대한 분별,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선포,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기대의 사중적인 목적 Alfred P. Gibbs,「주님의 만찬」장세학 역 (서울: 전도출판사, 1994), 79-82.
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주의 만찬’에 대해 잘못 인식하여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을 엄격하게 책망하고 경고했다. 바울은 주님이 주의 만찬을 제정하신 목적을 분명히 알려줌으로 그들이 앞으로 주의 만찬을 준수함에 있어서 바른 영적인 지식을 갖게 되도록 하였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가 갱신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주의 만찬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이 필요하다.
3) 주의 만찬의 중요성
예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교회의 예배를 시작하셨다. 떡을 떼시며 그는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몸이다”라고 하셨고, 잔을 가지고 “이것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 더 나아가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 28:20), 또한 두 세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그리스도교의 예배의식은 다만 예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6)는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 하늘의 예배를 반영하신 것이며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영원한 하늘의 제사를 드리신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J.J. von Allmen,「예배학 원론」, 21.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매주 중단 없이 항상(히 7:3), 마실 때마다(고전 11:25) 드려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0:12)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의식은 매시간 주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를 배경으로 해서 선포된다(고전 11:26). 예배의식이 과거에 대한 기념인데, 그 기념은 그리스도교 고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주의 만찬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 모임에서 중심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을 곁들인 주일낮 예배가 공식적인 “공동 예배”이며 그 밖의 주의 만찬이 없는 모임(주일 저녁, 수요일, 금요일 등)은 엄밀히 말해서 예배라기 보다는 영성 훈련을 위한 신앙 집회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오늘의 개신 교회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주의 만찬을 중심한 주일 예배와 다른 신앙 집회를 구별해야한다. 주의 만찬이 예배의식의 중심적 부분으로 항상 지켜져야 하고, 단순한 추가 부분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Franklin M. Segler,「예배학원론」, 174.
훠거슨은 예배에서 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주의 만찬이 예배 모임에서 중심적 행위임을 전제하고, 모임은 섬김의 일부분이라 한다. 그러므로 바울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히 10:25)”고 하였다. 신약성서의 모임에 관한 많은 구절들 중 “함께 오다”라는 말은 유월절에 군중이 모이는 것(행 2:6), 교회의 모임을 위해 사용되었다(고전 11:17). 교회에서의 모임은 주의 만찬을 위해(행 20:7), 기도하기 위해서 였다(행 4:31). 교회는 함께 있는 몸이고, 가족이다. 모임이 있을 때 구별되는 실체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동체가 되며, 모임은 교회의 본성인 구속 공동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모임이 초대 교회는 주의 첫날에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다(행 20:7). 주의 첫날은 예수의 부활의 날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에 함께 모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날을 각별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요(눅 24:13-35), 이 날이 주의 첫날인 오순절 날이었고 이 날은 교회의 시작과 교회에 성령의 임함을 찬양했다. 이 날은 부활을 넘어 예수의 종말적 재림이 가깝게 연결된 날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행 1:11; 고전 11;26).
주의 만찬(고전 11:20)과 주의 날(계1:10)이라는 단어는 둘 다 부활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부활의 날인 주일은 만찬에 참여하는 날이고 주의 만찬은 구원의 사건을 기념한다. 모임의 구체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전 10:31), 떡을 떼며 교제한다(행 2:42). 또한 믿지 않는 자에게 올바른 감동을 준다(고전 14:23-25). 그리고 주의 죽으심을 선포한다(고전 10:14-17, 11:17-34). E. Ferguson,「현대인을 위한 성서적인 교회」, 318-344.
4) 예배에서 주의 만찬과 말씀
예배에서 주의 만찬과 말씀은 불가분리의 상관성을 가진다. 주의 만찬이나 말씀, 이 두 가지는 예배의 본질적 요소로서 어느 한가지라도 배제된 예배란 진정한 예배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둘은 상호 깊은 상관성을 가지고 조화될 때 온전한 예배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주의 만찬과 말씀이 잘 조화된 예배의 모형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초대교회에서 발견된다(행 2:42; 20:7). 초대교회는 매주일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 예배를 드렸고, 기도와 찬미와 의(義)에 관한 교훈이 주의 만찬이라는 비의(秘儀)적 교제와 연합되어 있었다. R. Abba,「기독교예배의 원리와 실제」, 25.
주의 만찬은 교회가 드리는 예배 행위의 절정으로서 말씀의 성례전이며, 성서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복음의 표적이며 보증이다. 행위를 예전되게 하는 것은 그 행위 안에 있는 복음이다. 말씀과 성례전의 불가분리의 원리는 교회 예배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말씀이 없이는 참된 성례의 집행은 있을 수 없었다. 말씀이 진실되게 선포되고 마음으로부터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거기에 참된 그리스도교의 성례전은 있을 수 없다.
주의 만찬은 결코 예배와 분리된 행위로 간주되거나 설교예배(preaching service)의 부속물 정도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말씀과 주의 만찬이 함께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를 구성한다. 주의 만찬은 예배의 전체적 행위라는 배경에서 행해야만 될 핵심이며, 중심이다.
나오는 말
뒤늦게나마 한국 교회가 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의 만찬 회복을 위한 예배갱신 운동에 진력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에 있어서 오래된 전통의 규례와 관습의 영향으로 주의 만찬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갱신을 단행하지 못하고 있다. 예배갱신 운동은 교회갱신 운동으로, 이는 세계교회의 차원에서 줄기차게 주장되어온 교회의 자기 개혁의 한 몸부림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그릇된 예배의 내용과 구조를 갱신해야만 그 영적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고 참된 교회 모습으로 환원될 수 있다.
① 예배신학이 빈곤하다.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고 드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받아 가지고 가려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② 설교위주의 예배형태이다. 따라서 회중은 참여의 기회가 부족하여 고독하며 소외와 불만을 느낀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개혁전의 미사 형태이다.
③ 주의 만찬이 결여되어 있다. 예배는 신앙공동체의 전체 사건인데 목사의 설교위주의 독무대로 성도들은 말씀을 듣는 예배뿐이며, 감사와 교제를 나누며 헌신하는 축제적 예배공동체의 전체 사건이 결여되어 있다. 주의 만찬이 결여됨은 비성서적인 예배 행위로서 이는 반드시 시정되고 시급히 개선해야 될 과제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길은 성서로 돌아가서 초기교회가 행하였던 예배의 원형과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 길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에 회복에 있다. 마땅히 교회는 초기교회 공동체처럼 주의 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기념하며, 이를 통한 축제적 예배 행위를 갖는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4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