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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자요 목회자들 중 하나로 인정받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두고 어떤 이들은 그를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과 같은 반열에 두기도 한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의 주도적 위치에서 또 신학적인 이론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에드워즈는 신학과 신앙의 균형을 이룬 탁월한 신학자요 사상가라고 말한다. 본 발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에 일어났던 큰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가고자 한다.
몸말
1. 미국의 청교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부터 강대국들은 신대룩에 경쟁적으로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신대룩을 신민지화하는데 가장 성공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권신수론자 절대주의 국가에서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인민은 저항권없이 왕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정치이론이었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자신이 기대하고 있던 꿈이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마침내 1620년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약 일백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원하는 신앙의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이민국이라는 특성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은 ‘혼합된 도가니’가 되었다. 미국교회는 여러 교파로 혼재되었다.
각 교파들은 민족별로 분립하였다. 즉 회중교회, 루터교, 장로교, 침례교, 화란과 독일의 교회, 퀘이커교등의 군소교파들로 나뉘었다. 가장 오래된 식민지인 버어지니아에는 영국 국교회가 강하게 자리잡았다. 메릴랜드에는 로마 천주교가 자리잡았다. 종족간에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남과 북의 정치적인 차이로 계층분화가 더욱 발생했다.
한편 신대륙은 서인도 제도와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무역과 해운업이 발달하였다.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공업도 발달하였다. 뉴잉글랜드는 풍부한 삼림자원을 갖고 있었기에 제재업과 목공업은 물론이고 조선업도 발달하여 선박을 영국과 유럽에 팔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계급분화와 경제적 팽창은 종교적 열정을 냉각시키고 세속화의 과정을 촉진시켰다. 채천석, 『부흥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서울: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 2003, 27-28
2.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대적 배경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청빈한 신앙의 기치를 내걸고 신대륙에 자리 잡은 청교도들의 신앙의 열정도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고, 세속의 물결이 범람하였다. 남부의 버어지니아에서 먼저 영국 성공회가 세속화에 물들어갔고, 시간이 갈수록 북부의 뉴잉글랜드도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
18세기 초에는 영국의 계몽주의로 인해 다분히 지적인 종교가 식민지인 미국에 풍미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과의 조화속에서 하나님, 자유, 그리고 영생에 대한 신앙은 유지했다고 하겠지만, 기독교 교리주의와 가톨릭주의 그리고 개신교의 정통주의는 거부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서 합리주의적 기능을 빼앗아 가는 영적인 어둠의 세력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인간본성의 선함과 계몽된 이성의 원리에 대한 근본적인 확신 때문에 낙관론적인 견해가 있었다. 인간사회의 진보와 완전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이 개신교에 깊이 침투했다. 성경 권위에 대한 신앙을 손상시키고, 성경비평과 감상주의적 경건주의를 조장하였다. 이 영향력은 뉴잉글랜드 교회내로 파급되었고 비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시하기까지 하였다. 채천석, 『부흥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서울: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 2003, 29-30
한편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들은 사회적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는 계약 단위였고, 그들은 이 세상에 성경의 법에 따른 거룩한 공동체를 건립하려고 힘썼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약신학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는 거듭난 신자들로만 구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먼저 깊은 신앙적 체험을 요구했다. 오직 중생한 자만이 교회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요건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본래의 원칙을 지키다가는 교회의 회원이 되는 수가 급격히 줄어들 것을 염려한 그들은 불완전 계약(Half-Way Covenant) 또는 중도 계약, 유아 세례를 받아 교회 생활을 하는 성인들 중 아직 납득할만한 회심 체험을 진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준회원군을 주는 결정이었다. 즉 성찬에 참여하거나 교회에서 투표할 권리를 가지는 정회원은 아니지만 그 자녀들에게 유아 세례를 받게 할 수 있는 조치가 중도 언약이었던 것이다.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의 성찬 참여 자격 논쟁”『개혁신학과 교회』(고려신학대학원.2002.제13호). 96
을 추인했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회의 준회원이 되어 세례를 받게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반쪽 관계에 흡족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멀리하고 형식적인 신앙에 빠졌다. 채천석, 『부흥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서울: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 2003, 30-31
타락현상은 청교도들의 이상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불완전 계약에 의해 신대륙의 목사들은 더 많은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었지만, 신앙적 열의가 둔감해졌다.
이런 가운데 노샘프턴의 솔로몬 스타다드 목사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조부로서 서부 매사츄세츠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목회자였던 그의 개방적인 입장은 스타다드주의로 불리웠는데 그것은 중도 연약보다 진일보한 것이었다. 즉 설사 중생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생활에 특별한 하자가 없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으면 완전한 교회원권을 얻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스타다드의 입장이었다.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의 성찬 참여 자격 논쟁”『개혁신학과 교회』(고려신학대학원.2002.제13호). 96
그는 중생한 체험이 없다하더라도 타락하지 않은 ‘가시적 성도’는 세례뿐 아니라 성찬에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뉴잉글랜드 교회의 복음적 교리에 더욱 더 혼란과 무질서를 부채질하였다. 아울러 일반 성직자들은 교회일보다 사냥이나 경마 그리고 연회에 초대받는 일 등에 더 신경을 썼고, 신도들은 명목상의 헌신만을 했다. 교회의 거룩함이 사라지고 주일 성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앙의 순수성을 외치며 신대륙에 들어온 청교도들은 100년의 역사가 지나면서 이렇게 열기가 식고 차가운 지성주의로 전락했다. 교회는 불신앙, 문화적 혼란, 편의주의의 만연으로 혼탁해졌다. 채천석, 『부흥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서울: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 2003, 31-33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난 18세기 초는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가 쇠퇴해 17세기의 왕성했던 활기를 띠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50년 전만 해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던 칼빈주의 신학이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기독교가 새로운 세상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의 “옹고집”을 버리고 훨씬 자유로운 종류의 신학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런의미에서 에드워즈는, 제임스 패커의 표현대로 “때를 놓치고 태어난 born out of due time ”사람이었다.
3. 생애
1) 에드워즈의 조상
에드워즈의 조상들은 뉴잉글랜드에 가장 먼저 정착한 주민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증조부는 18세 되던 해 토마스 후커 목사 및 그 교인들과 함께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말하자면, 에드워즈의 뿌리는 뉴잉글랜드의 개척자들, 즉 토머스 후커, 토머서 셰퍼드, 존 코튼 등 제 1세대 청교도 지도자들의 세계관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조부가 되는 윌리암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 이주한 제1세대 에드워즈가 사람이다. 통장수였던 윌리암 에드워즈로부터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부가 되는 리처드가 출생했다. 리처드는 성장하여 꽤 성공적인 상인이 되었다. 리처드에게는 한 가지 혹독한 시련이 있었는데 아내 엘리자베스가 리처드와 결혼하자마자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그녀의 그러한 불륜은 그 후에도 계속 되풀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정신병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시련 덕분인지 리처드는 아주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평생 기도하는 겸손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리처드의 아들 디모데는(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버지) 그러한 신앙적인 아버지를 사랑했다.
2) 어린시절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주(Connecticut)의 이스트 윈저(East Windsor)에서 디모데 에드워즈 목사의 가정에서 1남 10녀 중 다섯째인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디모데는 머리가 뛰어나 그당시 유일한 고등 교육기관이었던 하버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였고, 1695년에 코네티컷강 상류에 있는 이스트 윈저 회중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그 교회의 초대 목사였다. 그의 어머니 에스더 명문가 출신인 에스더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교양과 세련됨을 갖춘 여성이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여성이어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여러 책들에 대한 그녀의 소양, 특히 최고의 신학 서적들에 대한 그녀의 지식이 표출되곤 했다. 양낙흥.『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부흥과개혁사.2003), 116-117.
는 유명한 솔로몬 스타다드 스타다드 가문은 뉴잉글랜드의 최고 명문가들 중 하나였다. 그는 1669년 매사추세츠의 노샘프턴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뉴잉글랜드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였고 “코네티컷 강 골짜기의 교황”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목사였다. 그가 집필하여 출판한 책들은23종에 달했다. 위의책, 115.
목사의 딸이었다. 디모데 에드워즈는 품위 있는 매너를 가진 사람이었고, 특히 외모와 성품이 정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경과 헬라어, 라틴 고전을 좋아했고, 취미는 시와 자연 탐구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591.
그는 회중교회의 목사로서 63년 동안 시무할 정도로 성실한 목회자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체험적 신앙인이었다. 그의 신학도 대부분 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그 체험은 성경의 말씀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그가 37세 때 영적 회고록으로 쓴『개인적 진술』은 에드워즈 자신의 영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글로서 평생에 걸쳐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사모해 오고 또 그것을 체험한 한 영혼의 구도자적 순례에 대한 연대기적 기술이다. 『개인적 진술』은 문학 전문가들 사이에 많은 주의를 끌었다. 그들 중 다수는 그것을 “성난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죄인들”과 함께 에드워즈의 글들 중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간주한다. 일기와 결심문이 그의 젊은 날의 기록인 데 반해 이글은 성숙한 영혼의 산물이다. 양낙흥.『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재인용 (부흥과개혁사.2003), 118.
에드워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섬기는 교회에서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하였다. 자신의 영혼의 구원문제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였고, 남이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하나님께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였다. 또한 어릴적부터 이웃의 소년들과 함께 신앙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즈는 몇몇 학교 친구들과 함께 아주 은밀하고 멀리 떨어진 늪지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기도했다. 게다가, 그는 숲 속에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은밀한 장소를 따로 마련하고는 거기 홀로 찾아가서 때때로 감동적인 시간을 가졌다.
조나단은 성장하는 동안 부친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몇 차례의 부흥을 목도했다. 후일, 그는 자기 아버지 교회가 서부 매사추세츠에서는 솔로몬 스타다드의 노샘프턴 교회 다음으로 강한 은혜의 역사가 있었던 곳이라 평가했다. ‘부친이 이스트 윈저에 부임한 이후 네댓 번의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던 결과 사람들 사이에 일반적 각성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조나단은 어릴 적부터 성령의 기름부음과 부흥에 친근한 환경 가운데서 성장했다. 위의책, 117.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을 때였다. 그 때 나는 몇 달 동안이나 아주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신앙과 내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했다. 나는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개인 기도 시간을 가졌으며, 친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보내기도 했다. 또한 친구들과 만나서 함께 기도하곤 했다.… 또한 학교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늪지의 아주 조용한 곳에다가 오두막을 만들어 기도할 장소로 사용했다. 이외에도 나는 숲속에다 나만의 특별한 비밀 장소를 만들어 두고 혼자서 기도하곤 했는데 때때로 많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592.
그는 학문적 자질에서 뛰어났는데 여섯 살에 라틴어를 배우고, 13살에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마스터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설교자의 자질을 길러주기 위해서 판단한 것을 꼭 기록하고 표현하도록 훈련시켰다.
3) 대학시절
1716년(13세) 예일 대학 하버드 대학이 과연 청교도적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지를 의심하기 시작한 코네티컷의 지도적 목회자들은 1701년에 예일 대학을 설립했다. 학교의 목적은 학생들을 “교회와 국가에서의 봉사”에 적합하게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양낙홍.『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부흥과개혁사.2003), 121-122.
에 입학한 조나단은 문학,문법,수사학,논리학,고대사,산수,기하,천문,형이상학,윤리학,자연과학을 배웠다. 그 외에도 그는 성경을 원어로 읽기 위해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동시에 고대 헬라 문학과 철학서들을 읽기 위해 고전 희랍어를 배웠다. 물론 그는 견실한 신학 수업에도 착수했다. 당시, 예일 대학 당국은 학생들이 안식일을 소홀히 하거나 영성계발을 소홀히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주일 설교를 기록하도록 요구했고 설교에 대한 퀴즈 시험을 실시했다. 위의책, 123.
에드워즈가 처음으로 하나님과 신적 일들에 대한 “내면의 달콤한 기쁨”을 발견했던 것은 1721년 즉 그가 18세 되던 해에 디모데전서 1장 17절,“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위의책, 141.
내가 그 말씀을 읽고 있었을 때 신적 존재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내 영혼 속으로 들어와 퍼져 나갔다. 그것은 그 전에 내가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이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말씀처럼 보였던 것은 없었다. 나는 혼자 그가 탁월한 존재이며, 만일 내가 그 하나님을 즐길 수 있다면 그리고 천국에서 그와 연합할 수 있다면, 그리고 사실상 그 분 안으로 삼켜진바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혼자 이 성경 말씀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그것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고는 기도하러 갔다. 기도하는 중에 그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즉 새로운 종류의 감정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거기에 영적인, 혹은 구원하는 성격의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위의책, 재인용, 141-142.
이러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그의 감각은 일년반 정도의 기간 동안 점점 증대되어 그가 뉴욕의 설교자로 봉사하러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에드워즈는 참 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종교적 정서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발견들은 훗날 그의 주저인『종교적 정서』 신앙 체험의 ‘징표’를 열거하면서 ‘의존할 수 없는 징표들’과 ‘의존할 수 있는 징표들’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새로운 심리적 감각?”과 기독교인의 실천을 포함한 12개의 믿을 만한 징표들을 논하고 있다. 이상현,『삼위일체,은혜,그리고 믿음』(대한기독교서회.2003)
에드워즈는 20세가 되기 직전 자신의 평생의 지침으로 70가지를 결심하고 기록해 두었다. 그것이 에드워즈의 유명한 “결심문들”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기록해 둔 그 결의들을 잊지 않고 “매주 한 번씩 읽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일기를 쓰는 것은 청교도들의 전형적 작업이었다. 에드워즈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1722년부터였는데 그것은 1725년까지 계속되었다. 에드워즈의 일기와 결심문들의 내용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도덕 및 생활에 대한 것이요, 둘째는 구원의 확신을 비롯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요, 셋째는 믿음과 경건에 관한 내용들이다. 양낙흥.『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2003), 129-130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결심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한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 결심문을 지킬 수 있도록 내게 능력 주시기를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결심문 서론)
“나의 전생애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지금 당장이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든지 간에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말자.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인류 전체의 행복과 유익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내가 부딪히게 될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그 어려움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자.” (결심문1)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 595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에서 철학자 존 로크 『인간 오성론』 존 로크의 경험주의는 18세기 유럽을 휩쓴 사상이다. 로크는 그의 인식론에서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토대로 하고, 경험은 다섯 가지 감각과 내관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받게 되는 ‘자료’로 성립된다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경험주의 철학이 신학의 성령론에 의존한다고 강조했다. 다시말해, 경험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 마음속에서 역사하심에 의존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상현,『삼위일체,은혜,그리고 믿음』(대한기독교서회.2003), 17-19
와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은 중력을 발견해 과거 중세와 달리 자연과학의 법칙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 기독교가 자연과학으로부터 받은 도전은 참으로 심하였다. 그래서 소위 이신론이라는 신학적인 방향도 그때 나오게 되었는데 ‘이신론’의 견지에 의하며 지금 이순간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부축하고 또 운영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옛날에 천지를 창조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직접 관계치 않으시고 자연법칙에 의해서 우주가 운행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원자 그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지적하였다. 위의책, 16-17
의 어려운 책들을 정독하고 그 시대의 새로운 조류의 사상들을 습득하였으며, 그 속에서 자기의 칼빈주의 신학 전통을 다시 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위의책, 14.
그는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을 읽고 나서 ‘지식’이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도록 돕는 인간의 감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감각적 경험과 사고는 함께 합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과 성경의 사실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의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진리에 대한 새로움 ‘감각’(sense)을 포함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594.
1720년(17세) 에드워즈는 수석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낭독했다. 대학 졸업후 에드워즈는 문학 석사 과정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2년간 예일 대학에 더 머물렀다. 그는 청교도와 개혁주의 학자들의 책을 계속 읽었다. 취향과 기호에 있어 그는 철저한 청교도였다. 동료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에임즈의 “신학의 정수” 당시 예일대의 학교의 규칙은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과 윌리엄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를 성경적 진리에 대한 가이드로 정해 놓고 있었다. 양낙흥.『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부흥과개혁사.2003) 122
를 암기하는 데 착수 했다.
4) 뉴욕 장로교회 설교자 시절( 위의책, 147-154)
1722년 석사 논문을 마치기 전,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하던 신도시 뉴욕의 작은 장로교회에서 약 8개월간 (1722년 8월에서 1723년 4월까지) 설교자로 봉사하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동안 그는 그 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종교적 감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더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더 합당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 그의 “밤낮 끊임없는 질문이요 투쟁”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토하면서 거룩한 삶의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했다. 전에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만큼 부지런하고 엄격했던 적이 없었다.”
에드워즈는 이 무렵 거룩에 대해 남달리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 그는 거룩을 “최상의 아름다움이자 사랑스러움”, 즉 “신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뉴욕에 있는 동안 (아직 20세가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뉴욕에 있는 동안에도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일에 힘썼다. 그는 아주 자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허드슨 강변 둑,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달콤한 시간들을 가졌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당시 모든 책들 중 성경을 읽는 데서 최대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10대의 청소년들이 흔히 그러하듯 젊은 시절의 에드워즈도 감수성이 대단히 예민했다. 10명의 자매들 틈바구니에서 외아들로 자란 탓인지 그 감수성은 때로 여성적이고 여린 감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723년 4월에 코네티컷으로 돌아온 에드워즈는 담임 목사들이 잠시 강단을 비운 뉴잉글랜드 각처의 교회들에서 설교자로 봉사하면서 석사 논문을 완성해 9월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에드워즈의 석사 논문 주제는 충성스런 개신교도로서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를 재 진술한 것이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이 그의 논지였던 것이다.
5) 예일 대학 강사 시절
1724년 5월,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으로 돌아와 2년 동안의 강사직을 시작했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강사로 봉사하는 것은 단지 목회를 위한 견습과정이었다. 1722년부터 1726년 사이 약 5년동안 예일 대학에는 사실상 학교장이 없었다. 물론, 당시의 예일 대학은 아주 작은 초창기 대학이었다. 1724년의 전교생 수는 40명이었고 1725년에도 그 수는 60명에 불과했다. 에드워즈가 맡은 직책은 학생들을 돌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자질구레한 행정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이 2년의 기간 동안 에드워즈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위의책, 155
졸업후, 에드워즈는 잠시 자신의 색다른 관심에 시간을 할애하여 날아다니는 거미에 대한 논문을 초고했다. “거미 편지”와 “묵시록에 대한 단상들”을 쓴 것은 스무 살 때인 1723년 10월이었다. 1725년에 에드워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정신에 관한 노트”에서 그는 실재의 이상주의적 이해에 대한 그의 평생에 걸친 헌신의 큰 줄기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 과학에 대한 소고”에서는 거미의 관찰과 같은 여타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경험적 데이터들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에드워즈는 1725년 9월 뉴헤이븐에서 병에 걸려 드러눕게 된다. 요양차 이스트 윈즈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려 시도하던 중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아 노스 빌리지에서 (현재의 노스 헤이븐)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중에 예일 대학의 학장이 된 에즈라 스타일즈의 집에서 거의 석 달 동안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게 되었다. 어머니가 밤새워 그의 곁을 지켜야 할 만큼 중한 병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위로와 영적 충만을 누리고 있었다.
1726년 초, 에드워즈는 이스트 윈저에 있는 부모님 댁에서 요양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여름에 그는 예일 강사직을 다시 시작했으나 금방 사임했다. 8월에 드디어 기다리던 하나님의 인도가 왔다. 노샘프턴의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의 교회로부터 부목사로 일해 달라는 부름이 왔던 것이다.
6) 노샘프턴에서의 목회
에드워즈는 1723년(20세) 예일 대학원을 졸업하여 문학학사 학위를 받고 뉴욕에서 약 8개월 간 목회사역을 하다가 1724년부터 2년 동안 예일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그리고 1726년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노샘프턴(Northampton)교회에서 에드워즈의 외조부인 솔로몬 스타다드 목사의 동역자로 아직은 젊은 에드워즈를 목사로 초빙하게 되었다. 1927년 2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7월에 사라 피에르폰트(당시17세)와 결혼한다. 에드워즈의 아내 사라는 대단히 경건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특별히, 그녀는 은혜의 체험에서 남다른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1743년에 출판된 『부흥에 관한 소고』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이 그 무렵 “높고 비범한 황홀경”을 체험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으면서 한 성도의 사례를 한 모범적 경우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 성도가 바로 자기 아내 사라였다.
에즈워즈와 사라는 4년 동안의 구애 기간을 거친 후 결혼하여 딸 여덟과 아들 셋, 도합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았다. 에드워즈 부부는 자녀들 모두와 친말한 관계를 즐겼다. 바쁘고 스트레스 많은 일과 중에도 에드워즈는 자녀들을 위해 아침 예배와 식사 시간, 그리고 저녁 시간을 할애했다. 에드워즈의 손자, 손녀는 모두 72인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후손은 무수하며 그 중 다수가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했기 때문에 그들이 없었다면 미국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심방보다는 설교와 기도에 치중한 목회를 하였고 하루에 열두시간 성경을 연구하였고, 하루에 두 번 이상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그의 생활은 규칙적이었고, 매주 정해진 시간에 깊은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허약한 체질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런 병약함이 더욱더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믿음의 자세를 갖게 했다. 그는 당시의 철학과 과학 서적을 섭렵했고, 특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좋아하여 항상 옆에 두고 지냈다. 그의 폭넓은 지식과 영성은 설교에 묻어 나왔고 그의 설교는 두 시간 이상 되는 설교가 허다했고, 한 손에는 원고를 쥐고 다른 한손에는 촛불을 들고 외칠 정도로 심취하여 전했다. 채천석, 『부흥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서울: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2003,39-40.
그리고 1729년 외조부 스타다드 목사가 소천한 후 그의 뒤를 이어 노샘프턴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에드워즈는 1731년 하바드 출신의 보스톤 성직자들의 초청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의존에 대하여, 구속 사역 그 전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설교했다. 그당시 사람들은 널리 퍼진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여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유 능력을 강조했으며, 도덕성을 종교의 핵심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신앙과 도덕의 자만심에 빠져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다고 비판했다. 또한 하나님만이 모든 신자들의 선이기 때문에 사람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이 구원의 유일한 방도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한 설교가 에드워즈의 첫 번째 출판된 저서이다.
7)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
1730년대 이전, 대부분의 영어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누군가가 최소한의 종교적 흥미를 보이거나 약간의 종교적 외양을 취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았다 교회에서 자란 사람은 그 삶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취급되었다. 양낙흥.『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2003), 215.
그러한 때에 에드워즈는 1734년 11월,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주제로 연속 설교를 했다. 때가 무르익었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했다. 1734년 겨울부터 1735년 봄까지 노샘프턴과 코네티컷 강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에서 부흥이 일어났으며, 이 기간 동안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심했다.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596.
이후 에드워즈는 벤저민 콜만 목사의 권유로 이 부흥에 관한 상세한 사항들을 콜만에게 보냈고 콜만은 1736년에 그것을『노샘프턴에 있는 수백 명의 회심 속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충실한 서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양낙홍씨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가 2002년에 출판했다 양낙홍.『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부흥과개혁사.2003) 218
특히 다양한 회개 체험의 유형과 단계를 묘사하여 미국과 유럽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존 웨슬리는 1738년 10월 9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옥스퍼드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나는 회심들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서술을 읽었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노샘프턴과 그 인근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다. 참으로 이는 주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위의책, 218-219
8) 대각성 조나단 에드워즈
1739-41년 사이 식민지 전역에서 대부흥이 일어났다. 조지 휫필드와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이 때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도구였다. 영국의 복음전도자 조지 휫필드의 설교가 기폭제가 되었다. 청중들은 격력하게 반응하며 회개했다.
에드워즈 자신은 비교적 청중들을 차분하게 다루기는 했지만,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죄인들은 언제든지 멸망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 죄인들이 아직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나 지금 당장에 형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된 안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종교적 열심이나 기도가 얼마나 많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영원한 멸망에서 구해내실 어떠한 의무도 없으시다는 것은 사실이며 명백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이미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들보다 여러분에게 더 크게 분노하고 계신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의 날이며 은혜를 구하기 위해 부르짖을 수 있는 때이다.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곧 여러분의 머리 위를 내리칠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큰 소리로 여러분과 같은 불쌍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신다. 조나단 에드워즈, 『성난 하나님의 손안에 떨어진 죄인들』, (서울: 말씀 보존학회,1998), 이우진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엔필드에서 한 설교(1741년)는 많은 사람들을 회심케 했다.
대부흥은 회개와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무절제와 무질서, 교회와 세속 사회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종교적 열광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 갔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휫필드와 에드워즈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보스톤 회중교회 목사인 찰스 촌시는 부흥 운동은 열광주의요, 사탄의 궤계라고 공격하였다.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부흥은 하나님의 참된 사역이며, 그 사역을 더 증진하고 더 순결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리고 비판자들로부터 대부흥을 옹호하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는 표지들』과 『최근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에 대한 몇 가지 견해』『신앙과 정서에 관한 논문』등을 썼다.
『신앙과 정서에 관한 논문』에서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냉정하고 합리적인’ 신앙관을 반박하면서, 모든 참된 신앙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이며, 그 사랑의 순수성은 내적인 성품과 실천 결과들에 의해 입증된다고 주장한다.
1749년 에드워즈는『반성』이라는 글과 함께『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에드워즈의 모든 저작물 중 가장 널리 읽혔다고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 재인용, 599.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케넥티커트주에서 태어났다. 1740년-1743년의 뉴잉글랜드 대각성운동 기간에는 그는 성년이 되었다. 예일대학의 교수회는 대각성 운동에 별로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브레이너드가 2학년때, 예일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부흥의 불길이 미쳤을 때, 대학 측은 브레이너드를 퇴학시켰다. 제적된 후, 브레이너드는 여러 목사들로부터 신학을 공부했다. 이 경험은 그로서는 예일 대학에 다니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경건생활 가운데 “불쌍한 영혼들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확장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교도의 구원”을 위하여 뭔가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1743년 그는 스코틀랜드 복음전도협회에 들어가 선교사가 되어 처음에는 뉴잉글랜드의 스톡브리지 인디언 사이에서, 나중에는 펜실바니아와 뉴저지의 델라웨어 인디언 사이에서 복음을 전했다.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그의 선교업적에 대하여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영적 순례의 기록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전도협회의 요청에 따라 그는 공개 일지를 기록했다. 여기서 그는 그의 사역을 자세히 기술했다. 그는 즐기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공개 일지는 엄격히 그리스도 선교의 진전에 대한 보고서일 뿐 지리적 혹은 인종적 상황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조나단 웨드워즈, 윤기향 역,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4)
를 편집했다. 에드워즈의 딸과 곧 결혼할 예정이었던 브레이너드(1718-1747)가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출판한 이 책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의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선교사 전기이며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에드워즈와 교제하던 스코틀랜드 목사들이 제안한 국제적인 중보 기도 협조를 지원하기 위해『특별한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명한 일치와 가시적 연합을 촉진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썼다. 이 책은 18세기 내내 영향을 미쳐 미국 곳곳에서 부흥을 사모하는 크고 작은 ‘기도 합주회’ 1744년, 에드워즈와 편지를 주고 받던 존 맥로린을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교회지도자들은 국제적 부흥을 위해 2년간 기도회를 조직하여 정해진 시간에 합심해서 기도하기로 했다. 기도 합주회에서 에드워즈가 제안한 것은 각성 운동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토요일 저녁이나 주일아침, 단체로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든 규칙적으로 비상한 기도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양낙흥.『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2003), 584.
9) 갈등과 결별
뉴잉글랜드의 목사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에드워즈도 평생을 노샘프턴 교회의 위임 목사로 한 회중을 섬기는 일생을 보낼 것으로 보였다. 당시에 한 교회의 위임 목사가 된다는 것은 결혼과 마찬가지로 평생의 헌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긴 논쟁 끝에 1750년 7월 1일, 23년 동안 시무하던 노샘프턴 교회를 떠나게 된다.
에드워즈와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요인으로는 사례문제, 권징문제, 인간관계문제사례문제-영적으로 에드워즈의 전성기였던 1742년의 사례 인상은 “마을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목사의 소비 성향에 대해 교인들의 관심이 현저히 증가되었고 아내인 사라 에드워즈가 보스턴에서 구입한11파운드 상당의 의상과 보석의 영수증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교인들은 그것을 근거로 목사 가정이 돈을 낭비한다고 불평했다. 권징문제(“나쁜책”사건)-1744년 동네 청소년들 몇 명이 산파들을 위한 매뉴얼을 돌려보고 외설적인 대화를 주고 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목격자들과 용의자들의 증언을 듣고 교회 앞에서 그 명단을 공개할 때 목격자들과 용의자들의 구별 없이 모두 호명해 버려 교회가 발칵 뒤집혔다.
그 마을의 유지들과 전통 있는 가문 중에 명단에 연루되지 않은 집안이 거의 없었다. 친인척과의 관계-1735년 어느 주일 아침 에드워즈의 이모부 조셉홀 리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본래 우울증이 있는 가계 출신으로 자기의 구원 가능성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그일로 인해 에드워즈의 이종 사촌들이 그 일로 인해 에드워즈에 대해 앙심을 품었고 특히 조셉이라는 사촌은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1748년 엘리샤 홀리라는 사촌이 어떤 여자에게서 출산된 쌍둥이를 두고 친자 확인 공청회에 소환되었다. 에드워즈는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출교시켰다. 또 이스라엘 윌리엄스라는 외사촌이 1734년에 에드워즈에게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거나 책을 출판하지 말라고 충고한 바 있는데 그것을 거절한 에드워즈를 적대시했다.
그리고 대학원생 기숙사 조교때신입생인 사촌 동생 엘리샤 믹스가 조교인 에드워즈의 어떤 특권을 기대하는 것에 대해 크게 분개하면서 협조를 거부했을 때 에드워즈는 엘리 믹스의 아버지이자 자기에게는 삼촌인 사람에게 편지로 상세한 불평을 써 보내는데 그 집안 전체를 싸잡아 비평하는 구절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의 성찬 참여 자격 논쟁”『개혁신학과 교회』(고려신학대학원.2002.제13호). 90-95
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지엽적인 것이었고 결정적인 이유는 과연 어떤 사람이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교회론적 이슈에 대한 양자의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에드워즈 해임의 결정적 요인은 교회론 내지 신학적 견해의 차이였다.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의 성찬 참여 자격 논쟁”『개혁신학과 교회』(고려신학대학원.2002.제13호).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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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년 에드워즈는 ‘완전한 주의 만찬 참여자의 자격에 관하여’를 설교했다. 에드워즈의 외조부 스토다드는 비록 회심의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더라도 유아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을 성찬식에 받아들이는 당시의 관습을 노샘프턴 교회에서 채택했다. 반면 에드워즈는 성찬식에 참여하려면 교리 지식과 도덕적 선행만이 아니라 참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 600.
에드워즈에게 문제가 됬던 것은 아직 참된 회심에 이르지 못한 자들, 혹은 은혜의 역사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해 아직 변화되지 않은 자들이 교회 회원권을 얻어 완전한 교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성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교회 회원권 취득의 자격 요건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판단했다. 입교의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의도였다. 에드워즈는 참된 회심은 틀림없이 생활과 인격의 가시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1749년 8월 중순경 에드워즈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담은 책 『겸허한 질의』 기독교회에서 누가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를 밝히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씌어진 아주 정교한 논리를 갖춘 신학 논문이다.
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끝에 1750년, 투표 결과 230대 23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 해 7월 1일 에드워즈는 고린도후서 1장 14절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을 본문으로 엄숙하고 절제된 심정으로 고별 설교를 했다. 이 본문에서 에드워즈는 “목사들과 그들의 목회 하에 있었던 교인들은 심판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만나야만 한다”는 교리를 제시했는데 아마도 이 설교를 듣는 교인들 중 적어도 일부는 그 명제에 섬뜩했을 것이다. 양낙흥.『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2003), 647.
10) 스톡브리지에서의 사역 조나단 에드워즈
노스햄튼을 떠난 후 1751년,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 있는 개척 교회의 목사겸 그 지역 인디언들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에드워즈는 신학적으로 더욱 완숙한 대작들을 쓸 수 있었다.
1754년, 에드워즈는 『의지의 자유』를 썼다. 이 책은 18세기 미국의 문학적 센세이션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모든 작품들 중 계속해서 가장 심각하게 분석된 작품이다. 메리 밀러는 에드워즈가 이 한 권의 책만으로도 미국사를 수놓은 가장 위대한 책들 중 하나를 생산했다고 극찬했다. 이 책에서 그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서, 의지는 가장 강력한 동기들을 거스르면서까지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기능이 아니라고 말했다.
스톡브리지에서의 에드워즈의 두 번째 논문은 그가 1756년에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한『원죄론』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을 때 인쇄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책은 주로 영국 목사 존 테일러가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칼빈주의를 공격하여 ‘아메리카를 소란스럽게 한’데 대한 반론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선과 자율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테일러의 주장은 초자연적 구속 개념을 뒤흔드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보았다.
원죄론이 나타나기 4년 전, 그는 두편의 다른 “논문들”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관하여』 『참된 미덕의 본질』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이래 이 두 주제에 대한 묵상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이 두 작품에서 에드워즈는 18세기 철학자들과 이신론자들의 도덕성의 주제에 대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이 두편의 논문은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의 행복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행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행복은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즐기는 것이다. 참된 덕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존재인 하나님과 그보다 열등한 모든 존재들을 사심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덕은 자기 사랑이나 세속적인 이타주의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 자기 자신, 가족, 국가, 심지어 인류에 대한 사랑도 최고의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왜냐 하면 그러한 존경을 받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관하여』에 따르면, 조나단 에드워즈,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서문강 옮김, 601.
1757년에 뉴저지대학(현재 프린스턴대학)에서 아론 버 그는 에드워즈의 딸 에스더의 남편이요 미국의 제3대 부통령이 될 아론 버 2세의 부친이었다.
총장이 별세한 후 에드워즈를 총장으로 청하였는데, 처음에는 책 쓸 것이 많아서 거절했지만 결국 수락하고 1758년 2월에 크린스턴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의학계에서 천연두 예방주사 약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에드워즈가 그 주사를 맞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그 다음달 3월에 54세의 아까운 나이에 별세 하였다. 그는 죽기 바로 전에 침대 곁에 있던 딸 중 하나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리하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위로하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에드워즈 부부의 묘는 지금도 프린스턴 묘지 내의 학장들 구역에 놓여 있어 프린스턴을 찾는 목사,식학자들의 필수적 방문 코스가 되고 있다.
나오는 말
작년이 조나단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이었다. 그래서 예일대와 프린스톤신학교는 그것을 기념하는 전국적 대회와 학회를 열었고, 최근 들어 활발한 연구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도 몇 년 전 학회가 생겼고 많은 책들이 출판 되고 있다. 그만큼 조나단 에드워즈는 현대에 들어 재조명 되고 있다.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엔 타락의 극한 일도를 달렸던 것처럼 지금의 시대도 부흥이 임박했음을 보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에서 영생으로 이끄는 귀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도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준비시켜 놓지 않으셨을까? 바로 그 주인공의 대열에 우리 각자가 설수 있길 바라며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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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양낙흥 『조나단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부흥과개혁사, 2003)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의 성찬 참여 자격 논쟁”『개혁신학과 교회』(고려신학대 학원.2002.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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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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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낙흥,이상현, “조나단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기념기획/ 신학자들의 신학대담”,『목회와 신학』 (두란노,2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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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웨드워즈, 윤기향 역,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4)
조나단 웨드워즈, 이우진 역, 『성난 하나님의 손안에 떨어진 죄인들』, (서울: 말씀 보존학회,1998)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역, “부록-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신앙과 정서』,(지평서원.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