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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1/8>
확인된 살인만 314건, 조선반도 경악케 한 사교집단의 최후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세상이 거칠고 강퍅할수록 종교는 힘을 얻는다. 일제의 강압이 날로 심해지던 1930년대, 피폐해진 식민지
백성들의 신산한 마음을 뚫고 ‘영생복락’과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 가운데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것이 수백건의 살인과 음행이 드러난 이른바 ‘백백교 사건’. 그 참담한 최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건의 배경에 가난과 무지, 정치적 부자유에 시달린 반도 백성의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곤용은 해주에서 가장 큰 한약국 ‘구명당(求命堂)’의 주인이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약종상을 하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한의학에 뜻을 두고 고금의 의서와 비방을 두루 연구했다.
1925년 약관의 나이에 도회지 해주에 나와 자력으로 ‘구명당’을 차렸다.
유곤용의 조부는 약종상으로 자수성가해 한때 수십만원대의 재산을 모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온천이 개발되어
전국적인 휴양지로 번성한 신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런 유씨 집안의 재산은 30여 년 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조부가 축첩을 하거나 주색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미두(米豆·미곡의 시세를
이용하여 약속만으로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나 도박에 손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조부는
수시로 땅을 팔고, 빚을 얻었다. 유곤용이 해주로 나올 즈음 유씨 집안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몰락했다.
유곤용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비방으로 약을 처방했는데, 특히 위장병, 임질, 뇌신경질환
치료약 조제에 탁월했다. ‘구명당’을 개업한 지 불과 1~2년 만에 유곤용의 명성은 일대에 자자했다. 10여 년의
관록이 붙은 후 그의 명성은 황해도를 넘어 경기도와 평안도에 뻗쳤다. ‘구명당’은 조선 최초의 한약재 연구소
를 설립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유곤용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1933년 임종하기 전, 조부는 유곤용에게 30년간 지켜온 집안의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할아비는 장차 너의 부귀와 공명을 위해 근 30년간 백백교를 믿어왔다. 대원님께 의지하여 재물 버리기를
초개와 같이 했다. 그러나 아쉬워 말거라. 할아비가 정성을 다해 교에 바친 재물은 이제 곧 몇 곱절,
몇십 곱절이 되어 네 아비와 네게 돌아올 거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집안이 몰락한 이유는 허망하게도 조부가 백백교라는 신흥종교를 믿은 탓이었다.
조부의 죽음으로 집안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친 유인호는 조부보다 더 ‘독실한’ 백백교 신도였다.
조부가 죽은 후 부친 유인호는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정리해 가솔들을 이끌고 백백교 본부가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재산 일체는 물론 18세밖에 안 된 딸 유정전마저 대원님께 바쳤다. 그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는
고작 ‘장로’라는 허울뿐인 직함과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유곤용은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라고 4년을 두고 설득했지만, 유인호의 30년 믿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교주의 애첩이 된 누이동생
유정전 또한 백백교의 열성 신도가 됐다.
최후의 밤
1937년 2월10일, 음력 설을 맞아 유곤용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왕십리 유인호의 처소를 찾았다. 4년 만에
부친을 만난 유곤용은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불효를 고개 숙여 사죄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대원님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유인호는 자식의 돌연한 개심이 한편으로는 기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불안했다.
“대원님을 승안(承顔)하는 데에는 절차와 법도가 있다.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승안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먼저 선생님께 의향을 여쭈어 허락을 얻어야 한다. 만약 대원님께서 허락하시면 너는 그로부터 사흘 동안
집안에서 아무도 만나지 말고 근신하여 세상에 찌든 더러운 마음을 씻어야 한다.”
유곤용은 어떠한 곤란한 명령이라도 순종할 터이니 제발 대원님을 승안케 해달라며 거듭 부탁했다. 그제서야
유인호는 자식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유인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2월16일 저녁 8시 왕십리 유인호의
자택에서 백백교 교주 전용해와 유곤용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전용해의 애첩이 된
유정전은 오빠 유곤용에게 대원님을 승안할 때 다섯 가지 계율을 명심해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2/8>
“첫째, 절대로 대원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든 대원님 앞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됩니다. 둘째, 대원님을 뵐 때는 몸에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셔야 합니다. 수건 하나 휴지 한 장이라도
주머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셋째, 백지장 같은 결백한 마음으로 대원님을 대하셔야만 합니다.
넷째, 대원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만 대답을 여쭙지 오라버니 편에서 무슨 말씀이고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다섯째, 대원님께서 내리시는 분부면 어떠한 것이건 절대 복종을 하셔야만 합니다.”
유곤용은 계율을 지키겠노라 다짐하고 사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 근신했다. 교주 전용해는 약속한 정각에
애첩 유정전과 부하 두 사람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검정색 외투를 걸치고, 고동색 모자를 쓰고, 검정색 구두를
신은 차림이었다. 겉모양만 보면 영험한 신흥종교 교주라기보다는 흡사 보험회사 두취(頭取·사장)처럼 보였다.
유곤용은 부친과 함께 뜰 아래로 쫓아내려가 공손히 대원님을 영접했다.
방안에 모여 앉은 얼굴과 얼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교주 전용해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따지고 보면 자네와 나는 4년 전부터 처남매부지간인데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구려.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반갑소.”
간단한 인사말이 있은 후 주연이 벌어졌다. 한잔 두잔 술잔이 거듭됨에 따라 전용해는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와 누이동생도 이미 서울에 와 있으니 차라리 그대도 가산 전부를 정리해가지고 서울로 오는 것이
어떠한가?”
조부와 부친처럼 속히 재산을 바치라는 말이었다. 유곤용은 긴장한 어조로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것도 대단히 좋은 말씀이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올라오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아들’ 대원님의 말씀을 감히 거부하는 것은 백백교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용해는 격분한 어조로 다그쳤다.
“그럼, 내 명령을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그리고 옆에 앉은 유정전을 보고 또 한 번 소리쳤다.
“네 오라비 잘났다.”
일격을 당한 유곤용은 그제서야 본심을 드러냈다. 지난 일주일간 그가 보인 행동은 교주 전용해를 만나
백백교의 악행을 따지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
유곤용은 “백백교의 교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얼치기 종교가 어디 있느냐”며 욕질을 했다. 세상에 나서
그런 욕설을 처음 듣는 전용해는 흥분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빼어들고 유곤용을 찌르려고 덤벼들었다. 이 순간이 그에게는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었으니
흉악무도한 그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단서가 될 줄이야 악의 천재인 그도 예상치는 못하였을 것이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안방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대청마루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전용해의 수하들이 교주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유곤용의 힘은 의외로 강했다. 쇄도하는 수하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전용해의
멱살을 잡아 넘어뜨렸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한 전용해는 죽을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벗어나 도망쳤다. 수하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도주했다.
유곤용은 위험을 직감했다. 백백교 교도들이 떼지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는 동대문서 왕십리주재소에
달려가 사정을 말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1930년 소위 ‘금화사건’ 이후 완전히 소탕된 줄 알았던 백백교가
지하로 잠복해 밀교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경찰은 현장으로 수사대를 급파했다.
산중의 시체들
수사대가 앵정정(櫻井町·현재의 중구 인현동) 전용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전용해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형사대는 백백교 총참모격인 2인자 이경득과 이순문, 장서오 등 간부 세 명을 체포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전용해의 행방을 찾기 위한 신문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백백교는 교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정조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교단의 비밀 유지를 위해 수백명의 교도를 살해, 암매장한 것이었다.
너무나 흉악한 범죄였기에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보도를 전면 금지했다. 경찰은 두 달이 지난
4월13일에야 보도금지를 해제하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3/8>
백백교의 대표적인 비밀아지트였던 양주 천원금광사무소.
동대문서 고등계는 지난 2월16일 밤 10시를 기해 필사적으로 백백교 검거에 나섰다. 두 달여의 활동에 의해
백백교의 죄상이 청천백일하에 폭로되었다. 백백교는 이름만은 종교단체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순전한 사기,
부녀자 능욕, 강도, 살인 등을 거침없이 한 흉악무도한 결사다. 소위 교주된 자와 그 간부가 되는 자들은
우매한 지방 농민들을 허무맹랑한 조건으로 낚아 재산을 몰수하고, 부녀자의 정조를 함부로 유린한 후,
그 비밀을 막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했다. 교도 중에서 피살된 자가
사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현재 판명된 자만도 158명에 달한다. 전율할 숫자는 세계범죄사상 전무후무한
범죄기록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 1937년 4월13일자 호외)
교도의 사체를 파묻은 백백교의 비밀 아지트는 한두 곳이 아니었다. 수사 결과 양평, 연천, 붕산, 사리원, 세포,
유곡, 평강 등 전국에 산재한 20여 곳의 비밀 아지트에서 모두 314구의 사체가 발견됐다. 살인은 서울 한복판
에서도 버젓이 자행됐다. ‘벽력사’ 문봉조는 신당리 자택에서 교도를 살해한 후 대담하게도 사체를 자전거에
싣고 백주에 종로와 남대문을 가로질러 한강까지 내달렸다. 서울에서 살해당한 교도 수십명이 한강물에
던져지거나 마포, 청량리 일대에 암매장됐다.
양주군의 ‘천원금광사무소’는 교도 살해에 이용된 비밀 아지트 중 대표적인 곳이다.
당시 전 조선은 황금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금광이 들어섰다.
그러한 시기, 깊은 산골에 세운 비밀 아지트는 금광으로 위장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전용해는 1935년 양주 봉암산 기슭에서 비밀 아지트를 세우기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으슥한 골짜기에
간이건물을 짓고 ‘천원금광사무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부근을 금은광구로 출원하고 인근 유지와 관리들을
초청해 성대한 개소식까지 거행했다. 수시로 빈 화약을 터뜨렸기에 바로 인근 주민들조차 그곳이 금광을
가장한 ‘도인장(屠人場)’임을 까맣게 몰랐다. 천포금광 일대에서만 40여 구의 사체가 발굴되었다.
경찰은 전용해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용해는 만일을 대비해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김두선’을 비롯한
16가지 가명을 쓰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용해의 인상착의는 전적으로 체포된 백백교 핵심 간부들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동거하던 애첩들조차 그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본 적이 없어 생김새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2인자 이경득과 교주의 아들 전종기 정도였다.
경찰은 검거에 나선 지 50여 일 만에 양평군 용문산에서 전용해로 추정되는 사체 한 구를 발견했다.
전종기는 코 아랫부분이 산짐승에게 먹혀 없어진 시체를 보자마자 “아이고 아버지!” 하고 대성통곡했다.
양복 주머니에선 전용해가 차고 다니던 시계와 80여 원이 들어 있는 지갑이 나왔다. 부검 결과 전용해의
사망 시각은 2월21일 정오경으로 밝혀졌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자신을 믿는 교도들에게
장생불사를 약속했던 전용해는, 유곤용과 다툰 지 닷새 만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신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백백교의 기원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북 영변 태생의 동학도 전정운은 금강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1900년 천지신령의 도를 체득한 후 세상에 나왔다. 전정운은 전용해의 부친으로 당시 나이 30세였다.
그는 함남 문천군 운림면을 중심으로 인근 사람들에게 도를 전했다. 그를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1912년 강원도 금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정식으로 백도교(白道敎)를 개창했다.
강원도를 중심으로 부근 각처에 지부를 두고 포교에 힘써 1915~16년에는 교도가 1만명을 헤아렸다.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죽자 교세 확장 방법을 둘러싼 간부들의 대립과 부친 유산 분배를 둘러싼 골육간의
싸움으로 교단이 분열된다. 결국 세 아들이 모두 독립해 각자 교단을 하나씩 차렸다. 1923년 5월 전정운의
맏아들 전용수는 간부 이희용을 표면상의 교주로 하여 경성부 도화정에 본부를 둔 인천교(人天敎)를 창립했다.
같은 해 7월 둘째아들 용해는 차병간을 표면상의 교주로 내세워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백백교를 창립했다.
셋째아들 용석도 형들에 지지 않고 경성부 도화정에 도화교(桃花敎)를 세웠다.
인천교는 “하늘 밖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밖에 하늘이 없다.
사람은 곧 조그만 하늘이다”라는 천인일체설(天人一體說)을 표방했다.
이에 대해 백백교는 유불선(儒佛仙) 삼도를 합한 것을 교리로 하고 교주는 ‘결백한 심령’을 가지고
퇴폐한 세도인심(世道人心)을 교화하여 추악한 현세를 아름답게 한다는 설교로 신도를 모았다.
백백교는 백도교의 성지 함남을 비롯하여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파죽지세로 뻗어가던 백백교의 교세는 1930년 7월, 10여 년 전 백도교 교주 전정운이
금화군 오성산에 그의 애첩 4명을 산 채로 파묻은 구악이 폭로돼 한풀 꺾인다.
미신의 복마전 백백교를 중심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던 강명성, 최윤성 등 10인에 대한 예심이 종결되었다.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백교의 전신 백도교 교주 전정운은 장생불사
(長生不死)의 선인(仙人)이 된다는 터무니없는 선전으로 우민을 우롱하며 5~6명의 부인교도를 유혹하여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 그중 남달리 미색이 뛰어나 첩으로 삼았던 박씨(25세), 이씨(18세), 최씨(20세) 등을
교주 전정운의 명령으로 피고들이 일부는 산 채로 생매장하고 일부는 사설 교수대에 교살한 것이 사건의
개요이다. 전정운은 이미 죽은 관계로 살해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1년 9월3일자)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4/8>
“일제는 가고 새 세상이 온다”
이렇듯 이른바 ‘금화사건’이 발생했을 당시만 해도 전용해와 표면상 교주인 차병간은 가까스로 검거망을
벗어났다. 전용해와 차병간은 지방을 전전하며 비밀리에 교단을 재건했다. 이후 전용해는 서울로 잠입해
앵정정에 본부를 마련하고, 지방에 있는 심복 교도들을 서울로 불러모았다. 백백교 간부들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을 순회하며 무지몽매하여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다소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포섭했다.
“우리 백백교 교주님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천위(天位)에 등극할 인물이다.
지금 일본의 통치 아래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백백교 교주의 통솔 하에 독립이 될 것이다. 그때 각
교도는 헌성금(獻誠金)의 다소와 인물의 능력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등에 임명될 것이다.”
“오래지 않아 큰 전쟁이 날 터이니 교도들은 자산을 팔아가지고 상경하라. 교주는 신통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반드시 그대들의 생명을 보장할 것이다.”
“3년 내 조선에 서른 자 이상의 큰 홍수가 날 것이다. 일반백성은 모두 물에 빠져 죽더라도 헌금한
우리 백백교도는 금강산 피신궁(避身宮)에 들어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홍수 이후 교주 전용해가 등극하여
천위에 오르면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제수할 것이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백백교 간부들은 정감록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도령과 소리가 비슷한 교주 ‘전도령’이
후천개벽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 호언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투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불로장생, 부귀영화’라는 말로 입교를 권유했다.
일단 백백교에 입교하면 교주의 명령에 따라 토지, 가옥, 가재도구 일체를 정리해 서울 본부로 올라왔다.
교주는 신입 교도가 가지고 온 현금을 헌납하게 했다. 데리고 온 가솔 중 미모의 처녀가 있으면 ‘시녀’로
바치게 했다. 교주는 앵정정 본부로 불려온 시녀에게 ‘신의 행사’를 빙자해 욕정을 채웠다.
‘믿음이 약해’ 교주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여성은 심복 간부에게 넘겨줬다. 간부가 거느린 첩은
모두 이러한 ‘절차’를 거친 여성이었다. 교주는 수십명의 첩을 거느렸다. 7~8명의 첩을 거느린 간부도 있었다.
앵정정 본부에서 교주와 ‘신의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여성은 4~5명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녀가 들어오면
기존의 시녀 중 ‘믿음이 약한’ 시녀는 양주, 양평 등지의 심산에 사는 심복 교도들의 집으로 보내졌다.
교주는 한 달에 몇 번씩 교도들의 집을 돌며 시녀들과 ‘신의 행사’를 치렀다.
전 재산과 자녀를 교주에게 바친 교도에겐 “오래지 않아 백백교의 천하가 올 터이니 그때까지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교도들은 연천, 양평, 철원, 평강 등 산간벽지 교통이
불편한 외딴집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교도들은 화전을 일궈 근근이 연명했다. 교단은 교도들이 근처 부락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고,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교도들을 수시로 이주시켰다. 교도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처자 형제를 각각 다른 지방으로 보내 격리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가족의 신변 걱정에 교도들은
차마 딴 마음을 품지 못했다.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간벽지로 보내져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도 임박한 백백교의
세상에 대한 꿈을 잃지 않은 교도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교단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전용해와 측근 간부는 교단에 불만을 품은 교도를 배교분자로 분류했다.
교주는 배교분자를 비밀 아지트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올려주었다. ‘기도’는 교도를 살해해 암매장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성인들이 타살된 후 딸린 어린 아이들은 산 채로 암매장됐다.
범죄 사상 초유의 대사건이었던 만큼 수사와 예심에만 3년이 소요되었다. 살인기록 보유자 문봉조 외
간부 24명은 보안법 위반, 살인, 사체유기, 상해치사, 살인강도, 외설, 사기 공갈, 횡령, 공사문서 위변조 등
10개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됐다.
1940년 3월13일, 경성지방법원 대법정 앞은 새벽부터 북적거렸다. 선착순으로 방청권을 배부하겠다는
예고 때문이었다. 며칠째 봄볕이 따뜻하여 봄기운이 완연하더니, 그날 아침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눈 섞인
비가 흩뿌렸다. 성격 급한 방청객들은 새벽 4시부터 찬비를 맞아가며 줄을 섰다. 8시쯤 800여 명의 방청객이
운집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 가운데 옷차림이 시골사람 같은 남녀 10여 명이 섞여 있었다.
9시를 조금 지나 간수 한 명이 나와 “방청객 중 피고인 가족이 있냐?”고 외쳤다.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던
시골사람 10여 명이 간수 앞으로 몰려갔다. 방청객들은 그들과 같이 섞여 있던 것조차 끔찍한 듯 이상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피고인 가족이 먼저 방청석에 들어간 뒤, 300여 명의 방청객이 법정으로 입장했다.
500여 명은 새벽부터 줄을 서고도 방청권을 얻지 못해 되돌아갔다.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5/8>
9시25분, 24명의 피고인을 태운 ‘경165호’ 서대문형무소 버스가 도착했다.
법정에 입장하지 못한 방청객들은 버스를 에워싸고 손가락질했다.
용수를 쓰고 수갑을 찬 백백교 간부들이 피고석에 들어가자 방청석은 일시에 술렁였다.
10시40분, 가마야(釜屋) 재판장을 선두로 재판부가 출정했다. 판검사의 책상 위에는 3만여 장의 조서가 놓여
있었다. 대충 읽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분량이었다.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하자 검사가 공소사실을 진술했다.
피고인 24명 중 살인에 관련된 피고인만 18명이다. 살인 수효를 들으면 한층 더 전율을 느끼게 된다.
문봉조가 공범자와 함께 죽인 사람이 49회에 129명, 이경득이 61회에 166명, 길서진이 48회에 169명,
길군옥이 34회에 121명, 이한종이 11회에 35명 등이다. 그 죽인 방법도 참혹하기 짝이 없어
마치 사람 죽이는 것을 병아리나 죽이듯 쉽게 여겼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공소사실 진술에만 1시간이 소요됐다. 재판장이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9명의 피고인이
살인 및 사체유기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장은 피고인들을 앉히고 개별심리에 들어갔다.
간부 대부분이 무학(無學)
재판장은 사건을 최초로 고발한 유곤용의 부친 유인호를 일으켜 세우고 신문에 들어갔다.
장로 유인호는 백백교 30년의 역사를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재판장: 어째서 백백교를 믿었느냐?
유인호: 대원님을 따르면 불로장생 호의호식 한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전용해의 부친 전정운이 창설한 백도교에 관계했느냐?
유: 예, 그때부터 믿었습니다.
재: 무슨 동기로?
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백도교를 믿으면 모든 재액을 피할 수 있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이냐?
유: 무식해서 교리는 모릅니다.
재: 헌성금은 얼마나 바쳤느냐?
유: 전 재산을 모조리 바쳤습니다.
재: 네 딸을 전용해의 첩으로 준 이유는 무엇이냐?
유: 선생께서 요구하기에 바쳤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3월14일자)
이어 벽력사 문봉조에 대한 신문에 들어갔다. 문봉조는 백백교의 행동대장격으로 49회에 걸쳐 129명의 교도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재판장: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인가?
문봉조 :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머지않아 서양은 불로, 동양은 물로 심판을 받아 인류가 전멸하는데
그 심판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백백교를 믿어야 한다, 심판 때 동해에 영산이 떠오르는데 교도들은
전부 피난해서 거기서 홀로 장생하고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신이 사람의 모습을
쓰고 내려온 구주라고 하셨습니다.
재: 헌성금이란 어떤 것인가?
문: 입교한 자는 자기 재산을 팔아 교주에게 바치도록 했습니다.
재: 검거 당시까지 얼마나 받았는가?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6/8>
재: 그런 불평분자는 모두 피고인들에게 명령해서 죽이게 했다지.
문: 예, 그랬습니다.
재: 전용해는 교도 중에서 딸이나 누이동생이 있는 사람에게 그 딸과 누이동생을 바치라 해서 첩을 삼았다지?
전부 몇 명이나 되는가?
문: 정확한 명수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앵정정에만 34명 있었습니다.
재: 그래 전용해는 매일 술만 먹고 첩과 음탕한 생활을 해왔다지?
문: 밥보다는 술을 좋아하셔서 매일 ‘월계관’이나 ‘백학’ 한 되쯤씩 자셨습니다.
재: 전용해는 자기 재산은 없이 교도에게서 모은 돈을 물 쓰듯 하여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을 했는가?
문: 예.
재: 그런 음탕한 생활을 하는 전용해를 어떻게 신의 아들이라 믿을 수 있었는가?
문: 지금 생각하니 잘못 믿고 있었습니다. 술 먹은 때는 그렇지만 선생께서 가르치는 말은 모두 훌륭해서
믿었던 것입니다.
재: 그래, 아직도 전용해를 신의 아들로 믿는가?
문: 천만에요. 지금 생각하면 모두 어리석어서 속았던 걸 깨달았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문봉조를 비롯한 피고인 전원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고 했지만, 교주를 지칭할 때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 뉘우친다고 거짓 진술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백교의 2인자 이경득은 전용해의
인격을 숭배해서 믿었는지 반역하면 죽이는 것이 두려워 믿었는지 묻는 질문에 정말로 신의 아들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불평을 품고 있을 때마다 교주가 “이 놈 네가 불평을 품고 있구나. 다른 데 가고 싶거든 가거라”
하여 독심술을 가졌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나머지 피고인들도 모두 교주가 진짜 ‘신의 아들’인 것으로 믿고 백백교에 귀의했다고 진술했다.
23명의 교도를 살해한 이창문은 백백교만 믿으면 가족의 병도 낫고 또 불로장수하는 줄만 알고 입교했으나
교주가 자칫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알고 무서워 도망까지 해보았지만 교주 밑에 남기고 온 처자의 목숨이
염려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고 말해 재판정을 숙연케 했다.
방청객들은 한번 걸려들면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늪과 같은 백백교의 정체에 치를 떨었다. 학력 심문 결과
피고 24명 중 정규 교육을 받은 자는 이자성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 보통학교 4년까지 다닌 것이 전부였다.
문봉조, 이경득, 김군옥, 박달준 등이 한문을 조금 알았다. 그밖에는 모두 무학이었다. 재판장이 “예심결정서를
보았으니 자기 죄를 알 터이지?”라 묻자 “무슨 종이를 받기는 했지만 무식해서 뭔지 몰랐습니다”고 진술할
정도였다.
피고인 중에는 비운의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교주 전용해의 딸 전선녀였다.
전용해와 그의 첩 최씨 사이의 소생이었다.
재판장: 전용해의 딸이라지?
전선녀: 예.
재: 최씨와 전용해는 언제까지 같이 살았는가?
전: 제가 다섯 살 때까지입니다.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7/8>
재: 그후 피고는 어떻게 살았는가?
전: 여덟 살부터 어머니를 따라 여기저기 흘러 다녔고 열네 살 때 어머니와 헤어졌습니다.
재: 어머니는 어디 있는가?
전: 열네 살 때 헤어진 후로는 만나지 못해서 생사를 모릅니다.
재: 전용해와는 헤어져 산후에도 자주 만났는가?
전: 1~2년에 한 번쯤 만났습니다.
재: 그래 전용해를 만날 때 어떠했는가?
전: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울먹이며) 만나 뵙기는 했지만 아버지다운 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재: 백백교를 포교한 사실이 있는가?
전: 그런 일은 없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백백교는 일본이 곧 폐망하고 조선이 독립하여 교주가 천위에 등극할 것이라 선전했다.
허무맹랑한 예언이었지만, 일본이 폐망한다는 주장은 보안법 위반에 해당했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교인도
백백교를 포교한 사실만 인정되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전선녀가 그런 경우였다. 전선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공소사실을 인정하여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18명 중 14명 사형
1940년 3월15일, 수은주가 영하 7℃까지 떨어지고 연 이틀 눈이 내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314인의 원귀가 내린 저주라 말했다. 때늦은 혹한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은 여전히 만원이었다.
제2회 공판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진행됐다. 314건의 살인혐의가 차례로 확인되었다.
재판장: 1930년 8월 둘이서 제2세 교주 우광현을 무주군 설천면 야산에서 목매 죽였는가?
이경득, 길서진: 예.
재: 이유는?
이경득, 길서진: 모릅니다. 대원님께서 죽이라고 해서 죽였을 뿐입니다.
재: 1931년 2월 20세가량의 여자와 그 젖먹이 애를 죽였나?
이경득, 길서진: 예.
(중략)
재: 1931년 5월 교주의 첩 문봉례를 죽일 때 업고 가던 젖먹이도 죽였는가?
문봉조 : 문봉례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애는 안 죽였습니다. 대원님께서는 애까지 죽이라 하셨지만
이경득이가 “어린애야 무슨 죄가 있느냐?”며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저 역시 젖 먹다가 어미를 잃은
계집애 처지가 하도 가련해서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있습니다.
재: 문봉례를 죽인 이유는?
문: 처음엔 몰랐습니다만 후에 알고 보니 오빠를 죽인 것을 알까봐 죽이란 것이었습니다.
재: 어째 친형인 문봉진과 그 가족을 죽였는가?
문: 자꾸 서울 오겠다는 걸 말렸지만 듣지 않아 할 수 없이 상경시켰습니다. 어느 날 대원님께서 먼저
“봉진은 어떤가?” 하시는 태도가 죽이자는 뜻이었습니다. 만일 형을 안 죽이면 나도 죽겠고 내 가족 친척도
남모르게 죽겠기에 형을 죽였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8/8>
백백교 2인자 이경득. 교주 전용해는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아녀자는 물론 젖먹이 어린애, 친형까지 대원님의 명이라면 서슴없이 도륙했다.
사흘 후 속개된 제3공판에서도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계속됐다. 심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살인 사실을 한 묶음 두 묶음씩 통틀어 심리했다. 피고인이 부인하면 부인하는 대로 그냥 넘어가는 식이었다.
몇 가지 혐의에 대해 부인해도 판결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00건의 살인혐의 중 99건의 혐의를 부인해도 판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살인사건은 1932년 이후 갑자기 증가했다. 그때부터 불평분자 본인만 아니라 한 가족 전부를 몰살해버린
탓이었다. 불평을 가진 자만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먹여 살리기에 귀찮다든가 한 장소에 너무 많은 교도가
있어 경찰에 발각될 우려가 있어 죽인 교도도 적지 않았다.
1년은 족히 걸리리라는 예상과 달리 공판은 일주일, 단 4회만에 종결됐다. 검사는 살인과 관련된
18인의 피고인 전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먼저 피고 가족석에서 울음이 터져나오고 연이어 나이 어린
피고인 몇 명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과오를 뉘우치고 흘리는 눈물인지 목숨이 아까워 흘리는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판장은 가담 정도가 경미한 피고인 4명만 징역 7~15년으로 감형하고 나머지 14명에게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현세의 영화를 약속한다면
식민지 시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갖가지 신흥종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동학계의 천도교·시천교·상제교, 증산계의 보천교·흠치교·태을교, 단군계의 단군교·대종교·칠성교·관성교 등
총독부가 파악한 것만 해도 70여 개에 달했다. 밀교의 형태로 운영된 것은 그보다 몇 배나 많았다.
총독부는 신도,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유사종교’로 분류했다.
종교는 학무국 종교과의 ‘관리’ 대상이었지만, ‘유사종교’는 경찰서 보안과의 ‘단속’ 대상이었다. 총독부에 의해
‘유사종교’로 규정된 신흥종교를 모두 사교나 사이비 종교로 치부할 수는 없다. 가령 천도교는 백백교와 같은
동학에 뿌리를 둔 종교이지만, 1910년 교인수가 100만을 넘었고, 독립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했다.
현상적으로는 백백교처럼 사악한 종교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가 사악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신자는 아무도 없다. 근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종교들은 교리상으로 큰 편차가 없다. 인존사상과
민중사상, 후천개벽사상과 지상천국신앙, 구세주신앙과 선민사상, 조화사상과 통일사상, 해원(解寃)사상과
전통문화계승사상은 거의 모든 신흥종교의 공통된 교리다. 오용될 소지는 있지만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全峯寬(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 1971년 부산 출생
●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등
종교는 합리성과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 맹목의 영역에 속한다.
백백교 사건은 전용해라는 사악한 교주가 저지른 예외적인 일탈행동이 아니다.
1987년 ‘오대양사건’처럼 종교를 빙자한 크고 작은 범죄행위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백백교와 같은 사교집단은 기성종교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세의 부귀영화와 영생을 약속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현세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보다 더 값진 마음의 평화일 것이다.
종교를 통해 현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려들면 언제든 사교집단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백백교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파고든 경우였다.
<빙혼>
백백교는 분명 사이비 종교이다.
그럼 현재 기성 종교는 어떠한가?
신도들을 헌금을 은근히 요구하고 음주도박은 물론이고 금품향응은 기본이요 심지어 성폭행도 한다.
사이비 종교는 전 재산을 헌금으로 요구하고 음란한 짓을 벌이는 종교이고
기성 종교는 일부 재산을 헌금으로 요구하고 일부 성직자는 음란한 짓을 벌이고 있는 종교이다.
사이비 종교와 기성 종교의 공통점은
“죽어서 내세에 좋은 데 가려면 헌금을 잘 내야 한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1 헌금>
사이비 종교 : 헌금으로 전 재산을 요구
기성 종교 : 헌금으로 일부 재산을 요구
<2 음란한 행위>
사이비 종교 : 교주와 간부급들은 거의 모두가 음란한 짓을 일상화
기성 종교 : 일부 교주와 간부급들은 몰래 음란한 짓을 시도
<3 체제 유지>
사이비 종교 : 살인폭행으로 체제 유지
기성 종교 : 세포 단위로 조직화 및 사후세계에 대한 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