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단상 (2)
끝과 시작의 사이라고 느껴지는 12월이 돌아왔다. 매년마다 윤회하는 억겁세월의 한 순간일 뿐이라지만 12월은 어찌 저리도 나에게는 빨리도 돌아올까 싶다.
지난 세월이 남은 세월을 낚아채듯 내 삶의 시간 또한 그렇게 빠르게 흐른다.
그리고 나를 많은 의미와 많은 생각에 이르게 한다.
쫓기듯 따라다니는 삶의 시간이 아니라 여유로운 마음으로, 넉넉한 시간으로 남은 세월 살자, 건강한 늙음을 찾아 단순하게 살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짐하며 살아온 그 한 해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 모자람과 아쉬움을 넘어 초조함과 두려움이 앞서는 것일까.
건강한 삶의 노력과 보람도 적지 않은 한 해였지만 그 성적표 같은 평가의 반성과 후회보다 상실과 떠남의 플랫폼처럼 느껴짐은 또 왜일까?
자기 삶의 시간이 줄어듦과 늘어남이 풍선효과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12월이 마치 젊음과 늙음이 함께 마주서 임무교대를 하고 선 세월의 간이역처럼 느껴짐은 또 왜일까?
내 한 해를 떠나보내는 세월의 문턱 같은 12월, 누군들 아쉬움 없을까 만은 도전과 열정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고 사는 젊은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의미의 아쉬움이 내게는 남는다. 누구나가 같은 심정이라 하겠지만 나에게는 그 받아들임이 사뭇 다르다. 해가 거듭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저물어가는 이 한 해가 예전 같지 않게 생과 사의 갈림길 같은 긴 세월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올 한해도 아직 고희의 나이에 들기도 전에 명(命)을 달리한 몇몇 동기와 지인들의 비보소식이 있었다. 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너무나도 야속한 아픔이다.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까지 무거운 한해다.
많은 선지식인들은 그러한 두려움과 근심걱정으로 가득한 자신을 버리며, 내려놓고 살라고 한다. 삶과 죽음도 윤회일 뿐 본래 없는 것이라 슬퍼할 일도 아니라 한다. 마음의 집착, 그 생각의 아픔마저 그렇게 버리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를 찾아나서는 깨우침의 길이라 한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른다.”는 불교경전의 가르침 또한 그러하다.
나도 한 때는 그런 무소유의 마음가짐으로 살고자 노력했다.
가끔씩은 그런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그런 생각의 글까지 남기며 세월의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해왔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떠나야 하는지,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책까지 사서 읽으며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은퇴 후 몇 년간을 시도해왔다.
누구의 영향이랄 것도 없다. 내가 나의 처지를 그렇게 받아들이며, 내가 그런 생각으로 살고자 한 본질적 사유(思惟)에서 비롯하였다.
희비애락으로 가득한 경쟁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적 관념을 떠나 누구라도 따르고 행하고 싶은 마음세상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 때문이라고나 할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곧잘 집을 나서 어디론가 혼자 나다니기를 즐겨했다. 혼자 다니는 것이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움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저곳, 온종일 생각 길을 많이도 걸었다. 마침내는 일상의 습관이 되었을 만큼 친숙한 발걸음이 되었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로는 동으로 간다고 하면서도 몸은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길을 걷는다고, 오랜 시간 생각만 한다고 나의 현실을 떠날 수 없음도 알았다.
그런 마음행동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성인과 현자들의 생각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라는 마음 갈등만 늘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니지 않아 내가 다다를 수 없는 생각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선지식인들과 현자들의 깨우침을 막연히 쫓아다니며 스스로 사고의 혼돈세계에 빠져들고 있을 뿐이었다.
무작정 떠난다고 벗어나고, 생각만으로 버려지는 현실세계가 아니지 않은가? 소유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과 그 인연들을 두고 어디로, 어떻게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진정한 무소유란 무엇일까? 현세를 살아가는 속인에게 무소유란 실현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애초부터 수도자의 길을 걷고자 한 번도 생각하여 본적이 없고, 다만 따르고자 하는 삶의 지혜로 받아들이려 한 나로서는 선무당의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한 가당찮은 질문이고 성불의 욕심일 뿐이었다.
인생이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수도(修道)의 길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자신의 현실세계를 지혜의 눈으로 바로보고 가꾸고자 노력하며 사는 것이 곧 자기 삶이라는 깨우침의 말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남은 시간을 조금 더 촘촘히 채워가며 살고 싶어졌다. 삶의 의식을 새롭게 하고 앎도 없이 속이 텅텅 비어있는 선무당 같은 나를 조금씩 지혜의 노력으로 채워가며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내 곁에서 함께 살아온 번민과 갈등을 이제 조금이나마 내려놓고자 한다. 그리고 아직 남은 12월을 성찰의 시간으로 더욱 많이 채우고자 한다. 지난 것과 새로운 것의 교차적 만남의 시기, 단순히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셈하기보다 무엇을 더 버리고 무엇을 더 찾아나서야 할지도 숙고해야 한다.
천주산 오르는 길에 내 삶의 이정표 같은 푯말이 나를 잠시 멈추어 생각에 이르게 한 적이 있다.
‘행복을 담을 그릇이 없는 사람은 행복이 담길 수 없다’ 는 격언이다.
지혜를 받아들이고 행복을 가슴에 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의 깨끗한 그릇부터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기지아(知己知我)의 가르침이다.
나는 이 한 해 무엇으로 살아왔으며 무엇으로 남아 있는가?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우며 살았는가? 그리고 무엇으로 또 새로운 한해를 살아갈 것인가?
누구라도 한해의 끝자락인 12월이 오면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허전한 마음 또한 감출 수 없다.
이룬 것 없이 또 한해를 보내는구나. 나이만 먹는 세월흐름이 무심하기도 하다. 누구나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왔겠지만 지나고 나면 항상 부족함과 아쉬움 남기마련이다.
그러나 심기일전하여 내일의 삶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런 의지를 담아 나는 이 아침, 고요한 마음으로 나의 한해를 돌아본다.
그리고 하루는 저녁에 뒤돌아 반성하고, 한 해는 12월에 뒤돌아 반성하는 성찰의 마음으로 나는 이 한 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또한 비움도 채움도 결코 쉽지않은 삶의 현장을 살아가게 될지라도,
그 비움과 채움의 무게를 나의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의 저울로 조절해가며 새해의 시간을 차곡차곡 내 가슴에 담아내고자 한다. (2018.12.8)
첫댓글 카톨릭에서는 11월이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지금은 대림시기죠.
말구유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정비하는 시기.
자신을 자주 돌아보며 살아야겠지만 때로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시간의 흐름에 나를 가만히 맡겨두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또 일어날 힘이 생기고 또 앞으로 한 걸음 내딛게도 되는 ...
뭐든 과제가 되면 힘들잖아요.
세상이 내게 잘하기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자신이 자신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는 것.
이제 조금 쉬엄 쉬엄하셔도 될 거 같아요.
그동안 충분히 최선을 다하셨으니까요.
한 해 동안 고단했던 몸과 마음을 토닥 토닥 두드려 주고 싶은 시기, 연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대림주일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카톨릭에서는 12월 2일이 새해 첫날이 되지요.
이름뿐인 카톨릭 신자임이 부끄럽습니다.
'대림'이란 '찾아옴' 과 '다가옴'을 뜻하는 라틴말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집사람이 다니는 창원 '중동성당'의 신부로부터 개인편지를 받았습니다.
왕교장마저 또 나를 생각의 길에 이르게 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