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12) Nancy Cott, “Young Women in the Great Awakening in New England,” Feminist Studies 3, no. 1/2 (Autumn 1975): 15.
(주13) Timothy L. Smith, Revivalism and Social Reform: American Protestantism on the Eve of the Civil War (1957).
(주14) Dickson D., Bruce, Jr., And They All Sang Hallelujah: Plain Folk Camp-Meeting Religion, 1800–1845 (1974). |
![](https://t1.daumcdn.net/cfile/cafe/2227F849546BAA70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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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839년에 진행된 한 감리교 천막집회장 모습을 묘사한 수채화. '제2차 대각성운동'의 주요한 외형적 특징 중 하나는 야외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부흥회인 '천막집회'였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당시 개발이 진척됐던 동부 연안이 아니라, 무질서와 변화가 혼재하던 서쪽 변방들(현재 미국 지도에선 여전히 동부로 볼만한 지역들임)에서 일어났다. 천막집회에 모여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압도감에 쓰러지거나 알 수 없는 말을 되뇌이는 등의 종교적 현상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
3.2. 환원운동
* 이 부분의 상세한 정보는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 회복운동) 항목을 참조하라. |
'환원운동'은 '스톤-캠벨 운동'(Stone-Campbell Movement)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적으로 '미국의 환원운동'(American Restoration Movement)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운동은 19세기 초 '제2차 대각성 운동' 기간 중 미국에서 시작됐다. 이 운동은 교회의 개혁과 기독교인들의 통일을 추구했다.
바턴 스톤(Barton W. Stone: 1772~1844)과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1788~1866)은 각기 독자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유사한 접근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은 <신약 성서>(New Testament)에 나타난 패턴을 기반으로 전체 기독교회들의 회복을 추구한 것이었다. 양 그룹은 각종 교리들이 기독교를 분열시킨다고 믿었다. 1832년 그들은 굳은 신뢰 속에 통합했다. 양측이 특히 의견의 일치를 보인 점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신(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매주 첫째날(=일요일)에 교회가 주의 만찬(Lord's Supper 혹은 Eucharist: 최후의 만찬, 성체성사)을 기념해야 한다는 믿음, 성인 신자들이 물 속에 잠기는 방식의 신자 세례식(Believer's baptism)이 구원(Salvation)에 필수적 요소라는 믿음이었다.
'환원 운동'은 19세기 초 '제2차 대각성 운동' 기간 중에 두 개의 별개의 흐름으로 시작됐고, 처음에는 양측이 서로를 알지 못했다. 첫번째 그룹은 바턴 스톤이 켄터키(Kentucky) 주, 버번 카운티(Bourbon County), 캐인 릿지(Cane Ridge)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두번째 그룹은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 1763~1854) 및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캠벨이 펜실바니아(Pennsylvania) 서부 및 버지니아(현재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주가 된 지역)에서 시작했다. '환원 운동'의 창시자들은 모든 종류의 특정 교파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추종자들의 이름을 사용했다.(주15) 양 그룹은 <신약 성서>에 묘사된 1세기경의 초기 교회로의 복귀를 주창했다. 이 운동에 관한 역사가 한사람은 '환원 운동'이 주로 [교회] 일치 운동의 한 형태였고 '환원'(=초기교회로의 복귀)이라는 요소는 부수적 역할만 담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16)
'환원 운동' 몇 차례 분열을 거듭하여 여러 집단들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스톤-캠벨 운동'이 자신들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3대 그룹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Churches of Christ), 그리스도인의 교회 및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 그리스도인의 교회 (그리스도의 제자회)(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가 있다. 일각에서는 '환원 운동'의 분열 이유가 '환원'과 '에큐메니즘'(ecumenism: 교회일치운동, 세계교회운동)이라는 목표들 사이의 긴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교회 및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원'을 강조하여 이러한 긴장관계를 해결한 반면, '그리스도의 제자회'는 '에큐메니즘'을 강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주16)
(주15) McAlister, Lester G. and Tucker, William E. (1975), Journey in Faith: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 - St. Louis, Chalice Press.
(주16) Leroy Garrett, The Stone-Campbell Movement: The Story of the American Restoration Movement, College Press, 2002, p.573. |
3.3 몰몬교 Mormonism
말일 성도 운동(Latter Day Saint movement)은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Jr.: 1805~1844)의 가르침을 따르는 운동이며, 외형상 환원주의(restorationism, 회복주의: [역주] 초기 교회로 돌아가자는 이념)의 특성을 강하게 갖고 있다. 말일 성도 운동의 역사는 그 독특한 교리와 관행에서 기인한 강력한 논란과 박해로 특징지워진다.
'망링 성도 운동'은 뉴욕(New York) 주의 소위 불타는 지역(Burned-over district: [역주]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지역'이라는 의미로서, 뉴욕주 중부 및 서부를 지칭)에서 시작됐다. 조셉 스미스는 이곳에서 자신이 하느님(God the Father)과 예수 그리스도를 봤다면서, 사도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 잃어버렸던 교리들을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1820년대 말 스미스가 <몰몬경>(Book of Mormon)을 처음으로 구술했을 때만 해도 추종자들의 수는 소수였다. 스미스는 <몰몬경>에 관해 북미 원주민 예언자가 자신의 집 근처에 파묻어놓았던 황금판들(golden plates)에 새겨진 문자들을 해독한 것이라고 말했다. 1830년 그가 <몰몬경>을 출판한 후 신자들도 급격히 증가했다. 이 교단은 최초에 오하이오(Ohio) 주의 커틀랜드(Kirtland)로 이전했다가, 1838년 미주리(Missouri) 주로 이동했다. 여기서 몰몬교도들은 여타 정착민들과 충돌하여 1838년 몰몬 전쟁(1838 Mormon War 혹은 '미주리 몰몬 전쟁'[Missouri Mormon War])이 일어났다. 결국 당시 미주리 주지사였던 릴번 보그스(Lilburn Williams Boggs: 1796~1860)가 서명한 "[몰몬] 근절 명령"(extermination order)이 발동되어 몰몬 교도들은 이곳에서 추방됐다. 스미스는 일리노이(Illinois) 주에 노부(Nauvoo)라는 도시를 건설했지만, 1844년 카시지(Carthage, 카르타고)에 수감 중 암살당했다.
조셉 스미스의 사후 [말일 성도 운동] 계승권 위기(succession crisis)가 촉발되어, 교단의 대다수는 브리검 영(Brigham Young: 1801~1877)을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몇몇 소수의 분파들도 생겨났다.] 브리검 영은 정치 및 종교 모두에서 신정정치(theocracy)의 지도자로서 추종자들을 통치했다. 일리노이에서 몰몬교도들에 대한 박해와 수난이 지속되자, 1846년 브리검 영은 '몰몬 개척자들'(Mormon pioneers)로 불리게 된 교도들을 이끌고 노부를 떠났다. 이들은 서부로 이동하여 오늘날 유타(Utah) 주의 솔트 레이크 계곡(Salt Lake Valley)에 정착했다.
* 참고 항목 - 몰몬학[學](Mormon studies: 몰몬 연구) |
3.4. 여호와의 증인
1870년, 찰스 테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은 조지 스토어스(George Storrs: 1796~1879)나 조지 스텟슨(George Stetson: 1814~1879) 같은 밀러주의(Millerism) 계열의 예수재림주의자들(Adventists)과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했고,(주17) 1877년 초에는 넬슨 바버(Nelson H. Barbour: 1824~1905)와 함께 종교 저널인 <헤럴드 옵 더 모닝>(Herald of the Morning: 그 아침의 전령)을 편집해 발행했다. 러셀은 바버와 결별한 후, 1879년 7월에 잡지 <시온의 파수대 및 그리스도 임재의 전령>(Zion's Watch 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 약칭-'파수대') 발행을 시작했다.(주18)(주19) 이 잡지는 <성서>의 연대기에 관한 러셀의 해석에 초점을 맞추면서, 특히 세계가 "최후의 날"(the last days)에 접어들었다는 그의 믿음을 강조했다.(주20)
1881년 펜실바니아 주,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시온의 파수대 전도지 협회(Zion's Watch Tower Tract Society: 워치타워 성서협회)가 창립됐다.(주21) 이 협회는 전도지, 신문, 성서 및 그 주석들을 보급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그리고 3년 뒤 이 협회가 펜실바니아에 합법적인 기업으로 등록하자, 러셀은 1884년 12월 15일 이 협회의 회장이 됐다.(주18)
1916년 러셀이 사망하자 '시온의 파수대 전도지 협회'는 몇 개의 경쟁 조직으로 분열했다. 그 중 한곳이 러셀이 발행하던 <시온의 파수대 및 그리스도 임재의 전령> 잡지 및 그의 기업인 '펜실바니아 파수대 성서 및 전도지 협회'(Watch Tower Bible &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의 소유권을 갖게 됐고, 1931년에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이란 명칭으로 개칭했다.(주22)(주23)
1917년과 1950년대에는 중요한 조직 개편과 교리의 변경이 있었다. 이 종교의 역사는 역대 회장들과 더불어 4개의 시대로 나뉘며, 역대 회장들은 찰스 테이즈 러셀, 조셉 러더포드(Joseph Rutherford: 1869~1942), 네이산 노어(Nathan Knorr: 1905~1977), 프레데릭 프란츠(Frederick Franz: 1893~1992)이다.(주24)
(주17) Jehovah's Witnesses-Proclaimers of God's Kingdom, chap. 15 p. 204 Development of the Organization Structure.
(주18) Holden, A. (2002). Jehovah's Witnesses: Portrait of a Contemporary Religious Movement. Routledge. p.18.
(주19) 1879~1916년 사이에 발행된 <파수대>는 '워치타워 성서협회'가 1920년에 전 7권으로 구성된 "파수대 전집"(Watch Tower Reprints)으로 재발간했고, 온라인 상에서 제호별 및 기사별로 열람이 가능하다.
(주20) "Prospectus". Zion's Watch Tower. 1879-7-1.
(주21) Jehovah's Witnesses: Proclaimers of God's Kingdom. Watch Tower Bible & Tract Society. 1993. p.576.
(주22) Rogerson, Alan (1969). Millions Now Living Will Never Die: A Study of Jehovah's Witnesses. Constable & Co, London. p.5.
(주23) "Walking in the Path of Increasing Light". The Watchtower: 27. 2006-2-15. --- "본 결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고 불려지며 인식되길 원한다."
(주24) Botting, Heather; Gary Botting (1984). The Orwellian World of Jehovah's Witnesses. University of Toronto Press. pp.34~52. |
3.5. 교회와 국가의 분리
1801년 10월 코네티컷(Connecticut) 주의 '댄버리 침례교도 연합회'(Danbury Baptists Associations) 회원들이 새롭게 대통령에 취임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재임] 1801~1809)에게 서한을 보냈다. 당시 코네티컷 주에서 침례교는 소수파였는데, 여전히 다수파인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 조합교회)에 대한 세금을 요구받고 있었다. 침례교도들은 이러한 일을 견딜 수 없는 일로 여겼다. 침례교도들은 이신론을 신봉하는 제퍼슨의 비정통적 신앙을 잘 알고 있었고, 모든 종교적 표현이 근본적인 인권 문제이며 정부 보조금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데 있어서 제퍼슨을 동맹자로 만들고자 했다.
1802년 1월 1일, 제퍼슨은 '댄버리 침례교도 연합회'에 보낸 답신에서 미국 수정헌법 제1조(Amendment I 혹은 First Amendment) 본래의 취지를 요약하고, 오늘날의 정치 및 법조계에서 매우 익숙해진 문구를 사용했다. 그는 수정헌법 제1조가 "교회와 국가(정치)의 분리 벽"을 수립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문구는 이후 주요한 헌법적 문제가 됐다. 미국 대법원이 제퍼슨의 이 말을 인용한 것은 그로부터 76년이 흐른 뒤인 1878년이었다.
3.6.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교회
* 이 부분의 추가적인 정보는 '흑인 교회'(black church 혹은 African-American church) 항목을 참조하라. |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 흑인) 인구의 기독교는 복음주의에 그 기반을 두었다. '제2차 대각성 운동'은 "아프리카계 기독교(Afro-Christianity)의 계발에 중심적이고도 결정적인 사건"이라 불린다. 이 부흥운동 기간 중에 침례교와 감리교는 많은 수의 흑인들을 개종시켰다. 하지만 흑인 개종자들 중 많은 수는 동료 신자들로부터 받는 처우에 실망했고,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 --- 이 기간 내에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 미국혁명전쟁: 1775~1783)이 포함됨 --- 직후부터 전개된 노예제도의 폐지운동(abolitionism)에서 많은 백인 침례교도들과 감리교도들이 퇴행적 태도를 보인 것에 실망했다.
1787년 리차드 앨런(Richard Allen: 1760~1831)과 동료들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감리교로부터 떨어져나왔고, 1815년에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회의 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혹은 AME Church)를 설립했다. 'AME 교회'는 여타 독립적인 흑인 회중교회들과 더불어 19세기 전체에 걸쳐 발전하면서 번창해나갔다.
3.7. 노예제 폐지운동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론이 최초로 제기된 것은 1688년의 일이다. (현재는 필라델피아의 일부가 된) 저먼 타운(Germantown, 독일인 거주지)에서 독일계 및 네델란드계 메노파(Mennonite) 교도의 후손인 퀘이커교(Quakers, '종교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신자들이 2쪽 분량의 노예제 비판문을 작성하여 퀘이커교의 행정조직인 '종교친우회'에 보냈던 것이다. 퀘이커 교단은 이 서한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1688년 저먼타운 퀘이커교도의 노예제 반대 청원(1688 Germantown Quaker Petition Against Slavery)은 이례적으로 이른 시기에 발생한 노예제 반대에 관한 명확하고도 강력한 주장이었고, '종교친우회'의 노예제 금지(1776년) 및 펜실바니아 주의 노예제 금지(1780년) 입법과정을 촉진시킨 사건이었다.
1775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창립된 불법 속박된 자유 흑인 구조협회(Society for the Relief of Free Negroes Unlawfully Held in Bondage: 일명-'펜실바니아 노예제 폐지 협회'[Pennsylvania Abolition Society])는 미국 최초의 노예제 폐지운동 단체였고, 주로 종교적 관점에서 노예제를 강력히 반대하던 퀘이커교도들이 구성원을 이뤘다.
미국 독립전쟁(미국혁명전쟁: 1775~1783) 직후 퀘이커교와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 소속 운동가들은 상(上) 남부(Upland South 혹은 Upper South) 지역의 수많은 노예 소유주들에게 노예 해방을 설득하는 일에 조력했다. 복음주의 목사였던 테오도르 웰드(Theodore Dwight Weld: 1803~1895)와 자유인 신분의 흑인 로버트 퍼비스(Robert Purvis: 1810~1898)와 함께 1833년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 1805~1879)의 '미국 노예제 반대 협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 AASS: 1833~1870) 창립에 합류했다.
웰드는 이듬해 '래인 신학대학'(Lane Theological Seminary: 1829~1932)에서 일군의 학생들에게 노예제 반대 협회를 결성토록 독려했다. 하지만 라이만 비처(Lyman Beecher: 1775~1863) 총장이 이들의 움직임을 억압하려 하자, 학생들은 '오벌린 대학'(Oberlin College: 1833년 개교)으로 전학했다. 이들 학생들이 노예제 반대 입장을 갖고 있어씨 때문에, '오벌린 대학'은 금새 미국 내에서 가장 자유스런 분위기의 대학 중 하나가 됐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도 받아들였다.
개리슨과 더불어 노스컷(Northcutt)과 존 콜린스(John A. Collins)는 즉각적인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다. 노스컷과 콜린스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며 즉시 행동이 필요함을 강하게 느끼고 있던 열렬한 폐지론자들이었다. 1840년 이후, "[노예제] 폐지"(abolition)라는 말은 개리슨과 같은 이들의 입장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다. 그것은 대체로 약 3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주도하는 이념적 운동이었다. 여기에는 자유 흑인과 유색인종들도 포함됐는데, 필라델피아에 있던 프레데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 로버트 퍼비스, 제임스 포텐(James Forten: 1766~1842)을 비롯한 많은 유색인들이 지도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다.
노예제 폐지론은 강력한 종교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종교적 기반에는 퀘이커 교도들이나 '제2차 대각성 운동' 기간 중인 1830년대에 장로교(Presbyterianism) 목사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가 북부에서 주도했던 부흥의 열기에 귀의했던 사람들이 포함된다. 노예제 폐지에 관한 믿음은 자유 감리교회(Free Methodist Church)를 비롯한 일부 군소 교단들의 분파도 촉진했다.
복음주의 계열의 폐지론자들은 몇몇 대학들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메인(Maine) 주에 개교한 베이츠 대학(Bates College: 1855년 개교)과 오하이오 주에 개교한 '오벌린 대학'(1833년 개교)이었다. 반면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 1636년 개교), 예일 대학(Yale University: 1701년 개교),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University: 1746년 개교)처럼 이미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던 대학들의 경우, '예일 대학' 총장 노아 포터(Noah Porter: 1811~1892)나 '하버드 대학' 총장 토마스 힐(Thomas Hill: 1818~1891) 같은 이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에 동참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폐지론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영국령] 아일랜드 내에서 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 천주교) 교도들의 지도자였던 다니엘 오코넬(Daniel O'Connell: 1775~1847)은 대영제국 및 미국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지지했다. 오코넬은 아일랜드의 구교도 해방(Catholic Emancipation: 가톨릭교도 해방) 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당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도들의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가 박탈당한 상태였다. 오코넬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의 모델 중 한명이다. 개리슨은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에 오코넬이 보여줬던 행동을 명분으로 삼고자 했다. 오코넬은 흑인 출신 노예 폐지론자 찰스 레녹스 레몬드(Charles Lenox Remond: 1810~1873), 금주 운동 목사 테오볼드 메이휴(Theobold Mayhew)와 더불어 6만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 운동을 조직했다. 이 운동은 미국 내 아일랜드계 사람들에게 노예제 폐지 지지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오코넬은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에 관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미국의 가톨릭 교회는 노예를 소유했던 매릴랜드(Maryland)와 루이지애나(Louisiana)와 오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 비록 흑인들의 영적 평등을 주장한 사례도 있었고, 교황 그레고리 16세(Gregory XVI: 1765~1846, [재위] 1831~1846)가 1839년에 발행한 자신의 교서 <인 수프레모 아포스톨라투스>(In Supremo Apostolatus)에서 노예제 비판을 반복한 일이 있긴 했지만, 미국의 가톨릭 교회는 --- 만일 공개적인 담론이 아니라면 --- 사실상 노예 소유주들의 이익을 지지하는 입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뉴욕의 주교는 오코넬의 청원서를 날조된 것으로 치부하면서, 만일 그 청원서가 진짜라면 법적 효력을 지니지 못하는 외국의 개입으로 보았다. 찰스턴(Charleston)의 주교는 가톨릭 전통이 노예 거래를 반대하긴 하지만 노예제 자체에 관해서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미국 내전: 1861~1865) 이전에 미국의 주교들 중 노예제 폐지론을 지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북전쟁 기간 중에도 미국의 주교들은 노예 소유주들의 미사 참석을 허락했다.
한 역사가는 제의주의적 교회들이 종교적 죄인들(sinners)보다는 종교적 이단자들(heretics)과의 분리에 더욱 집중했다고 관찰하기도 했다. 이 역사가는 성공회(Anglicanism,영국 국교회)와 루터교(Lutheranism)도 노예제를 수용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남부지역 성공회 주교 한명은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군대의 장군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회는 [영국의] 식민지 시대에 남부지방에서 기성화된 교회였기 때문에, 성공회의 노예제 용인은 종교적 전통 그 이상의 근거들을 갖고 있었다. 성공회는 그 어떤 교단보다도 토지 소유 상류층과 보다 부유하고 고학력의 농장주 전통 및 남부지방 전통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또한 '대각성 운동' 시기 남부지방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처음에는 노예제를 반대했지만, 19세기 전반 수십년 동안에 침례교와 감리교 전도사들은 남부지방 농민들과 장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노예제를 수용하는 태도로 변해 있었다. 남북전쟁 무렵, 침례교와 감리교는 노예제 문제로 인해 지역별 연합회로 갈라지기도 했다.(주25)
오코넬이 실패한 이후, '미국 [노예제] 폐지 연합회'(American Repeal Associations)는 붕괴했다. 하지만 개리슨주의자들은 미국 개신교도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가졌던 "깊은 적대감"(bitter hostility)으로 돌아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정당들이 붕괴되는 와중에서 노예제 반대론자 중 일부가 토착주의(nativism: 이민 배척주의) 운동인 노우 낫싱(Know Nothings: [역주] 조직의 비밀주의에서 붙여진 이름. 특히 독일 및 아일랜드계 가톨릭 교도 이민자를 배척하는 세력이었음) 운동에 합류하긴 했지만, 에드먼드 퀸시(Edmund Quincy: 1808~1877)는 그 운동을 급성장하면서 진정한 이슈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또한 '노우 낫싱'이 주도한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 의회는 개리슨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개리슨은 그들이 신앙의 자유에 관한 근본적인 권리를 위배하는 자들이라면서 계속해서 반대했다.
노예제 폐지 운동은 자유 신분의 흑인들의 활동과 함께 더욱 강화됐다. 특히 흑인 교회에서는 노예제에 관한 이전의 성서적 정당화가 <신약 성서>와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흑인 활동가들과 그들의 저술을 흑인 공동체 바깥에서 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부 호의적인 백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백인 활동가 중 특히 명성을 얻은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선전가가 된 사람은 바로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었다. 웅변가들을 발굴하려는 개리슨의 노력은 결국 노예 출신의 프레데릭 더글라스를 발견해냈고, 더글라스는 마침내 그 자신의 권리에 관한 저명한 활동가로 성장했다.
(주25) Dooley 11–15; McKivigan 27 (ritualism), 30, 51, 191, Osofsky; ANB Leonidas Polk. |
3.8.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의 북미 교구(North American Diocese)는 19세기 중반 무렵에 본부를 알래스카(Alaska)에서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옮겼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다시금 뉴욕으로 본부를 옮겼다. '러시아 정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 동부에서 정교회에 대한 거대한 '합동 동방 가톨릭 교도'(Uniate: [역주] 로마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인정하면서 그리스 정교 고유의 전례와 관습을 지킴) 운동이 일어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이 운동은 미국의 정교회 신자들의 수를 증가시켰는데, 미네소타(Minnesota) 주의 미네아폴리스-세인트 폴(Minneapolis–Saint Paul) 대교구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로서 정치적으로 강력했던 인물인 존 아일랜드(John Ireland: 1838~1918)와 [동방 가톨릭 교회(Eastern Catholic Church)의 한 분파인] 루테니아 가톨릭 교회(Ruthenian Catholic Church) 사제로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물인 알렉시스 토스(Alexis Toth: 1853~1909) 사이의 갈등을 초래했다.
아일랜드 대주교는 토스 사제가 제출한 신임장 수령을 거부했다. 그 신임장은 토스 신부가 자신의 조상들의 소속 교회였던 정교회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 대주교가 토스 신분의 제안 수령을 거부하자, 도리어 북미 지역의 여타 '합동 동방 가톨릭'의 수많은 교구들(=소교구들)이 토스 신부의 지도 하에 정교회로 복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존 아일랜드 대주교는 아이러니하게도 때때로 "미국 정교회의 아버지"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러한 '합동 동방 가톨릭' 교구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러시아 정교회 북미 교구를 통해 정교회의 일원이 됐다.
또한 거의 같은 시기에 많은 수의 그리스 및 여타 정교회 교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왔다. 이 시기에 북미에 존재했던 모든 종류의 정교회 신자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북미 교구를 통해 '모스크바(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Patriarch of Moscow)의 오모포리온(omophorion: [정교회 대주교가 착용하는 영대로서] 교회의 권위와 보호를 상징) 하에 단결했다. 이러한 단결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이었다. 왜냐하면 북미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북미 교구 외에는 다른 교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시작하던 무렵에 북미 교구의 수장은 훗날 모스크바 정교회 총대주교로 즉위하게 될 티혼(Patriarch Tikhon of Moscow: 1865~1925) 주교였다. 러시아 정교회 북미 교구의 보호 하에서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지닌 정교회 신자들이 러시아계 및 비-러시아계 사제들을 통해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성(聖) 브루클린의 라파엘(Raphael of Brooklyn: 1860~1915)의 감독회의적 지도력 하에서 시리아계 아랍인 선교단도 설립됐다. 브루클린의 라파엘은 북미에서 최초로 성자로 시성(諡聖)된 정교회 주교였다.
3.9. 자유주의 신학
"사회의 세속화"(secularization of society)는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시대의 영향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종교적 규율을 준수하는 이들의 비율이 유럽보다 높으며, 여타 서구 국가들에 비해 미국 문화는 보수적인 편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부분적으로 기독교적 요소에서 기인한다.
일부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Liberal Christianity 혹은 liberal theology)이라고 정형화한 움직임은 <성경> 해석에 관한 새로운 비판적(=합리적) 접근방식을 교계에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19~20세기 기독교 내에 있었던 일련의 운동들과 이념들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새로운 태도들은 명확해졌고, 기독교의 정통설로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돼던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관행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미국의 교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빠르게 성장한 요소였다. 교단들 내부에서 자유주의 파벌이 성장했고, 상당한 양의 세미나들을 개최하여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교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반대의 양상이 나타나, 미국의 보수 진영이 교계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그들이 개최하는 세미나들도 늘어나게 된다.
3.10. 기독교 근본주의
기독교(=개신교) 근본주의(Christian fundamentalism)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나타난 운동으로서,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의 영향력 및 현대 기독교에 나타나는 성경 원전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거부했다. 개신교 내 보수 진영은 자유주의 그룹들이 자신들이 근본적인 요소로 간주하는 교리들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기독교 정체성 유지에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신조들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교설들을 "근본적인 것들"(fundamentals: 펀더멘털즈)로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이라는 용어도 파생됐다.
근본주의자들은 특히 <성서>의 해석과 관련하여 비판적(=합리적) 접근방식을 취하는 것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세속적인 과학적 가정들이 자신들의 교회로 침투해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다양한 교파들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세력은 성장했고, 역사적 기독교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대한 독자적인 저항 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은 2가지로 분열했다. 이후 '근본주의'라는 명칭은 보다 소수면서 보다 강경한 그룹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고, 보다 온건하면서 가장 최초의 이념들을 견지한 그룹들은 '복음주의'로 불리게 됐다.
3.11. 로마 가톨릭
* 이 부분의 상세한 정보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의 역사'(History of Roman Catholicism in the United States) 및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 in the United States) 항목을 참조하라. |
1850년경, 로마 가톨릭은 단일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에서 최대의 교파가 됐다. 1860~1890년 사이 이민자들로 인해 미국의 로마 가톨릭 신자 수는 3배로 증가했고, 1890년대 말에 신자 수가 700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규모의 가톨릭 이민자들은 아일랜드, 독일 남부, 이탈리아, 폴란드, 동유럽에서 왔다.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가톨릭의 정치적 힘은 커졌고 문화적 표현도 더욱 확대됐다. 그에 따라 가톨릭의 "위협"(menace)에 대한 두려움도 동반해서 커지게 됐다. 19세기에 흐르던 적대감이 약화되면서, 미국 개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이 정부의 통제권 장악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세력이 정부에 대해 너무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공포가 20세기로도 이어졌다.
3.12. 반(反) 가톨릭주의
* 이 부분의 상세한 정보는 '반-가톨릭주의'(Anti-Catholicism) 항목을 참조하라. |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이민자들의 유입에 경각심을 갖게 되면서 미국의 반-가톨릭 반감은 19세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의 일부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선민(God's chosen people 혹은 people of God)이라 믿었는데, 그들은 <요한계시록>(Book of Revelation)에서 말하는 '종말의 시기'(end time: 마지막 때)를 두려워하면서 가톨릭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빌론의 창녀(Whore of Babylon)라고 주장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주26)
1840년대에 유명해진 토착주의(=이민 배척주의) 운동은 반-가톨릭의 광란(frenzy)을 일으켜 집단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고, 가톨릭 교회의 자산들이 불타거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살인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주27) 이러한 폭력사태는 가톨릭이 미국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을 그 기반으로 했다. 특히 미국의 세금인상과 폭력 및 질병의 확산이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토착주의 운동은 1850년대에 '노우 낫싱'이란 당명의 민족주의 정치 운동의 형태로 모습을 나타냈다. 이 정당은 제13대 대통령이었던 밀라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1800~1874, [재임] 1850~1853)를 1856년 대선 후보로 추대했지만 당선에는 실패했다.
가톨릭 교구 부설 학교(Catholic parochial school) 시스템은 19세기 초부터 중반에 걸쳐 발전했는데, 부분적인 이유는 미국의 공립학교들에서 나타난 반-가톨릭 편향성 때문이었다. 반면 보다 최근에 개신교 학교들이 새롭게 설립되는 붐이 일어난 것도 그와 유사하게 때때로 공립학교들에서 --- 창조론(creationism)과 반대되는 --- 진화론을 가르치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부분 주들은 "블레인 수정안"(Blaine Amendments)으로 불린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조항은 교구학교들에 세금을 이용해 재정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교구학교들은 1840년대 이후 아일랜드로부터 가톨릭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온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2002년 미국 대법원(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SCOTUS)은 이 수정안들을 부분적으로 기각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론상 어떤 학생이 종교 학교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 학생에게 세금을 이용한 바우처(=인환권)가 지급되는 것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2009년 현재, 미국의 어떤 주의 학교 시스템도 이 판결에 맞춰 법률을 개정하지는 않았다.(주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