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비평 (사본 문제)
인쇄된 히브리어 성서의 본문은 자음, 모음 기호, 가락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모음 기호와 가락은 7~9세기 마소라(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학파가 만들어서 자음 본문에 붙인 것이다. 손으로 쓴 사본에는 여러 가지 오기가 들어 있다. 유형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성서 번역).
잘못 듣기
비슷하게 발음되는 낱말을 잘못 들어서 생기는 오기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부정사(lo⁾)와 인칭대명사 여격 그에게(lo)의 혼용, 후음 헷(ḥet)과 마찰음 카프(kaf)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흐(aḥ : 형제)와 아크(akh : 반드시)의 혼용 등이 여기에 속한다.
잘못 보기
비슷하게 생긴 글자와 낱말들 사이에서 오기가 발생한다. 베트(bet : 안, 속)와 카프(kaf : ~처럼) 사이의 혼용이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와 마소라 본문 〈이사야〉에서 많이 발견된다. 자음 글자의 자리가 뒤바뀌는 자순도치(字順倒置)의 오기도 있다. 키르밤(qirbam : 그들의 속 생각)이 키브람(qibram : 그들의 무덤)으로 바뀐 예가 〈시편〉에서 발견된다. 자음 글자나 낱말이 중복되는 중복오사(重復誤寫 Dittograpy) 현상도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와 마소라 본문 〈에제키엘〉 등에서 확인된다. 겹쳐 나오는 자음 글자나 또는 낱말이 우연히 탈락되는 중자탈오(重字脫誤 Haplography) 현상도 사해 두루마리 〈이사야〉에서 발견된다. 유사한 어두나 어미를 가진 2개의 구나 절이 서로 몇 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을 때, 사본을 베끼는 사람의 눈이 그 몇 줄을 뛰어넘기 때문에 생기는 탈락이 있다. 사본에서는 이러한 유사문미(類似文尾 Homoioteleuton)나 유사문두(類似文頭 Homoioarchton)로 인한 본문 탈락현상도 발생한다. 〈사무엘 상〉 14장 41절의 마소라 본문을 70인역이나 불가타 역과 대조해볼 때, 마소라 본문에서 이런 유형의 탈락이 많이 발견된다.
주석상의 문제
같은 자음 본문을 어떻게 발음하여 읽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본래 히브리어 성서 본문에는 모음이 없었으므로 DBR 같은 글자를 마소라 본문 〈호세아〉에서 보듯이 디베르(DiBeR)로 읽으면 '그가 말했다'가 되고, 70인역 〈호세아〉에서 보듯이 데바르(DeBaR)로 읽으면 명사 '~의 말'이 된다. 히브리어 성서에는 본래 낱말과 낱말 사이에 구분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다른 뜻을 읽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에 나오는 BBQRYM은, 마소라 본문에서 읽듯이 바베카림(BaBeQaRYM)으로 읽으면 '황소를 부려서'라는 뜻이 되고, 바바카르 얌(BaBaQaR YaM)이라고 읽으면 '황소로 바다를'이라는 뜻이 된다. 가끔 약자가 나오는데 그 약자를 잘못 해독한 경우도 있다. 마소라 본문 〈사무엘 하〉 1장 12절, 〈에제키엘〉 12장 23절, 〈아모스〉 3장 9절 등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마소라 본문과 70인역을 비교할 때 확인된다.
고의적 변경
사본을 복사하던 서기관들이 난해한 낱말을 설명하기 위해 쉬운 말로 난외에 주석을 단 것이 본문 안으로 들어간 경우가 있다. 때로는 사본을 복사하는 서기관이 두 사본을 앞에 놓고 비교해가면서 복사하다가 서로 다른 낱말이나 구절이 있을 때 그 이문을 융합시키는 이문융합(異文融合 conflation) 현상도 있다.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역사를 보면 본문을 정확하게 베끼고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세기 중엽에 나온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Letter of Aristeas)에 보면, 그리스어 70인역의 원본 문제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는 오기가 많은 모세5경 사본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보관하고 있던 '성전 두루마리'가 권위있는 사본이라는 언급이 있다. 랍비 전통에서도 제2성전 시대에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최종 정착을 위한 본문비평이 성전 두루마리를 근거로 실시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본문과 사본들
70인역 성서의 원본
70인역 성서란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전설적으로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70명 또는 72명의 번역자가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번역자들이 100년 이상 걸려서 번역한 것이다. 70인역이 사용한 히브리어 원본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르며 70인역의 히브리어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마리아 5경
사마리아 5경은 히브리어 본문의 교정판이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서체는 마소라 본문에 사용된 네모꼴 히브리어 서체(square script), 일명 아시리아 서체(Assyrian script)가 아니라, 페니키아-고대 히브리어 서체(Phoenician-Old Hebrew script), 즉 고대 히브리어 서체(paleo-Hebrew script)로 씌어져 있다. 마소라 본문과 5경을 비교해볼 때 약 6,000여 곳의 차이가 있으나 철자상의 차이가 그 주종을 이루고, 다르다고 해도 본문의 의미상 다른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마소라 본문과 다른 6,000여 곳 중에서 1,900여 곳은 70인역과 일치한다. 마소라 본문과의 차이점 중에서 극히 일부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학을 반영하는 고의적 변경도 있다(출애 20 : 17 끝부분에 그리짐 산에 성소를 지으라는 말이 첨가됨).
쿰란 본문과 다른 두루마리들
유대 광야 두루마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BC 150년경의 십계명과 〈신명기〉가 기록된 '나시 파피루스'가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러나 유대 광야의 여러 동굴에서 두루마리가 발견되면서부터 BC 3~2세기의 것으로 추산되는 180여 종의 서로 다른 〈구약성서〉 사본들이 공개되었다. 이 사본들은 가죽과 파피루스 위에 씌어진 것들이다.
쿰란의 제1동굴에서는 2개의 〈이사야〉 사본이 발견되었다(→ 쿰란 종파). 하나는 BC 100~75년경의 것으로 추산되는 〈이사야〉 전체가 기록된 1QIsab이고, 다른 하나는 〈이사야〉의 일부만이 기록된 1QIsaa이다. 전자는 마소라 본문 〈이사야〉와 차이가 많고, 후자는 몇 개의 차이가 있지만 마소라 본문과 매우 가까운 본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쿰란 제4동굴에서는 〈창세기〉 단편 5개, 〈출애굽기〉 단편 8개, 〈레위기〉 단편 1개, 〈신명기〉 단편 14개, 〈여호수아〉 단편 2개, 〈사무엘〉 단편 3개, 〈이사야〉 단편 12개, 〈예레미야〉 단편 4개, 소예언서 단편 8개, 〈잠언〉 단편 1개, 〈다니엘〉 단편 3개 등이 발견되었다. 쿰란 제11동굴에서는 〈레위기〉 단편을 포함하여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본문 형태를 지닌 〈시편〉의 마지막 1/3이 발견되었다.
이들 사본들은 그 연대가 BC 250~200년에 이른다. 이들 중 더러는 70인역에 반영된 히브리어 본문과 그 형태가 유사하고, 더러는 사마리아 5경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전(前)마소라 본문 형태와 유사하다. 이것은 마소라 본문이 7세기경에 확정되었다고 하지만 마소라 본문이 이미 기원전부터 현재의 본문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조금씩 개정되어왔을 가능성을 반영한다. 유대 광야에서는 쿰란 외에도 마사다 (73년에 붕괴된 유대인의 요새)에서 〈레위기〉·〈신명기〉·〈에제키엘〉·〈시편〉 등의 단편이 발견되었고, 알 무라바아트에서는 〈출애굽기〉·〈레위기〉·〈이사야〉·소예언서 등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나할 레베르에서도 약간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사본의 본문 형태는 마소라 본문 형태와 거의 같다.
마소라 본문들
현재 남아 있는 히브리어 성서 코덱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카이로 예언서'이다. 이것은 895년에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에서 모세스 벤 아셰르가 쓰고 모음 기호를 붙였다. 그다음으로 오래 된 것은 레닌그라드 코덱스인 '후기 예언서'(916경)이다. 벤 아셰르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모음 기호가 티베리아 마소라 체제를 따른 것이다. 그다음의 것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알렙포 코덱스'이다. 솔로몬 벤 부야가 썼고,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가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마소라 주기를 붙인 것으로서,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 사본은 〈구약성서〉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으나 모세5경과 성문서 부분이 거의 소실되고 예언서 부분만 그대로 남아 있다.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의 체제를 따르는 또다른 두 사본이 있다. 하나는 BM(4445) 사본으로서 모세5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9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다른 하나는 레닌그라드 사본으로서 〈구약성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MSB 19a 사본인데, 이것이 완성된 것은 1008년이다. 이밖에도 1105년에 씌어진 예언서 로이클린 코덱스(Codex Reuchliana of the Prophets)가 있다.
마소라 자료들의 대조
일찍이(1050 이전) 미샤엘 벤 우지엘이 자신의 책 〈키타브 알 훌라프 Kitab alHulaf〉에서 벤 아셰르의 마소라 본문과 벤 납달리의 마소라 본문 사이의 차이를 비교한 바가 있다. 솔로몬 예디다 노르지는 〈민하트 샤이 Minhath Shai〉로 알려진 본문비평주석에서 방대한 양의 마소라 본문 자료들을 비교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1626년에 완성하여 1742년에 나온 '만투아 성서'(Mantua Bible)에 함께 인쇄되어 나왔다. 벤저민 케니콧은 615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52개의 인쇄본을 수집하여 2권으로 편집했다(1776~80). 조반니 베르나도 데 로르시는 731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300개의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고(1784~88), C.D. 긴스부르크는 70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17개의 초기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다(1908~26).
인쇄본들
1488년까지는 랍비의 주석성서에 포함되는 낱권들만 나왔다. 〈시편〉(1477)·〈모세5경〉(1482)·〈예언서〉(1485/86)·〈성문서〉(1486/87) 등이 이탈리아에서 인쇄되어 나왔다.
〈구약성서〉의 첫 인쇄본은 1488년에 이탈리아의 손시노에서 나온 것이다. 이어서 1491, 1493년에는 나폴리에서, 1494년에는 브레스키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인쇄되어 나왔다. 이상 3권은 유대교 쪽에서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교 쪽에서 나온 첫번째 〈구약성서〉는 스페인의 히메네스 대 시스네로스 가 감수한 전 6권의 ' 콤품루툼 학파 대역 성서'(Complutensian Polyglot)이다. 이중 4권에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온켈로스의 아람어역(타르굼) 모세5경이 들어 있다. 알칼라에서 인쇄되었으며(1514~17), 1522년에 유포된 것으로서, 이 성서는 서유럽에서 히브리어 본문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히브리어 자음 본문에 모음 기호와 억양 부호가 첨가된 본문을 중심으로 아람어역 타르굼이 대조되어 있고, 중세기에 나온 유대교 랍비들의 주석이 함께 편집되어 있는 성서를 '랍비 성서'라고 하는데, 최초의 '랍비 성서'는 펠릭스 프라텐시스가 편집하고 다니엘 봄베르크가 출판한 것(1516/17)이다. '제2 랍비 성서'는 야코프 벤 하임 이븐 아도니야가 편집하고 봄베르크가 출판한 것으로서,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는데(1524/25),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 전해져온 히브리어 성서의 표준판이 되었다. 이 성서에는 그 이전의 어떤 편집에서도 볼 수 없던 광범위한 마소라 주기 곧 본문비평 자료들이 들어 있다. 다만 불행하게도 벤 하임이 사용한 사본들이 후대의 것이고, 히브리어 본문이 단일 전승을 반영하지 못하며, 여러 사본의 본문을 절충하여 만든 본문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런던에서는 긴스부르크가 편집한 히브리어 성서의 비평적 편집본이 나왔다(1894, 1908, 1926). 마소라 본문과 인쇄되어 나온 여러 사본들 및 고대역들과 대조하여 개정된 것이다. 긴스부르크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교 학자였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긴스부르크가 편집한 이후에 독일의 성서학자 루돌프 키텔과 파울 칼레가 편집한 히브리어 〈구약성서〉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가 나왔다. 이 책은 처음 2판에서 벤 하임의 '제2 랍비 성서' 본문을 사용했으나, 알브레히트 알트와 오토 아이스펠트가 편집한 제3판(1937)부터는 벤 하임의 본문 대신 레닌그라드 코덱스(B 19a)를 사용했다. 이 편집본에는 2종류의 본문비평 장치가 있다.
하나는 편집자의 생각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항이나 극히 경미하다고 생각되는 사본상의 차이점을 열거해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비평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나 편집자의 판단에 사본상의 중대한 차이점으로 생각되는 사항들 및 편집자 자신의 비평적 견해를 적은 것이다. 1957년판에서는 유대 광야 두루마리와 비교한 것이 첨가되었다. 1960년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또다른 비평적 편집본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기본 본문으로는 알레포 코덱스의 히브리어 본문을 사용했으며, 사본 비교, 고대역 비교 등이 포함된 본문비평 장치는 현재까지 나온 다른 어느 비평적 편집본보다 더욱 더 방대하고 철저하다. 1965년에 〈이사야〉 견본이 나왔다. 가장 최근의 비평적 편집본은 K. 엘리거와 W. 루돌프가 편집한 히브리어 성서인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 1967/77)이다. 이것은 키텔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3판을 거의 40여 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학계에 내놓은 것이다. 편집진과 본문비평장치 집필진이 거의 다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작성 원칙과 배열방식도 완전히 그 면모를 바꾸었다.
초기 역본들
아람어 타르굼
BC 5,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람어 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와 디아스포라(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아람어를 쓰게 되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때 통역자(메투르게만)가 등장하여 예배 때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 관련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통역 내용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졌고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
율법서 타르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온켈로스의 타르굼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타르굼(Babylonian Targum)이다. 이것은 본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개정되고 크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9세기 직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다른 여러 종류의 타르굼들을 제치고 독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문자적인 번역이면서도 랍비들의 주석을 번역에 반영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타르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나단의 타르굼이다. 요나단은 14세기경부터 생긴 이름으로서 예루살렘 타르굼(Targum Jerusalem)을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TJ'를 요나단의 타르굼(Targum Jonathan)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위요나단 타르굼). 이것은 옛 팔레스타인 타르굼(Old Palestinian Targum)과 온켈로스의 초기 번역을 뒤섞은 것이다. 랍비들의 주석·설교·교훈 등이 번역에 많이 첨가되어 있다.
사마리아 5경을 번역한 타르굼도 있다. 유대인의 타르굼이 문자적인 번역인 데 비해 이것은 좀 자유스러운 번역이다. 본문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적은 없다. 예언서 타르굼도 본래는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개정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BC 1세기말에서부터 AD 1세기초까지 활동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의 제자 요나단 벤 우지엘의 번역으로 본다. 이것이 엄격한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온켈로스에 의존한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성문서의 아람어 역은 모두 5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70인역성서(LXX)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배경에 관해서는 '아리스테아의 편지 '에 언급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가 이집트를 다스릴 때 기록된 편지임을 드러내려고 당시 관리로 있던 아리스테아스라는 그리스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학자들이 와서 히브리어 율법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된 사정을 언급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가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필로·요세푸스·〈탈무드〉·교부들의 글에도 나타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편지의 저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율법서 번역이 끝난 다음에 이와 같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70인역이란 BC 3세기 중엽에 번역된 구약의 모세5경 곧 율법서 부분을 일컫는다.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그리스어로 번역되기까지는 그후 1세기 이상이 걸렸다고 보고, BC 1세기까지는 번역이 완료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하여 70인역 성서는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이방 세계에 알리는 통로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70인역을 자기들의 성서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유대교에서는 70인역을 버리고 자기들의 히브리어 본문성서를 다듬는 일에 더 열성을 보였다. 제2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히브리어 본문이 편집되면서, 히브리어 본문과 70인역 사이의 차이점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되자,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읽던 사람들 쪽에서 최신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