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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기금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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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다방 스크랩 28.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 요한 스트라우스 2세 왈츠곡
아름다운세상(준경) 추천 0 조회 115 09.01.04 19: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8.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문이 확 열리면 준마들이 뚜벅뚜벅, 금슬장식의  기마병을 태우고 당당하게 들어온다.
이렇게 시작되는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세계인에게  힘찬 새해를 맞게 해준다.
30년 전만 해도 유럽지역에만 생중계되던  신년음악회, 이젠 동, 서양 오지에도 위성중계되어, 멋진 멜로디로  동시에 들썩거리게 한다.
50여 년 동안 신년음악회가 열린 뮤직페라인 홀의  천장과 벽, 기둥의 수려한 장식, 조명도 현란해 보인다.
 
어제와 다른 오늘,  아니 작년과 다른 새해가 왔음을 지구인들에게 일깨우고 신비와 감탄으로 설레게 한다.
해마다  레퍼토리는 왈츠인데 그중에서도 꼭 빼놓지 않는 곡을 발견했다.
힘찬 ‘라데츠키  행진곡’과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An der sch nen blauen Donau) ’왈츠로
이  두 곡은 마지막이거나  아니면 끝에서 두번째로  연주된다.
연주 홀 청중과 함께 신나게 환호하고 ‘라데츠키 행진곡’에서는 박수치며 어깨까지 들썩거리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가 시작되면  으레 숙연해져서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잔 물결 같은  바이올린 서주와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관현악 연주로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는  리듬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지휘자에 따라 다른 강도로. 
 
1980년대에 일곱 차례, 1990년대에도 두 차례나 지휘했던 로린 마젤은  이지적인 지휘로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 되게  이끌었다.
그러나 인상적인 두 거목이 잊혀지지 않는다.
1987년도의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여든 살의 완만한 듯한 제스처였으나  싱싱한 선율을 끌어내었고,
1990년도의 레너드 번스타인은 관중석에선 보이지 않는 받침대에 의지하고 지휘했으나 우미한 선율을 창출해  냈다.
젊은 날의 불꽃과 날카로움 대신  부드럽고 진지하여 과연  거목의 의연함이 느껴졌다. 
특히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를 지휘할 때는 감정을 누르고 승화시키려는 의지가 감지되었다. 두 분 다 이제는 고인.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는  여느 왈츠와는 다른 유래가 있다. 
 
오스트리아 제2의 국가 격으로 신년음악회라든다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는 꼭 연주되는 음악이라는 사실을 몇 년 전에야 알았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함께 오랜 동안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그러나 1866년, 이웃 나라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민들의 의기가 소침해져 있을 때였다.
당시  남성합창협회의 지휘자 헬베크가 국민들의 기분을 일신시키고  용기를 주려고 요한 슈트라우스2세에게 합창곡 작곡을 의뢰했다.
슈트라우스2세는 이미 작곡가로서  ‘왈츠의 왕’으로 인정받고 궁정무도회의 지휘자로 활동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흥취를 불러일으키는 유려한 왈츠는 많이 썼지만, 합창곡과 같은  성악곡은 자신이 없어서 거절하다가 할 수
없이 승낙을 했다.
그리고는 구상을 하려고 비엔나 교외를 거닐었다.
 
비엔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도나우강은 우리 한강처럼  유구한 역사를 자켜본 강이다.
알프스에서 시작되어 북쪽  비엔나를 지나는 긴 강. 슈트라우스2세는  비엔나 교외에서,
사람들의 고통과 불안과는 관계없이 봄을  맞아 생동하며 변화하는 산과 강을 보았다.
나라의 흥망과는 관계없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거기서 비엔나의 마음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세상 번뇌를 견뎌내리,
기품이 있고 젊음이  넘치는 그대와 만나리,
우리들 마음 의지할  곳,
도나우강 기슭,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기슭...
이렇게 시작되는  칼 베크의 시가 생각나서 제목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로 했다.
 
곡은 자신이  쓰고 가사는 칼 베크의 시를 바탕으로 게르네르트가 다시  썼다.
그런데 남성합창곡으로는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후 편곡된 관현악  연주로 대성공을 거두고 단기간에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오랜 동안 유럽동란에  시달리면서 위안을 얻기 위해 왈츠가 성행했던 오스트리아, 
1월과 2월의 무도회 계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왈츠이다.
힘찬  합창곡으로는 왈츠다운 맛이 덜해서 유연한  관현악 연주로만 무도회장이나 신년음악회 등 축하행사장에서 연주된다.
 
현대의 빈  사람들은 비록 가사 없는 연주에 맞춰 춤추면서도, 조상들이 패전으로 침체했다가  활력을 되찾은 사실을 상기할까.
19세기, 덴마크 국민들이 프랑스, 영국, 독일의 침공으로 피폐해진 땅에서 국민들이 허탈한 상황에 빠졌을 때 활기를 회복시켜준 것도 
그루빈트라는 애국자의 노래였다.
방방곡곡 다니며  그동안 보여줬던 국민들의  용기와 애국심을 찬양하고, 
용사 ‘필터 윌모스’를 칭송하는 노래 ‘소녀여 이리 오라’를  써서 합창하게 했다.
덴마크는 그 결과 국민들이 단결,  노력하여 잘 살게 됐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힘차고 늠름한  연주를 들으면서 희망을  품고,
‘소녀여 이리  오라’를 부르면서 용기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성실하게 제2의 한강의 기적을 꿈꾸어야 할  때다.
올해는 제2의 도약을 꿈꾸는 물결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출렁거리기를.
 
<유혜자 - 음악의 숲에서 - 순수의 시절에 들어야 할 클래식 음악 55 中에서>
 
 
 

<동영상 출처 : size 75.8M
 
Orchestra of Vienna Valksoper
Conductor : Peter Falk
 
관현악
 
비엔나 소년합창단
 
 


비엔나적 기질의 달콤한 선율의 많은 요한 스트라우스 왈츠곡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걸작,
1867년 궁중 무도회 악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무렵에 완성되었다.
낙천적이고 온화하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해서 즐기려고 하는 빈 사람들의 기질을 푸른 다뉴브강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하여 잘 묘사되어 있다.

악곡에 대하여
서주-안단티노 A장조 6/8
제1왈츠- D장조 두도막 형식 3/4
제2왈츠-D장조 세도막 형식 3/4박자
제3왈츠-비바체G장조 두도막 형식 3/4박자
제4왈츠-F장조 세도막 형식 3/4박자
제5왈츠-A장조 두도막형식 3/4박자
후주 - 이것은 두 번 계속되는데 합창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제5왈츠의 B부터 갑자기 힘차게 연주되다가 즉시 끝난다.
 
전쟁의 폐허 위에 꽃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의 화창한 선율
음악의 도시 빈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꿈과 그리움의 고장이다.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시절 합창단원으로 봉사했던 성 스테판 대성당의 아름다운 고딕식 건물 첨탑이 지금도 빈의 상징처럼
우뚝 솟아 있고 여러 차례 입은 파멸적인 전화에도 불구하고 옛날 그대로의 거리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화려한 궁전, 고색창연한 교회, 우아한 정원이 한껏 번영을 누렸던 여러 시대의 문화와 예술의 정수를 피력해 준다
또 모짜르트가 지휘했던 극장이며 베토벤이 거닐던 길.
브람스가 즐겨 찾던 커피 집이 그대로 남아서 음악애호가의 마음을 야릇한 향수로 들뜨게 만든다
이렇듯 아름다운 역사의 도시 빈과 끊을 수 없는 깊은 유대를 가진 음악이 요한 쉬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11(1825∼ 1899)를
중심으로 한 많은 작곡가의 「빈 왈츠Wiener Waltz」이다
끊임없이 유려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멜로디, 솟구치는 리듬의 소용돌이. 빈 왈츠야말로 꿈의 도시 빈의 살아 있는 혼이다
전쟁의 폐허 위에 꽃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화창한 선율.
 
1866년 8월. 오스트리아는 이웃나라 프로이센과 전쟁을 일으켰다.
오래 전부터 독일 통일을 꾀해온 비스마르크의 계책에 말려들어 일어난 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장비도 사기도 프로이센 군의 적수가 못되었다.
사도바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적군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성밖까지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마침 프랑스가 중재에 나선다. 결국 오스트리아 군은 항복하고 전쟁은 7주만에 끝이 났다.
전쟁에 진 타격은 사람들의 마음을 실망과 슬픔 속에 깊숙히 잠기게 했다.
빈의 거리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상이병과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여인들의 탄식으로 그 밝던 분위기를 깡그리 잃고 말았다
그토록 좋아하던 음악과 춤도 간 데 없이 사라졌다 .
이때 처참한 패전의 정신적 폐허 빈에 어떻게 하면 즐겁고 쾌활한 노래를 다시 한번 살려낼 수 있을까 고심하는 사람이 있었다
빈 남성 합창단의 지휘자 요한 헤르베크 」Johann Herbeck(1831∼1877)였다.
이 사람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발견하여 세상에 소개한 사실로도 유명하다.
헤르베크는 자기의 뜻을 살릴 수 있는 작곡가는 그 무렵 흥겨운 왈츠를 많이 만들고 있는 요한 쉬트라우스 2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곧 그에게 빈 사람들의 마음을 북돋아 밝고 쾌활하게 만들 합창곡을 의뢰했다
쉬트라우스 2세도 헤르베크와 동감이었으므로 선뜻 응했다. 아직 합창으로 왈츠를 작곡한 사람이 없었다.
쉬트라우스 2세가 합창곡 의뢰를 받았을 때, 문득 한 무명 시인 Karl Beck의 시 한 구절이 떠올라왔다
대강 뜻은 다음과 같다.
 
''나는 괴로워 슬피 우는 네 모습을 본다
나는 아직 젊고 영광으로 가득한 네 모습을 본다
마치 금광 속에 빛나는 황금처럼 거기 진실은 자란다 도나우 강변에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변에''
 
대자연 속에서 슬픔과 괴로움을, 기쁨과 소망들 기쁨과 소망을 모두 한데 감싼 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변함없이 도도히 흐르는 도나우.
패전의 고통을 이기고 힘차게 다시 일어나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쉬트라우스 2세는 이 시에 왈츠 합창곡을 만들어 제목을「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라고 불리리라 마음 먹었다.
이윽고 1857년에 완성한 관현악 반주의 남성 합창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An derschonenblauen Donau op 317」 는 그해 2월15일.
헤르베크의 지휘로 빈의 디아나잘에서 초연 되었다
곧 이어 여름께 파리 만국박람회 개관기념 연주에 초청된 쉬트라우스 2세는 이 곡을 연주하여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제는 빈뿐만 아니라 온 유럽에 유명한 곡이 되고 말았다.
곡은 안단티노의 긴 서주가 있고나서 D장조의 유명한 왈츠를 시작한다.
왈츠의 선율은 그밖에 4가지가 더 나타난 뒤 힘찬 후주로 끝난다 단순하고 명쾌한 선율의 아름다움은 언제 들어도 가슴 두근거리는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그 후 쉬트라우스 2세는 「빈 숲속의 이야기」. 「남국의 장미」. 「예술가의 생애」, 「봄의 소리」. 「빈 기질」.「황제 원무곡」.「술. 여자 그리고 노래」,「천일 야화」.「가속도」,「시트론 꽃피는 나라」 등의 걸작 왈츠를 써서 명성을 확고히 굳혔다.
그의 왈츠가 얼마나 유명했는지에 대해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파티에 쉬트라우스 2세의 초대를 받고 브람스가 참석했다.
쉬트라우스 부인이 "기념으로 여기 한마디 적어 주시겠습니까?" 하고 들고 있던 부채를 내밀었다.
브람스는 즉시 그 부채에「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멜로디를 적은 뒤. "애석하지만.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이 아닙니다"라고
토를 달고 한다.
쉬트라우스 2세는 왈츠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널리 공연되는 「박쥐」,「짚시 남작」을 비롯한 비롯한 오페레타를 16곡이나 썼다.
그가 아직 본격적으로 오페레타를 쓰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오페라 「호후만의 이야기」로 유명한 오휀바크 」Jacques Offenbach(1819∼1800)와 만나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오휀바크가 "반드시 오페레타를 작곡하십시오 틀림없이 성공할 테니까요!" 하고 권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그의 오페레타에도 우아한 왈츠와 즐거운 폴카가 넘치고 있다.
안동림 / 충주대 영문학과 교수


국민 왈츠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클래식 사상 최초의 ‘국제 히트곡’… 1867년 빈 남성합창단이 초연
오스트리아의 모든 방송국은 매년 해가 바뀌는 첫날 0시 정각에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방영해
새해를 알린다.
그런가 하면 새해 아침에는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이 곡으로 신년음악회의 서두를 장식하고, 이 신년음악회는 유럽 모든 지역과
미국에 위성으로 중계된다.
오스트리아 국민 대부분은 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비공식적인 국가(國歌)처럼 여기기 때문에 음악학자 에두아르트 한슬릭은
이 곡을 “가사 없는 애국적 국민가요”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왈츠가 오스트리아에서 이처럼 사랑 받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1866년 7월3일, 베네덱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참패한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긍지를 잃었고, 빈의 경제는 바닥을 쳤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예정돼 있던 여러번의 무도회는 돈이 훨씬 덜 드는 음악회로 바뀌었고,
이 때문에 빈 남성합창협회는 당시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이었던 요한 스트라우스에게 사육제 음악회의 합창을 위한 왈츠 작곡을
의뢰했다.
요즘 연주되는 곡에는 일반적으로 가사가 없지만 작곡 당시에는 합창곡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1867년에 빈 남성합창단이 초연한 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작곡가의 의도와는 달리 당시 빈의 정치·경제 상황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가사를 사용해 일부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생동감 넘치는 스트라우스의 음악은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1890년부터 이 곡은 조국의 푸른 강물과 아름다운 자연을 찬미하는 현재의 가사로 바뀌면서
오스트리아인들의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됐다.
 
비에니즈 왈츠 Viennese Waltz
-가장행렬 대신 번성한 왈츠 무도회
-전 세계로 생중계 되는 ‘오페라 볼’
-‘노숙자 볼’‘사냥꾼 볼’ 등 이색행사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비엔나에서 왈츠가 부흥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엄격한 어머니 역할을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1717~1780)은 카니발 기간 동안 가장 행렬을 비롯한 요란한 행사를 금지했고
귀족들에 한해서만 궁전에서 가면무도회를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후 ‘백성의 황제’로 불렸던 아들 조세프 2세는 모든 백성들에게 화려한 카니발행사를 허락했고 무도회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에는 가장 퍼레이드로 진행되는 요란한 카니발 행사가 드물고 1~2월이 되면 볼 시즌(Ball Season)을
맞아 거의 매일 무도회가 개최된다.
하지만 당시의 무도회는 신체의 접촉이 거의 없는 폴로네이즈, 양식화된 미뉴엣 등의 춤이 주 무대를 이루는 차분한 자리였다.
그래서 왈츠가 무도회에 등장한 초창기에는 남녀가 가까이 몸을 당겨서 추는 이 춤이 매우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그것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광경이었으면 한 공작은 “왈츠는 추는 여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정도였다.
그런 반발과 상관없이 왈츠는 대중화를 거듭해 1837년 합법성을 인정받았으며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무도회의
댄스가 되고 있다.
메인 홀 외에 부속실에서는 왈츠가 아닌 모던음악, 탱고, 디스코, 하우스 비트에 맞춘 댄스판이 벌어지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많았지만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 전통은 오프닝으로 처음 무도회에 참가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데뷔무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무도회가 상류층에서 사교계의 정식 데뷔무대였던 전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무도회 중에서도 비엔나 오페라하우스에서 진행되는 비엔나 ‘오페라 볼’은 전 세계 수십 만명의 시청자에게 생중계되는 비엔나
최고의 이벤트이다.
전통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사냥꾼들의 볼’, 노숙자들을 위한 ‘홈리스 볼’, 형편없는 음악에 볼썽사나운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나쁜 취향의 볼’ 등 각가지 주제의 다양한 볼이 진행되고 있다.
무도회를 사랑하는 비엔나 사람들은 새벽 2~3시까지 , 5시까지도 춤을 춘다.
그렇다고 춤만 출 수 있는가.
볼 시즌 동안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면 멋지게 차려입는 젊은 남녀들이 가판대 앞에서 게걸스럽게 핫도그를 먹어 치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왈츠  (Waltz)
월츠는 프랑스의 보르타(Volta)란 춤에서 기원하였다는 학설이 있으며 1178년 11월 9일 빠리에서 처음 추어졌다고 문헌에 남아
있으므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듯 하나, 실제로 빠리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보르타」란 원래가 「돌다」라는 뜻으로서 그 때의 춤은 원무(Round Dance)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의 어원은 프랑스의 봐르세(Volse), 독일의 왈저(Walser), 이태리의 왈즈(Walz), 영국의 왈츠(Waltz)등 모두가 빙빙돈다는 뜻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독일인들은 왈츠를 자기네의 지방무용인 「랭드라 : Landler」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왈츠가 유럽의 전지역에서 전성기를 이루게 된 것은 슈베르트나 스트라우스 등 그 외의 많은 음악 대가들이 불멸의 왈츠
명곡들을 작곡하였다. 19세기 무렵부터였으며 이러한 빠른 템포(1분간 60소절)의 왈츠는 라운드 턴(Round Turn : 360도의 회전)을
사용하는 로타리 왈츠(Rotary Waltz)였다.
19세기 중엽에는 요한 스트라우스 풍의 비엔나왈츠(Vienna Waltz)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에서 시작하여 대중화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에선 보스톤왈츠(Boston Waltz)란 것이 발생하여 많은 유행을 하게 되었다.
 
왈츠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Strauss Johann 1825-1899)

아버지(1804-1849)와 아들 성이 같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지요.
그래서 아버지를 슈트라우스 1세 아들을 슈트라우스 2세라고 합니다.
슈트라우스 부자는 비엔나 왈츠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완성시켰기에 아버지를‘왈츠의 아버지’, 아들은 ‘왈츠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입니다.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비엔나 왈츠의 기초를 닦아 아들에게 전해주었고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비엔나 왈츠의 정수를 이어받아 세계적인
음악으로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아버지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아들에게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아들 슈트라우스 2세는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19세 때에 이미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약하며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1849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버지의 악단을 인수하여 유럽 각지를 순방하며  왈츠의 거장으로서 명성을 높였습니다.
연말이면 베토벤의‘합창’이나 헨델의‘메시아’를 방송을 통해 자주 듣게 됩니다.
그와 함께 새로 시작되는 새해에 열리는 신년음악회마다 빠지지 않는 곡이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입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비엔나 왈츠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전쟁에서 패한 독일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심한 인플레와 전쟁배상금에 시달리던 독일에 등장한 히틀러는 왈츠를 장려하였습니다.
왈츠는 대표적인 춤곡인 만큼 집단의식을 고취시키고 단결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전쟁 후 사회불안을 틈타 집권한 나치정권은 국민통합에 음악치료의 효과를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왈츠가 지닌 음악의 사회적 효과는 매우 두드러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는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쳐 건조해진 가족의 분위기를 화목한 분위기로 적셔 줄 것입니다. 
 
주말 가족의 식사시간이나 휴식시간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권합니다.
음악을 통해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첨부파일 :
chemicla.wma (1.7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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