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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2:1-3(870) 인자와 성실함으로 2018.7.22
18세기 영국교회의 목사인 윌리엄 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성인(聖人)의 에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성인은 기도를 가장 많이 하거나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헌금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는 사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표로 받고 늘 그로 인해 마음에 하나님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월리엄목사님의 말을 빌어보면, 내가 무엇을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보다는 항상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찬양하는 그 사람이 바로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월리엄 목사님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유대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인간으로 하여금 완벽하게 창조하신 세계를 찬양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실 목적으로 인간을 가장 마지막에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곳곳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 외에 “그 이름을 높이라” 등,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 성도들의 모습에 대하여 숱하게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성경의 곳곳에서 명령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언제어디서나 성도들의 찬양과, 높임의 대상이며 찬송 받으실 만 한 충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때가 따로 없습니다. 무시로 찬양해야 하며, 하나님을 언제나 송축해야 합니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 3시, 6시, 9시로 기도 시간을 정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할 때와 취침 전에 찬양을 부르고 시편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항상 해야 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 온전하게 헌신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사용된 시편 92편은 안식일, 즉 주일을 맞이하여서 부르는 찬양시입니다.
시편을 보면 알겠지만, ‘시편’은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기쁠 때에 드려지는 찬양도 있지만, 어떤 시편 말씀을 보면, 온통 고난과 역경으로만 기록된 내용도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 중에 있을 때에,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고난과 역경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모습이 찬양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쁘고 좋을 때에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힘들고, 고난과 역경 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시편말씀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지요? 그것은 한글성경에서 1절부터 3절까지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이나 기타 번역본 성경에는 각 절이 따로 분리되어져 있습니다. 저는 왜 새번역 성경에서도 이 부분을 이대로 두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히 히브리어 성경에도 각 절이 구분되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1절은 “여호와께 감사하며, 오 지존자여, 주의 이름을 찬양함이 좋으니이다.” 2절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나타냄이(좋으니이다).” 3절은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주께 찬양함이 좋으니이다).”
이렇게 된 성경의 원문을 번역상으로 1절에서 3절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좀 더 내용을 함축시켜 놓았지만, 성도들이 읽기 쉬운 성경을 원했다면, 각 절을 분리하는 것이 더 좋았다는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
역상 23:30에는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며”라고 합니다. 아침과 저녁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 끊이지 않는 우리의 삶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1 상반절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등장하는 악기를 보세요. 십현금이라는 악기를 10줄로 만들어진 악기로 손가락으로 줄을 팅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비파와 수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세 가지 악기만 언급되고 있지만, 시편 기자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찬양하고”라고 하는 말에 사용된 히브리어 ‘자메르’입니다. 이 단어는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자메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악기를 동반하여 노래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찬양할 때에 어떻게 찬양합니까?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피아노와 신디사이저 그리고 기타를 가지고 찬양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떻게 찬양합니까? 손벽을 치면서 찬양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면서 내가 몸으로 드려지는 악기가 됩니다.
특히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라고 말합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 났을 때에 가장 먼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리면서, 아침마다 가슴에 벅찬 감격의 연속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인자하심”이란 용어는 성경에 106회나 나오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어질고 자애롭다”라는 뜻입니다. 간혹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자비, 인애, 긍휼”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자하신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보호하시는 은혜가 있기에 오늘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한 시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가장 많이 언급하고 찬양하는 것이 시 136편입니다.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이어 등장하는 26절 전체가 모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언급합니다. 계속 반복되는 구절은“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느끼고 싶다면, 시편 136편을 큰소리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나를 돌보시고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고 싶다면, 역시 시편 136년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자하신 모든 모습이 읽는 여러분들의 가슴을 뜨겁게 흔들고 요동치게 만들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현자(현명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민가와 뚝 떨어진 산기슭에 홀로 삽니다. 이 사람은 산에서 나는 약초를 캐어서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다가 진기한 보석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 후에 여기저기를 떠 돌면서 빌어 먹는 걸인이 현자의 집을 찾아왔고, 현자는 걸인에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정성껏 대접합니다. 걸인은 현자에게 귀중한 보석이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 진귀한 보물을 자신에게 달라고 애원합니다.
걸인의 말을 들은 현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보석을 걸인에게 줘 버립니다. 보석을 받아 던 걸인은 “이제 죽을 때까지 구걸하지 않고, 빌어먹지 않고,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행복한 생각을 하며 아침 일찍이 현자의 집을 떠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른 아침 걸인이 현자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자고 있는 현자를 깨어서 보석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어제 하루 종일 생각을 했는데, 당신이 나에게 주신 이 보석을 내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게 이 보석을 주지 마십시오. 대신 저에게 이 귀한 보석을 아낌없이 주도록 만들었던 당신의 그 자비를 제발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이 걸인은 보석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라, 보석을 뛰어 넘는 더 소중한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교훈은,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것이 먹고 자고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이지만, 재물만 바라보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오로지 재물만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내가 필요한 육신적인 것만 요구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려 드려야 하는 감사와 찬양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함을 맛 본 성도는 하나님의 인자함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입술에서 아침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찬양합니다.
1 하반절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합니다.
아침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하였다면, 저녁이 돌아오고 밤이 되는 시간에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하여 역시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성실”이 무슨 뜻일까요? ‘성실’이란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성스럽고 참되어 거짓 없는 성품을 성실이라고 합니다. 성실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항상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게 성실하게 행동합니다.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배교하거나, 불충하거나, 불순종을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성실하게 모든 믿는 자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십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변하고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는 때때로 흔들리는 믿음의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성실하게 나를 이끌어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직장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멀 리가 똑똑하여 두뇌회전이 아주 빠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이 아주 쎄어서 필요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잔재주가 아주 많아서 시기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종류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마도 <성실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해도, 언제 어디서나 초심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하게 성실하게 근무하는 사람을 뽑은 그 회사는 크큰 인재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여러교회 부교역자를 거치면서 경험하고 판단한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꾸준하게 성실한 성도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인정을 받으면서 중직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신앙생활하고 성실하게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를 목사가 싫어할 리가 없으며, 하나님이 이런 성도를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성실함을 본받아 행동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주의 일에 성실한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맡은 바일에서 성실하고, 여러분이 속한 회사와 직장에서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성실한 모습 하나가 내가 굳이 입을 열어 전도하지 않더라도, 그 성실함 한하나가 전도지 수백장을 뿌리는 것과 같은 전도효과를 주게 됩니다.
번지르하게 말은 잘합니다. 교회에 나가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말을 자주합니다. 하지만 행동은 엉망입니다. 성실하지 못하게 약은 수만 부립니다. 잔머리 굴리면서 눈치만 살피는 기회주의자입니다.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합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의 성실”이란 단어는 성경에 총 17번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많이 표현된 말씀은 아니지만, 주의 성실하심이 들어가 있는 말씀들을 살펴 보면, 공통되게 등장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거짓이 없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인 것을 강조합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조변석개(朝變夕改), 조령모개(朝令暮改)”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변석개>가 무슨 뜻이에요? 아침 저녁이 다르게 쉽게 변한다는 말입니다. 무언가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아침과 저녁의 모습이 다르다면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조령모개?도 같은 말입니다.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그 명령을 뜯어 고쳐서 헛것으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선시선종(善始善終), 수미일관(首尾一貫)”이란 말도 있습니다.
<선시선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변함이 없이 잘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수미일관이라는 말은 머리와 꼬리까지 변하지 않고 같은 모습이라는 것으로, 이 역시 변하지 않고 한결 같은 모습으로 성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늘 한결 같고 변하지 않는 신앙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런 성도를 하나님이 더 아껴 사랑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민 23:29에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을 바꾸는 분이 아닙니다. 이전 성경 번역에는 “식언하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문자나 카톡에 답이 없으면 “문자 씹었다. 톡 씹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실수나 또는 고의로 내가 하는 말을 씹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좋으신 하나님, 성실하신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은 절대 씹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의 말씀이나, 지금의 말씀이나, 장래의 말씀이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현재형 말씀입니다. 절대로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신 32:4에는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석같이 든든하셔서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시고, 올바르신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완전하다, 정의롭다. 진실하다. 거짓이 없다. 공의롭고 바르다는 여러 표현을 사용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절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올 4월 27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핵 폐기를 위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반도에 곧 평화가 찾아오고 북한의 핵이 다 폐기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성실하지 못하고 거짓만 일삼은 김정은이 한결 같이 성실하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믿으면 이렇게 실망하게 됩니다. 한결같으신 하나님만 아침저녁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길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