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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혜 16가지
*게시자 주 시작
https://cafe.daum.net/satisamadhi/C3oD/46 참조
칠청정과의 지혜
도표 9.2.1
청 정 visuddhi | 수행과 지 혜 | 대상 | |
I | 계청정(戒淸淨) sīla | 출가자는 계목 단속에 관한 계, 감각기능[根] 단속에 관한 계, 생계 청정에 관한 계, 필수품에 관한 계를 지켜야한다. 그러나 재가자는 오계나 생계 제8계(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이간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것과 8번째로 바른 생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계청정이 완성된다.*1 | |
II | 마음청정[心淸淨] citta | 근접삼매(찰나삼매)와 본삼매를 마음청정이라 한다.*2 | 형성 [行] |
III | 견해청정[見淸淨] diṭṭhi | 특징, 역할, 나타남, 가까운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을 파악하는 것을 견해청정이라 한다.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 | |
IV | 의심극복청정 [度疑淸淨] kaṅkhāvitaraṇa | 정신과 물질들의 조건을 파악하는 것을 의심극복청정 이라 한다. (조건 파악의 지혜) -> 작은 수다원 | |
V | 도비도지견청정 (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 ñāṇadassana | 1. 명상의 지혜(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 -> 위빠사나 지혜의 시작 | |
2. 생멸의 지혜(약한 단계) | |||
위빳사나의 10가지 경계(광명, 지혜, 희열, 경안, 행복, 결심, 분발, 확립, 평온, 욕구)를 장애라고 파악함으로써 도와 도 아님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이 도비도지견청정이다. | |||
VI | 실천지견청정 [行道智見淸淨] paṭipadā- ñāṇadassana*3 | 2. 생멸의 지혜(성숙된 단계) | |
3. 소멸의 지혜 | |||
4. 두려움의 지혜 | |||
5. 허물의 지혜 | |||
6. 염오의 지혜 | |||
7. 벗어나려는 지혜 | |||
8. 재성찰의 지혜 | |||
9. 형성평온의 지혜 | |||
10. 수순의 지혜 *6 | |||
2~10 수순의 지혜까지의 9가지 위빳사나 지혜를 실천지견청정이라 한다. | |||
VI 과 VII 사이 | 11. 종성의 지혜[淸白의 경지]*4 | 열반 | |
형성[行]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실천지견청정에 속하지 않고, 열반을 대상으로 하지만 번뇌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지견청정에도 속하지 않음. | |||
VII | 지견청정 (智見淸淨) ñāṇadassana |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의 지혜를 지견청정이라 한다.*5 |
*주1: 출처: 비구 일창 담마간다, 『가르침을 배우다』, 불방일, 2021, 130-228쪽.
*주2: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항상 변하는 정신과 물질의 흐름에 집중된 것이 심청정(찰나삼매)임.
*주3: paṭipadā란 “實踐, 行道, 도닦음, progress”라는 뜻인데, 선정 수행을 시작해서 그 선정의 근접삼매가
생길 때까지의 삼매 수행을 말한다. 출처: 대림스님, 『청정도론 제1권』, 272쪽 (Ⅲ. §15).
*주4: 사다함도/아나함도/아라한도 직전의 도에 접근하는 순간의 이런 마음은"淸白의경지"라 하며,
그 대상은 열반이다. 果 직전의 마음은, 이미 도에 의해서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에 열반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바로 果의 지혜가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 출처: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권』, 366쪽.
*주5: 과의 지혜와 반조의 지혜는 지견청정에 속하지 않는다.
출처: http://cafe.daum.net/mahasi, 『위빳사나 수행방법론』교정, 2016/10/7 게재 글.
*주6: 수순의 지혜를 벗어남(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라고 한다. 출처: 『길라잡이 제2권』,363쪽.
참고: ①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권』, 초기불전연구원, 2017, 326–374쪽.
② 냐나포니카 테라 영역, 오원탁 번역, 『마하시 스님의 칠청정을 통한 지혜의 향상』, 경서원, 2007.
③ 비구 일창 담마간다 옮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제1권』, 이솔, 2013, 600-601쪽.
이상 게시자 주 끝
지혜 16가지
지금까지는 위빠싸나 수행해서 지혜가 아주 빨리 생기는 이(khippābhiñña)들, 즉 위빠싸나 지혜가 차례차례 생기는 단계가 너무 빨리 지나가서 바로 도(道) 마음, 과(果) 마음이 생기는 이들인 경우를 설명한 것이다. 지금부터는 16가지 위빠싸나 지혜를 설명하겠다.
1.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대상 6가지를 물질(루빠), 그 6가지 대상을 아는 것을 정신(나마)이라고, 몸과 마음(물질과 非물질)을 구분해서 아는 지혜를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라고 한다.
2. 조건파악의 지혜
그 몸과 마음 법들이 조건이 맞으면 생기고 사라진다고, 자기 능력이 미치는 만큼 아는 지혜를 “조건파악의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라고 한다.
3. 명상의 지혜
배에 마음을 붙이고
단단해지는 성품, 줄어드는 성품들을 관찰하면
만나는 성품들이 더 자세해진다.
뱃속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따뜻해지기도 하고, 차가와지기도 한다. 그런 성품들이 늘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심해지기도 하고,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미세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기는 사대의 성품들이 하나씩 생기고 사라진다. 변하고, 바뀌어서 이처럼 생기고 사라지는 성품들이 물질(루빠)이구나. 관찰하고 아는 성품들이 정신(나마)이구나. 그 법들이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성품이구나. 도저히 어떻게 다스릴 수 없는 것이로구나.”
라고 아는 것을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지혜인 “명상의 지혜(sammasana-ñāṇa)”라고 한다.
4. 생멸의 지혜
수행할 때 만나는 성품들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그렇게 만나는 성품의 생김과 사라짐도 점점 두 배로 증가해서 분명해진다. 그때 생기는 상태와 사라지는 상태를 특별히 주의해서 관찰하라. 만나게 되는 상태를 주시해보면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차례차례 더욱 분명해진다. 차례차례 깜빡깜빡 잊어버리기도 한다.
더욱 집중해서 자세하게 관찰한다면,
만나는 성품마다 매우 부드럽고,
미세한 성품들을 많이 만나기도 하고, 매우 심하게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관찰하면
아주 작은 점 같은 성품들도 더욱 많이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을
마음속이나 뱃속에서부터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만나고 싶은 자리에서부터 만나기도 한다.
어떤 자리, 어느 곳에서부터 만나기를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된다.
그렇게 만나는 성품들을 관찰할 수 있을 때,
그것들을 모두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배(가슴)에만 마음을 두지 말라.
분명히 생기는 그 자리에 마음을 두라.
이렇게 만나는 그 사대의 성품들이
조각조각 점점이 가루가 되도록,
영원하지 않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성품들로 주의해서 관찰하라.
이렇게 만나는 성품들의 생기고 사라짐을
분명하게 많이많이 보게 되면,
원하는 대로, 생기고 사라짐을 온몸에서도 만나게 된다.
만약 전신에서 만나지 않으면,
만나는 그곳에서 계속하여
있는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점점 이어서
전신을 이어서 관찰하도록 해야 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발끝에서 머리까지 ……,
차례차례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관찰해야 한다.
이처럼 관찰하는 전신에 빈틈을 찾을 수 없도록
생기고 사라짐만 드러날 것이다.
가끔은 자기 몸을 보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도
생기고 사라지는 성품들만 보게 된다.
가끔은 몸의 부분들만 생기고 사라짐을 만나기도 한다.
관찰하고 보고, 관찰하고 보고를 반목한다.
어쨌든 생기고 사라지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여서 관찰한다.
생기고 사라짐을 이처럼 많이 관찰하면
상당히 오랫동안 관찰하더라도 오랫동안 관찰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혼침이 생기지 않는다.
낮이나 밤이나 잠을 자지 않고도 지낼 수 있다.
가끔 식사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라도
모든 현상을 자세히 알게 된다.
알려고 정성을 기울인다면,
가고, 오고, 먹으면서도, 생기고 사라짐을 알게 된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저절로 앎이 이어진다.
좌선하려고 앉으면, 앉음과 동시에
전신에 생기고 사라짐을 알게 된다.
삼매가 이 정도로 좋아져서 많이 관찰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자세에서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자세히 알게 된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 관찰할 때는
누움과 동시에 생기고 사라짐이 전신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잠들고 싶지 않으면 밤새 관찰할 수도 있다.
잠자고 싶으면 마음을 잠자려는 쪽으로 조금 기울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생멸에 마음을 그대로 두고 잠들라.
이렇게 잠들면 잠에서 깨어나도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 것을 모른 채로
생기고 사라짐을 보면서 수행하고 있게 된다.
적절한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깨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생멸을 관찰하다가
‘지금 들리는 소리는 아침에 듣던 소리로구나. 아침이구나. 내가 잠에서 깼구나.’라고 알게 된다.
이 정도로 삼매가 좋아져서
생멸을 많이 관찰하게 되었을 때
스승들이
‘온몸의 어느 곳에도 영원한 것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구나.
소다수 병이나 사이다 병뚜껑을 열었을 때
뿅 하는 소리는 작은 소리이다.
나의 전신에 끓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이 끓어올라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훨씬 더 크다.’
라고 하신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수행해 보면 알 것이다.
생멸을 이 정도로 보게 되면
관찰하는 수행자의 몸에 아주 짧은 찰나 동안이라도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무상이 사실이고.
이 무상한 성품들을 만났을 때,
영원하지 않은 성품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성품이라고 저절로 알게 된다.
이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성품들을 다스릴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저절로 알게 된다.
이렇게 생멸을 아는 것과 함께
고통스러운 성품, 다스릴 수 없는 상품들을
자신의 지혜로 알게 되는 것이다.
담마상가니에도
특별하게 이 위빠싸나의 위치에서
무상의 특성을 보는 것이 필요한 기본 성품이다.
무상의 특성을 보더라도
그곳에서 나머지 2가지 특성을 차례대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설하셨다.
“사랑하는 아들 매기야,
무상하다는 생각이 드러나는 이에게
무아라는 생각이 저절로 생긴다.
무아라는 생각이 드러나는 이에게
‘나’라는 자만이 사라지게 된다.”
무상한 성품들을 많이 보게 되면,
고통과 무아인 성품도 저절로 알게 된다.
이 무상한 성품은 영원하지 않은 성품일 뿐이다.
‘나와 남, 여자, 남자’라고 해도 사실이 아니고,
몸의 부분인 사지가 아니며, 한 덩어리라는 물질도 아니다.
보장할 수 있는 알맹이나 핵심은
작은 먼지 알갱이만큼도 없고, ‘나’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스스로의 지혜로 알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의 지혜가 깨끗해져서
성숙해진 수행의 지혜[修慧. Bhāvanāmaya ñāṇa]로 잘 아는 것을
의심이 사라진 청정(의심극복청정. 度疑淸淨. kaṅkhāvitaraṇa)이라고 한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생기고 사라지는 성품을 자세하게 조사하면
생기는 성품을 우다야(udaya)
사라지는 성품을 와야(vaya)라고 한다.
생기고 사라짐만 관찰하여서
일어남, 사라짐만 아는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에
‘우다얍바야 냐나(udayabbaya-ñāṇa. 생멸의 지혜)라고 한다.
5. 소멸의 지혜
이처럼 ‘생김 사라짐’을 관찰하면
삼매가 더욱 좋아지기 때문에
생기고 사라짐이 아지랑이를 보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지나간다.
그때 사라짐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생김의 끝과 사라짐의 끝이 모두 드러나지 않고,
수행자의 지혜에 사라짐만, 사라짐만 들어나게 된다.
수행자의 지혜에 사라짐만 드러나는 것을 ‘ 소멸(무너짐)의 지혜 (bhaṅga-ñāṇa)’라고 한다.
6, 7, 8 두려움의 지혜,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
이렇게 사라짐만 드러날 때
고통스러움도 더욱 분명하게 저절로 드러난다.
다스릴 수 없음도 저절로 드러난다.
그때가 되면 위빠싸나를 관찰하거나 잠깐 쉬거나 간에
행복하다는 생각(sukkha saññā)을 버리게 된다.
자신을 포함한 31천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영원, 행복, 나, 깨끗한 것(subha)이 아니라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이고, 부정한 것(asubha)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라고 저절로 보고 믿는 마음들이 더욱 깊고 확고하게 된다.
이처럼 좋아하는 사대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되면
수행자의 지혜에 몸과 마음의 생기고 사라짐을
자세하게 관찰할수록 그것들이
‘이익이 아니라 위험한 것들뿐이로구나.’
라고 분명히 알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생각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해서 알거나 짐작 또는 들어서 아는 것을
마음으로 아는 지혜(citāmaya ñāṇa. 思慧)라고 한다.
생기고 사라짐을 실제로 보면
아는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서
수행으로 아는 지혜(bhāvanāmaya ñāṇa. 修慧), 참 지혜가 된다.
그때 수행자가 더 이상 관찰하고 싶지 ㅇ낳고,
보고 싶지 않고, 기분 나빠지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생기고 사라짐을 좋아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으며, 애착하지 않고, 싫어하고, 혐오하게 된다.
소멸의 지혜가 생겼다면,
두려움의 지혜,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가 한 줄에 꿴 것처럼 연달아서 생긴다.
표현만 달라서 위, 정상, 꼭대기처럼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뜻은 같다.
밀착해서 관찰하면 더욱 깊이 혐오한다.
이렇게 혐오심이 커지면 경전에 있는 대로
애착이나 탐착을 버린다.
깊은 갈망(sappītikataṇhā)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 혐오스러운 것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자기 몸이거나 다른 이의 몸에 애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생명에 집착하는 마음(nikanti)도 버린다.
세간에 사는 사람들의 일을 원하지(rāga) 않는다.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고
인욕심도 갖추어져서 잘 참을 수 있게 된다.
금생이나 미래생에 짓는 선업과 불선업,
윤회하는 것, 모든 것이 행복이 아니라고
‘오직 고통일 뿐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기억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동안만 생긴다.
수행을 계속하지 않고, 오랫동안 중단하면 사라진다.
9. 벗어나려는 지혜
이렇게 생기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수행자의 마음에
저절로 생각과 견해가 바뀌어 나타나는 상태를 위빠싸나 지혜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무너지는 것만 보이는 때를 소멸의 지혜,
모두 위험스러운 것뿐이라고 생각될 때를 두려움의 지혜,
모두 허물뿐이라고 알 때를 허물의 지혜,
혐오스러워서 싫어하는 때를 염오의 지혜라고 한다.
수행자의 마음에 드러나는 지혜대로 부르는 것이다.
이런 것을 위빠싸나 지혜라고 한다.
위빠싸나 지혜란 ‘두려움의 지혜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어떻게 해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본래 성품, 법 자체 그대로여서
그 성품 그대로만, 그 스스로 드러난다.
위빠사나로 관찰한다는 것은
실은 있는 성품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여
혐오하는 마음이 많아졌을 때,
생기고 사라짐과 함께
혐오스러운 것들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긴다.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겨서 관찰하는 지혜를
벗어나려는(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ñāṇa)라고 한다.
10. 재성찰의 지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수행을 줄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혹은
‘그래도 계속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가끔은 ‘어쨌든 생기고 사라짐만 계속 관찰하는 것이 수승한 수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관찰한다.
이렇게 벗어나려는 지혜에서는 벗어나려는 마음이 많이 생긴다.
계속해서 관찰하고, 수행을 오랫동안 하면
벗어나려는 마음이 많이 생기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만 한다.
그때는 벗어나려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생기고 사라지는 것에만 주의해서 정성스럽게 관찰하게 된다.
이렇게 관찰하게 되면, 마음을 이리저리로 옮기지 않아도 전신 모두를 관찰하게 된다.
생기고 사라지는 것들도 여기는 많이 생기고, 저기는 적게 생기지 않고,
저쪽에 한 가지가 생기고, 이쪽이 한 가지가 사라지는 식으로,
조금이라도 갈라져서 다르게 생기지 않고, 고르게 한꺼번에 생긴다.
관찰도 고르게 관찰하면서 지내게 된다.
이렇게 고르게 관찰하는 지혜를 ‘재성찰의(깊이 숙고하는) 지혜(paṭisaṅkhā-ñāṇa)’라고 한다.
11. 형성평온의 지혜
이렇게 생기고 사라지는 법들을 오랫동안 고르게, 고르게 관찰했을 때,
삼매가 매우 좋아져서
생기고 사라짐이 두 배로 증가하여 더욱 선명해진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생기고 사라짐에만 마음이 머물기 때문에,
자신의 몸조차 있다고 생각되지 않고,
오로지 생기고 사라짐만 드러난다.
그때는 삼매가 매우 미세해졌기 때문에
생기고 사라지는 장소로 마음이 따라가지 않고,
마음이 있는 곳으로 생기고 사라짐이 모여드는 것처럼,
생기고는 사라지고, 생기고는 사라지곤 한다.
그때 생기고 사라짐이 천천히
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드러난다.
나중에는 온 전신에 있는 모든 생기고 사라지는 것들이
손바닥 정도의 크기보다 작거나 혹은 그보다 더 작은 크기로 되어 모여들어서,
매우 좁아진 것 같다고 생각된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매우 빠르다.
몸의 접촉 성품(kāyaphoṭṭhabba dhātu)들의
생기고 사라짐의 무더기들이 매우 빠르다.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 생기고 사라짐의 무더기를 관찰하는 마음 외에,
그 어떤 것 한 가지도 생각하거나 망상하지 않고 지낸다.
표상 없는 삼매(animitta samādhi)가 생긴 것이다.
생기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앎, 오직 한 가지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가지만 아는 것이
평온(upekkhā)하게 깊이 집중해서 관찰하는 지혜와 함께 하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이 지혜를 ‘형성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라고 한다.
이렇게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했을 때,
열반의 문 근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문(vimokkhamukha)이라고 한다.
하지만 열반의 문 근처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열반에 틀림없이 들어간다고 자만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 지혜에 이르렀을 때
누가 무슨 일이 있어서 부르거나 말을 걸어서 방해한다면
위빠싸나 지혜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고요하게 앉아서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수행자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밖에 형성평온의 지혜가 사라지는 경우는
몸과 마음이 매우 빠르게 생기고 사라져가는 작은 무더기들을
형성평온의 지혜로 관찰할 때,
삼매가 지혜 두 가지가 고르게 있어야 한다.
삼매가 지혜보다 힘이 넘치게 되면
몸과 마음의 생기고 사라지는 성품의 작은 무더기들을
자신의 지혜로 보는 몸의 접촉 성품(kāyaphoṭṭhabba dhātu)에서
차츰차츰 사마타 표상을 보는 성질로 바뀌어져서
허상인 아지랑이를 보고 진짜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열반의 문 근처에 도달했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진정으로 열반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생기고 사라짐만을
형성평온의 지혜의 상태로만 관찰해가면
몸과 마음의 생기고 사라짐이 모두 소멸하게 된다.
이 책에서 설명한 대로 열반을 보는 성품 그대로 되어간다.
이러한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한 다음,
열반을 보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는 것에
사대의 생기고 사라짐이
아주 작은 무더기 세포라고 드러났을 때,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검은 못처럼 박혀서 집중한 상태로 지낸다.
그렇게 관찰해 가면 생기고 사라짐이
차츰차츰 점점 더 미세하고도 미세하여
더욱 부드러워져서 사라져간다.
생기고 사라짐이 매우 미세하여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된다.
생긴 다음 다시 깊이깊이 넓어진다.
생기고 사라지는 무더기들이 점점 줄어들어서,
부드럽고, 미세하고, 미세해져서
거의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아주 줄어들어서 더 이상 줄어들 수 없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거의 사라졌다가 더 이상 줄어들 수 없는 데까지 간다.
이렇게 생기고 사라지는 무더기들이
거의 소멸할 때까지 사그라졌다가,
다시 조금 더 선명해지기를 거듭하다가
마지막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라져서
생기고 사라짐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몸과 마음 두 가지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도(道) 마음, 과(果) 마음으로 열반을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을 경전에 있는 대로 말하면
생기고 사라지는 작은 무더기들을
깊이깊이 주시, 집중, 관찰하여
고요하여 변하거나,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적절하게 잘 관찰하는 지혜가 ‘형성평온의 지혜’가 된다.
생기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관찰해서 사그라져 소멸하는 것은
‘까마귀가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점점 사라졌다가 생기고 사라짐이 다시 선명해지는 것은
저쪽 언덕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쪽 언덕으로 다시 돌아와서 쉬는 것과 같다.
생기고 사라짐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지는 것은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날아갔다가
언덕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이쪽 언덕으로 다시 돌아와서 지내는 것과 같다.
마지막에 생기고 사라짐과 그것을 아는 마음들이
모두 아주 사라짐은
저쪽 언덕을 보았기 때문에,
이쪽 언덕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저쪽 언덕으로 날아가서 도착한 것과 같다.
이 비유에서 열반은 저쪽 언덕과 같다.
이쪽 언덕은 생기고 사라지는 무더기와 같다.
관찰하는 마음을 까마귀와 같다.
여기에서 생기고 사라지는 무더기를 따라서
여러 가지로 희미해지고, 선명해지는 것을 관찰하는 지혜를
‘평성평온의 지혜’라고 한다.
12. 수순의 지혜 13. 종성의 지혜 14. 도(道)의 지혜 15. 과(果)의 지혜 16. 반조의 지혜
수순(隨順)의 지혜(anuloma-ñāṇa)는
형성평온의 지혜가 보는 대로 관찰하고 관찰해서
종성(種姓)의 지혜(gotrabhū-ñāṇa), 도(道)의 지혜(magga-ñāṇa), 과(果)의 지혜(phala-ñāṇa), 반조(反照)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의 지혜는 형성평온의 지혜와
한 집, 한 가지라고 수행자의 지혜에 드러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종성의 지혜의 앞에 생기는
먼저 하는 일인 준비(parikamma) 삼매 마음순간,
근접(upacāra) 삼매 마음순간,
수순 마음순간, 이 세 가지를 수순의 지혜라고 하기 때문에
종성의 지혜의 앞의 3가지 마음순간을
수행자들은 수순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종성의 지혜, 도(道)의 지혜, 과(果)의 지혜들이 생기는 모습이
몸과 마음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버리고,
몸과 마음이 생기지 않는 열반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행자의 지혜에 그와 같이 믿고 생각한다.
쓸모없는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몸과 마음이 생기고 사라짐을 알다가
몸과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앎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빠띠삼비다막가』에
“몸과 마음이 생기는 것을 형성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라고 분명하게 말해 놓았다.
도(道) 마음, 과(果) 마음이 생긴 다음에,
다시 아는 마음이 생기는 그 사이에
무엇이 생겼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열반의 성품만은 기억한다.
생기지 않음인 열반을 보기 전에,
생기고 사라지던 성품들도 다시 돌이켜서 기억한다.
아는 마음이 다시 생겼을 때,
‘자신의 몸이 생기고 사라짐이 있었던가?’라고
기억하는 앎이 생긴다.
이렇게 기억하는 앎이 생긴 성품을
‘반조(反照)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라고 한다.
기억한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은 아주 짧은 순간만 생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무상 하기 때문에 괴로움인것인지?
오온의 특성 자체가 괴로움인지?
항상 이점이 궁금 했습니다.
무상과 괴로움으로 인해서 무아임은 이해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