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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2019. 6. 9
이 세상에는 상대적인 것들을 대비하면 더 쉽게 이해되고 설명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 건강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 보아도 실감나게 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건강을 잘 챙기지 않습니다.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지만, 건강하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 예상하지 못하게 아파 보면 그제서야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건강에 각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건강과 질병은 서로 상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상대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상대적인 것들이 서로를 설명하게 합니다. 어두움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어두움과 반대되는 밝음에 대하여 올바른 설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밝음도 어두움을 통해서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이것은 행복하지 않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참된 행복을 더 쉽게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불행함을 느껴본 사람은 행복함의 소중함을 피부로 더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을 돌아보면 됩니다.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 보면 됩니다. 멀리 쳐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살전 5:16절 이하 “항상 기뻐하라. 항상 감사하라. 항상 기도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성도가 항상 기뻐해야 합니까? 왜 항상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왜 힘든 와중에도 기도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내가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그런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기뻐하지 않습니다. 항상 감사하지 않습니다. 또한 항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슬픔과 염려와 불평불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로 “인간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삶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중심 주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야말로 쉬지도 않고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원래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인지라,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잘 알면 알수록 걱정하고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곰곰이 주변을 살펴 보세요. 많이 가진자가 염려 만힝 할까요, 없는 사람이 많이 할까요? 없는 사람이 염려를 많이 한다고 다들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염려합니다. 더 가지지 못해서 염려하고, 가진 것을 잃어 버릴까 싶어서 또 염려합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가진 것이 넉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만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큰 염려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염려하고 걱정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때로는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당신이 염려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염라대왕이라는 말 아시지요? 세상 사람들은 염라대왕을 무서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염라대왕은 살아 있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사람이 죽은 후에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라대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인터넷 유머를 보았습니다.
염라대왕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요? 넌센스 퀴즈입니다. 이 문제의 정답은 <염려대왕>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어서 만나는 염라대왕보다, 살아생전에 수없이 만나는 염려가 더 무서워서 <염려대왕>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염려와 걱정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질병을 만들어 내며 삶의 리듬을 깨어 버립니다.
하지만 성도는 염라대왕도 무섭지 않고 염려대왕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죽은 이후에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염라대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게 되는 <염려대왕> 역시 성도는 개념치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런 세상 일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염려대왕이 내 앞에 턱하니 버텨 서서 나를 위협한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염려와 걱정을 십자가에 다 붙들어 매어 버리기를 바랍니다.
1. 자신의 힘으로만 살려고 할 때 염려가 옵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나의 연약함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그래서 약한 마음과 약한 생각 속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부정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강하면 그만큼 염려가 적습니다.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질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염려가 많습니다. 그러나 책임질 일이 없으면 염려도 없고 긴장감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약할수록 , 할 일이 많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염려가 많습니다. 따라서 책임져야 할 일이 많고 힘이 딸릴수록 염려가 많아지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읽었던 책 중에 ‘파인애플 이야기’라는 책은 가끔 저의 묵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한 선교사님이 뉴기니아에서 7년에 걸쳐 일어났던 실화를 적어놓은 책입니다.
선교사님 한 분이 뉴기니아에서 선교를 하다가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러다가 원주민 마을에 파인애플을 들여오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깊은 정글 속에서는 싱싱한 과일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파인애플 재배에 성공을 한다면 이것을 팔아서 돈을 모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은 성실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원주민 한 명에게 품삯을 주고 고용을 합니다. 그리고 파인애플 묘목을 심게 합니다. 정성껏 가꾸는 시간이 3년이 흐른 뒤, 마침내 첫 파인애플을 수확할 때가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선교사님은 파인애플 밭으로 향했는데, 파인애플 밭에 도착하니 파인애플이 하나도 달려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 누가 다 따 가 버린 모양새입니다.
화가 난 선교사님은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전부 따갔다는 판단이 들어서 자신이 무료로 운영했던 병원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병원이 필요한 원주민들은 선교사에게 사정을 해서 다시 병원 문을 열어 줄 것을 요청을 합니다.
선교사님은 수소문 끝에 파인애플을 도둑질한 원주민이 누군지 알아냅니다. 놀랍게도 파인애플 도둑놈은 바로 자신이 파인애플을 심을 때에 삯을 주고서 고용하였던 원주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주민과 이야기를 나눈 선교사님은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원주민이 가진 생각 때문입니다. 이 원주민은 자기가 파인애플을 심었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당연히 따갔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이 밭의 소유권이 선교사 자신에게 있고, 그리고 원주민에게 파인애플을 심어주는 조건으로 품삯을 주었기 때문에 원주민은 파인애플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설명하였지만, 원주민은 선교사님이 말하는 논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할 수 없이 선교사는 그 밭의 파인애플을 포기하고 다시 다른 밭을 구하고, 다른 원주민을 찾아서 파인애플을 심습니다. 또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자기들이 심은 파인애플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면서 다 따가지고 가 버립니다. 아무리 선교사 소유라고 가르쳐도 그것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선교사님은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 이 파인애플은 내 것이 아니지. 하나님께 드리자. 이 밭을 하나님께 드리자 ” 하고 자기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밭을 드리고 난 후에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가져가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원주민들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선교사로부터 그 밭이 하나님의 것임을 들은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파인애플을 훔쳤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원주민들은 파인애플을 훔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은 이후로 맛있게 익은 파인애플을 수확했고 그 파인애플을 원주민들과 나눠 먹으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선교사님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선교사님의 모습에서 본 받아야 하는 것은, 세상일 때문에 염려할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길 때에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선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맡겨야 할까요? 내 생각이 옳다는 것까지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맡기면 됩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만, 아마도 여러분 중에서도 이 말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나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흔들리지 않게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해서 어떤 거창한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소소한 작은 부분까지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믿음입니다.
미국의 작가이며 교육가였던 데일 카네기(Dale Breckenridge Carnegie, 1888년 ~ 1955년)의 어린 시절이야기입니다. 미주리주 매리빌의 농장 출생이어서 어릴 때부터 시골 농장일에 익숙하게 성장을 합니다.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나무 구덩이를 파다가 별안간 아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놀라서 “왜 그렇게 우는가?”하고 물어 봅니다. 그러자 아이가 훌쩍거리면서 “아무래도 구덩이를 파다가 그 속에 묻힐 것만 같아서 운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죠. 카네기는 강연을 할 때마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참으로 많은 걱정을 하는 아이였다고 말합니다.
천둥이 치면 벼락을 맞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고, 병으로 금방 죽을 것 같은 걱정을 합니다. 또한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에는 자신이 죽어서 지옥에 가지나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는 훗날 커서는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훗날 자신이 염려하였던 수많은 것들 중에서 단 하나도 일어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걱정들은 어리석은 걱정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문제로 인하여 너무 많은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미리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가는 나의 앞날은 내 뜻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 집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점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믿지 못할 때 염려가 옵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본문에 보면 성도가 해야 하는 두 가지 모습이 등장합니다. “1)주께 맡기라, 2)주가 돌보신다”는 말입니다.
1)주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맡긴다는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아주 쉽습니다. “당신이 가진 염려를 그에게 던져 버려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에게 던져 버리는 모습입니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의 짐을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런 저런 염려와 걱정을 하나님 앞에 던져 버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움켜쥐고 걱정하지 않고서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면 하나님께서 다 돌보아 주십니다.
2)돌보신다는 말은, ‘멜레이’란 말인데, 마치 잠들어 있는 아기를 케어하는 어머니의 눈길처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하윤이를 잠시 봅니다만, 이집사님과 박집사님이 어떻게 하윤이를 케어합니까? 잠시도 눈에서 떼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챙기고 돌보며 케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본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와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가진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맡겨 버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며 케어 한다는 점입니다. 박집사님의 품 안에 있는 하윤이가 “내가 배가 고픈데 무엇을 먹어야 하나? 내 기저귀가 젖어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이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엄마와 아빠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 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필요 할 때면, 무엇을 요구 할 때면, 그냥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엄마와 아빠가 우는 이유를 알고 금방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줍니다.
시 37:5-6 “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기서도 맡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맡기면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내 생각과 염려는 맡겨 버리고, “하나님이 내 모든 형편을 다 아신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내 모든 염려를 내게서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믿는 것이 믿음이며, 이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신실한 기도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 할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나폴레옹 대군에 둘러 쌓여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리고는 항복 여부를 논의하였는데, 대다수 시의원들은 미리 항복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데로 모아집니다. 그때 교회의 지도자 한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만을 믿는다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다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무서워 떨고만 있지 말고 교회의 종을 힘껏 치고 먼저 부활절 예배를 정성껏 드립시다. 그리고 그 뒷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라고 말합니다.
펠드리히 시에 있는 모든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프랑스군 진영에까지 이 종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참모들은 밤사이에 오스트리아의 지원 군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울리는 기쁨의 종소리로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는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펠드리히 시는 점령이 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실화가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내 뜻대로 살 것이냐?”이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내가 걱정과 염려를 몽땅 짊어지고서 고민 고민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것인가?” 이것도 여러분이 해야 하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염려를 다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면서 걱정과 염려를 맡기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