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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18코스 제1부
목포지방해양수산청-평화광장공원-갓바위-갓바위문화타운-삼학도-목포진지
20220928
1.입암반조의 갓바위와 갓바위문화타운
서해랑길 18코스 탐방을 위해 목포시 옥암동 삼향교를 건너 목포지방해양수산청 입구의 서해랑길 18코스 시작지점에 도착하였다. 아침 6시 30분이 안 된 시각, 동쪽으로 아침노을이 물들고 있다. 서해랑길 15코스와 16코스는 현재 임시코스로 운영 중이며 17코스는 미개통이다. 2022년 11월 중에 해남과 영암을 잇는 솔라시도대교가 완공되어 '솔라시도로'가 개통되면 서해랑길 15-17코스는 온전한 정식코스로 개통될 것이다.
목포지방해양수산청 앞에서 미항초등학교 입구를 거쳐 수로변 길을 따라 수로 끝까지 가면 평화교에 이른다. 평화교 입구에서는 왼쪽으로 영산강하굿둑, 배수갑문과 삼호대교가 보이고 동쪽 하늘에는 아침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다. 영산강 기수역(汽水域)건너편에 영암의 대아산과 대불국가산업단지가 친근하게 보인다. 2주 전 저 곳을 걸어 영산강하굿둑을 건넜다. 기수역에서는 갈매기들이 공중을 날며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다.
평화교를 건너 스토리가 있는 연인의거리를 걷는다. 연인의거리는 평화교로부터 평화광장과 '춤추는 바다분수' 앞을 거쳐 달맞이공원에 이르는 해안길이다. 아침 7시 이전인데도 많은 시민들이 연인의거리 아침 트레킹을 즐기고 있다. 평화광장의 사랑의 붉은 하트 조형물 앞 바다에 춤추는 바다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야간에 운영되기 때문에 바다분수의 춤추는 모습과 해상 음악을 즐기지 못하고 통과한다. 목포 춤추는 바다분수는 세계 최초 및 최대의 부유식 해상 음악분수로 분수공연에 영상을 가미한 다양한 분수쇼가 펼쳐지는데 목포9경 중 4경으로 꼽는다고 한다. 탐방객은 후일을 기약하여 지나간다.
달맞이공원 앞을 거쳐 갓바위해상보행교로 들어간다. 목포9경 중 3경에 해당하는 갓바위의 입암낙조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저녁노을이 물드는 때에 와야 한다. 아침 7시경의 갓바위는 찬란히 떠오른 아침햇살에 빛나는 모습이다. 슬픈 전설의 갓바위 부자(父子)가 나란히 서 있다. 갓을 쓴 아들이 불효를 탄식하는 모습에 내 자신이 투영된다. 효도, 그 끝이 없는 효도의 길에서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후회막급하는 모습에 가슴이 절절하다.
갓바위해상보행교 북쪽 출입구에서 북쪽을 조망하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예술회관, 목포문예역사관, 목포자연사박물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남농기념관, 목포문화예술회관, 목포문학관, 목포옥공예전시관 등 목포의 문화예술관들이 집중되어 있다. 이 지역을 목포 문화의 자존심 갓바위 문화타운이라 이른다. 서해랑길은 이 지역을 관통하지만 탐방객은 이른 시각이기도 하거니와 개방이 되어 있더라도 시간이 없어서 그냥 통과할 수밖에 없다. 목포문학관 앞에 박화성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비와 박화성 조각상, 학창 시절에 배운 수필 '백설부'의 작가 김진섭 선생 고향마을비가 세워져 있고 목포문학관 입구에는 한국근대문학의 걸출한 극작가 김우진과 차범석, 소설가 박화성, 평론가 김현을 목포문학의 얼과 혼으로 소개하고 있다. '멧돼지'의 극작가 김우진은 '사의 찬미'를 부른 성악가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하여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인텔리의 절망감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세상에 알렸다. 갓바위 문화타운의 겉모습만 눈요기하며 갓바위 문화타운을 통과하여 예술웨딩컨벤션 건물 앞을 통과하여 제일중학교 사거리에 도착하였다.
제일중학교 사거리에서 대삼학도 입구까지 삼학로를 따라간다. 북쪽으로 유달산 아래 목포 중심시가지가 보이는데 서해랑길은 목포 중심시가지 외곽 목포 남항 뒤, 대삼학도 난영공원 입구, 삼학도공원,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소삼학도, 중삼학도를 거쳐 목포항 부두로 나간다. 한 청년을 사랑하는 세 여인이 죽어서 바다에 세 개의 섬으로 솟아났다는 아픈 전설이 서린 삼학도 세 개의 섬은 다리로 이어져 있다. 삼학도를 지나며 목포항과 부두, 목포의 진산 유달산과 노적봉을 바라본다. 목포의 아름다움이 저 곳에 있으며 저곳에서 삼학도를 조망하는 풍경은 목포의 낭만에 젖어들게 할 것이다.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 가는 부두 광장에서 서해랑길은 해안로 횡단보도를 건너 옛날 보리밥 골목을 통하여 항동시장을 가로지른다. 목포의 옛 중심시가지 만호동으로 들어서서 항동시장 위 목포진 역사공원으로 올라갔다. 목포진 역사공원 객사 입구 앞에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안내도,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과 목포진지(鎭址)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진지(鎭址)란 군사 상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진(鎭)이 있던 터를 말한다. 목포진(木浦鎭)은 세종 때 1439년(세종21년)에 설치한 수군기지였다. "목포진은 1895년 군사 제도 개편에 따라 폐지하였으나 1897년에 목포가 개항하면서 이곳의 주요 시설들을 대한제국의 관청인 감리서와 해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목포진은 목포 역사의 뿌리이자 근대사의 출발지라는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안내판에 적혀 있다.
소년 김대중 공부방을 들러보지 못하고 목포진 역사공원에서 건물을 바라만 보았다. 삼학도를 조망하려는 욕망의 조바심으로 주변과 목포진 역사공원의 구석구석을 살피지도 않고 곧바로 전망대로 오른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 아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묵포의 설움"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에서 삼학도는 파도 깊이 스며든다고 했는데 과연 그 삼학도 모습을 조망할 수 있을까?
-제2부로 이어짐
2.탐방 과정
18코스 전체 탐방거리 : 19.16km
18코스 전체 소요시간 : 5시간 30분
목포시 옥암동 삼향교를 건너 목포지방해양수산청 입구의 서해랑길 18코스 시작지점으로 이동한다.
삼향교 동단 목포지방해양수산청 입구에 서해랑길 목포18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18코스 안내도 옆 벽 기둥에 붙어 있다. 서해랑길은 수로 끝까지 이어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나간다.
서해랑길은 목포지방해양수산청 입구를 거쳐 수로의 둑길을 따라 이어간다.
영산교를 지나서 수로 끝 지점에서 평화교를 건너 연인의 거리를 따라간다.
서해랑길 임시 16코스에서 삼호대교를 건너 영산강 하구둑 앞을 통과하여 목포시 옥암동으로 들어왔었다.
서해랑길 임시 16코스에서 걸었던 영암군 삼호읍 대불산업단지가 한눈에 보인다. 맨 오른쪽 산은 대아산이다.
건너편은 영암군 삼호읍 나불리, 삼호대교가 중앙의 영산강하굿둑 배수갑문을 거쳐 목포시 옥암동으로 이어진다.
평화교에서 평화광장을 거쳐 달맞이공원까지 1.2km의 거리는 '스토리가 있는 연인의거리'라 명명되어 있다. 앞 해안에 해양레저스포츠 무료체험실이 있고, 그 왼쪽 뒤 바다에는 춤추는 바다분수가 조성되어 있다.
바다분수는 봄여름가을 중에 밤 8시부터 1회당 20분씩 2, 3회 운영된다고 한다.
평화교에서 이곳 달맞이공원까지를 스토리가 있는 연인의거리라 명명하고 있다. 뒤쪽에 입암산이 솟아 있다.
오른쪽에서 정면의 갓바위 앞으로 이어지는 갓바위해상보행교 뎈이 설치되어 있고, 바다로 돌출한 곳에 갓바위가 있으며 저녁노을에 물든 갓바위 풍경의 아름다움을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하여 목포9경 중 3경으로 꼽는다고 한다. 바다 건너 왼쪽 뒤는 영암군 삼호읍 대아산이고 그 앞이 용당부두이다.
목포9경-유달산, 목포대교, 갓바위, 춤추는 바다분수, 노적봉, 목포진, 삼학도이난영공원, 다도해전경, 사랑의섬 외달도-을 소개하고 있다. 서해랑길 18코스에서 9경인 '사랑의섬 외달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오른쪽에 유헌의 '갓바위'시비가 세워져 있다.
남자가 흐느낀다/ 바다에 빠져 휘청거리고 있다
달빛의 무게에 출렁다리 흔들리고/ 가로등 속삭임에 불빛 안은 불면의 밤/ 불효를 후회하며 슬픔에 젖어 있다
삿갓 쓴 그 남자도 한때는 젊은이/ 무심한 시선들이 늙은이 만들었다/ 바람의 나이 들어 노인이 되었다
영겁의 세월 아직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가/ 회한의 수수만년 불효는 지금도 진행형인가/ 눈물은 핏빛되어 바다를 물들인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는가/ 말로는 그 누가 효를 모르는가/ 혼돈의 시대 모두가 공범이다
출렁출렁 통곡의 바다여/ 억천만겁 아들의 효심이 하늘에 닿았는가/ 부자가 함께 만나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는 용서하고 아들은 울고 있다
차가운 바다 맨발의 삿갓 쓴 아들이여/ 고개를 들고 자책의 고통에서 벗어나라/ 무거운 돌삿갓 벗어놓고 하늘 보며 살아가라/ 남은 날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못다 한 효도하라
삿갓 쓴 아들의 눈가에/ 붉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2008년 4월에 영산강변을 따라 해상보행교가 설치되어서 바다 위에서도 갓바위를 감상할 수 있다. 바다 위 보행교는 298m 구간에 설치되어 있으며, 밀물 때 약 1m 정도 올라왔다가 썰물 때에는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갓바위는 두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큰 것이 8m이고 작은 것이 6m 정도이다. 목포8경의 하나이며, 2009년 4월 27일에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목포 갓바위는 서해와 영산강이 만나는 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풍화혈(타포니, tafoni)이다. 갓바위 일대는 저녁노을이 비치는 바다와 입암산의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아름다워 일찍이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갓바위의 암석은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응회암으로, 화산재 입자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입자가 크다. 주요 구성광물은 석영·사장석·미사장석·흑운모·견운모 등이며, 특히 석영과 장석이 우세하다. 갓바위 일대로는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바위에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된 풍화혈이 늘어서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습기와 염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염분이 성장함에 따라 입자들이 암석에서 떨어져 나가는 염풍화작용을 받아 암석의 입상붕괴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갓바위 해안지형은 전형적인 침식지형으로 해식절벽, 해식대지, 풍화혈 등의 지형이 발달해 있다.
해식절벽은 수직적 경사를 보이고, 기저부는 파도에 침식되었으며 벌집모양의 풍화혈을 볼 수 있다. 풍화혈은 수분이 암석 내부에 스며드는 균열 부분에 잘 발달하는데, 풍화혈이 생기기 시작하면 햇빛에 가려진 부분이 주변보다 훨씬 습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풍화되면서 풍화혈의 규모가 커진다. 여기에 갓바위가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햇볕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도 풍화혈이 커지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목포 갓바위의 원형이 점차 변형되어 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주 먼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삮을 주지 않아 한 달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 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고 불렀다.
또 한가지는 부처님과 아라한(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성자)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어 이를 중바위(스님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목포3경인 갓바위 풍경의 아름다움은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하여, 저녁노을 물든 갓바위 풍경을 이른다고 한다. 입암반조(笠岩返照)에 대한 설명글을 옮겨온다.
입암반조(笠岩返照)는 저녁노을 빛이 드리운 갓바위 부근의 아름다운 풍경을 말합니다. 입암은 문화의 거리 갓바위와 입암산을 지칭합니다.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갓바위와 입암산은 원래 한 줄기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픈 마음에 갓을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한 갓바위에 석양의 빛이 반사되어 오는 풍경을 노래한 것입니다. 지는 해가 마지막 빛을 저녁하늘에 쏟고 갓바위를 돌아 넘어가는 정경으로 슬픈 전설의 갓바위와 그 뒤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입암산, 그리고 저녁노을이 물든 영산강의 풍경에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칭송한 것입니다.
왼쪽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그 맞은편에 목포문예역사관과 목포자연사박물관이 있다.
왼쪽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그 뒤에 목포예술회관, 그 맞은편에 목포문예역사관과 목포자연사박물관이 있다. 이 지역을 목포 갓바위 문화타운이라 이르는 듯. 중앙 맨 뒤에 유달산이 들어온다.
입구에 목포개항 백년비(1997년)가 세워져 있다.
갓바위해상보행교와 갓바위가 오른쪽 끝에 보인다.
씨 뿌리는 여인 아! 박화성
당신은 외로운 새벽별/ 여명의 어둠 속에 홀로 남은 별 하나/ 꽃다운 나이에 새벽길을 떠나는 나그네/ 찬 서리 매운 바람 속에서/ 황량한 지평을 향하여/ 붓 한자루로 꿈을 그려냈으니/ 아! 그것은 우리의 자유. 영원한 자유!/ 일제의 쇠사슬 아래서/ 여위어만 가는 이 땅의 골짜구니/ 눈물 고인 자리마다 무궁화가 피기를 갈구했던 절망의 시대에도/ 가난과 무지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고자/ 말과 글과 영혼으로 지냈던 진주같은 작품들/ 아 당신은 이 세상 크기보다 더 큰 자유의 씨를 뿌린 선구자였소
세월은 가도 역사는 흘러도/ 진실과 사랑과 정의의는 강줄기처럼 흐르니/ 팔십평생 당신이 뿌린 문학의 씨앗은/ 세세연년 해송보다 푸르름을 더해가니/ 유달산이 내려다보고/ 영산강의 품에 안긴/ 이 축북의 땅에 당신이 살아 계심에/ 아, 당신은 이 땅에 자유의 씨를 뿌리신/ 아, 당신은 새벽길을 열어주신 선구자였소.
-글지은이 차범석, 글쓴이 장근현, 조각 손창석, 소설가 소영 박화성 탄생 백주년 서기 이천사년 십이월
'백설부' 수필로 잘 알려진 수필가이다.
김우진, 차범석, 박화성, 김현
왼쪽에 삼학도, 중앙에 유달산, 그 아래 목포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 대삼학도, 그 왼쪽에 목포 남항, 건너편 왼쪽 대아산 아래쪽으로 대불국가산업단지가 펼쳐져 있다.
맞은편에 목포 제일중학교 교사가 보인다.
목포 갓바위문화타운을 거쳐 건너편 예술웨딩컨벤션과 한국요양원 앞을 지나 제일중학교 사거리를 건너왔다.
삼학로를 따라 삼학도 입구까지 이어간다.
목포진이 설치된 것이 1439년 음력 4월 15일이라고 한다.
바다 건너편에 영암군 삼호읍의 대아산과 대불산단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왼쪽 대삼학도 수로변을 따라 올라가서 난영공원 입구로 이어진다.
이난영(李蘭影, 1916~1965), 본명 이옥례(李玉禮). 전라남도 목포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 이봉룡(李鳳龍)과 함께 불우하게 자랐다. 16세 무렵 태양극단의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 나섰다. 단체가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에게 발탁되어, 1933년에 염석정 작곡의 「향수」를 취입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이 이난영의 데뷔곡이다.
1935년 가사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의 새별로 등장하였다. 1936년 20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뒤이어 이봉룡 작곡의「목포는 항구다」, 김해송 작곡의「다방의 푸른 꿈」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가 되었다. 광복 후에도 무대가수로 활약하였는데, 6·25동란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손수 운영하였다.
자식들도 미국에서 김씨스터스·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하였고, 1963년 한때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별세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 청년을 사랑하던 세 여인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세 개의 섬이 되었다는 전설이 어려 있다.
전남과 경북이 동서화합과 교류협력을 위하여 목포시 삼학도공원에 '경북도민의 숲'을 조성하고, 경북 구미시 동락공원에 '전남도민의 숲'을 조성하였다. '경북도민의 숲'에 구미 금오산 모형물과 '하나되는 손길'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구미 금오산은 1970년 6월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최고봉은 해발 976m 현월봉이다.
삼학도공원 '경북도민의 숲'에 조성된 '하나되는 손길' 조형물이다. '하나되는 손길'의 맞잡은 두 손은 지역 소통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화합과 상생, 소통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본 묘비는 2009년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서울 국립현충원에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2019년 이희호 여사님 서거에 따라 대통령 묘와 합장하게 되어 우리 기념관으로 옮겨온 것입니다.(실제 묘는 서울 국립현충원에 합장되어 있음)
1.
당신은 민주주의입니다.//
어둠의 날들/ 몰아치는 눈보라 견디고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의 마루턱/ 몇 번이나 그 마루턱 넘어/ 다시 일어서는 목숨의 승리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우리입니다.
2.
당신은 민족통일입니다.//
미움의 세월/ 서로 겨눈 총부리 거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것/ 마구 달려오는 하나의 산천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평화입니다. 우리입니다.
3.
당신은 이제 세계입니다.//
외딴 섬 아기/ 자라나서 겨레의 지도자 겨레 밖의 교사입니다.//
당신의 고난 당신의 오랜 꿈/ 지구의 방방곡곡 떠돌아/ 당신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내일입니다. 우리입니다.//
이제 가소서 길고 긴 서사시 두고 가소서.
본 건물은 5대양 6대주를 형상화해 6개의 돌출된 부분은 6대주를 상징하며 물이 채워진 울림못은 5대양을 의미한다. 건물 옥상은 비둘기가 나래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모습으로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정신이 5대양 6대주를 향해 널리 퍼져나가길 바라는 의미를 담아 건축된 것이다.
대삼학도 앞 매립지 삼학도공원에서 평화아치교를 건너 소삼학도로 건너간다.
세 개의 삼학도 사이의 수로에 놓인 다리를 건너며 세 개의 삼학도를 통과한다. 소삼학도에서 중삼학도로 건너가 건너편 다리 앞을 통과하여 목포항 부두광장으로 이어간다.
소삼학도에서 중소삼각교를 건너 중삼학도로 건너와 중소삼각교와 소삼학도를 돌아보았다. 왼쪽 뒤의 평화아치교를 건너 대삼학도 매립지 삼학도공원에서 소삼학도로 건너갔다가 왼쪽 다리 중소삼각교를 건너 중삼학도로 건너왔다.
목포의 진산 유달산이 우뚝하다.
오른쪽 끝에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이 보인다.
목포종합수산시장은 목포개항과 역사를 같이하는 100년 전통의 어시장입니다. 남도의 대표 특산물인 홍어와 청정 서남해안에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수산물, 젓갈, 건어물 등 전국적으로 명성 높은 최상의 제품만을 취급합니다. 전통시장의 후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목포종합수산시장으로 놀러오세요.
왼쪽에 대삼학도, 오른쪽에 중삼학도가 보인다.
왼쪽에 중삼학도, 그 오른쪽 뒤에 소삼학도가 보인다.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은 더 직진해 가고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해안로를 가로질러 항동시장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해안로 횡당보도를 건너 추억의 옛날 보리밥 골목을 통하여 항동시장을 가로지른다.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돌아가지만 곧바로 오르면 소년 김대중 공부방을 거쳐 목포진 역사공원으로 이어진다.
객사 입구 앞에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안내도,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과 목포진지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1.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木浦 近代歷史文化空間) 등록문화재 제718호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1897년 목포가 국제 무역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설치한 각국 거류지 지역이다.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목포진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주변 해안가를 간척하여 근대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바둑판식 도로 구조와 근대 건축물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공간이다. 개항 당시 목포 각국 거류지의 총면적은 762,024㎡(약 22만평)인데, 이중 핵심에 해당하는 지역을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등록하였다.
이 공간은 과거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 일대에서 목포역 방향으로 이어진 대표 도로를 중심에 놓고 유달산·목포진·선창을 연결하는 구조이다. 이 일대에는 각종 관공서를 비롯해 일본인들이 다녔던 학교와 교회, 일본식 민가,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 시설 등이 밀집해 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식민지 수탈의 아픔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부두노동운동·소작쟁의·의병·항일 운동 등 민족의 저항 역사가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또한 해방 이후 항구 도시 목포사람들의 삶의 중심 터전이기도 하다.
2.목포진지(木浦鎮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지정일 1987.01.15.
진지(鎭址)란 군사상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진이 있던 터를 말한다. 목포진지는 세종 때인 1439년에 주변의 바닷길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수군 기지인 ‘목포진’의 터이다. 목포진은 초기에는 해상에서 방어 활동을 하다가 1501년 연산군 대에 이르러 성벽이 지어졌다. 성벽의 높이는 약 2m, 성의 둘레는 400m 정도이다. 동서남북 사방에 출구가 있고, 내부에 객사(客舍)와 관아(官衙)를 비롯하여 감옥과 우물 등이 있었다. 포진은 1895년 군사 제도 개편에 따라 폐지하였으나 1897년에 목포가 개항하면서 이곳의 주요 시설들을 대한 제국의 관청인 감리서와 해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목포진은 목포 역사의 뿌리이자 근대사의 출발지라는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87년에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였고 2014년에 역사공원 형태로 일부 유적을 복원하였다. 이 동네의 이름을 ‘만호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시대 만호가 운영하던 수군진이 있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부터 목포진 주변에 진을 지키는 사람들과 식솔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오늘날 목포 사람들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학교 4학년 때 우리 가족은 드디어 목포로 이사했다. 그전에 나는 틈만 나면 뭍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혼자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며 부모님을 조르기도 했다. 신문 배달을 해서라도 독학을 하겠다고 했다. …… 여기에 자식들을 뭍에서 공부시키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합쳐져 생활 터전을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뭍으로, 큰 곳으로,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정말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배에 올랐다. 1936년 가을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기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