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21칙. 지문화상과 연꽃
“연꽃과 연잎은 不二…불심과 중생심도 하나”
{벽암록} 제21칙에는 지문(智門) 화상에게 연꽃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 화상에게 질문했다.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무엇입니까?"
지문 화상이 대답했다. "연꽃이다"
"연꽃이 물 밖으로 꽃이 피어 나왔을 때는 무엇입니까?"
"연잎(荷葉)이다"
擧. 僧問智問, 蓮華未出水時如何. 智問云, 蓮華.
僧云, 出水後如何. 門云, 荷葉.
망념을 비우면 그것이 곧 보리(菩提)
대승불교와 선사상은 '일치'
송대의 선승 지문광조(智門光祚)화상에 대해서는 {연등회요} 제27권, {오등회원} 15권 등에 약간의 법문을 수록하고 있다. {지문광조선사어록}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지문화상은 운문 선사의 제자인 향림징원(香林澄遠) 선사를 멀리 사천 익주까지 찾아가 참문하여 운문종의 정법을 계승하고, 호북성 수주의 지문사에 수행자를 지도하였으며, 그의 문하에 {벽암록}의 '송고(頌古)'를 지은 설두화상을 비롯하여 30여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했다. 아마 연못가에서 연꽃을 쳐다보며 나눈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선문답을 사물을 제시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차사문의(借事問義)라고 한다. 연꽃이라는 사물을 차용하여 불법의 근본(본래면목)을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연꽃에 의미를 두고 이 선문답을 이해하려고 하면 연꽃이라는 경계에 떨어진 중생이 된다.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기 이전(未出水)'은 즉 진실된 자기의 본래면목을 자각하지 못한 순수한 범부의 경지는 어떠한가? 우리들은 진실의 자기 본래면목을 자각하기 이전의 모습은 어떠한가? 중생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성은 어디서나 있는 것이다. {열반경}은 "불성은 본래 있었고, 지금도 있다(本有今有)"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원오도 '평창'에서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은 어떻습니까? 우두법융선사가 사조도신을 뵙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반석(斑石)에 혼돈이 나뉘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차별심(중생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성을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문답에서 자주 제기하는 '부(父)'나 '모(母)'라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父母未生以前]의 소식을 질문하고 있다. 천(天)과 지(地)라는 차별적인 분별의식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자기의 불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연꽃이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밖으로 들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불성을 직접 보고 확인 할 수가 없다. 이때 만약 방편의 언구를 사용하면 이미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지고 만다. 이 질문은 근원적인 불성의 본체에 대한 지문화상의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문 화상은 "연꽃(蓮華)"이라고 대답했다. 질문한 스님은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불성의 실재를 질문했는데, 지문화상은 연꽃이라는 사물의 현상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연꽃이 피어 물 밖으로 나온 이후(出水)는 무엇입니까? 앞의 질문과 반대로 현상의 입장에서 추궁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연꽃이 물속에 있을 때와 물 밖에 나왔을 때, 즉 '미출수(未出水)와 출수(出水)' 양변의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상에 집착되어 있는 질문이다.
불성을 깨닫기 이전의 본래면목과 깨닫고 난 이후는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차별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오는 이 스님의 질문이 미오(迷悟)의 차별심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귀신의 소굴에서 지혜작용이 없는 살림살이 하지 말라!"고 주의 주고 있다.
이 스님은 아마도 당(唐) 규기(窺基)의 {법화현찬(法華玄贊)} 제2권에서 연꽃이 물 속에서 꽃피지 않았을 때와 꽃이 피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두 가지 이름이 따로 따로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여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지문 화상은 "연잎(荷葉)"이라고 대답했다. 연꽃이 피어 물 밖으로 들어 나지 않았을 때도 연잎은 항상 물 밖에 드러내고 있다. 연꽃과 연잎은 같은 것인가? 지문 화상이 "연잎"이라는 대답에 대하여 원오는 "유주(幽州)지방은 그래도 괜찮은데 가장 힘든 곳은 강남(江南)"이라고 착어(着語, 선에서 비평하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북송말 흠종(欽宗)시대에 정강(靖康)의 사변으로 잘 알려진 고사를 말한다. 즉 송대의 조정이 오랑캐의 침략으로 북쪽의 하북(河北) 하남(河南)의 지방을 빼앗기고 남쪽의 강남(江南)으로 도망 왔지만, 계속된 오랑캐(금나라)의 약탈과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옛날 유주의 굴욕은 그래도 견딜 만 한 일이었는데, 뒤에 강남의 굴욕은 참기 어려운 일이라는 당시의 소문을 인용하여 착어한 것이다.
즉 스님의 첫 번째 질문에 지문 화상이 "연꽃"이라고 대답한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두 번째 질문에 "연잎"이라고 대답한 말은 쉽게 알 수 있는 말이 아니니 수행자는 특별히 주의하여 정신차려 참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이지 않는 물속의 연꽃이 근원적인 불성을 의미하는 대답이라면, 물 밖의 연잎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이다. 연꽃과 연잎이 둘이 아닌 것처럼, 불심과 중생심은 둘이 아니다. 그런데 질문한 스님은 연꽃과 연잎을 둘로 보는 차별심에 떨어져 있다. 즉 중생심과 불심, 생사와 열반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지문화상은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는 {열반경}의 사상을 체득한 입장에서 질문자가 교학에서 주장하는 연꽃의 두 가지 이름과 출수(出水)와 미출수(未出水)의 두 견해(二見)의 차별을 벗어나 일체중생의 불성이 본체(연꽃)와 현상(연잎)이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서 불성의 참된 의미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유마경}은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보리)'이며 '생사심(生死心)이 그대로 열반의 경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정신을 잘 새겨 체득해야 한다. 중생의 번뇌를 텅 비우면 번뇌가 없어진 그대로가 깨달음의 불심이며, 중생의 생사 망념을 텅 비우면 그대로 열반적정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법문을 설하고 있다.
{신회어록}에도 불심과 중생심을 질문하는 사람에게 "중생심(衆生心)이 불심(佛心)이며, 불심이 중생심"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불심과 중생심을 둘이라고 보고 나누는 것이 차별심이며 중생이다. 연꽃과 연잎이 둘로 보는 것은 현상의 사물에 떨어진 중생심이다. 불심과 중생심은 다른 것이 아니며(不異), 연꽃과 연잎은 둘이 아닌 것(不二)이라는 사실을 체득해야 한다.
설두는 이 공안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지문화상이 연꽃과 연잎으로 질문한 스님에게 잘 가르쳐 주었네" 즉 지문 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연꽃과 연잎, 자기와 남의 차별심을 초월하여 일체 만법과 하나 된 불법의 본체 묘용을 잘 제시한 법문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원오도 "지문 화상은 노파심이 간절했다"고 착어(着語)하고 있다. 그리고 "(연꽃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라는 분별심에 사로잡힌 스님의 질문에 대하여 원오는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라고 착어함으로써,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잘 사유하고 음미해서 참구해야 한다고 주의하고 있다. '강북과 강남의 여러 선지식(王老)에게 묻고 물어, 의심하고 또다시 의심하는군'이라는 말은 지문 화상이 친절하게 분별심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질문자가 잘 사유하여 체득하지 못하고 강북과 강남의 여러 선지식을 찾아서 돌아다니며, 이렇쿵 저렇쿵 사량 분별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많은 의심과 분별심에 떨어진 중생이 되고 만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