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양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선사박물관>
아득히 먼 옛날 양구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약 5억 4천만 년 전 양구에 살던 동물들은 그들의 족적을 화석으로 남겼습니다. 삼엽충(三葉蟲)이라고 들어 보셨지요. 절지동물 삼엽충류에 속한 화석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너무 멋지지요. 그때 우리 인간은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역사는 참 짧아요. 100년도 못 사는 인생인데도 저 잘난 얘기만 하잖아요. 연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우리 사람이에요.
이런 사실을 양구선사박물관에 가시면 생생하게 볼 수 있답니다. 선사박물관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선사박물관의 삼엽충은 특별한 사연이 있답니다. 바로 평생을 삼엽충 화석을 모은 양구 사람 어느 독지가의 기증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1만 5천 점의 삼엽충 화석은 고스란히 선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너무 멋지지 않아요.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실천하신 분이잖아요. 그것도 사재(私財)를 써 가며 모은 화석을 말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로 양구선사박물관에 삼엽충화석전시실이 따로 생기게 되었답니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너무나 화려하고 멋지며 깜짝 놀랄 화석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생생하게 자신의 모습을 화석에 담았을 까요?
자세히 보면 살아가는 또 다른 방법을 삼엽충의 화석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생김도 여러 가지지만 살아가는 모습도 다양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런 동물들은 지금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지요.
그래도 또 눈을 크게 뜨면 쉽게 찾을 수 있답니다. 그때 동물의 층은 석유라는 화석연료로 변했고요. 식물들은 석탄이라는 화석연료로 변해서 깊은 땅속에 묻혀 있답니다. 언젠가는 다 써서 없어지고 에너지의 재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걱정은 마세요. 태양이라는 무궁무진한 연료가 있으니까요? 어디 그뿐일까요? 훗날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인체연료(人體燃料)도 멋지게 쓰일 겁니다. 스스로 생산하고 보존하며 삶을 영위하는 신물체가 곧 개발 될 것입니다. 100년의 짧은 기간에 화석연료를 다 쓰고 신물질을 개발하여 문명의 발전을 몇 억년 앞당긴 것처럼 말입니다. 너무 멋지지요. 비료와 전기를 개발한 인간의 능력 말입니다.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만 않았으면 참 좋겠어요.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요. 자연 재난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잖아요.
제가 지금 양구선사박물관 얘기를 하면서 잠시 한 눈을 판 것 같아요. 선사박물관에는 삼엽충만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원래 양구선사박물관은 양구에 있는 상무룡리의 유적 때문에 생겼는데요. 상무룡리의 유적은 그냥 영영 물속에 묻힐 뻔 했지요. 바로 지금 파로호라고 하는 화천댐 바닥에 있었잖아요.
일본제국주의, 곧 일제(日帝)는 우리의 고대 역사가 필요 없었어요. 어쩌면 거추장스러운 한국의 역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세계의 발전 기틀이 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지요. 그래서 일제는 우리의 역사를 숨기려고 했어요. 바로 그 명확한 증거가 화천댐을 건설하면서 최소한의 지표조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도 일제보다 못한 시군(市郡)의 지자체 장(長)들이 있기는 하지요. 물론 지표조사를 하기는 했겠지만 형식으로 하고 말았지요.
참으로 슬픈 역사의 현장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일제의 침탈, 그리고 지각없는 통치자와 행정가들 말입니다. 왜 세계를 호령한 몽고의 칭기스칸처럼 남의 말을 들어 성공한 사례를 따으려 하지 않을 까요.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정치인, 행정인은 앞으로도 기대할 수 없겠지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실이지만 아마도 세상이 망하는 그날까지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물속에 그냥 묻히어 영영 나올 수 없었던 선사시대의 유적이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답니다. 평화의 댐 공사를 하기 위해서 화천댐 물을 빼면서 실시한 발굴 때문이었지요. 아마도 1943년 당시 한국의 역사를 깡그리 묻고자 했던 일본제국주의자가 봤다면 어땠을 까요?
상무룡리의 선사유적은 평화의 댐 공사로 인해 화천댐 물을 방류하면서 들어난 유적이랍니다. 우리나라 어디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구석기문화가 아주 많이 출토된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아니 역사학자들은 모두들 놀랐어요.
그 유적들을 강원도에서는 보존하기로 했지요. 그 때문에 양구선사박물관에는 양구의 유적 뿐 아니라, 강원도 전역의 선사시대 유적이 보관된 것입니다. 춘천, 양구, 홍천 등의 선사시대유적이 한 자리에 보존된 것이지요.
춘천의 신매리, 거두리, 하중도, 삼천동, 천전리, 율문리, 발산리 유적과 홍천의 하화계리, 양구의 상무룡리, 만대리, 공수리 등의 유적이랍니다.
우리 선인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찾는 것 너무 멋지지 않나요. 오늘 아이들 손을 잡고 양구선사박물관으로 가보는 것 어때요?
<민속관>
양구사람들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우리 조상들은 어떤 집에서 어떤 농기구와 어떤 생활도구를 갖고 살았을까? 많이 궁금합니다.
이런 궁금증은 양구민속관에 가시면 일시에 해결이 됩니다. 민속관은 선사박물관과 마주하고 있지요. 위치를 찾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답니다.
민속은 민중의 삶을 말하잖아요. 임금님을 비롯한 고관대작의 공적인 삶에 비해서 민중들이 살아온 내력을 우리는 민속이라 일컫는답니다. 산촌, 어촌, 농촌 등에서, 또는 도시 서민들의 삶을 아울러 우리는 민속이라는 범주에 넣는 것이지요. 이들은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농촌이나 도시나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요. 단지 주변 환경에 따라서 적응해 가는 방식이 달랐던 것입니다. 곧 생업에 따른 구별이겠지요.
농촌은 농촌의 환경에 맞게 농사를 짓는 방법 등에 있어 독특한 성격을 보였고, 어촌은 고기잡이를 주요 생계로 삼았기에 그에 적응했고, 산촌은 사냥이나 산나물 채취 등에 있어 다른 생업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생업활동은 간혹 시대에 따라 독특한 변화를 보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화전민(火田民) 같은 경우랍니다. 산에 불을 놓아 땅을 일궈 농사를 짓는 경우이지요. 화전민이 산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산림이 황폐화되는 폐단이 따르자, 정부에서는 이들을 모두 이주 시켰습니다. 어차피 국유림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던 터라 보상이라는 개념은 없었지요. 그때 이주 명목으로 내 건 것은 공비와 간첩으로부터 화전민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어요. 1968년 삼척울진무장공비사태가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화전민들은 모두 도시 노동자로 나갔고, 갑자기 도시가 팽창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농현상은 산촌민속을 완전히 파괴하는 직접적인 것이었지요. 그 때문에 산촌에서 행하던 산신제며, 서낭제 등은 아주 많이 사라졌습니다. 공비의 은신처를 만들어준다는 미명하에 말입니다. 물론 새마을운동사업과 신흥종교의 유입으로 인해 미신(迷信)이라는 있을 수 없는 용어도 만들어지고, 그들이 말하는 미신타파로 인해 민속신앙은 많이 사라지게 된 것이었지요.
이런 외부적인 침탈은 시골의 공동체기반을 무너뜨리고, 생활자체가 도시화 되어가는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계속 시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의 모습을 잘 보전하고 보존하도록 해야 합니다. 먼 훗날 굴삭기를 동원해서 땅을 파며 조상들이 살았던 내력을 찾는데 엄청난 공력과 비용을 지불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양구에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선사박물관과 민속관을 지어서 양구사람들의 삶을 보존한 것이지요.
<함춘주막>
양구 민속관 앞에 가면 새로운 경험을 할 수가 있답니다. 함춘주막이라는 곳입니다.
함춘은 이곳의 지명인 함춘리에서 따온 것이고요, 주막은 우리의 옛 다목적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여행객의 숙식을 제공해 주기도 하고, 긴 여정의 피로를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의 외식장소며, 슬프고 고달픈 현실을 달래며 주모와 함께 막걸리 한 잔을 걸치던 곳이기도 합니다.
황토로 지은 아담한 집에 걸린 ‘함춘주막’ 간판을 보고 주막에 들어가면 옛 정서를 만끽할 수 있어요. 물론 주모도 있지요. 양구에서 생산된 산채며 곡식들로 만든 음식을 누구든 먹어 본 사람들은 흡족해 합니다. 맛깔 나는 음식과 주막이라는 분위기가 잘 어울리거든요.
주막체험이라 할까요. 비록 밤에 잠을 잘 수는 없지만 음식과 술, 그리고 주모의 입담을 함께 해 보세요. 바쁜 요즘의 생활에 한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일탈(逸脫)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답니다.
<명품관>
명품관이라는 이름이 멋지지요. 명품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단어입니다. 왜냐면 생산자는 명품을 만드는 자긍심이 있을 것이고요, 소비자는 명품을 쓰는 만족감이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명품은 품질도 좋고, 값도 비싸지만 누구든 기분 좋게 하고 있습니다.
양구명품관은 현재 두 곳이랍니다. 명품관을 이용하는 수요층이 많아지면서 2013년도에 또 하나를 개관한 것입니다.
양구명품관에는 철마다 생산되는 농산물을 비롯해서 양구의 특산품을 모두 진열해 두었습니다. 방산백자, 방산꿀, 곰취, 송이주, 민들레, 양구오대쌀, 시래기 등등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명품이 많지요. 게다가 명품관에 가시면 양구의 이모저모를 모두 관람하실 수 있답니다.
양구의 명품은 양구에만 있는 것들인데요. 산양이 자라는 지역, 수달피가 노니는 지역, 열목어 떼가 유영하는 지역, 게다가 민간인의 출입이 드믄 DMZ까지 청정의 이미지는 모두 갖춘 곳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국토정중앙의 기를 먹고 자란 양기구운(楊氣口運)의 생산품이라는 것입니다. 백자의 경우는 조선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 임금이 발원문을 써서 나중에 그 발원대로 오백년 도읍의 꿈을 이룬 발원그릇이었고요, 한 시대 한국의 미술을 대표한 박수근 화백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고요, 여류 시인으로서 여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잔잔한 시를 썼던 이해인 수녀의 고향이기도 하답니다. 나라를 연 아주 큰 인물로부터 마음에 여유를 가져단 준 가녀린 여인까지 다양한 삶의 흔적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양구에서 꾼 꿈은 모두 양구의 기운(氣運)을 받아 이뤄진 것입니다.
양구의 생산품들이 명품으로서 가치를 지닌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