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안천과 유역문화
화성의 옛 지명 매홀은 고구려 시대 때부터 유래하는바 매홀(買忽)은 곧 물(水)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과 관계가 깊다. 장마로 인한 범람 등의 역사적 근거를 살필 수 있다.
화성지역의 연 평균기온10~11℃이며, 강수량은 연평균 1,250㎜로 우리나라 평균 강수량에 비해 100㎜가 많다.
발안천은 봉담읍의 태행산, 건달산에서 발원한다. 기천저수지와 덕우저수지를 거쳐 서봉산의 서쪽 사면의 물줄기를 합쳐 팔탄면 구장리, 지월리의 넓은 들을 흘러내려 향남읍 발안리, 제암리를 돌아 행정리, 상신리의 물을 담아 남쪽으로 흘러가며 구문천리와 장안면 장안리 일대의 벌판을 가로질러 남양호로 유입되는 길이 17㎞의 화성 제2의 하천이다.
장안면 수촌리∼우정면 이화리까지 14.8km에 이르는 남양간척지는 1973년 12월 20일 2,065m의 남양방조제 완공으로 1,211ha의 간척농지가 형성되었다.
분향만(남양만)을 막아 조성된 남양간척지와 제방 축조로 조성된 967ha의 남양호는 새롭게 등장한 화성의 관광명소이다. 화성8경 중 제5경으로 “남양황라”라는 가을들녘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일제는 조선을 무단강점하면서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기에 혈안 되어 치밀한 계획으로 화성연안 각처에 잘 발달된 개벌을 막아 논과 염전을 만들었으며 조선인 노동자 농민들을 관리 통제를 위한 많은 일본민간인들이 유입된다.
따라서 수많은 인구와 물화(物貨)의 이동이 발생함으로서 일제 강점기 초에 수원과 오산으로 갈라지는 직선 신작로의 분기점 발안과 조암을 잇는 신작로가 형성되었다. 수원과 오산에 기차역이 생기며 팔탄에서 50리 길인 오산장까지 길을 발안에서 40리로, 조암까지 30리 길을 20리로 좁힐 수 있었다.
현재의 발안 지역은 구장리 쪽으로 2~3㎞ 정도 밀물 때 개천줄기를 따라 배가 더 들어 갈수 있었으나 일제가 개벌을 간척하면서 제방이 형성된 발안에 배를 댈 수밖에 없으므로 발안에 농수산물이 집중되면서 필연적으로 장시가 이전하게 되었다. 1913년 팔탄면 구장리의 장시가 신흥마을 발안으로 옮겨지게 된다.
당시 발안을 “뻘안”으로 불렀으며 이후 연음화 현상으로 “펄안”으로, 지금의 “발안”으로 불리어지는 것이다.
1913년경 발안에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국, 심상소학교, 동양척식주식회사 분소, 발안금융조합,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여 일제의 악랄한 자원의 수탈과 조선인 탄압의 결과 1919년 3월 31(음, 2. 30일) 발안 장날 3․․1독립만세운동이 유례없는 격렬하게 전개된다. 이로 인하여 발안장터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제암리 마을에 일제의 참혹한 보복으로 제암리와 고주리 학살만행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이는 팔탄면, 향남면, 양감면, 장안면, 우정면 일대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와 바다를 간척하여 염전과 농토를 만들어 우리 조선인 농민과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수탈혹사 시켰음으로 빌미되는 반일 감정의 악화가 3․1독립만세를 기화로 일제에 매우 격렬하게 항거하는 독립만세 운동의 제일의 원인이었다.
조암 방면으로 팔탄면과 장안면이 경계하는 해창(海倉)이라는 곳이 있다. 이 곶은 예전에 관곡을 저장했다가 한양 조정으로 실어가는 창고가 있던 포구였기에 해창이라 한다. 지금은 간척으로 바다의 면모를 살필 수 없지만 1960년대에만 하더라도 해창리 인근 개벌에서는 조개를 캐었다는 추억의 풍요로움을 들을 수 있다.
2008년 화성시환경운동연합 단체에서 발안천 생태조사를 하였다. 이때 발안리 도시 한가운데 발안천의 작은 모래톱에서 민물조개 재첩과 각시붕어 등의 멸종보고 된 생물 종들이 발견됨으로서 일대 놀라움을 희소식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 도시 하천을 관통하는 도시정비 사업의 도로의 우회를 요구하는 각계의 환경보존에 대한 우려의 표명이 대두되었으나 교각 설치는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2009.3.8. 일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