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호치민을 다녀와서
성낙수(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외솔회 회장)
호치민시는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로 메콩강 하구 삼각주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에 베트남인에게 정복되기 전에는 캄보디아의 주요 항구였다고 하며, 사이공이란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지인 코친 차이나와 그 후의 독립국인 남베트남(1954년-1976년)의 수도이기도 했다. 1975년에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시 중심부는 사이공강의 강둑에 놓여 있고, 남중국해로부터 60㎞ 쯤 떨어져 있다.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아, 옛날에는 캄보디아인이 살고 있었지만, 17세기에 베트남인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19세기에 프랑스의 도시계획으로 근대도시가 된 후 정치 ·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필자와 같은 세대들은 이 도시에 대하여 1960년부터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즉 1955년 남베트남에 고딘디엠 정부가 수립되고, 북쪽에는 공산국가가 들어서서 자연히 군사적인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1961년에 미국 대통령 J. F. 케네디는 처음으로 미국 정규군을 파견하였고, 이어 L.B. 존슨이 1964년의 통킹만사건을 계기로 미군을 직접 전투에 참가시켰다. 1965년에는 북폭을 개시하였으며, 1968년까지는 미지상군의 투입도 54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나라는 미군을 지원하여 1964년 8월에 1개 의무중대 파견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맹호ㆍ청룡 2개 전투사단, 이어 1966년 백마부대의 파견 등으로 한 때 5만 명의 병력을 월남으로 파병한 바가 있다.
필자가 이렇게 장황하게 역사를 운위하는 것은 이 전쟁이 우리 세대와 아주 관련이 많기 때문이다. 내 초등학교 동창생 중에는 월남전쟁에 갔다온 사람들이 많다. 모두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생활 때문에 돈을 벌려고 지원을 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그렇게 목숨을 걸고 갔다온 덕분에 조금 살림이 나아진 사람도 있지만, 모두 가난의 굴레를 다 벗어나지는 못했다. 또한 내가 대학을 다닐 때 2학년쯤부터 선배들이 월남에 갔다 와서 복교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살육이 빈번하던 전쟁의 용사답게 아주 살벌하였다. 그리고 거의 행패라고 할 수밖에 없는 폭언과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경제부흥에 그들의 피와 땀이 밑천이 되었음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 당시에는 날이면 날마다 베트남 전쟁의 뉴스가 전해졌는데, 이제 직접 그 곳을 보면서 느끼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몇 년 전에 관광단의 일원으로 하노이시 등에 갔다왔고, 작년에는 호치민시에 학술회의 때문에 갔다 왔는데, 금년에는 호치민시에 있는 홍방대학교라는 곳에 장학금과 노트북을 전달하려고 갔었다. 그 대학교에는 한국어과가 있는데, 많은 학생들이 아주 열심히 한국어ㆍ문과 문화 공부에 전력하고 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어ㆍ문의 교수와 전파에 큰 역할을 할 것이며, 한국과의 교류와 베트남의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호치민은 익히 알려진 대로 평화롭고, 다채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직도 그 옛날에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우던 오토바이 행렬이 길을 메우고, 아오자이 대신에 짧은 바지와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이발소 같은 곳에 잔뜩 앉아 있다. 한 집 건너 맛사지집이 들어선 것을 보면, 향락문화가 발달된 것으로 보였다.
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 밑으로는 유럽풍의 옛 건물도 흔히 보이고, 허무러질 듯한 허름한 집들도 들어서 있다. 그래도 각종 과일을 비롯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걸 보면, 역시 다른 열대지방처럼 식생활에는 문제가 없는 듯 보인다. 필자는 더운 나라 백성들은 과일을 비롯하여 먹을 것이 많아 조금은 게으르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성정을 가진 것으로도 보인다.
이 번의 호치민 방문에서는 저녁에 사이공강가에 정박해 있는 배에서 만찬을 먹고, 30여 분간 유람을 한 것과 대학에서 제공한 메콩강 관광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메콩강은 아주 넓은 강으로서 곳곳에 있는 섬에 관광지를 조성하여 특산물 등을 팔고 있었다. 특히 점심에 나온 ‘얼레판트 피쉬(코끼리물고기)’라는 물고기 요리가 맛이 있었다.
이제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라고는 하나, 우리나라와 정치ㆍ경제적으로 아주 밀접한 국가다. 옛날부터 농경민족으로서 비슷한 생활 습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국제결혼도 점증하여 가까운 나라로 부각되고 있다.
다만 짧은 시간에 ‘주마간산’처럼 둘러본 나그네의 눈으로는 아직도 이 나라가 공중질서를 잘 지키지 못하고, 공산품 등에 대한 실력이 부족하여 열악한 물건을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열대에 위치하여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성으로 보아, 가까운 날에 부자나라로 탈바꿈하리라는 믿음도 또한 가져보았다.
성낙수의 주요 약력: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사기소리 237번지에서 출생
성당초등학교, 당진중학교, 공주사대부고 졸업
연세대학교에서 문학사, 문학석사, 문학박사 학위 취득
청주여자사범대학, 동덕여자대학 교수, 파리7대학, 북경 중앙민족대학 객원교수 역임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재) 외솔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