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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2005~2020]/정기산행기(2005) 2005-11-28 16:27:55
[52차]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기 2005. 6. 14. (화) / 박광용
산행일 : 2005. 6. 11. (토), 화창하게 맑고 따뜻함.
코 스 : 비선대-마등령-나한봉-1275봉-노인봉-1184봉-신선대-무너미고개-양폭-비선대
거 리 : 소공원 - 3km - 비선대 - 3.5km - 마등령 - 4.9km - 무너미고개 - 5.3km - 비선대 - 3km - 소공원. (총 19.7 Km)
친구들 : 박광용, 권택술, 이민영, 조길래, 김길수, 김인섭, 황문수, 김재중 (총 8명)
<프롤로그>
설악 공룡을 만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지가 3년째다. 재작년 재중이와 둘이서 좀 이른 설악의 가을을 즐기고 난 후(오색-대청-천불동), 함께 공룡을 타보자고 다짐했었다. 작년 가을에는 재중이와 일정을 맞출 수가 없어 망설이다가, 민영이와 의견일치를 보고 공룡에 도전하였으나, 경직된 일정으로 움직이려다 첫날 비바람을 맞고 운행에 차질을 빚고 만다. 하루만 일정을 늦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공룡은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만다.
이번에는 부산의 재중이와 미리 연락하여 일정을 잡아버렸다. 내가 휴무하는 토요일을 잡으려 하니 선택의 폭이 좁다. 6/11(토)에 산행하기로 하고 가장 단거리인 ‘비선대-마등령-(공룡)-무너미고개-양폭-비선대’ 코스의 당일 산행으로 잡아버렸다. 온종일 걸어야 하는 코스인지라, 전날 설악에 당도하여야 하니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충분히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해결하기로 한다.
49차 강화도 마니산 산행에서 공룡 산행계획을 슬쩍 흘리니, 문수와 인섭이는 무조건 간다 하고, 신림이를 꼬셔 보지만 택~도 없는 소리란다. 문수가 숙소예약 필요하면 알려달란다. 재중이가 부산에서 올라와야 하는 관계로 재중이와 먼저 일정을 협의하다가, 10일(금) 저녁 7시 서울을 출발하여 밤 10시에 숙소에 도착하고, 11일(토) 온종일 산행하고 (11시간 예상), 12일(일) 오전에 귀경하는 것으로 2박3일 일정을 최종 합의한다.
며칠 후 산행 공지를 메일로 띄우니 반응이 시원찮다. 문수의 숙소예약이 끝나고 나서야 참가자가 늘어나고, 최종적으로 부산의 재중이를 포함하여, 광용, 문수, 인섭, 길래, 길수, 민영, 이렇게 총 7명의 대군으로 구성되었다. 경호도 무척 가고 싶어 하였으나 아들녀석 군대 간다고 시간 맞추기 어렵다 하고, 병효는 다른 산행일정이 잡혀 있는지라 불참하겠단다.
1주일 전부터 날씨예보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뭔가 좀 신경이 그슬린다.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 비가 올 거란다. 이거 미치겠다. 작년에도 비 때문에 공룡이 나와 민영이를 거부하고 말았는데, 올해 또? 참가 신청한 친구들도 내게 전화로 확인한다. 나는 “우리는 무조건 간다. 비옷이나 준비해라.”고 답했더니 더 이상 군소리는 없어졌다.
떠나기 전날 목요일, 재봉선사에게 전화한다. “선사님, 우리를 위해서 기도 좀 해 주이소. 날씨가 사람 골탕 먹일라 카는데, 이는 선사님의 기도만이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 했더니, 선사님도 “그래 알았다. 기도해 주께.” 하며 불참의 아쉬움을 대신한다.
떠나는 날 (6/10, 금),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업무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오후에 인터넷으로 날씨를 검색해 보니 예상보다 빨리 구름이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오늘 출발하면 내일 날씨는 좋을 것이라 믿으며 출발을 준비한다.
오후 4시경, 택술이 전화다. “빈자리 있나?” 하고 묻는다. “총 7명이니까, 충분하다. 그런데 시간 지켜라. 7시까지 수서역이다. 1분이라도 늦으면 우리 떠나뿐다.”로 답했는데 약간 걱정도 된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택술이가 무릎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 왔던 지라, ‘뒤쳐지면 우짜노?’ 하는 걱정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래도 팀 닥터까지 동행하게 되니 조금은 든든하기도 하다. 이래서 총 인원이 8명으로 늘어났다.
저녁 6시, 일찍 퇴근한다고 보고하고, 길래를 태우고 수서역으로 간다. 민영이한테 연락하니 집에 들렀다 갈 거란다. 나도 집 앞에 주차하고 민영이 차로 수서역으로 이동, 김밥 집에서 간단히 요기한다. 인섭이, 택술이도 늦지 않게 도착한다. 문수, 재중, 길수는 수서역 6번 출구에 도착해 있단다. 내일 산행 중에 먹을 아침, 점심을 김밥으로 준비하고, 7시 20분쯤 6번 출구로 이동하려는데 택술이가 없다. 화장실을 갔다나 어쨌다나??? 7시30분 경, 수서역 6번 출구에서 총 8명이 집합 완료한다.
부산에서 온 반가운 친구 재중이와 인사하고, 문수의 랜드로바와 민영이의 멋진 승용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흡연차와 비흡연차로 구분하여 4명씩 탑승하고, 순환도로-하남-팔당대교-6번 국도로 올라선다. GPS가 딸린 문수 차가 앞서며, 무전(워키토키)으로 연락하니 밤길에 카메라 걱정 안 해도 되니 편하다. 금요일 저녁이라 행락 차량으로 붐빌 것인데 비가 와서 그런지 도로가 한산하다.
문수가 무전으로 “터널 지나서 휴게소에서 좀 쉬었다 가자” 한다. 따라가보니 ‘화양강 휴게소’다. 커피 한 잔씩 뽑아 먹으며 하늘을 본다. 별이 보이지는 않지만, 초승달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이거 대박이다. 내일이면 휘황찬란한 하늘을 볼 수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설악 공룡이 어디 보통의 심술이더냐? 떠나려는데 또 택술이가 없다. 5분 여를 기다렸나, 화장실 쪽에서 나온다. 아무래도 뭔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하고는 그냥 갈 길을 간다.
미시령을 넘고, 10시 40분 우리의 숙소 ‘일성설악콘도’에 도착한다. 방이 좁다. 원래 4~5명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인원이 8명으로 늘어나 버렸으니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고… 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 온 기분이다. 군대 내무반처럼 일렬로 쭉 늘어 눕는 수 밖에 없다. 물과 소주, 맥주, 등 준비물을 챙겨둔다. 민영이가 갖고 온 지리산 무슨 꽃술과 맥주 한 컵으로 목을 축이며, 간단히 내일 코스를 일러 주고, 4시30분에 기상하기로 하고 알람을 맞춰둔다.
대충 자리잡고 누웠는데 혼자 부시럭 거리는 친구가 있다. 라면을 끓이네, 계란을 삶네, 하면서 택술이 혼자 부지런을 떤다. 그때서야 이야기한다. 설사를 했었노라고. 점심 먹은 것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단다. 그래서 수서역에서, 화양강 휴게소에서 우리를 애타게 했었구나 여긴다. 그런데 걱정이 더 커진다. 그런 몸으로 내일 산행을 감행할 수 있을는지? 팀 닥터인 마당에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꺼라 여기고 잠을 청한다.
<산행기>
이튿날 (6/11, 토), 4시가 되니 누군가 맞춰놓은 알람이 울기 시작하더니 우르르 모두 잠을 깬다. 예정보다 30분을 일찍 깬 것이다. 먼저 창을 열고 하늘을 보니 구름만 내려 앉아있다. 일기예보에는 안개가 많이 낄 거라는 걸로 봐서 날씨는 맑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남자 8명에 화장실이 한 개라, 밖에 나가서 볼일 볼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부산을 떤다. 둘러 앉아 어제 사온 김밥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준비물을 각자의 배낭에 골고루 나누고, 5시 05분 출발이다. 목우재를 넘어 설악동으로 이동하니, 널찍한 주차장에 주차 된 차가 몇 대 없다. 우리 차량 두 대가 먼저 주차한다. 입장료 내고, 국립공원 설악산 지도(가장 상세한 지도입니다. 잘 보관해두세요.) 한 장씩을 나눠주고, 비선대로 출발이다. 금강교를 건너고 포장길을 지나자 숲으로 둘러싸인 흙길이다. 냄새가 풋풋하다. 우리 모임에서 산행하면서 가장 이른 시간에 산에 오르고 있는 것 같다.
소공원을 출발한지 30여분 지났을까? 비선대다. 몇몇 산객만이 휴식하고 있다. 우리가 올라갈 길을 올려본다. 미륵봉(일명 장군봉) 옆구리에 나있는 금강굴 옆을 통과할 거라고 일러주니 모두 겁부터 먹는다. 가파른 경사에 질리는 모양이다. 비선대에서 10분간 휴식하고 6시 10분 마등령을 향해 무지개 다리를 건너간다. 예상시간보다 10분 늦은 것이니 큰 걱정할 것은 없다.
재중이가 선두를, 내가 후미를 맡는다. 문수나 내가 선두에 서면 속도조절을 못해 오늘 산행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반 속도를 가장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재중이라 여기고 재중이를 앞세운다. 급경사 오름 길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30여분, 금강굴 입구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출발한다.
급경사 오름 길에 조망이랄 것이 별로 없다. 숲이 우거진 탓에 더욱 그렇다. 선두와 후미가 조금씩 거리차이가 난다. 다른 등산객이 많지 않아 좋다. 10여분 먼저 떠난 팀이 우리 앞에 있고, 뒤에는 3~4명의 팀이 우리 뒤를 따라오는 듯하다. 하지만 서로를 만나보지도 못했으니, 우리가 설악산을 통째로 전세 낸 기분이다. 후미의 속도가 늦어지고 휴식시간이 길어지자 재중이가 좀 갑갑한 모양이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웃음으로 갑갑함을 거둔다.
앞 사람 신발이 내 코에 닿을 정도로 급한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길수가 헛발질을 한다. 작은 돌멩이를 뒤로 밀어 내릴 때마다 몸이 자꾸 좌우로 흔들린다. 선두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잠시 쉬는 곳에서 길수가 포기한다. 그냥 내려가겠단다. 목요일 밤에 고도리 친 것이 화근이란다. 금요일 새벽까지 잠 못자고 버텨냈으니 장사가 없을 테지. 설악산 간다고 헤드랜턴하며 비옷까지 준비했는데, 회사 사람들한테 온갖 자랑을 다 늘어 놓았는데… 아쉽게 길수와 작별하고 숙소에서 쉬고 있으라고 민영이 차 키를 내어준다.
두어 차례 더 휴식을 취하고 금강문을 지나 샘이 있는 곳에서 10분간 휴식한다. 09:05 드디어 마등령 고개 마루에 당도한다. 3시간에 올라온 것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싶다. 원래 ‘령’이라 함은 고개 이름에 붙이는 것일 진데, 가끔씩은 고개 마루 옆의 봉우리를 뜻하는 경우도 많더라. 여기서도 그렇다. 마등령 봉우리는 고개 마루보다는 북쪽에 위치하여 공룡에서 이어진 백두대간을 북으로 이어가서 저항령-황철봉-미시령으로 이어지고, 동으로는 세존봉-미륵봉(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작은 능선을 이룬다.
지금 우리는 마등령 고개 마루에 위치해 있다. 이제 백두대간의 능선마루에 올라온 것이다. 북으로 능선 타고 그냥 백두산까지 가버릴까? 마음을 진정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 사과도 깎아먹고, 떡도 한 조각씩, 오이 등으로 원기를 보충한다. 소주도 한 모금했나? 예의 증명사진을 하나 찍고 (한 사람이 없네? 이게 유일한 단체 사진임.) 이동한다.
이제 본격적인 공룡능선을 타는 거다. 2~3분 이동하면 좀 널찍한 공터다. 이름하여 마등령 독수리요새. 고목의 가지 모양이 독수리를 닮아서 돌탑을 쌓아 놓은 것인데, 마등령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독수리한테 오늘의 우리 산행을 지켜줄 것을 신고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매점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있고, 쓰레기 집하장이 되어버렸다.
09:25 나한봉을 향해 전진이다.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된다. 얼마나 왔었나? 나한봉 봉우리 바로 옆으로 우회한다. 우리가 갈 길을 조망해 본다. 1275봉도 분간할 수 있겠다 싶은데 능선 금이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워낙 침봉들이 많아서 일 게다. 저 멀리 대청봉이 중청, 소청, 끝청을 거느리고 서북능 하늘금을 긋고 있다. 두어 차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로프 구간도 지나면서, 1275봉 아래 안부에 당도한다. 가야동 계곡 방향으로 좀 내려가면 샘이 있다고 하는 곳이다. 우리는 충분한 물을 준비했으므로 물 뜨러 가야 하는 불편은 없다.
잠시 숨을 고르고 급하고 긴 오르막을 오른다. 1275봉으로 오르는 것이다. 약 20여분을 급한 오르막을 오르고 숨이 턱에 닿을 때쯤 좀 널따란 공터에 당도한다. 11:30분이다. 독수리 요새에서 여기까지 2시간 걸린 것이다. 1275봉은 봉우리가 두 개인데 조금 높은 봉우리가 동쪽에 있고 (이곳이 정상), 서쪽 봉우리가 좀 낮다. 그 중간에 조금 널따란 공터가 있는 것이다. 이제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 뒤돌아가더라도 온 것만큼 가야 하니, 어차피 앞으로 전진하는 수 밖에 없다. 재중이 왈 “여기까지 왔다가 못 내려간 사람은 없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허기진 배를 어쩌랴? 여기서 자동으로 점심상을 차린다. 김밥, 소주, 사과, 오이, 오징어, 방울토마토, 등 무슨 음식인들 맛이 없겠는가? 하지만 김밥의 양이 좀 많은 것 같다. 반 줄 정도를 남긴다. 30여분을 휴식하고 떠날 채비를 한다. 택술이가 준비 끝나면 우리 일행은 출발이다.
첫발을 딛는 순간, 공터 반대편에서 쉬고 있던 여자 둘, 남자 한명의 일행 중에 한 아줌마가 “그 오이 우리 주고 가면 안돼요?” 한다. 이런? 먹거리가 없어 계속 우리쪽을 보고만 있었던 모양이다. 정면으로 앉아 있던 민영이는 자기한테 관심 있어 하는 줄로 알았단다.
재중 “여자 분이 받으러 오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일행 중의 남자 “갔다 와!”
재중 “요즈음 남자들 다 이렇다니까?”
인섭이가 배낭을 챙기다 말고 사과와 오이가 들어있는 봉지를 다가온 아줌마에게 내민다. “사과까지 다 드리지 뭐.” 하면서 챙겨주고, 즐거운 산행하시라고 일러둔다. 그 일행은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도 더 했을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 준비 없이 이곳 공룡의 중심까지 왔단 말인가? 아찔하다. 돌아 나오면서 김밥 남은 것도 주고 올 걸 그랬다 싶다. 알고 보니 우리와는 진행 방향이 반대였다.
12:15 1275봉을 출발한다. 급하고 긴 내리막을 또 내려간다. 내려갈 걸 왜 올라왔으며, 올라갈 걸 왜 내려가냐며 투덜대기 시작한다. 20여분을 계속 내려 왔다. 이제 천화대 능선이 시작되는 노인봉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긴 오르막을 가는 중에 밑에서 올라오는 한 줄기 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봉우리 부근에 당도하기는 하지만 주변 조망은 별로다. 봉우리 정상 바위와 주변 숲에 막혀 조금은 답답하다. 정상으로 우리가 오르기는 좀 힘들 것 같다.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수수꽃다리 (일명 라일락)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흰색이 대부분이고 엷은 보라 빛을 띤 것도 있다. 간간히 일렁이는 바람타고 진한 향기는 땀에 찌든 쿰쿰한 냄새를 지워낸다. 재중이는 이처럼 진한 향기는 처음 맡아본단다. 1184봉에 가면 조망이 좋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또 내려가는 거다. 또 오르막이 있겠지! 1184봉에 이르자 주변이 확 트인다. 대청봉도 눈앞에까지 다가왔다. 중청의 천문대인지 기상대인지 둥근 볼도 눈에 확 들어온다. 희미하지만 희운각 산장의 노란 물탱크도 눈에 띈다. 소청 옆에서 가야동 계곡 쪽으로 시원히 뻥 뚫린 도로처럼 보이는 것은 산길이 아니라 사태가 나서 그런 거란다. 출입금지구역이다.
서북능이 하늘금을 이루고, 그 아래 용아장성은 손에 잡힐 듯하다. 작년 가을에 민영이와 구곡담 계곡을 오르면서 용아장성을 하나도 구경하지 못했는데 오늘 이곳에서 한 없이 눈에 넣어둔다. 재중이는 기회가 되면 용아릉을 한 번은 타고 싶단다. 하지만 나는 용아보다는 공룡을 반대방향으로 한 번 더 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동으로는 화채능선이 늠늠하고, 주능선에서 뻗어 내린 지능선들이 절벽을 이루어 일천 여 개의 불상을 이루고 있다. 바로 발 밑으로는 칠형제봉 능선이 쭈삣쭈삣 늘어져 있다. 효용 고수가 지난 주에 여기서 릿지를 했다는 능선이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에 점점 짙어가는 숲의 빛깔이 훌륭한 조화이지 싶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시도 만에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공룡에 감사를 표해야지. 여럿이 모여 사진을 찍어둔다.
뒤돌아보면 왜 노인봉이라 이름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봉우리가 보이고, 그 봉우리를 시작으로 천화대능선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천화대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범봉이 우뚝 솟아있어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마등령 쪽에서 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달리 보인다. 효용 고수는 지난 주에 천화대능선 중의 하나인 석주길도 릿지하고 왔단 말이지?
이제 한 고비만 남았다. 신선대에 오르면 비선대까지 계속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올라갈 일이 없는 것이다. 다시 로프를 잡고 내림길을 가고 빤히 보이는 오르막도 이제는 힘겹다. 선두와 후미가 10분 이상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신선대 오르막에서 숨이 목까지 차오를 즈음, 신선대 바위 위에 섰을 때가 14시다. 물론 정상은 아니다. 정상까지 오르려면 좀더 노력해야 한다. 바위 릿지를 해본 사람이면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 듯… 이제 더 이상 봉우리가 없는 고로 마음껏 조망을 즐긴다.
리본이 매여 있는 좌측으로 돌아 조금을 올랐다가 내려간다. 무너미 고개까지 단숨에 내려간다. 재중이, 문수는 발걸음이 너무 가볍다. 출발했다 하면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20여분 후, 무너미 고개에 당도하고 나무계단이 끝나는 곳을 내려와서 10분간 휴식한다. 재중이는 휴식시간이 너무 길어지니까 몸의 기운을 조절하기가 어렵단다. 재중이와 문수가 먼저 내려간다. 양폭에서 만나기로 하고. 길래도 재중이를 쫓아가다가 되돌아온다.
휴식할 때마다 제일 바쁜 사람이 있다. 신발 끈 풀어놓고, 무릎의 붕대 풀었다가 다시 감고, 또다시 패치를 붙였다가 다시 떼어내고 무릎보호대를 했다가 다시 풀기를 여러 번… 아무튼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잘 챙긴다. 내 생각으로는 성가실 정도로… 10분을 더 쉬고 2진도 출발한다. 양폭까지 40~50분 걸릴 것이다. 재작년 재중이와 설악을 찾았을 때 희운각에서 양폭까지 30분에 주파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쁠 것이 없다.
정해진 길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고, 쉬엄쉬엄 가기로 마음먹으니 더 이상 편할 수가 없다. 2진 5명은 천천히 간다. 1진의 문수가 무전으로 연락한다. 천당폭포를 지나 양폭 위를 지나고 있다고, 또다시 5분 후에는 산장에 도착했단다. 우리는 아직 15분은 더 남은 것 같다. 민영이와 택술이는 알탕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조금 재촉한다. 양폭산장에 내려가서 맥주 한 잔 사주겠노라고, 양폭에서 알탕하면 되니까 내려가서 하자고.
천당폭을 지나고 양폭에 이르러 진짜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러 등로를 비껴 옆으로 더 들어간다. 폭포수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어두고, 산장에 도착하니 재중이는 30분을 기다렸단다. 계곡물을 받아 채워놓은 차가운 맥주를 3,500원 주고 한 캔씩 마신다. 이처럼 시원한 맥주가 또 있을까? 우리 몸 내부 깊은 곳에서 발생한 열기를 맥주 한 캔으로 다 식힐 수는 없는 것이리라.
김밥의 양이 많지 않았다면 여기서 조금은 시장할 것이고 그러면 라면을 끓여 먹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김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문수가 힘들여 갖고 온 버너와 코펠을 커피 끓이는 용도로 사용해 본다. 문수의 버너는 진짜로 손가락 두 개를 포개놓은 것만하다. 이에 비하면 내 것은 부피가 열 배는 될 것 같다.
택술이는 29년 전에 이곳에 왔었단다. 양폭산장의 털보 아저씨와 외삼촌이 함께 공룡을 넘고 화채능선도 구경했단다. 우리 일행 중에 유일하게 공룡 등을 두 번 밟은 친구인 셈이다. 산장을 배경으로 택술이 독사진을 하나 새겨 둔다. 산장지기 아저씨 왈 “어제, 오늘은 사람들이 없어요. 어제 비가 와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씨에 설악을 전세 낸 것 같다. 간간히 지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부딪히는 사람들이 없으니 정말 좋다.
배낭을 정리하고, 비선대로 내려간다. 지도상에는 1시간40분 정도로 예상하지만 보통은 1시간을 넘지 않는다. 천천히 간다. 30분을 갔나? 중간에 민영이가 도저히 못 견디는 모양이다. 알탕하러 가잔다. 1진(재중, 문수, 인섭)한테 무전으로 ‘알탕 모드’를 알려주고 좀 쉬어 간다. 길에서는 조금 벗어났지만 숲이 우거져서 전혀 볼 수가 없는 곳이다. 민영, 택술, 길래가 모두 훌러덩이다. 나는 무릎까지만 물에 담그고 천불동의 백미를 시원함으로 만끽한다.
몸가짐을 바로하고 또 길을 떠난다. 1진은 귀면암을 지난단다. 그래 느그는 먼저 가라. 우리는 천천히 간다. 조금 후에는 비선대에 도착했단다. 문수한테 길수와 연락해보라고 일러둔다. 알탕으로 식힌 몸에서 다시 열기가 솟아오른다. 조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천천히 타박타박 걸어간다. 2진이 비선대에 도착한 시간이 17시30분쯤. 쉼 없이 1진과 같이 소공원으로 간다. 재중이와 문수가 너무 많이 쉬었다고 그냥 가잔다.
고속도로를 따라 터벅터벅… 어느덧 소공원이다. 18시 10분, 길수가 마중을 나와 있다. 어찌나 반갑던지?? 이로서 기나긴 12시간의 대장정을 마감한다. 길수는 아픈 다리를 끌고 비선대로 내려와서 바위 위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그냥 잠이 들었단다. 1시간 이상을 바위 위에서 자고 숙소로 돌아갔단다.
이제 샤워하고 싱싱한 회 먹으러 간다. 시장 끼가 돌고 배에서는 자꾸 신호가 온다. 숙소 내의 온천탕에서 열을 식히고 경직된 근육을 풀어준다. 30분 정도 샤워를 마치고, 횟집 찾아 택시타고 속초 시내로 간다. 문수 경험으로 중앙시장 지하의 횟집에서 사먹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란다. 동명항이나 대포항으로 나가봐야 관광객을 대상으로 바가지만 씌운단다.
부여회집, 적당히 흥정하고 자리에 앉으니 조개를 삶아준다. 남자들이란, 조개 얘기만 나오면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회 준비하는 동안 맥주로 열난 몸을 식히고, 회가 나오면서 못다한 얘기와 웃음을 안주로 이슬이를 돌린다. 속도 늦추어 간다고 고생한 재중이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후미를 아무 탈 없이 따라준 친구들, 특히 택술이에게 그 고마움을 전한다.
<에필로그>
사실 참가 인원이 늘어나면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 낙오자가 생기지는 않을는지? 부상당하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등등… 나이 50에 시작한 등산으로 무릎이 모두 조금씩 문제를 안고 있을 텐데 하는 걱정이 나의 뇌리를 감돌고 있었다. 그런 우려를 깨끗이 씻어버린 친구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길수가 마등령 오름길에서 일찍 포기한 것이다. 한편 다행이라고 생각도 하지만 서운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목요일 밤의 고도리 때문이라고 했나? 이 나이에 12시간의 대장정을 떠나는 마당에 자신의 몸을 혹사 시키는 일은 없도록 하자.
선두의 초반 속도 조절하느라고 자신의 속도를 늦추어 가는 수고를 해준 재중이와, 배탈을 무릅쓰고 12시간의 대장정을 감행하며 가장 고생을 많이 했을 택술이에게, 이 못난 글을 바친다. 문수야, 숙소예약에서 손수 운전까지 온갖 준비물을 혼자 다 준비했구나. 너무 고맙다. 동행한 친구들, 민영, 인섭, 길래, 모두 고맙고 수고 많았다. 길수야, 민영이와 나도 재수하여 성공했는데 내년에는 공룡 거꾸로 한 번 타야지? 마라톤을 완주하는 길수가 예서 말 수 없쟎아! 마지막으로 또 하나, 재봉 선사님의 기도 덕분에 설악 공룡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선사님, 고맙습니다.
[답신 1] 조길래
역시 박 대장은 진짜 대장이다!
새벽부터 시작한 마등령, 백두대간, 공룡능선, 천불동계곡으로 이어지는 12시간이 넘는 긴 行程을 이렇게도 정확하고 자상하게 빠짐없이 서술할 수가 있을까? 헐떡거리면서 앞 사람 꽁무니 뒤쫓아 따라가기도 숨이 찼는데…
이번 설악산행에 우리가 지나쳐간 고개마루, 봉우리, 능선, 계곡 등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려 맘속 깊이 벅찼던 심상을 나도 나름대로 읊어볼 꿍심도 있었는데… 박 대장이 작정을 하고 쓴 설악 산행기는 그야말로 일등품이다. 광용아! 화이팅!
공룡능선이 펼쳐주는 천애무봉 기암괴석은 설악을 찾는 山人들에게 보답을 하는 이땅 금수강산 대자연의 베풂이 아닐는지? 같이 산행을 한 소중한 친구들 모두 한 마음이겠지요.
二乘取滅 菩薩留生
박 대장 산행기를 읽고 감탄을 한 다정스런 친구가
조 길래
016-346-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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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2] 김재중
박 대장!
수고 많았다. 사실 광용이가 대장인지도 몰랐는데, 이번 산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대장감이 아닌데… ㅎㅎㅎ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 몸을 스스로 잘 가꾸는 놈이 최고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나도 게으른 천성 탓에 젊었을 적(?) 단련해 놓은 체력 다 까먹고, 이제는 장거리 산행에는 조금씩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비하면 서울 친구들은 매주 등산한다고 하니, 조만 간에 좋은 산행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있어 보여 부러웠다. 나도 열심히 운동을 해야 되는데…
실제로 별로 한 일이 없는데도, 박 대장께서(여기서는 존칭으로 ^^) 자꾸 수고 많이 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는 그냥 앞에 가라 해서 앞에서 갔고, 뒤가 안 보이니까 쉬면서 기다렸을 뿐인데… 오히려 뒤에서 따라오면서 무지하게 욕을 많이 한 것 같던데…
다행이라면, 아무도 부상 없이(적어도 콘도에 돌아 왔을 때까지는) 산행을 마쳤다는 것이다.아마도 내가 장거리 산행 경험이 조금 있다고 나를 선두에 세운 것 같은데, 서울 친구들 산행 관례를 잘 몰라서 내 맘대로 하는 바람에 민폐를 끼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당시에 괘씸한 생각을 한 친구들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용서를 구한다.
나는 다음 기회에 용아장성을 한 번 타보고 싶다. 전문가와 함께… 그리고 가능하면 올해 중으로 ‘오색-대청-공룡-마등령-설악동’ 당일 코스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 하루라도 더 젊었을 적에... 이왕이면 아들 놈들 데리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도 있어서, 이번 산행은 나에게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택술이, 길래, 문수, 민영이, 인섭이, 길수 그리고 박 대장,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준 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이번 산행의 실질적인 페이스메이커는 택술이였음을 이 자리를 빌어 만천하에 밝힌다. 지 몸 잘 관리하면서, 능력껏 페이스 조절을 잘한 택술이는 "영악한 동반자"였다.
박 대장의 산행기는 훌륭하다.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지 몰랐다.
모두들 수고 많았다. 그리고 즐거웠다. 고맙다.
김재중 드림
Jae Joong Kim, Ph. D.,
Dept. of Civil & Ocean Engineering,
Dong-A University,
840 Hadan 2-dong, Saha-gu,
Busan 604-714, Korea
Tel) 82-51-200-7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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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3] 이민영
박대장님,
우리 쫄들을 이끌어주시고 이렇게 장문까지 !
이제 대장에서 고수로 승진함이 어떨까 하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안돼 ! 왜냐? 대장할 인물이 아직 없거든.
누군가 신림일 거사로 올리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그것도 안돼 !
신림이 빠지면 쫄 수가 거의 없어져 쫄고의 위상이 이상하게 되므로...
좋은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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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4] 김인섭
안녕들 하시요? 지금쯤은 다리 알통도 다 풀렸으리라 믿고…
6/11 ‘영광의 팀’ 덕분에, 나로서는 평생 자랑거리를 하나 챙긴 기분이라네. 며칠째 공룡등반의 무용담을 주위에 늘어 놓으며, 좋은 안주거리로 삼고 있소. 재봉선사, 신림이 데리고, 그라고 재수해야 하는 길수랑 가을 단풍에 한번 더 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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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고, 저는 이번 토요일에 다른 일이 있어 주왕산 산행에는 조인을 못한다. 어제 파나마에 있는 박세우가 왔던 데, 일요일 등반을 하자고 해서… 혹시 주왕산 가지 못하고, 일요일에는 시간이 되는 양반들은 서로 연락해 근교산을 탑시다.
그라고, 제 id를 회사 아닌 개인 id로 좀 바꿔야겠다.
‘inseopkimkr@yahoo.co.kr’로 좀 모두 바꿔 주라.
감사
Inseop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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