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일곱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17 권기옥 -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출생 - 사망
1901.1.11. ~ 1988.4.19.
학생시절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고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권기옥 선생은 청년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중국 항공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한 선생은 어린 시절 품었던 비행사의 꿈을 이루며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가로 활동하였다. 결혼 후에도 독립운동가였던 남편 이상정과 함께 독립을 위한 여러 활동에 가담하였던 선생은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숭의여학교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 가입
권기옥(權基玉, 1901.1.11~1988.4.19)선생은 1901년 1월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에서 권돈각(權敦珏)과 장문명(張文明)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에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으나 놀기 좋아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날려 선생이 4살 되던 해에는 남의 집 문간방 신세를 질 정도로 가난하게 되었다. 11살 되던 해에 은단공장에 취직하여 집안 살림을 돕던 선생은 이듬해 12살의 나이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운영하던 숭현(崇賢)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선생은 수학 교사 박현숙(朴賢淑)의 권고로 당시 숭의여학교에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松竹會)에 가입,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신홍식으로부터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박현숙의 지휘 아래 한선부(韓善富), 김순복(金順福), 차진희(車鎭姬), 최순덕(崔順德), 김명덕(金明德), 장성심(張聖心) 등과 함께기숙사의 일본인 사감호시코의 눈을 피해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애국가 가사도 등사하였다.
평양청년회 김재덕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체포
유치장에서 풀려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 김정직(金鼎稷), 김순일(金淳一), 김재덕(金在德)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의 일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는데, 학생들은 자신들의 긴 머리를 잘라 판 돈을 가져오거나 어머니의 패물을 판 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던 김재덕(金在德)으로부터 평양 근교 30리 밖 과수원에 가서 권총을 찾아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생으로부터 그 일을 부탁 받은 선생의 동생 기복(基福)이 권총을 발목에 노끈으로 묶고 그 위에 대님을 맨 다음 자전거를 타고 가져왔고, 선생의 어머니가 김재덕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김재덕이 권총을 시험하다 오발하여 총소리를 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선생은 평양경찰서에 다시 구속되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끈질기게 미행하는 형사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평양청년회 여성전도대를 조직
6개월 형기를 보내고 출옥한 선생은 1920년 8월에 문일민(文一民), 장덕진(張德震) 등으로부터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할 것이니 도와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선생은 그들을 만나고 숭현소학교 수위의 도움으로 숭현소학교 지하실 석탄창고에 숨어 폭탄을 제조하였다. 며칠 후 평남 도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는데 폭파범은 한 명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당시 평양 숭실학교에는 브람스 밴드를 연주하는 전도대가 있었는데, 선생은 이 전도대의 리더인 차광석(車光錫)의 조언을 듣고 한선부, 차순석, 차묘석 등을 구성원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을 조직하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동지들과의 연락을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추천으로 중국의 항공학교 입학
졸업 후 선생은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4월에 중국의 변방인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항공학교 입학은 선생의 소녀시절의 꿈이기도 하였다. 선생이 16세 되던 1917년 5월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의 곡예 비행사인 스미스(A. Smith)가 처음으로 선보인 곡예비행은 한국인들에게 근대 과학에 대하여 눈뜨게 하였고, 청소년들에게는 창공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갖게 하였다. 선생도 당시 비행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항공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는 각오를 하였다. 입학 동기로는 이영무(李英茂), 장지일(張志日), 이춘(李春) 등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복무
1925년 3월에 선생은 운남육군항공학교의 제1기 졸업생으로 학교를 마쳤다.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소개로 풍옥상(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서 복무하였다. 1926년 5월 21일 <동아일보>는 중국 군민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선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중국창공(中國蒼空)에 조선(朝鮮)의 붕익(鵬翼), 중국하늘을 뎡복하는 조선용사 그 중에서 꼿가튼 녀류용사도 잇서. 안창남(安昌男), 최용덕(崔用德), 여류비행가(女流飛行家) 권기옥(權基玉) 등 국민군(國民軍)에서 활약.” 1927년 8월 28일자 <중외일보>도 선생과 안창남, 최용태, 권태용 등 조선인 비행가들이 중국혁명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게재하였다.
선생은 1927년에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북벌(北伐)을 할 때,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과 함께 참여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첫 출전에서 계급이 빨리 올라 소령, 중령에까지 올랐다가 공군을 개편할 때 대위가 되었다. 중국의 혁명공군 초창기에 공군을 선정하는 임무를 가졌으며, 기금을 모으고 선전을 위해 중국인 여성 혁명가 한 사람을 비행기에 태워 중국을 일주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총 7,000시간의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중국 군인 신분으로 그 군대의 훈련 과정으로 비행과정만을 마쳤기 때문에 비행사로서 자격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한국인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일컬어진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권기옥 [權基玉] -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