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전라도 지방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
1906년 최익현(崔益鉉)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됐던
임병찬(林炳瓚)이 1912년 귀양에서 돌아온 뒤
고종(高宗)황제의 밀명을 받아 조직했다.
그는 전라남도순무대장(全羅南道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 규합에 나섰으며,
호남 지방의 의병장과 유생들이 적극 호응했다.
이어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이인순(李寅淳), 곽한일(郭漢一), 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해
서울 경기도 강원도 등 전국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1913년 2월 고종에게서 다시 전라남북도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임병찬은
중앙원수부(中央 元帥府) 아래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에 5영(營)을 설치하는 한편,
각 도ㆍ부ㆍ군 단위 조직을 완성하고 그 대표를 임명했다.
독립의군부는 대한제국 왕정을 복고하고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준비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1914년 5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총독부 관리 등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국권반환요구서’를 발송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항의 전화를 하기로 했으나,
같은 달 23일 단원 김창식(金昌植)이 체포돼 조직이 발각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임병찬은 일본 경찰에 붙잡힌 뒤
일본정부 총리대신과 조선총독과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며 항쟁하다 거문도로 유배됐으며,
몇 차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916년 병으로 순국했다.
독립의군부는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이었지만,
지도부 구성이나 활동방향이 전형적인 의병운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댓글 임병찬 義는 위정척사 - 상리학적
고종이 밀지 - 복벽주의
국권반환요구서
復辟
복벽
復 회복할 복
辟 피할 피 임금 벽, 비유할 비, 그칠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