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이란?
조선 단종의 유배 이야기를 담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인기에 힘입어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 영월 청령포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단종이 받은 유배 형벌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차마 사형에 처하지 못할 때 내린다. 양반의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에서는 양반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몸을 훼손하는 교수·참수형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사약을 내렸다. 양반 중에서도 특히 지위가 높은 사대부나 왕족에게는 유배를 보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거나, 유배지에서 사약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큰 죄가 없어도 정치 싸움에서 밀린 사람을 유배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시대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서귀포 대정 유배지 조선에서 유배지를 정할 때 처음에는 중국 명나라 법전을 참고했다. 명나라는 죄의 정도에 따라 고향에서 3,000리(약 1,180㎞), 2,500리(약 980㎞), 2,000리(약 790㎞) 떨어진 곳으로 유배지를 정했다. 중국만큼 국토가 넓지 않았던 조선은 이 숫자를 그대로 따르긴 어려웠다. 그래서 세종 때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유배지를 정하는 법률인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만들었다. 배소상정법에 따르면, 한양·경기 지역 죄인은 경상·전라·평안·함경도로 유배를 가야 했다. 충청·경상도 죄인은 함경도로, 함경도 죄인은 경상·전라도로 보냈다. 한반도를 세로로 가로질러 멀리 보낸 거다. 한반도 서쪽에 있는 평안도 죄인은 한반도 동쪽의 강원도로, 반대로 강원도 죄인은 평안도로 유배 보냈다. 정치적 사건일 때는 이런 규칙을 적용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생활비는 죄인이 전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유배지에 죄인의 가족이 따라가서 같이 살기도 했다. 함께 살기 어려운 경우에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음식이나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물건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조선 후기의 선비 추사 김정희도 그랬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충청도였기 때문에 편지나 물건을 주고받으려면 무려 7달이나 걸렸다. 추사 김정희 초상화
이때 김정희가 아내에게 쓴 편지 일부가 남아 있는데, 아내가 보내준 밑반찬이 제주까지 오는 동안 상하고 물러졌으니, 잘 상하지 않는 젓갈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김정희는 소중한 아내가 떠났는데 본인은 반찬 투정이나 한 것에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다음 생에는 자신이 아내로, 아내는 남편이 돼서 만나게 해달라고 옥황상제에게 하소연하겠다는 시도 지었다. 추사는 그곳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려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주었다. 유배 형벌 중 가장 극심한 것은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울타리로 둘러싸고 편안하게 가두다.’라는 뜻의 이 형벌은 죄인이 유배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집에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가뒀다. 주로 가시가 뾰족한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썼고,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았기 때문에 위리안치형을 받은 죄인은 보통 전라도의 섬에 가게 됐다. 우암 송시열
17세기 말 조선 숙종 때 문신 송시열은 예송논쟁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 제주도에서 위리안치형을 살았고, 이런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성리학에 몰두하며 저술 활동까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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