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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김씨좌윤공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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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문중 자료 스크랩 하회마을 - 경북 안동 풍천
김정현 추천 0 조회 50 08.03.31 15: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물이 감돌아 흘러나가는 마을, 그래서 물돌이동이라 불려왔다.

 

낙동강의 큰 물줄기가 안동을 지나 흘러가다가 이곳에 와서 한 번 크게 휘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Ω"자형으로 보이는 것이 천혜의 요충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6.25 동란을 겪으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이러한 지형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물이 감돌아드는 지형을 풍수에서는 ‘태극형’이라 하여 길지(吉地)로 인정하고 있다.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하회를 감도는 묏부리와 강줄기가 서로 어우러져 태극(太極)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하회를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다.

 

한편 하회 앞을 흐르는 낙동강은 특별히 화천(花川)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화천이 거느린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도 일품이려니와 건너의 부용대(芙蓉臺) 또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고장에 처음 발을 들이고 큰 마을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풍산(豊山) 유(柳)씨들이다.

 

풍산 유씨가 하회에 살게된 것은 7대째에 해당하는 전서공(典書公) 유종혜(柳從惠)때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풍산 상리(上里)에서 살았던 것 같다. 이렇게 유씨들이 터를 잡기 전까지 하회가 빈터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허(許)씨와 안(安)씨 등이 살고 있었다.

 

하회의 인접부락에는 허정승의 묘가 있다. 이 무덤을 타성인 유씨들이 해마다 벌초를 해 준다.

 

더욱이나 하회라면 생각나는 탈춤이 있는데, 이 탈춤의 제작자 역시 허도령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서 이 마을에 선주민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들 선주민은 유씨들에 의해 점차 쇠퇴하여 갔다.

그리고 유씨의 동족부락으로 바뀌면서 하회는 비로소 대처(大處) 거촌(巨村)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유씨들이 처음 하회에 터를 잡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집을 짓고자 기둥을 세우면 주초가 허물어지고 우물을 파면 불순물이 섞여 나왔다. 그래서 고심을 하고 있는데, 마침 역사를 주동하는 사람에게 현몽(現夢)으로 스님이 나타나, 이런 좋은 터의 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공덕을 닦아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일단 고개 너머로 후퇴한 다음 스님의 권유대로 여러가지 적선(積善)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유씨들이 이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회에 세거(世居)한 후 얼마 안되어 유씨들에게 벼슬길이 터졌다. 중종 때 유중영은 과거에 급제한 다음 벼슬이 관찰사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한 분이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이며 다른 한분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었다. 겸암은 퇴계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자라서는 경문(經文)에 두루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다. 후에 음사로 사복첨정(司僕僉正)과 원주목사 등을 지냈을 뿐인데, 그 소탈한 성품과 차원 높은 식견으로 이름을 떨친 분이다. 서애는 나라가 위급하였을 때 재상이 되어 그 명성을 후세에까지 남기신 분이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선조를 모시고 백성들의 뜻을 모아 국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 한마디로 한국사에서 가장 훌륭한 재상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하회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민속마을이다. 안동(24㎞)이나 풍산(8㎞)으로부터의 진입로는 화산(花山)의 북쪽고개를 넘고 그 길이 이 마을의 중심부를 관통하게 되는데 이 중심로의 북쪽을 북촌(北村), 남쪽을 남촌(南村)이라 부르고 있다. 남북촌은 모두 110여 가구이나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있고 이에 따라 인구도 감소되고 있다고 한다.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 북촌의 양진당과 북촌댁은 그 역사와 규모에 있어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인 가옥들이다. 지금까지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내용을 보면,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 빈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 유시주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주일재-중요민속자료 제91호, 하동고택-중요민속자료 제177호 등이 있다. 이들 중 양진당(養眞堂), 충효당(忠孝堂), 남촌댁(今無), 북촌댁 등 몇몇 가옥들은 모두 口자형 몸채를 기본으로 하고 사랑채나 별당채를 일측면으로 연결하거나 후정에 별설(別設)하는 등 발달된 주거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조선중기에 있어 사대부(士大夫) 향제(鄕第)의 정형(定型)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존재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마을의 관습으로서 다른 마을가 색다른 것으로 별신(別神)굿 놀이와 강상유화(江上流火)인 줄불놀이가 있다. 별신굿은 동제(洞祭)와는 달리 연례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으며, 3년, 5년, 10년에 한 번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짐과 아울러 신탁(神托)이 내려짐으로서 행해지던 오신(娛神)행사이다. 12월 말에 준비가 되어 정월 초에 행사가 이루어졌으며 이 마을의 비동족(非同族) 농민들이 행하던 놀이로서 출연자들이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가면극(假面劇)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줄불놀이는 7월 보름날 밤 부용대 아래에서의 시회(詩會)와 곁들인 일종의 뱃놀이인데, 그 비용은 유씨들이 부담하고 타성(他姓)들은 노력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먼저 줄불은 뽕나무 숯을 갈아서 만든 숯가루에 소금을 섞은 다음 창호지로 만든 좁고 긴 봉투에 담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것을 몇 개의 매듭으로 묶어 긴 새끼줄에 매다는 것이다. 일종의 폭죽과 같은 성격이지만 화약 대신 숯가루를 쓰기 때문에 크게 폭박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용대에서 건너편의 만송정까지 두 줄로 큰 줄을 매고 여기에 숯봉지를 줄줄이 달아맨다. 줄에 매단 숯봉지에는 쑥으로 불을 붙인다. 줄불은 한 매듭이 다 타거나 소금이 타오를 때 폭죽 터지는 소리를 낸다. 아래로부터 불을 붙이면 줄을 따라 타 올라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걀불은 달걀껍질을 모아 두었다가 일부만을 잘라내고 그 속에 피마자 기름을 넣은 다음 솜심지를 꽂고 불을 켰다. 이 불은 짚으로 만든 또아리에 올려놓은 것이 달걀불이다. 줄불이 타기 시작하면 상류에서 띄운 달걀불이 물결을 타고 흘러내려 오면 불이 춤을 추는 듯 강물로 아로새긴다. 그리고는 부용대 위에서는 낙화놀이가 동시에 행해진다. 낙화놀이는 솟갑에 불을 붙여서 아래로 던지는 놀이로, 줄불과 달걀불 낙화놀이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면 부용대 일대를 대낮처럼 밝게 하였다고 한다. 그 아래의 백사장과 강에서는 뱃놀이를 하면서 구경하고 선비들은 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양진당(養眞堂) - 보물 제306호

양진당의 주인은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이다. 이웃에는 동생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산 충효당이 있다. 양진당은 원래 이들의 부친인 유중영(柳仲櫾)이 1595∼1600년 사이에 지은 살림집이다. 사랑채의 당호를 <養眞>이라 하였다. 겸암은 동생인 서애에 비하여 벼슬은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동생이 일찍이 출사(出仕)하였음에 비하여 겸암은 나이 30세 되던 해에야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되었다. 선조5년의 일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노모를 모시고 피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풍기군수가 되었다가 원주목사로 승진하였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향리에 머물었다.

충효당은 서향하였다. 하회마을의 제일 높은 자리에 위치하면서도 유별나게 서향한 것인데, 비하여 양진당은 자좌오향(子坐午向)하였다. 그래서 두 집 대문이 넓은 바깥마당에 연(沿)하여 있는 듯이 자리잡게 되었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다. 좌우에 행랑이 달려 대문간이 되었다. 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안마당이 있고 저 끝에 남향한 양진당이 자리잡고 있다. 안마당의 좌우에는 안채의 행각이 있고 우측에는 낮은 토병(土拈)이 있다. 뒤쪽에는 사당(祠堂)이 있다.

 

양진당 높직한 댓돌로 쌓은 기지석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산석(山石)을 써서 소박하게 쌓았다. 계석(階石)이 좌우로 설치되었는데 이 계단으로 올라서면 앞쪽마루에 이른다. 쪽마루 전연(前緣)에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이 부분만 열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평면은 합하여 8간이다. 이 중 2간이 방인데 좌측에 있다. 안채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이 접속을 위하여 지붕도 맞배로 처리하였다. 지붕의 반대편은 팔작지붕을 구성하였다. 좌우의 모양을 달리한 것이다. 방의 바깥벽 문짝은 궁판 없는 띠살의 앉은뱅이 분합이고 대청의 문짝들은 궁판이 달린 띠살의 사분합이다. 사분합은 주간(柱間)이 문짝뿐이나 방의 분합 달린 문얼굴 좌우에는 토병(土拈)을 쳐서 외모는 전혀 다르다.

 

내관 대청 6칸은 우람하다. 방 2칸은 종이천장이어서 가구모양이 숨겨졌으나 대청은 연등이어서 환히 드러나 있다. 마루대공은 파련대공(波蓮臺工)이며 종보는 굴곡 꿈틀거렸고 중대공은 동자형이나 보아지를 큼직하게 초각하여 떠받게 하였다. 대들보도 용목(龍木)이다. 꿈틀꿈틀 몸부림칠 듯이 생긴 나무를 천연스럽게 다듬어 올렸다. 들보를 주두로 받고 보아지를 떠받게 하였다. 기둥은 둥구리나무이고 키가 커서 창방과 문얼굴의 인방 사이가 상당한 간격을 두었다. 뒷벽 문얼굴에는 바라지창을 달았는데 동쪽벽도 마찬가지이다. 가운데 간에 <養眞堂>이란 편액이 달렸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가칠하지 않은 백골집이다.

 

전경 충효당에서 건너다보면 이렇게 보인다. 충효당 서측 토병과 골목을 이룬 담장 안에 전포(田圃)가 넓직하고, 안쪽에 다시 안쪽담이 있어 양진당의 동측담이 된다. 양진당 뒤편에 사당 일곽이 있고, 이 행랑은 안채로 계속되어 전면이 되면서 그 중의 1칸이 중문이 된다. 평중문이다. 행랑채 안쪽으로 다시 토병(土拈)이 있는데 이 담장이 솟을대문에 이어진다. 대문 옆에 작은 협문을 열어 안채의 중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배설(排設) 안채는 협문인 외곽문과 중문을 전혀 다른 각도에 두어 내외법을 응용하였는데 비하여 양진당은 솟을대문과 남북자오선상에 축을 함께 하고 있어서 대청에서 사분합 문짝을 열고 내다보면 안마당 끝에 솟을대문이 섰다. 문밖에 왕래하는 사물까지 내다볼 수 있다.

 

정침 안채를 이렇게 부른다. 안채는 거의 정방형 윤곽의 口자형 배설이다. 안채의 안방은 3칸으로 남향하였다. 앞퇴가 있고 퇴는 4칸의 대청에 이어진다. 주간(柱間)의 넓이에 비하여 주고(柱高)가 높다. 이를 이용하여 안방 천장 위를 다락으로 꾸몄다. 안방 서쪽은 반빗간이다. 3칸 규모이다. 상하의 2층으로 구성되었다. 하층 3칸은 토상이며 주간의 내연벽은 개방되었다. 부엌 일은 여기에서 한다. 많은 사람의 음식을 장만하기 위한 구조이다. 위층은 판상하고 일부에 난간을 전출시키는 시설 등을 하였다. 찬간(饌間)이다. 보관하기 위한 음식물의 수장처로도 이용된다. 이 3칸에 이어 광이 계속된다. 안살림에 소용되는 재화들이 여기에 보장된다. 이 부분이 口자의 서변을 이룬다. 안방과 대청과 건넌방이 북변이 된다. 남변은 방·마루·외양간·부엌, 방 2칸과 마루이다. 이것의 동쪽으로 양진당 앞쪽의 대문간채가 된다. 헛간·방·솟을대문·마굿간·마루방의 순서이며 그 동쪽에 따로 외측(外厠)이 마련되어있다. 口자형 동변은 남변에서 꺾이면서 부엌이 되는데 그 중의 1칸에 문짝을 달아 사랑의 안마당에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부엌 북쪽에 단간방·마루에 이어 대청 동편 건넌방 쪽으로 이어져 완전한 口자형 구성하게 된다. 건넌방 2칸에 이어서 북쪽에 봉당처럼 1칸이 열렸고 그 북편에 서고 등으로 쓰이는 작은 두 칸이 나란하다. 여기에서 양진당의 2칸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채와 안채와의 통로가 여기에 생긴 것이다. 양진당은 사대부의 제택이다. 하회마을은 류씨 집성촌이다. 그 마을의 중심건물이 양진당과 충효당이다. 제택의 모범적인 구성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충효당(忠孝堂) - 보물414호

김극일이 1696년경에 지었다고 생각되는 <충효일기>가 그의 저서인 『蘆洲集』에 실려 있다. 그 글 중에, 서애 류성용은 치재(治財)에 능하지 못하여 작은 집에 살았고 그의 후손인 익찬공(翊贊公) 의하(宜河)의 경영으로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 익찬공의 공역은 1650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회는 안동지방의 여러 유형의 집들 중 폐쇄형인 口자형과 더불어 개방형인 ࠇ자형도 있다. 개방형이 있다는 뜻은 낙동강 서안, 상주나 선산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유형들의 일부가 흘러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이 하회마을의 한 특색을 이룬다.

 

 이 흐름을 좇아 양진당과 충효당에도 고상식 요소가 가미되어서 안동의 폐쇄형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구현시켰다.

 

충효당 바깥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사랑채가 높은 댓돌 위에 자리잡았다. 서향이다. 댓돌 앞 층계를 올라서면 쪽마루가 있다. 집 앞쪽 전면에 쪽마루가 설치되고 전연에 난간을 시설하였다. 올라설 수 있는 부분만 난간을 열어 출입하게 하였다. 대청은 4칸이다.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연등이며 뒷벽에는 머름 위로 바라지창이 설비되고 앞쪽에는 기둥 사이에 벽체가 없는 개방형이다. 대청 왼쪽은 방이다. 2칸통 2칸 규모이다. 오른쪽도 반칸 크기의 방이다. 서편에 앞퇴가 반칸 규모로 열렸다. 남쪽 외벽은 개방하여 벽체가 없는데 앞퇴의 서벽은 판벽하고 바라지창을 달았다. 다른 예를 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다. 서북풍을 막으려는 의도였다고 보인다. 사랑채 앞마당에서 안채로 가자면 바깥행랑채와 사랑채의 끝을 연결시켜 가로막은 사이담의 일각문을 지나야 한다. 이 일각문은 제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사랑채 뒷부분의 북쪽은 안채에 이어지고 있다. 안채 口자형 동변에 뜰아랫방이 있는데 이 방에서 바라다보면 사랑채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침 일각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중문이 보인다. 口자형 서변의 1칸이 열렸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반듯한 마당에 화단이 있다. 건너다보이는 부분이 안채이다. 안방은 3칸이며 앞에 퇴가 반반간 열렸다. 대청은 4간의 넓이이다. 안방과 대청의 구조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그 기둥이 아주 높다는 점이다. 주간(柱間)에 비하여 주고(柱高)가 높음으로 해서 안방 천장 위에는 다락이 구성되었고, 대청의 천장은 연등으로 높아서 기(氣)가 고(高)하는 욱일(旭日)의 세(勢)를 돋아주었다.

 

낮은 천장의 기(氣)의 쇠(衰)를 피한 것이다. 기고만장의 기세를 집안에서 함양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口자형 서변은 반빗간이다. 별설의 반빗간이 안방에 부설되기 시작한 모습이다. 아직 부엌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상황이다. 이 부분은 상하층이 되었다. 하층은 주방용이고, 상층은 수장용이다. 이런 구조는 양진당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고상식의 채택은 개방성 지대에서 자극되었던 것이라고 해석하여야 마땅하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건넌방 1칸이 있다. 방의 서쪽에는 1칸의 퇴가 생겼다. 꺾이면서 뜰 아랫방 2칸이 계속되는데 방 북쪽, 내정(內庭)쪽 기둥 밖으로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마당에서 상당히 높이 떨어진 위치에 있다. 방 서쪽은 부엌 1칸인데 식구는 부엌 남벽의 판문을 열고 사랑채 뒷마당으로 나갈 수 있다. 중문에 이어 고간(庫間)이 연속된다. 口자형의 서변을 이루는 부분이다. 바깥행랑채는 12칸이다. 밖에서 바라다보면 이 바깥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 전부를 가리고 있다. 사랑채 뒤쪽, 동편에 가묘 일곽이 있다. 토병에 문을 내었고 가묘는 3칸이다. 가묘의 동쪽에 영모각이 있다. 시멘트로 신축한 전시관인데, 서애선생 이래로 수집된 책과 서애선생의 교지(敎旨)나 각종 유물들이 정리 전시되어 있다.

하회 북촌택 - 중요민속자료 제84호

하회마을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뉘는데, 양진당과 더불어 북촌을 대표하는 집이다. 마을 중심부 북촌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주인 유영하의 고조할아버지 유도성이 1864년에 건축하여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남향한 一자형 대문간채와 口자형 몸채, 一자형 사당간채, 그리고 서남향한 별당채로 구성되었다.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서쪽 3칸이 광이고, 대문간 1칸, 그 동쪽으로 광 2칸과 외양간 1칸이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곧 사랑마당이 되는데, 이 마당에 남향한 口자형몸채의 전면 서쪽으로 작은사랑채가 있고, 동쪽으로 사랑채, 그리고 그 사이에 두 사랑채의 온돌방에 불때는 아궁이를 둔 중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의 사랑채는 중문간 동쪽으로 사랑방 2칸, 대청 1칸을 두었는데, 전면에는 반칸 폭의 개방된 퇴를 두었고, 뒤로는 벽장광과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은폐된 통로를 두었다. 동쪽끝 1칸 대청의 ㄱ자로 꺾인 북쪽에 1칸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이는 서고(書庫)로 쓰이며, 이의 북쪽에 2칸의 돌아들어서는 중대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작은사랑은 아궁이를 둔 중문간의 서쪽으로 1칸의 온돌방, 1칸의 대청을 두고, 전면에 반칸 폭의 개방된 툇마루를 두었으며, 북쪽으로 꺾인 곳에 1칸의 온돌방과 2칸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대청과 연이는 방은 작은사랑채에서 쓰지만, 2칸의 온돌방은 안채 부엌 아랫방인 것이다. 안채는 서북쪽 모서리에 4칸의 큰 부엌을 두고, 이의 동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안방을 두었는데, 안으로 4칸으로 나뉘어 마치 함경도지방의 田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부엌 쪽 전면 1칸이 안방이고, 이의 북쪽 1칸은 의걸이 등을 놓아두는 곳이며, 동쪽 전면방은 안방의 윗방이다. 이의 북쪽방은 찬방으로도 쓴다. 안방의 동쪽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인데, 안방에서부터 연속된 반칸 폭의 개방된 툇마루가 앞에 붙게 된다.

 

 대청의 동쪽은 2칸 크기의 윗상방이 있고 이의 남쪽으로 반칸 폭의 툇마루를 두고 다시 1칸의 아랫상방이 있는데, 전자는 며느리방이고, 후자는 노모의 방이었다. 서남향한 一자형 별당채는 전면 7칸, 측면 2칸으로 온돌방과 대청·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몸채의 사랑채는 최근 수리에 잘못 고쳐쌓은 견치석쌓기의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워 납도리롤 결구한 납도리집이다. 그러나 이와 연이은 안채는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는데, 대청 전면 3개의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둥에는 주두를 놓고 창방 위에 소로받침을 두어 굴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있는 5량의 굴도리집으로 꾸몄다. 처마는 홑처마로 합각을 크게 형성하여 팔작지붕모양을 이룬다. 별당채는 사고석발근층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는데, 정면 7개, 후면 7개, 대청 중간 1개는 모두 두리기둥들이며, 홑처마의 팔작집이다.

하회 원지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85호

하회마을 북촌의 화천과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한 이 정사는 유성룡이 34세 때 은거하였고, 병환 중 요양하던 곳이다. 一자형 평면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북향한 평면의 동쪽 끝에 1칸의 대청을 두고, 그 서쪽으로 2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방 사이는 장지로 나누었다. 대청과 방 전면에는 반칸 폭의 개방된 퇴를 두었다. 정사의 서쪽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중층 누로 된 연자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여기서는 부용대와 화천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또 하회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구조는 어느 정도 다듬은 막돌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는데, 정면에 두리기둥 4개를 세웠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5량가구의 홑처마 맞배집인데,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연자루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상면을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고 막돌초석을 놓고 9개의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2층에는 중앙기둥을 없애 넓은 공간이 되도록 하였다. 기둥 윗몸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하나를 내고, 다시 주두 위에 결친 보머리를 쇠서모양으로 하여 마치 2익공처럼 꾸몄다. 가구는 5량이고 홑처마의 팔작집인데, 이층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사면은 창호와 벽체 없이 개방하여 조망하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하회 빈연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86호

하회마을 북촌의 화천과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한 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서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동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둔 간략한 평면구성이다.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을 최근 시멘트로 마무리하고,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하였는데, 대청 정면 중앙기둥만은 두리기둥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방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방과 대청 사이에는 들어열개정자살창호를 달았으며, 대청의 옆과 뒷면에는 판장벽 사이에 골판문과 판장문을 달았다.

 

 


하회 유시주가옥 - 중요민속자료 제87호

풍천유씨 시주의 집으로 연화부수형의 이 마을 북촌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동남향의 一자집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반 크기의 이 집은 서쪽부터 부엌 1칸반, 안방 1칸, 대청 1칸, 건넌방 1칸을 두고 이들 앞에 개방된 반칸 쪽의 퇴를 두었다. 건넌방의 동쪽에는 1칸반의 사랑방이 있는데, 건넌방과 사랑방 경계를 따라 앞마당에 낮은 담장을 쌓아 안마당과 사랑을 나눈 一자형 한 채로서, 안채와 사랑채의 기능을 가지도록 하였다. 몸채의 서북측으로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부속채가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몸채의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이며 이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들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3량가구인데, 기둥 윗몸에 첨차와 비슷한 부재를 놓아 보 밑을 받치고 있다. 방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부엌에는 판장문을 달았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을 이루는데, 박공면에는 풍판이 없다. 부엌 서측 벽은 앞퇴 귓기둥에서 밖으로 내쌓아 부엌의 내부공칸을 보다 크게 하였다.


 

하회 옥연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곳으로 전하여오는바, 그의 만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회마을의 화천 북쪽 부용대 동쪽 강가에 자리잡고 있어, 나룻배로 마을을 드나들게 되어 있다. 정사는 대문간채, 살림채, 사랑채, 별당채로 구성되고, 이들은 각각 독립된 채로서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채는 동남향하여 정면 6칸, 측면 1칸이고, 이곳에는 측칸과 광들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안쪽 서쪽으로 동서향으로 면한 살림채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앞뒤로 반칸 폭의 퇴를 두었는데, 동쪽은 벽체로 막아 방에서 쓰고, 서쪽은 개방하였다. 온돌방 옆 남쪽에는 부엌간을 두고, 그 옆으로 온돌방을 동서로 연이어 배치하고, 서쪽과 남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살림채의 서쪽에는 별당채가 남향하여 하회마을을 굽어볼 수 있도록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별당은 동쪽에 대청을, 서쪽에 2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개방된 반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유성룡은 주로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별당채의 서남쪽에는 一자형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크기로 동쪽부터 방 1칸, 대청 2칸, 방 1칸을 두고, 앞뒤로 반칸 폭의 퇴를 두었다. 이들의 구조는 모두 홑처마의 팔작집으로 방주와 납도리로 결구되었고, 방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대청 옆과 뒤쪽에는 판문을 달았다. 담장은 강가 전면과 안채 남측 벽 중간과 강가, 사랑채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쌓고 일각대문을 달았다.


 

하회 겸암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89호

유운룡은 성룡의 맏형으로 1564년에 이 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위치는 하회마을 북쪽 화천을 끼고 우뚝 솟은 부용대의 서쪽, 옥연정사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강가 전면에 정사의 몸채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크기로 一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잡고 이의 뒤쪽에 살림채가 ㄱ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잡고 있다. 몸채는 서쪽에 2칸 크기의 온돌방, 2칸×2칸의 대청, 다시 1칸의 대청을 두었는데 이들 방과 대청의 전면과 좌우로는 툇마루를 달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살림채는 서쪽 끝에 1칸반 크기의 부엌, 다음 2칸×1칸의 온돌방을 두고 다시 2칸×2칸의 대청을 두었는데 전면에는 반칸 폭의 툇마루를 달았다. 대청 동쪽은 건넌방으로 툇마루를 달았다. 대청 동쪽은 건넌방으로 1칸×2칸 크기이며, 이의 ㄱ자로 꺾인 남쪽으로 다시 1칸×2칸의 방을 두고, 그 남쪽 끝에 계자난간을 두른 1칸 크기의 마루를 두었고, 이 마루와 방의 안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달았다. 정사 몸채는 누의 형식을 갖추어서, 동쪽면 누마루 밑으로 정사 마당에 출입 할 수 있고, 정사의 온돌방과 대청에의 출입은 살림채와의 사이에 세운 대문을 들어가 정사 몸채의 대청 뒷벽에 단 문을 통하여만 가능하다. 즉, 정사 몸채 뒤쪽은 대청에 여닫이문만 두고 모두 벽체를 쳐서 살림채가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였다. 막돌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굴도리로 결구하였는데, 기둥 윗몸에 익공모양의 부재를 내었으나 주두가 없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살림채는 두리기둥 위에 주두를 얹고, 익공모양의 부재를 내어 퇴보를 받치며 창방 위에 소로를 놓아 도리 밑 장혀를 받치고 있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하회 남촌택 - 중요민속자료 제90호

이 집은 주일대사를 지낸 유태하의 고택으로 충효당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집이다. 본래 대문간채·몸채·사당·별당·정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1953년 화재로 몸채와 정자가 소실되었다. 정자는 복원하였으나, 몸채가 없어 현재는 별당채에서 살림을 하고 있다. 대문칸채는 정면 7칸·측면 1칸으로 남향하였는데, 서측 2칸이 광이고 마루방 1칸, 다음에 대문칸 1칸을 두고, 다시 광 3칸이 연달아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 북쪽터가 옛 몸채터로, 주초들이 남아 있고, 왼쪽으로 복원된 정자가 있다. 몸채 뒷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정면 북쪽으로 따라 쌓은 담장 속에 정면 3칸·측면 1칸의 사당채가 있고, 동쪽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별당채가 동북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별당채는 정면 4칸·측면 1칸의 一자집으로, 남측에 부엌 1칸과 북쪽으로 온돌방 2칸, 마루방 1칸을 두었다. 별당 앞마당에는 작은 연못을 두고, 주위에 화초를 심었다. 대문간채의 구조는 막돌초속 위에 방주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홑처마의 맞배집인데, 문간만은 지붕을 한층 높여 솟을대문으로 하였다. 별당채는 막돌허트층쌓기의 기단을 콘크리트로 마감하고, 막돌초석을 놓아 방주들을 세웠는데, 전면 양 우주만이 두리기둥이다. 도리는 굴도리이고 3량가구로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하회 주일재 - 중요민속자료 제91호

충효당 뒤편 골목에 면한 남향집으로 사랑채·문간채·안채·광채·사당채를 세우고, 담장을 방형으로 둘러치고 사이사이에 사잇담을 쳐서 여러 개의 마당을 이루고 있다. 골목에 면한 담장의 중간 끊어진 곳으로 들어서면 정면 북쪽에 사랑채와 문간채가 남향하여 一자로 늘어서 있다. 사랑채인 주일재는 정면 4칸·측면 1칸으로 왼쪽인 서쪽에 사랑방 2칸·오른쪽인 동쪽에 대청 2칸을 두었는데, 전면은 창호나 벽체 없이 개방하였다. 문간채는 사랑채 서쪽으로 연이어 있는 一자집으로 정면 4칸·측면 1칸인데, 사랑채 서쪽에 대문간 1칸·다음 작은사랑 2칸·불대는 아궁이 1칸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선 안마당의 정면 북쪽에는 안채가, 왼쪽 서쪽에는 광채가, 또 동쪽에는 광채가 자리잡고, 동쪽 일각문을 나서면 사당마당에 이른다. 안채는 정면6칸·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서쪽에서부터 부엌 1칸반,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2칸으로 구성되었는데, 안방과 대청 전면에는 반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고, 건넌방은 앞뒤의 두 방으로 나누어져서 윗상방과 아래상방으로 불린다. 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동향하였고, 사당은 1칸이다. 사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는데, 대청 중앙의 앞뒤기둥은 두리기둥이다. 납도리의 3량집으로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3량가구로서 홑처마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하회동 하동고택 -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이 집은 예천 용궁현감을 역임한 유교목이 1836년에 건축하여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953년 현소유자 유단하의 아버지 유시익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남촌의 중심에서 북쪽으로 남촌과 북촌을 가르는 길가에 자리잡고 있는 이 주택은 행랑채·사랑채·안채들이 각기 독립되어 있지만 사랑채와 안채는 튼口자를 이루어 양반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안채의 중앙에는 안마당 가득히 정면 3칸의 대청을 드려놓았는데, 보간은 1칸으로 비교적 폭이 좁으며 오른쪽 칸의 뒤쪽 반칸에는 아래위 2층으로 된 수장공간을 설치하여놓았다. 대청의 왼쪽에는 안방 2칸과 부엌 2칸을 마당쪽으로 길게 내려뽑아 배열하였고 이와 대칭으로 대청의 오른쪽에는 1칸 크기 건넌방과 1칸 마루에 이어 중간방 1칸을 배치하였다.

 

 정면 3칸의 사랑채 왼쪽에는 앞쪽으로 약간 나앉은 중문간채 4칸이 접하여 있다. 사랑채의 평면구성은 왼쪽의 전면 2칸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뒤쪽으로 사랑방을 드렸으며, 오른쪽 칸은 앞이 개방된 마루가 놓여 있다. 사랑채 왼쪽의 중문간채는 사랑채에 접한 중문간 왼쪽으로 광을 3칸 배열하여 안마당의 앞을 막고 있다. 행랑채는 4칸의 왼쪽 끝에 대문간이 설치되었으며 오른쪽으로 머슴방 2칸에 이어 마구간이 놓여 있다. 안채는 잡석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가구는 3량가로 들보 위에 각대공을 세운 간략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잡석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마루의 상부 가구는 5량가로 충량위에 낮은 받침을 두고 소로를 놓아 외기틀을 받고 있으며 중도리와 외기를 안에 우물반자를 꾸몄다. 사랑방 앞 툇마루의 천장은 별스럽게 고미반자를 쳤다. 사랑채 지붕의 오른쪽 마무리는 합각으로 꾸몄지만 왼쪽은 중문간의 한 단 낮은 박공지붕 위에 다시 박공지붕이 겹쳐지는 꼴을 하고 있다. 이 주택은 평면구성에 있어서 안대청에 설치된 2층의 수장공간인 광의 배치에서 예스러움을, 그리고 건넌방과 중간방 사이에 부엌 대신에 시설된 마루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느끼게 하는 건물로서 조선 후기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병산서원(屛山書院) -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서당으로 전해진다. 풍악서당이 창건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고려중기라 한다. 그 후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임시 피난왔을 당시 서당의 학구열에 감동하여 토지와 책자들을 하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고려말 조선초에 이미 서당의 명성이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사 받았다는 토지는 현 예천군 감천면에 임야 103정보와 전답이 남아 있다. 당시의 서당은 현 풍산읍에 있었으며, 1551년 학전(學田)을 하사 받아 면모를 일신했다. 그후 1572년 유성룡에 의해 병산동의 경승지에 이건했다. 병산서원의 기틀을 이룬 것은 실재로 이때로 보여진다. 16세기의 서당은 교육적 측면에서 이미 서원과 동급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다. 서당의 명목적 주인이자 임진란의 영웅인 유성룡도 1607년 타계한다. 서애를 따르던 후학들이 서애를 기념하고 자신들의 결속을 위해 풍악서당이 있던 병산동에 서원을 중건하게 된다.

 

1614년 기존 서당의 규모에 새로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서애의 위패를 봉안했다고 하니 비로서 향사 기능을 갖춘 서원이 경영된 것이다. 1620년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애의 위패를 여강서원(來江書院)으로 옮기게 된다. 여강서원은 퇴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었는데, 서애와 학봉의 위패를 딸림으로서 명실상부한 퇴계파의 서원으로 발전시키려던 의도였던 것 같다. 서애와 학봉의 위패를 동시에 봉안할 때 누구를 높은 서열에 두는가의 문제가 후일 유명한 "병호시비"의 원인이 된다. 문제는 나이로 보면 학봉이 서애보다 4살 위지만, 관직으로 보면 서애는 영의정인 반면 학봉은 경상도 관찰사로 차이가 컸던 데 있었다. 결국 서애 위패를 선위(先位)인 동쪽에, 학봉은 차위(次位)인 서쪽에 배향함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여강서원의 위치가 현 와룡면 도곡동이었으며, 이곳은 학봉 가문(의성 김씨)의 세거지인 임하면 천전동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학봉파가 서원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에 반발한 서애 계열은 1629년 서애 위패를 다시 병산서원으로 모셔 오게된다. 동시에 서애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유진(柳袗)을 배향하여 오늘에 이른다.

 

병산서원이 강학과 향사(교육과 종교)라는 서원의 보편적 기능을 가진 시기는 대략 17세기 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액서원으로 승격된 것이 철종조(1850∼1863)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7∼19세기초반까지의 서원의 격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애의 후예들이 대부분 동인(東人)에 속했고, 동인은 17세기 이후에 정계에서 도태됐으며, 학맥도 끊겨 퇴계학파의 정통을 학봉파인 남인(南人) 계열로 넘겨 준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인다. 이 점은 경쟁 상대인 호계서원(여강서원의 후신)이 이미 1676년에 사액된 사실로도 반증된다.

 

이후의 건축 기록이 보이는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다. 1921년에 강당인 입교당을 중수했고, 1937년에 사당인 존덕사를 중건한다. 다시 말하면 강당의 보존상태가 사당의 상태보다 나았음을 이르며, 강당이 사당보다 자주 사용됐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말한다. 초기의 강학기능 위주에서 중기에는 향사기능 위주로 변화하며, 후기인 19세기에는 지역 세력가들의 거점으로 기능한다. 물론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향사기능이 서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임은 사실이지만 19세기의 서원은 상대적으로 강당 건물을 빈번히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단 16∼17세기에는 강학기능으로 강당을 사용했던데 비해 이 시기에는 모임의 장소로 이용했던 차이가 있다.

 

일제와 해방 후의 혼란을 지나는 와중에서도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77년 12월 12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보수 공사 때에는 담장과 계단 축대 등을 수리했을 뿐 건물 자체의 큰 변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는 늦어도 20세기 초의 모습이라 해도 무방하며, 현상의 골격은 17세기 창건 당시와 큰 변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에 들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주변 환경을 정화하여 주변의 민가를 이전하고 잔디밭과 주차장조성, 나무심기 등을 시행했다.

. 문화재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 관리자: 하회마을관리사무소
. 장 소: 경복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이용시간:365일 /하절기 09:00 - 19:00
. 관람료: 개인 1,600원, 단체 1,400원
. 주차료: 대형 4,000원, 소형 2,000원

 

 

 

 

 

 

 

출처  :  글  -  http://www.haerasia.com

           사진 -  하회마을홈및소구리홈일부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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