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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꾸로 유추해보니 부안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범신라 김씨의 방계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상대(시조~28진덕여왕) : 원시부족국가, 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
2.중대(29무열왕~36혜공왕) :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
3.하대(37선덕왕~56경순왕) :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멸망에 이르는 시기
이 밖에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상대●
박혁거세 신화
1. Bc 69년, 여섯마을의 촌장들이 알천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임금이 없어 모두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여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때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이 높은곳에 올라가 자세히 보니 양산기슭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장소로 몰려가봤는데 그 곳에는 자줏빛 큰 알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깨져버렸는데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신기해하며 아기를 동천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기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2. 진한에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날 고허촌 촌장 소벌공이 양산밑의 나정이라는 우물곁에서 흰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것을 이상히 여겨 가보았더니 커다란 알이 있었는데 깨어보니 아기가 있어 데려가 정성껏 길렀다.
이 아기는 점점 준수해져 나이 열세살에 뛰어난 젊은이가 되었다. 이에 여섯마을 촌장들이 모여 이 아이를 임금으로 삼고 박같은 알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박,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1.혁거세 거서간(재위BC57~4) : 고조선 유민이 산곡간에 흩어져 살면서 형성한 6마을의 왕으로 신라의 시조이다.
BC 57년,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의 나이로 즉위, 왕호를 거서간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이라하였다.
BC 53년, 용이 알영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이라 하였다.
BC 41년, 알영부인과 함께 6부를 두루 돌면서 백성에게 농잠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썼다.
BC 39년,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BC 37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는데 쇠같이 단단하다 하여 쇠울이라 하였다.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크게 지어 비로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BC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BC 20년, 마한에 사신 호공을 보냈는데, 마한왕이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자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이에 마한왕이 분노해 호공을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BC 19년, 마한왕이 죽자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였으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BC 5년, 동옥저가 사신을 보내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혁거세는 재위 62년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마리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몸통, 얼굴을 따로 묻었다.
그리하여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 무덤들을 가리켜 오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2.남해 차차웅(재위4~24) : 박혁거세의 맏아들로 이름은 박유이다.
신라가 정식으로 왕의 칭호를 쓰기 전에는 차차웅,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 등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4년, 남해차차웅이 즉위한 해에 낙랑군이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차차웅이 신하들에게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신하들이 답하기를 "적이 우리가 국상을 당하자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잠시 후에 적이 물러갔다고 한다.
6년,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의 묘를 세웠다.
8년, 석탈해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10년, 석탈해를 대보에 임명하여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14년, 왜인이 병선 백여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자 6부의 군사를 출동시켜 격퇴하였다.
이에 낙랑군이 나라안이 비었다고 생각하여 다시 쳐들어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
19년, 북명에서 예왕의 인장을 발견, 차차웅에게 바쳤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그 나라 인장에는 예왕지인이라 한 글귀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예나 부여가 그리 멀지 않고 가까운 이름이었음을 나타낸다.
3.유리 이사금(재위24년~57년) :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다.
남해가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 탈해가 덕망 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이전에 남해가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않아 알 수 없다.
탈해가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시험해보니 유리의 이 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다.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28년, 홀아비, 과부, 고아, 늙고 병든 이들에 대한 구휼을 실시했다. 이에 이웃나라의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옮겨 오는자가 많았으며 백성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하여 도솔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가악의 시초이다.
32년, 진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렸으며 17등급을 정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17등급이 전부 이때 정해진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리가 기틀을 다지고 후에 완성된 것)
왕은 두딸에게 시켜 부안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편을 짜서 7월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뜰에 모여 길쌈을 하도록 하여 밤10시경에 그치는데 8월15일에 이르러 그 공적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진편은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편에게 사례하였다. 이어 노래, 춤, 놀이를 행하는데 진편에서 한 여자가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라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에 그 소리를 따라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이름하였으며 이 행사는 한가위의 유래이다.
35년,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당하였다.
37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자 낙랑사람 5천명이 신라에 투항하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40년, 화려현과 불내현의 사람들이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의 우두머리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이에 유리 이사금은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42년,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57년, 유리 이사금은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번 공명을 드러내었다. 짐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라 하였다.
석탈해 신화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으나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 금관가야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가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 어구에 다다랐는데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39년 되는 해이다.
그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줄로 끌어 당겨서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기가 하나 있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아홉 자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고 환했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아이의 성씨를 모르니,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그것을 따랐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어 남은 글자인 석(昔)으로써 성을 삼고 바다에서 나왔음으로 이름은 탈해라 하였다.
4.탈해 이사금(재위57년~80년) : 첫번째 석씨 왕으로 토해라고도 한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62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았고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59년,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63년, 백제의 다루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64년, 백제가 와산성, 구양성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년, 김알지설화 : 탈해 이사금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 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탈해 이사금이 기뻐하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거두어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라 이름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이라 하였으며 (경주김씨시조) 시림을 계림이라 개명하고
그것을 나라이름으로 삼았다.
66년,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박씨의 귀척으로써 나라 안의 주,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 군주라 하였다.
73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해 각간 우오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4년,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하여 탈해 이사금이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
75년, 크게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그해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회복하고 백제인 2백명을 모두 죽였다.
77년, 아찬 길문이 황산진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명을 베었다.
5.파사 이사금(재위80~112) : 성은 박씨로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 (혹은 유리왕의 아우인 내로의 아들)
80년, 탈해왕이 죽자 유리왕의 맏아들인 일성이 왕위를 계승하여야 했으나 어떤자가 말하기를 "일성은 비록 왕위를 이을 친아들이나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파사를 임금으로 세웠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로 씀씀이를 줄이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81년,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으며 민생을 살피고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군비를 정리하는 등 체제정비에 나섰다.
주, 군을 돌며 위무하였으며 창고를 열어 구휼하고 교수형, 참수형이 아니면 모두 용서하였다.
84년, 고타군주가 푸른소를 바쳤다. 고타군(안동지역)에 있던 반독자적인 권력이 사로국에 특이한 생산물이나 조장 등을 바침으로써 충성을 서약하거나 동맹관계를 지속시킨 것으로 보이며 군주가 바쳤다고 하는 청우는 크고 튼튼하게 잘 자란 소를 의미한다.
이 해에 크게 풍년이 들어 여행하는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87년,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90년, 사자 10명을 주주와 군주에 파견하여 공무에 힘쓰지 않거나 밭과 들을 크게 황폐하게 한 자의 관직을 강등시키거나 파면하였다.
93년, 고소부리군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을 몸소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 주었다.
94년, 가야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였으나 아찬 길원에게 기병 천명과 함께 보내 쫓게 하였다.
96년, 가야군이 다시 습격해 왔으나 왕이 직접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97년, 가야를 치러 하였으나 가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용서하였다.
101년, 금성의 남동쪽에 월성을 새로이 쌓고 이거하였다.
102년,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것을 요청받았으나 금관가야의 수로왕에게 맡겼다.
수로가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고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만은 지위가 낮은 자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을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파사 이사금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타추간이 항복하고 실직국,압독국의 왕도 항복하였다.
105년, 백제와 화친하였다.
108년, 가야를 공격하고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등을 합병하였다.
6.지마 이사금(재위112년~134년) : 파사왕의 장남이다.
115년, 가야가 남쪽 변경을 공격하자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나섰으나 가야의 복병에 걸려 간신히 퇴각하였다.
116년, 1만병사를 거느리고 다시 가야 정벌에 나섰으나 가야는 굳게 수비하였고 장마까지 겹쳐 결국 퇴각하였다.
121년, 왜가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이때의 여파가 심했는지 이듬해 수도 백성들 사이에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이 퍼져 앞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이사금은 이찬 익종 등에게 시켜 수습하게 하였다.
123년, 왜국과 수교하였다.
125년,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이에 지마 이사금이 백제의 기루왕에게 원군을 청하였고 백제가 다섯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
7.일성 이사금(재위134년~154년) :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이다.(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말갈족의 침입을 자주 받아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는데 농사를 장려하여 제방을 수축하고 전지를 개간하는 등 농정에 진력하였다. 또 민간에서 금은주옥 등의 사치품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137년, 139년에 말갈이 침입하였고 이듬해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강화시켰다.
142년, 말갈 공격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좌절되었다.
8.아달라 이사금(재위154년~184년) : 일성 이사금의 맏아들이다.
157년, 처음으로 감물, 마산의 두 현을 두고 죽령의 길을 열었으며 장령진에 순행했다.
162년, 사도성에 순행하여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165년, 아찬 길선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하자 백제 개루왕에게 길선의 송황을 요구하였으나 백제에서 응하지 않아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졌다.
167년,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여 천여명의 백성을 잡아갔는데 이에 아달라 이사금은 군사 2만과 함께 직접 8천을 거느리고 나갔다. 그러자 백제는 노략한 주민들을 반환하고 강화를 청하였다.
174년, 왜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왔다
신라 말기에는 그의 후손들이 3대(신덕왕,경명왕,경애왕)에 걸쳐 왕위를 이었다.
9.벌휴 이사금(재위184년~195년) : 성은 석씨, 탈해왕의 손자이자 각간 구추의 아들로 발휘왕이라고도 한다.
아달라 이사금이 자식이 없어 박씨 왕조가 일시적으로 끊기고 석씨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갔다.
벌휴는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고 한다.
185년, 좌우군주의 군직을 신설하여 구도, 구수혜를 군주로 삼았으며 소문국을 정벌하였다.
186년, 주, 군을 순행하여 민정을 살폈다.
187년,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는데 구도에게 군사를 주어 막게 하였다.
188년, 구도가 백제군과 구양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포로로 잡았다.
189년, 백제가 원산향을 습격하고 부곡성을 포위하자 구도가 5백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92년, 왜인 1천여명이 기아를 피해 대규모로 신라에 도망왔다.
10.내해 이사금(재위195~230) : 벌휴왕의 손자이다.
벌휴 이사금의 태자인 골정과 이매가 일찍 죽었고 골정의 아들이 어리므로 이매의 아들 내해가 왕이 되었다.
201년, 가야와 화친을 요청하였으며 203년에는 말갈의 공격을 받았다.
208년, 왜가 국경을 침범하자 왕자 이음을 보내 막게 하였다.
209년,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은 가야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자 우와 이음에게 진한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여 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여명을 구해냈다.
212년, 가야의 왕자를 볼모로 받았다.
214년, 백제가 요거성을 공격하여 요거성주 설부를 죽이자 이음에게 6천여 병사를 주어 사현성을 공격하였다.
218년, 백제가 다시 공격해 장산성을 포위하자 이사금이 직접 지휘하여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222년, 백제가 우두주를 공격하자 충훤이 이를 막았으나 홀로 도망치니 충훤을 강직시키고 연진을 새로 임명했다.
224년, 봉산 아래에서 백제와 싸워 승리하여 천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은 뒤 봉산에 성을 쌓았다.
11.조분 이사금(재위230년~247년) : 벌휴왕의 손자이자 골정의 아들이며 제귀왕이라고도 한다.
선왕인 내해 이사금의 유언으로 사위 조분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231년, 이찬 석우로를 시켜 감문국을 정복하여 군으로 만들었다.
232년, 왜가 금성을 포위하자 이사금이 친정하여 적을 격퇴하고 천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 왜가 동쪽을 노략하자 석우로가 사도에서 싸웠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236년, 골벌국의 아음부 왕이 무리를 이끌고 와 항복하였다.
240년에 백제가, 245년에 고구려가 침공하였다. 석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패하고 마두책을 지켰다.
(이는 신라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첫 번째 침공이다.)
242년, 243년 연달아 가뭄과 홍수를 맞아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244년 달벌성을 쌓고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에 백제가 화친을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첨해 이사금(재위247년~261년) : 벌휴왕의 손자이자 골정의 둘째 아들,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이다.
조분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248년, 고구려와 화친하였다.
249년, 사량벌국을 공략하여 병합하였으며, 왜국의 침공을 받기도 하였다.
255년, 백제가 침입하자 일벌찬 익종을 시켜 괴곡 서쪽에서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도리어 익종이 전사하였다.
13.미추 이사금(재위262년~284년) : 김알지의 6대손이자 구도의 아들이며
미조, 미소라고도 한다.
임금이 된 첫 김씨 이며 조분왕의 사위로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264년, 농업과 민생에 깊이 관심을 기울여 가난한 자들을 위문하여 구제하였다.
266년,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직선이 2백명을 몰고 격퇴하였다.
268년, 신하들을 각지로 보내 민중들의 불만사항을 수렴하였다.
272년, 농사에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금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76년,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 하여 거부하였다.
278년, 백제가 귀곡성을 공격했으나 격퇴하였다.
281년, 양산 서쪽에서 병사를 시찰했다.
283년,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괴곡성을 포위하자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다.
14.유례 이사금(재위284년~298년) : 성은 석씨로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이다.
286년, 백제와 화친하였다.
287년, 왜인들이 일례부에 쳐들어와 천여명의 주민을 잡아갔다.
289년, 왜인이 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돌자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고 전쟁 준비를 하였다.
292년, 왜인이 침범하여 사도성을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다.
293년, 사도성을 다시 개축하고 사벌주의 주민 80여 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294년, 왜가 다시 쳐들어와 장봉성을 쳤으나 격퇴하였다.
295년, 이사금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왜인이 계속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다. 백제와 계획을 세워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자 서불한 홍권이 신라군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며 백제를 믿을 수 없다하고 반대하여 왜 정벌 계획은 취소되었다.
296년,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하였고 신라가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이 때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나 이서국군을 쳐부수고 사라졌는데 이후 미추 이사금이 묻힌 죽장릉에 수만개의 대나무 잎이 쌓인 것을 보고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님이 하늘나라 병사들을 보내 도우셨다고 하였다.
15.기림 이사금(재위298년~310년) :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며 이찬 걸숙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는 걸숙과 기림이 모두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고 하여 제대로 알 수 없다.)
300년, 왜과 수교하고 비열홀에 순행하여 노령자와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같은 해 낙랑,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
307년,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16.흘해 이사금(재위310년~356년) : 성은 석씨, 내해 이사금의 손자이고 우로의 아들이다.
(생존연대상 우로와 흘해 사이에 2~3대가 더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기림 이사금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312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시집보내어 화친을 도모했다.
317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죄수들을 심사해 석방하였다.
318년,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에 백성을 부려 노역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329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는데 이 둑의 길이가 1천 8백보였다.
337년,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
344년, 왜왕이 다시 공주와의 혼례를 청하자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345년, 왜왕이 국교를 끊는다는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 크게 군사를 내어 금성을 포위했다. 신라군은 금성에서 농성하며 왜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왜군의 퇴각 시점에 맞춰 기병을 내어 격퇴하였다.
17.내물 마립간(재위356년~402년) : 성은 김씨,
각간 말구(미추이사금 동생)의 아들이고 나밀이라고도 한다.
갈문왕 김구도(미추왕 아버지) - 각각벼슬 김말구 - 내물왕
미추왕이 직계후사가 없어서 김씨로서 내물왕이 뒤를 이음.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해 왕위가 세습되었으며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364년,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초우인(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 기슭에 세우고 용사 천명을 따로 부현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368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3백명의 주민과 함께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분거하여 살게 하였다.
백제 근초고왕이 이에 항의했으나 내물 마립간은 주민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381년, 위두를 전진의 왕 부견에게 보내어 우의를 맺은 뒤 중국문물 수입에 힘써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문화가 들어왔고 한자도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92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볼모로 보냈다.
393년,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자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적의 식량이 떨어질때까지 농성케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1천을 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
395년, 말갈이 침입하자 실직에서 격파하였다.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하였다.
내물 마립간때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나갔다.
18.실성 마립간(재위402년~417년) : 이찬 대서지의 아들로 실주왕, 실금왕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 귀국, 내물 마립간이 죽자 태자가 어리므로 추대받아 즉위하였다.
402년, 왜와 우호를 맺고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
405년, 왜가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마립간이 직접 기병을 거느리고 퇴로를 막아 3백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407년, 왜가 신라의 동쪽과 남쪽으로 재침해 백여명의 주민을 노략했다.
408년,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선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해 그들이 오면 막아 우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유리할때 나가 사로잡는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곧 남을 이용하며 이용당하지않는 계략으로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라 하여 이가 곧 신라의 대왜 방위전력이 되었다.
412년,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15년, 왜인들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417년, 고구려 사람을 시켜 내물 마립간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눌지를 죽이려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고구려의 지원으로 쳐들어와 실성왕을 죽였다.
19.눌지 마립간(재위417년~458년) : 성은 김씨, 내물왕의 아들이다.
내물 마립간이 392년 실성을 고구려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뒤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418년,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볼모로 간 동생 복호를 데려왔으며 박제상을 일본에 보내 다른 아우 미사흔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박제상은 미사흔을 빼돌린 사실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424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431년, 왜가 동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둘러쌌으나 소득 없이 물러났다.
433년, 백제와 관계가 좋아져 이듬해 비유왕이 말 두 필과 흰매를 보냈고 눌지가 황금과 명주를 보내 답례했다.
438년, 우차법을 제정하였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하여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왜가 대규모로 쳐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마립간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고 마립간이 산 위에 오르자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450년, 고구려의 한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그를 죽였다. 장수왕이 노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립간이 사죄하자 그대로 물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자 백제와 공수동맹을 맺고 원병을 보내 구원했다
당시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에 건너와 불교를 전했으나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20.자비 마립간(재위458년~479년) : 눌지 마립간의 맏아들이며 실성 이사금의 외손자이다.
459년, 왜병이 병선 백여척으로 습격하여 월성을 포위하였는데 신라군은 마립간의 지휘에 따라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했다. 바다 어귀로 몰아 물에 빠져 죽게 한 적병이 절반이 넘었다.
462년,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 천여명을 생포했다.
463년, 다시 왜병이 삽량성에 침입하자 매복해 있다가 후퇴하는 왜병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다.
이 해에 왜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일모성, 사시성 등 성을 축조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467년, 유사에게 명하여 전함을 수리하게 하였다.
468년,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을 습격하였다.
같은해 하슬라 주민 중 15세 이상 되는 자들을 징집하여 이하에 성을 쌓았다.
469년, 마립간은 수해 복구를 위해 신라 전역을 순행하였다.
470년 삼년산성, 471년 모로성, 473년 명활성을 수리, 474년 일모,사시,광석,답달,구례,좌라의 성을 쌓았다.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치자 개로왕이 태자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여 마립간이 백제에 원군을 보냈으나 신라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은 살해되어 있었다.
476년, 왜가 동쪽을 침범하자 덕지에게 명해 격퇴하게 하여 2백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477년, 왜가 또 다시 크게 군을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 왔으나 소득 없이 돌아갔다.
21.소지 마립간(재위479년~500년) : 자비왕의 맏아들로 조지, 비처라고도 한다.
(소지,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 비처는 이두자,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소지 마립간 치세에는 자연재해가 잦았는데 가뭄,기아,폭풍,화재,폭우,홍수,우레,전염병 등이 계속 기록되어 있다.
481년, 소지 마립간이 비열성에 행차하여 군사를 정비했다.
같은 해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여 호명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로 진군했다. 이에 백제와 가야에 원군을 요청하여 고구려와 말갈을 막아내었고 퇴각하는 것을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천여명을 베었다.
이듬해에는 왜인이 해변을 침범하였다.
484년,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왔으나 백제와 연합하여 모산성에서 격파하였다.
486년, 왜인의 재침이 있었으나 이를 막아낸 후 낭산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또한 일선 지역의 장정 3천을 징발해 삼년산성과 굴산산성을 고쳐 쌓았다.
487년, 신궁을 나을에 세웠고, 각 지방에 우편역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 마립간은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또한 일선군에 행차해 빈민을 구제하고 돌아오면서 지나는 주군의 죄수들을 2대 사형죄를 제하고는 용서했다.
489년, 하는 일 없는 백성들을 몰아다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실업자 대책이다.
같은해 고구려가 북쪽을 다시 침범하여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490년, 비라성을 재건하였으며 시장을 개설하여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는데 이는 신라 최초의 경제 진흥책이다.
493년, 백제의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 해에는 해안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하여 왜로부터의 방비를 강화했다.
495년,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원병을 보내 이를 구하였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고구려가 우산성을 침공하자 이하에서 격파하였다.
497년, 곳곳 관부에 명해 도로를 수리하게 하고 월성을 보수했다.
496년, 고구려군이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자 장군 실죽이 나가 맞아 싸웠으나 이듬해 고구려가 다시금 잇따라 침공해오자 결국 우산성을 빼앗겼다.
22.지증 마립간(재위500년~514년) : 마립간 칭호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왕으로 휘는 지대로, 지도로, 지철로이다.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 소지 마립간의 재종 아우로 소지 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어 64세에 왕위를 이었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는데 소를 길러 땅을 갈게(우경법)하여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503년, 국호를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의 신라로 통일하였으며 마립간의 칭호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왕이라 칭하게 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고,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505년, 주, 군, 현을 정하여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12년,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지증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이것이 한국 시법의 시초이다.
23.법흥왕(재위514년~540년) : 지증왕의 아들이고 이름은 원종이다.
517년, 병부를 설치하였다.
520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521년, 양나라와 국교를 열었다.
522년, 가야국이 청혼하자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출가시켰다.
524년, 남부지방을 순행하고 황무지를 개척하여 군사당주를 두었다.
이 무렵 마라난타에 의해서 불교가 들어와 신라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이 조신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불교의 공인을 주장하던 끝에 순교를 자청하고 나서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그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려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527년,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통해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531년, 상대등 벼슬을 새로 두어 국사를 총리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532년, 본가야를 병합하고 금관군을 설치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536년, 연호를 건원이라 정하였는데 이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로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24.진흥왕(재위540년~576년) : 지증왕의 손자로 이름은 삼맥종, 심맥부이고 법호는 법운이다.
8세에 법흥왕의 양위로 왕이 되어 성년이 될 때까지 모친 식도부인이 섭정하였다.
545년, 국사를 편찬케 하였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551년, 연호를 개국으로 고쳤고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같은 해 가야의 음악가 우륵이 진흥왕의 부름을 받고 하림궁에서 제자와 함께 새 곡을 지어 연주했다. 이에 감동한 진흥왕은 그를 국원에 보내고 계고, 만덕, 법지를 보내 그의 노래를 전파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높게 평가해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으며 평생동안 185곡을 지었다.
(그는 한국 삼대 악성의 한 사람이며 가야금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에도 능했으리라 여겨진다. 가야에서 지내던 어느날 가실왕이 이르기를 "수나라에는 악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어찌 하나도 없을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우륵은 그의 뜻을 헤아려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었다.)
553년, 황룡사를 창건하였으며, 백제의 한강유역을 빼앗아 당항성을 근거지로 중국과 교통로를 열었다.
이에 분노한 백제 성왕이 이듬해 쳐들어온 것을 크게 격파하고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562년, 화랑 사다함이 15살의 나이로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진흥왕은 어린 사다함의 공을 크게 칭찬한 뒤 포로 2백명과 많은 농토를 상으로 내려 주었는데 그는 포로들을 석방시켜주고 농토는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친구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일주일동안 단식하며 애통해하다가 17살의 어린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라는 대가야를 평정한 뒤 주위의 침입에 대비하여 한강 유역에 주군과 강력한 군단을 설치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가 전해지고 있다.
565년,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면서 아울러 불교의 경론 1700여권을 보내왔다.
566년, 기원, 실제의 두 절을 지었다
576년,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하였는데,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 572년의 홍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치세에 신라의 국력은 팽창하여 삼국통일로 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25.진지왕(재위576년~579년) : 휘는 사륜, 금륜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나 태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대신 즉위했다.
백제와 불화하여 자주 침공을 받았으나, 내리서성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
상대등 거칠부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진나라와 수교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다.
26.진평왕(재위579년~632년) : 진흥왕의 장손으로 휘는 백정, 진평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자 즉위하였다.
579년,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580년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왕권을 강화하였고 관제를 정비하는 데 힘을 썼다.
581년,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를 설치하였다.
583년,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원광, 담육 등 승려를 중국에 보내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 힘썼다.
584년, 연호를 건복으로 개원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고 수나라에게 공물을 바치며 수교하였다.
618년, 수나라가 망하자 이후 당나라와 수교하며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재위 54년만에 죽자 당나라 태종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선덕여왕 설화
1. 어느날 여왕에게 당나라 태종이 진홍, 자색, 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왔다.
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앗을 뜰에 심게 했는데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아 여왕의 예언이 들어 맞았다.
2. 636년, 궁성 서쪽 옥문지에 개구리가 모여들어 삼사일을 계속 울어대자 사람들이 이상히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정병 2000명을 데리고 서쪽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찾아가면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며 쳐부술 것을 명했다. 각간이 군사를 이끌고 가보니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500명의 백제군이 숨어 있었다. 이들을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있던 백제 장군 우소와 백제의 후원군까지 모조리 죽였다.
당시 신하들이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일을 알았는지 묻자 여왕은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는 당나라 왕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경인데 여자는 음이며 그 빛이 희니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3.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에 장사하라고 일렀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낭산의 남쪽이라고 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낭산의 남쪽 양지쪽에 장례했다. 그 후 10년 뒤에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왕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가 많았음으로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여왕이 비범한 인물임을 강조)
지귀 설화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너무나 고민한 나머지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어느 날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지귀의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었는데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더욱 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화귀로 변하였다.
지귀가 화귀가 되어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니자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뒤 백성들은 화재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
27.선덕여왕(재위632년~647년) : 진평왕의 장녀이며 휘는 덕만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라는 호를 올렸다.
선덕여왕은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민생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또한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80m의 황룡사 9층석탑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고 자장법사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다.
632년,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하게 하였다.
633년,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634년, 연호를 인평이라 고치고 불교를 장려하였다.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에 책봉되었다.
고구려,백제가 침공해오자 이를 막는 한편 당과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642년,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나당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다.
백제에게 대야성이 함락되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4년,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다.
647년, 상대등 비담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김유신에게 진압하게 하였다.
한때 선덕여왕이 독신자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규례에 따라 3명의 남편을 뒀다. 그러나 후사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28.진덕여왕(재위647년~654년) : 휘는 승만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태화라 하였다.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같은해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의 협조가 필요했기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연합을 체결하였다.
649년, 당나라를 본떠 복제를 개편하였다.
650년, 법민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지은 태평송을 바치고 같은해 당나라 연호인 영휘를 쓰기 시작하였다.
652년, 김춘추의 둘째아들 인문을 당나라에 보내어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여왕이 죽은 뒤 당 고종은 비단 300필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했다.
●중대●
29.태종 무열왕(재위654년~661년) : 진지왕의 손자로 휘는 춘추,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는 이종사촌이다.
무열왕이 활동하던 시기는 삼국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던 때로 그는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므로 일본,당나라에 다녀왔고 특히 당나라에 여러번 왕래하면서 외교적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았다.
(삼국유사中 -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을때 당 태종은 그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본서기中 - 그는 미남이고 말솜씨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642년,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 품석과 딸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고자 연개소문을 만났으나 오히려 국경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고구려 대신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
647년,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과 함께 이를 진압하였고 선덕여왕이 죽자 진덕여왕을 왕으로 내세웠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 알천 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율령을 새로 정비,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개부의동삼사신라왕에 책봉되었다. 또한 9서당이라는 9개 군단를 설치하여 군사조직을 강화하는 등 국가체제를 확립시켰다.
655년,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북쪽 지방의 33개의 성을 공격하자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659년, 백제가 자주 국경 지역을 침범하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본격적인 백제 정벌에 나섰다.
660년, 김유신이 당나라군과 함께 백제의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물리치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렇게 태종무열왕이 닦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문무왕때 삼국을 통일하고, 이후 그의 직계 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30.문무왕(재위661년~681년) :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로 휘는 법민이다.
650년, 진덕여왕때 아버지 김춘추와 함께 외교 활동을 벌여 당 고종에게 대부경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654년, 아버지인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파진찬으로 병부령이 된 뒤 곧 왕태자에 봉해졌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때 명장 김유신과 함께 군사 5만을 이끌고 싸워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을때 태종무열왕이 승하하자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 백제의 잔적을 소탕하고 제복을 당식으로 고쳤으며 당악을 배우게 했다.
또한 중앙 관료를 감찰하는 기관을 위시하여 여러 중앙 관서가 분화, 확충되었는데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진골귀족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 될수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군현의 명칭과 관호도 중국식으로 개편되었고 주, 군에 외사정을 두어 지방 관리의 감찰을 담당케 하였다.
율령정치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족장 회의제의 정치 체제는 관료 정치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666년,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668년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후 당은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도호부를 두어 통치하려하였다.
671년, 신라는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김인문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 정벌을 감행하였다.
674년, 신력을 쓰고 동인을 제작하여 백관과 주군이 사용하게 하였다.
675년,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676년,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을 섬멸하여 그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비로소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긍정적평가- 최초로 민족 통일을 달성, 민족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
부정적평가-옛 고구려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일대를 잃었으며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로 인식)
삼국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자 생산이 늘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신라의 주 교역 상대는 당나라과 일본이었고, 발해와도 교역을 했다.
수출품 : 비단, 마포, 금, 은, 인삼, 약재, 말, 모피, 공예, 철, 모직, 서적, 놋쇠 식기, 불경
수입품 : 비단, 약재, 공예, 서적, 풀섬, 견직물
31.신문왕(재위681년~692년) : 문무왕의 아들로 휘는 정명, 명지이다.
665년, 태자에 책봉. 681년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어 즉위하였다.
682년, 위화부령 2명을 두어 선거 사무를 맡게 하고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683년, 김흠운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684년, 금마저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그 땅을 금마군으로 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685년, 9주를 정비하고 서원소경을 설치하였으며 봉성사, 망덕사를 창건하였다.
687년, 신라인 뿐만 아니라 고구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직속 부대를 만들어 이국민에 대한 반란의 위험을 덜고 중앙의 병력을 강화시켰다. 금색에 의하여 부대를 구별하였다.
689년, 내외관료의 녹읍을 폐지하고 대신 일종의 녹봉제로서 관료전을 급여하였다. 이는 녹읍지로 인한 경제외적 침탈을 막기 위한 것으로 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듯 중앙 집권화 된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국가 권력이 촌락 내부에까지 깊숙이 뻗쳤으나 지역에 따라 그 권력이 작용한 정도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귀족회의는 존속하였으나 그 권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유교적 정치이념이 전면에 내세워져 충, 효가 주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엇다.
이 밖에도 일본, 당나라와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설총, 강수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32.효소왕(재위692년~702년) : 신문왕의 아들로 휘는 이홍, 이공이다.
당나라 측천무후로부터 신라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에 봉해졌다.
모든 관제를 정비하고 당, 일본 등과 수교하였다.
692년, 좌우 이방부를 좌우 의방부로 고쳤다.
693년, 처음으로 의학박사를 두었으며, 이듬해 송악, 우잠의 두 성을 축조하였다.
695년, 서시전과 남시전을 설치하여 699년 창부를 두었다.
33.성덕왕(재위702년~737년) :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고 효소왕의 동생으로 휘는 융기, 흥광이다.
효소왕이 아들을 두지 않고 죽자 화백 회의에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당나라 문화수입에 힘써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는데 재위기간동안 약43회의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711년, 백관잠을 지어 군신들에게 제시하였는데 이는 신하들이 받들어야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714년, 당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였다.
717년,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10철 72현의 초상화를 대학에 두었다. 이듬해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었다.
722년, 정전을 실시하여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 재정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732년, 발해를 치고자 김사란을 당나라에 보냈으나 눈으로 길이 막혀 중단하였다.
이때 정식으로 패강 이남의 땅을 판도로 하였다.
34.효성왕(재위737년~742년) :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고 휘는 승경이다.
즉위 후 당 현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739년, 동생 헌영을 태자로 책립하였다.
이듬해 왕비의 질투로 후궁이 살해되었다. 이에 후궁의 아버지 파진찬 영종이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했다.
35.경덕왕(재위742년~765년) :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자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휘는 헌영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아우로서 태자가 되었으며 효성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경덕왕은 한화정책을 널리 편 것으로도 유명하며 대외 관계에서는 당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743년, 당나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사지절 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충지절영해군사 신라왕이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이는 효성왕의 벼슬을 이어받은 것이다.
745년, 동궁을 수리하고 동궁관아를 설치하였으며 박사와 조교를 두어 국학을 강화하였다.
747년, 집사부의 중시라는 이름을 시중으로 고쳤다.
757년, 땅이름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고 후에 벼슬이름까지 바꾸어 이에 반대하는 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같은해 다시 녹읍제가 부활하였다. 이는 행정적인 번거로움과 귀족 세력의 반발 등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덕왕은 불교중흥에 노력하여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였고 굴불, 영흥, 원연, 불국 등의 절을 세웠다.
당시 고위 관직자가 자주 바뀌는 등 정치적 변동이 많은 시기로 전제왕권을 유지하려는 경덕왕과 이에 반발하는 귀족세력이 맞선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고구려의 왕산악의 영향을 받은 옥보고는 50년동안 거문고 타는 법을 익히고 30여곡을 만들어 신라의 음악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혜공왕 탄생 설화
딸만 있던 경덕왕은 후계자가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경덕왕은 승려 표훈과 벗하며 지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고승이며 하느님과 이야기할수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덕왕은 표훈에게 "나를 계승할 아들을 낳고 싶은데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였더니, 표훈이 한울님에게 왕이 아들을 갖게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이 "경덕왕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면 나라를 멸망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차라리 딸을 낳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경덕왕이 나라를 멸망시켜도 좋으니 사내 아이만을 바란다고 간청하여 결국 하느님이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얼마 후 경덕왕의 부인이 아들을 낳았고 기뻐한 경덕왕이 아기에게 "건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36.혜공왕(재위765년~780년) : 경덕왕의 아들로 휘는 건운이다.
경덕왕이 죽자 8세에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하였다. 태후의 섭정 기간 동안 왕당파는 당과의 관계 속에서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미 세력을 구축한 김옹, 김양상 등의 귀족 세력이 이에 반발하였다.
그 후 많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768년 대공과 대렴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되었고 770년에 김융이 반란을 꾀하자 살해되었고 775년 김은거, 염상, 정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혜공왕의 재위 기간 중에는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드는 등 민심이 흉흉하였으며 왕이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아 궁중의 기강을 문란하였다.
768년, 당나라 대종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780년,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에게 진압하게 하였으나 결국 피살되었다.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고 내물 마립간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다.
●하대●
37.선덕왕(재위780년~785년) : 내물왕의 10대손으로 휘은 양상이다.
780년, 혜공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하였다.
혜공왕이 후손없이 죽자 김양상이 선왕의 인척인 관계로 무열왕계를 제치고 왕위를 승계하였는데, 이에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진골 귀족들은 앞다투어 경제 기반을 확대하고 사병을 거느리며 권력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로 국가재정이 바닥나자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중앙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져갔으며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자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으며 살기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나 도적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는데 당의 덕종이 선덕왕에게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의 봉작을 주었다.
이후 선덕왕도 후사없이 사망하자 이는 왕위 계승자리를 두고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38.원성왕(재위785~798) : 휘는 경신이다.
눌지왕의 아우 복호의 11대손(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이다.
780년, 이찬으로 상대등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유교정치를 지향하였다.
(삼국사기中 - 선덕왕이 아들없이 죽자 대신들은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김주원이 홍수로 인해 알천을 건너오지 못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고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786년,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다.
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는 국학 학생을 대상으로 치뤄졌던 일종의 졸업시험으로 유교 경전의 해석능력에 따라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어 관리로 임용하였다. 이러한 유교 진흥책은 학벌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나 골품제의 강인한 존속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790년, 김제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하였다.
39.소성왕(재위799년~800년) : 원성왕의 장손으로 휘는 준옹이다.
궁중에서 자라서 789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원성왕의 태자 인겸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하자 왕세손으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당의 덕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간의 권력 투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이로 인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들이 성장하였다.
소성왕은 재위 1년 7개월만에 승하하였는데 이후 왕위 쟁탈전이 극에 달하였다.
40.애장왕(재위800년~809년) : 소성왕의 맏아들로 휘는 청명 나중에 중희로 바꾸었다.
800년, 즉위하였을때 13세에 불과하였으므로 작은아버지인 병부령 김언승의 섭정을 받았다.
801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묘당을 세웠다.
802년, 해인사를 창건하였으며 일본과 우호를 증진하였다.
807년,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였고, 808년에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809년, 김언승이 반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고 이때 애장왕은 동생 체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41.헌덕왕(재위809년~826년) : 원성왕의 아들이자 소성왕의 동생으로 휘는 언승이다.
800년, 조카 애장왕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다.
809년,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집권하였다.
즉위한 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으로 책봉받고, 이듬해 제방을 수리하여 농사를 장려하였다.
왕자 헌장을 당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을 바치고 당 순제의 명복을 비는 등 친당정책에 힘썼다.
819년, 당나라 헌종의 청으로 운주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 3만을 파견하였다.
822년, 웅주도독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하고,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의 모반을 진압하였다.
823년, 우잠태수 백영에게 명하여 한산 북쪽의 군민 1만을 동원하여 패강에 장성 약 3백리를 쌓게 하였다.
42.흥덕왕(재위826년~836년) : 원성왕의 손자, 헌덕왕의 동생으로 휘는 경휘이고 초명은 수종, 수승이다.
819년, 이찬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며, 822년 부군이 되어 월지궁에 들어갔다.
즉위하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 문종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이 무렵 골품제로 말미암아 중앙 정치의 길이 막힌 지방 세력들은 주요 활동무대를 해상무역으로 삼았다.
이로써 공적인 조공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이 주도하며 당, 일본과 활발히 교역하였다.
특히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였는데 왕래가 가장 빈번하던 산둥반도나 장쑤성에는 신라방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으며 사원인 신라원도 세워졌다.
이렇듯 지방세력가들에 의한 민간무역이 성행하자 해적의 출몰이 잦아졌고 이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다.
828년, 대아찬 김우징을 시중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장보고를 청해진대사로 삼아 해적을 막게 하였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무역을 활발히 하여 황해의 왕자라 불리었고 중앙 정치에도 간여하였다.
이 시기 지방에서는 일정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라고 자처하였는데 중앙 귀족은 이러한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한 정쟁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해 대렴이 당나라로부터 차의 종자를 가져와서 재배하였는데 이때부터 차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다.
834년, 복색 제도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였다.
43.희강왕(재위836년~838년) :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김헌정의 아들로 이름은 제륭, 제옹이다.
836년,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과 왕위다툼 중에 김명,이홍의 도움으로 균정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그 후에 김명을 상대등에,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여 정권을 맡겼다.
838년,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측근자를 살해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44.민애왕(재위838년~839년) :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고 이름은 명이다.
836년, 제륭과 균정이 왕위를 다툴 때 제륭을 도와 왕이 되게 하고 자신은 상대등이 되었다.
838년, 시중 이홍, 배훤백 등과 함께 희강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때 균정의 아들 우징은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에게 의탁해 있었는데 민애왕이 즉위하자 장보고의 힘을 빌려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839년,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보내 싸우게 하였으나 달벌전투에서 패하여 월유댁으로 도망가다가 병사들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45.신무왕(재위839년) :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의 아들로 휘는 우징이다.
836년, 흥덕왕이 죽어 희강왕이 왕위를 탐내자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여 싸웠으나 화살을 맞고 청해진으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병사하였다.
당시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는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으며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 농장을 확대해 갔다.
그러나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수 없게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46.문성왕(재위839년~857년) : 신무왕의 태자로 휘는 경응이다.
신무왕이 왕위다툼에서 승리하고 즉위하여 정치적 안정을 다져갔으나 재위 반년 만에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장보고가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을 성하게 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였다.
그가 안전 항해를 보장하였으므로 사신, 승려들의 왕래가 많았고 당나라와 관계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841년, 일길찬 홍필이 반란을 일으켰고, 846년 장보고가 딸을 왕비로 삼게 하려다가 실패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847년, 양순, 흥종 등이 모반하였으며, 849년 이찬 김식, 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재위 19년에 숙부인 상대등 의정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죽었다.
47.헌안왕(재위857년~861년) : 신무왕의 이복 동생으로 휘는 의정, 우정이다.
859년, 전국에 흉년이 들자 백성의 구원에 힘썼고, 제방을 쌓아 농사를 장려하였다.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을 맏사위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48.경문왕(재위861년~875년) : 희강왕의 손자로 휘는 응렴이다.
재위 중에 천재지변이 많아 백성이 곤궁하였다.
그는 빈번히 일어나는 중앙 귀족의 모반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기에 힘썼다.
또한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긴밀한 유대를 맺었으며 황룡사탑을 수축하였다.
49.헌강왕(재위875년~886년) : 경문왕의 아들로 휘는 정이다.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어 불경을 강하게 하였다.
878년, 당나라에 조공하여 희종에 의해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879년, 반란을 도모한 일길찬 신홍을 처형하였다.
880년, 처용무가 크게 유행하였다.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다.
50.정강왕(재위886년~887년) : 경문왕의 차남으로 휘는 황이다.
헌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887년,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어 청강하였으며 이찬 김요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887년, 재위 2년만에 죽으면서 누이 동생 만에게 전위하였다.
51.진성여왕(재위887년~897년) : 경문왕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으로 휘는 만, 원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뒤 음사를 즐기는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는데 전념하며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또한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자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는데 이는 전국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도적이 숱하게 일어났다.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흉년까지 겹치자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져 부역과 과도한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세력있는 귀족의 노비로 전락하였다.
888년,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명하여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병제가 법대로 시행되지 않아 지방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였으며 북원에서 양길과 궁예가 봉기하자 이를 토평하려다가 실패하였다.
892년, 완산에서 견훤이 일어나 세력을 확보해가자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894년, 나라가 날로 분열해가자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최치원은 유, 불, 선, 삼교에 깊은 소양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한시 뿐만 아니라 변려체로 된 다수의 글을 남겨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같은해 병마에 시달리던 여왕은 헌강왕의 손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하였다.
52.효공왕(재위897년~912년) : 헌강왕의 아들로 휘는 요이다.
893년, 태자에 책봉되고 897년에 진성여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898년 궁예에게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900년에 남서쪽의 땅을 견훤에게, 904년 북쪽의 땅을 궁예에게, 907년 견훤에게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기는 등 신라의 영토는 날로 축소되어 갔다.
53.신덕왕(재위912년~917년) : 아달라왕의 23대손, 대아찬 예겸의 아들로 휘는 경휘이다.
효공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54.경명왕(재위917년~924년) : 신덕왕의 태자로 휘는 승영이다.
궁예와 견훤이 나라를 세움으로 후삼국이 정립하여 패권을 다투던 때에 왕위에 올랐다.
급격히 기울어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후당에 조공을 바치며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18년, 현승의 난이 일어났고 고려가 건국되었다.
견훤의 압박이 심했으므로 새로 건국한 고려 태조 왕건의 도움으로 견훤의 침공을 격퇴하는 등의 전과도 올렸으나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죽었다.
55.경애왕(재위924년~927년) :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아우로 휘는 위응이다.
혼란기에 즉위하여 왕건, 견훤 등의 강대한 세력에 눌려 국왕다운 위엄을 떨치지 못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에 쳐들어와 그를 능욕하자 자결했다.
56.경순왕(재위927년~935년) :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로 휘는 부이다.
신라의 마지막 군주이자 고려 초의 문신이다.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에게 경애왕이 죽은 후 강제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차례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935년, 민심이 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군신 회의를 소집한 뒤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그는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받았으며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