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도(忠淸道)
목천현(木川縣)
동쪽은 청주(淸州)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쪽은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은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에서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목주(木州)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대목악(大木岳)ㆍ대록(大麓)ㆍ목주(木州)ㆍ신정(新定).
【성씨】 본현 우(牛)ㆍ마(馬)ㆍ상(象)ㆍ돈(豚)ㆍ장(場)ㆍ심(沈)ㆍ신(申)ㆍ왕(王) 세상에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에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 이름으로 성(姓)을 내렸다. 뒤에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장(張)으로 고쳤다.” 한다.
【산천】 작성산(鵲城山) 고을 동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 흑성산(黑城山) 고을 서쪽 11리에 있다. 취암산(鷲巖山) 고을 서쪽 12리에 있다. 용혈(龍穴)이 있는데, 비를 비는 곳이다. 세성산(細城山)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성거산(聖居山) 고을 서북쪽 14리에 있으니, 직산현 조에 자세하다. 길상산(吉祥山)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인다. 산방천(山方川) 고을 동쪽 20보(步)에 있다. 근원은 고을 북쪽 산방동(山方洞)에서 나와서 청주 진목탄(眞木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철(鐵) 산방천에서 생산된다. 사기그릇[磁器]ㆍ꿀[蜂蜜]ㆍ대추[棗]ㆍ지치[紫草]ㆍ안식향(安息香).
【누정】 동작루(東作樓) 선덕(宣德) 갑인년에 세웠다. ○ 유사눌(柳思訥)이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었다. 『신증』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소심(小心)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최보(崔溥)가 기문을 지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춘역(延春驛)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탑원(塔院) 고을 동쪽 23리에 있다. 황신원(黃信院)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원(新院)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혹 남원(南院)이라고도 한다. 정항원(井項院)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신증』 불지방원(佛地方院) 고을 동쪽 35리에 있다.
【교량】 장명교(長命橋) 산방천(山方川)에 있다.
【불우】 전곡사(轉谷寺)ㆍ보문사(普門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은석사(恩石寺) 작성산(鵲城山)에 있다. 승천사(勝天寺) 흑성산(黑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흑성산성(黑城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백 90척이고, 높이가 6척이며 가운데 못이 하나 있는데, 가물 때는 비를 빈다.
【인물】 고려 우학유(于學儒) 활달하여 기개가 있었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양대에 왕궁을 숙위(宿衛)해서 충성되고 근신하였다. 이고(李高) 등이 난을 일으킬 적에 우학유와 함께 모의하고자 하니 우학유가 말하기를, “공의 뜻은 크도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항상 나를 경계해서 말하기를, ‘무관이 문관에게 굽혀 지내고 있으니, 이 일이 어찌 분하지 않느냐. 그것들을 없애기란 썩은 가지 꺾기보다도 쉬운 일이지만 문관이 해를 당하면 역시 발길을 돌리기 전에 화가 우리들에게 미칠 것이니 또한 너는 마땅히 삼가라.’ 하였는데, 우리 아버지는 비록 돌아갔어도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있는지라, 죽어도 따르지 않겠노라.” 했다.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신증』 【효자】 본조 서만(徐萬) 아버지를 효성스럽게 섬겨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술과 반찬을 갖추어 바쳤다.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을 먹고자 하므로서 서만은 얼음을 두드리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니, 물고기 네 마리가 뛰어 나와서 갖다가 바쳤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여묘하면서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성종(成宗) 11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제영】 위린산수차중기(爲憐山水此中奇) 권진(權軫)의 시(詩)에,“나그네 길 봄바람에 말 발굽 더디니, 이 가운데 산수가 기이한 것 어여뻐라. 나무 그늘 땅에 가득하고 뜰은 고요한데, 달이 배꽃 위에 올라오니 저절로 시가 되네.” 하였다. 사면산여화(四面山如畫)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사방으로 둘린 산 마치 그림과 같은데, 천년 동안 이 땅이 스스로 기이하네.” 하였다. 흑산막막운차사(黑山漠漠雲遮寺)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서원(西原 청주(淸州)) 잔치 파할 때 아직도 이른 아침이러니 목성(木城)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멀고 머네. 흑산이 아득한데 구름은 절을 막았고, 푸른 들판 넓고 넓은데 물이 다리[橋]를 치네, 늙어 가니 자못 벼슬 재미 적은 것 알겠고, 술 깨서 나그네의 혼이 녹아나네. 늦게 공관(公館)에 들어가니 거처가 고요한데, 떨어지는 버들개지와 나는 꽃 함께 적막하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 끝이 10리. 근동(近東)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일원(一遠)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이원(二遠)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남면(南面)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북면(北面) 처음은 5리, 끝은 30리. 서면(西面)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세성(細城)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성지】 작성(鵲城)ㆍ세성(細城) 모두 옛터가 있다.
【토산】 감ㆍ은어[銀口魚].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인조(仁祖) 기축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 문묘에 보인다. 정구(鄭逑) 충주(忠州)에 보인다. 김일손(金馹孫)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金海), 연산군 무오(戊午)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헌납(獻納),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황종해(黃宗海) 자는 대진(大進), 호는 후천(朽淺), 본관은 회덕(懷德), 벼슬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민수 (역) |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