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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사는 법을 터득하면 씻음이
계속이 되고 거룩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의가 항상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하게 이해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롬1:17)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씻음과 거룩함과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나 하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금지된 것이기에 손대지 마라 하므로 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까짓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할 마음이 없으니 안 합니다. 남의 제재를 받을 만큼 욕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13절부터는 식욕과 정욕의 문제입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그런데 식욕과 정욕 이 두 욕심은 같이 연결이 되는 말입니다.
식물과 배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와서 사람들이
음식에 무척 신경을 많이 씁니다. 먹방 방송이 텔레비전 화면에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음식에 신경을 쓰는 그 이유는 전혀 엉뚱한데 있습니다.
음식을 통한 육신의 정력에 관한 기대감 때문이 큽니다. 먹는 음식이 몸의
체질과 건강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먹는 음식이 건강의 절대적인 조건처럼 말하면 핀잔 받아 마땅할 겁니다.
칼빈이 육신의 사람들에게 부엌이 종교라고 말할 만큼 사람들이
정력을 위해 먹는 음식에 많은 신경을 쓴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빌3:19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 곧 육신의 사람들은 배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 몸의 문제입니다. 이 몸이 육적인 관계에 있느냐 영적인
관계에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몸은 주를 위하여 주님을
표현하고 주님은 그 몸을 위하는 영적인 관계가 항상 이루어져야 합니다.
몸으로 그 속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내는 의의 병기가 되어야죠.
음식 잘 먹은 몸으로 외모나 힘자랑하는 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하나님이 주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주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죽을 몸을
항상 살리십니다(롬8:11) 그래서 예수 죽음을 짊어지는 사람들에게는 그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고후4:10) 평강의 기운과 기쁨의 기운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얼굴색이 다르고 음성이 생기가 가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은 음식으로 몸의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주와 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는 겁니다(마4:4)
사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식물이 몸이 됩니다.
그 몸은 음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따라서 식물은 주를 위하고 나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용하는 양식은
바로 우리 몸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대에는 식물과 약물이 인간의
죄성과 부패성 때문에 잘못된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 곧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먹는 사람은 배가 바로 그의 하나님입니다.
몸이 정욕에 젖지 말아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생식을 위한 본능입니다.
인간의 본능가운데 식욕, 성욕, 소유욕은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자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위해서 몸이 존재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5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란 그리스도의 부분이며 조각입니다. 기업의 한 부분이며
그리고 상속물입니다. 요13장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주님과 그 관계입니다.
상관이 없다는 말은 주님 안에서 그의 몫이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지체는 떼어 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서로 섞여서 나눌 수 없습니다.
창녀의 지체는 음란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욕은 넘쳐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의 뜻은 절대로 금욕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몸이 그의 지체가 되므로 절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내가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아니라 영의 체질이 되면 절제가 되는 겁니다.
16절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창녀와 한 몸, 사람이 둘이 하나(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인격은
둘이지만 몸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그 속에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녀 간의 사랑은 서로의 욕구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둘이 한 몸이 되는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님과 한 몸,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맛을 본 사람만이 압니다.
아마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공중 혼인잔치에 참여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되었다고 말하면 낯설어 할 겁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영과 생명에 접촉되어 본 사람은 한 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이십니다. 그 분께 접촉이 되면 만유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롬5:1-2절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요10:35절의 뜻을 확실하게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글로 표현하기에는 오해가 소지가 많아 생략하기로 합니다.
어쨌건 목사가 먹는 음식으로 인해 개기름이 주르르 흐르며
유들유들한 얼굴로 자신을 표현하려 한다면 이건 창피한 일입니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음행은 몸의 죄 곧 내적인 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영과
한 몸이 안 된 상태가 바로 죄인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 분과 하나가
되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상태에서 한 몸이 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그리스도의 새 계명입니다.
고전11장에서 자기 몸을 살피라는 말씀은 딴 것하고 한 몸이 되어
있으면서 또 주님과 한 몸이 되려고 하는 자신이 아닌지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거짓 고백하는
일이 되므로 양쪽과 다 한 몸이 되려는 음행이 되는 겁니다.
예컨대 어떤 여성이 평생 목욕을 안 하므로 더러운 것이 아니라 미스터 김과
미스터 박 사이에 끼어서 오락가락하면 더럽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칩니다.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는 곧 안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성전인 몸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배우자가 하나의 창기와 같은 악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과 하나 되는 일을 방해하면 그렇게 됩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육신으로 정복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아내를 대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불신 남편들이 종종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걸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가는 진로를 방해하면 아말렉과 같이 됩니다.
부부의 원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합하는 원리를 알기 위한 자연계시입니다.
만약 둘이 한 몸이 되는 신비한 연합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쾌락만을 서로
주고받는다면 그건 간음입니다. 성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고팔면 음란입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이지만 영적으로는 간음이 되기에 성령의 제재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간혹 부부간에 너무 돈독한 정이 들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육신의 행복에 영의 배고픔을 모르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잘못되면 음란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서로 쾌락을
주고받는 행위만으로 성을 생각하면 그건 음란이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 애써 배우자를 기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뒤에 따라 오는 영적인 거리낌 때문입니다. 성령이 근심을 하십니다.
특히 남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부부의 관계에 대한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일’ 그것이 바로 부부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일을 벗어나면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싫어하심을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마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그 앞으로 나란히 걸어야 합니다. 영적인 믿음의 남편과
믿음의 아내끼리 한 몸이 되면 거기에 신기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자녀들까지 경건하게 됩니다. 성경의 구원은 가족적인 구원입니다.
노아의 8식구, 다윗의 아들 솔로몬, 라합의 식구, 고넬료의 집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하십니다.
소돔 성에서 롯의 일가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창기인 사위들은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만약 그들이 온전했으면 끝까지 다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거절하면 안 됩니다. 그 뜻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면 누구에게든지 됐다 입니다.
18절의 ‘자기 몸에게 범하느니라’ 신학적으로는 난해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체험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음란이 자기 몸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독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만은 매우 약하신 분입니다.
우리 개념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의 행패에 휘둘리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에 쌓여있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도록 하려면 우리가
매우 순수해져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드십니다.
사람이 단순해지는 겁니다. 사실 성경의 최고봉의 신자들은 시편의 저자들입니다.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경지에 나아갑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토양과 조건과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죄에게 붙들려 있지 마라입니다. 진리를 몰라 죄인의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하죠.
일단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 난 다음 주의 보혈의 효력으로 죄의식을 떨쳐야
합니다(요일1:7-9)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 몸, 이 몸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성령 안에 내가 있는 몸입니다.
아무나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값으로 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과 영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기쁨과 감사로
행복하게 살면서 자신의 그릇과 믿음의 분량대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둘이 한 몸이 되는 신비한 연합!!
부부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 앞으로 나란히 걸어 가는것!!
영적인 믿음의 남편과 믿음의 아내가 한 몸이 되면 신기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
"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2)
부부의 원리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교회!!
한 몸됨은 놀라운 비밀의 영역안에서 열어지고 보여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오타가 나와서 수정하려 하니 수정이 안되네요~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리'자가 빠졌네요~
학이불염 [學而不厭]
더 큰 만족을 원한다면 허기진 상태로 머물러라.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어린아이 맘으로 주님을 앙망할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맛은 이렇케 표현해 봅니다.
마음은 나근나근하고, 몸은 노근노근 합니다.
오늘 부부의 원리를 다시 생각해 보는 귀한 날 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비밀과
부부의 신비한 몸 만들기를 겸하여 생각하며
주님을 사랑하듯 서로 존중하고 거룩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늘 부를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찬양을!
좋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