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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15~17(2) 하나님의 울타리 2024. 6. 23
예전에 동독과 서독이 나뉘어져 있을 때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합니다. 사회주의 동독에서 개 한 마리가 목숨을 걸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 자유로운 서독으로 넘어 왔습니다. 서독에 살고 있는 개가 동독에서 넘어온 개에게 물어 봅니다. “너는 왜 목숨을 걸고 넘어 왔냐? 동독에는 먹을 게 없어서 서독으로 넘어 왓냐?”, 동독 개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서독개가 계속하여 동독 개에게 “주인이 마구 때려서 넘어 왔니”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동독 개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궁금해진 서독개가 “정말 궁금하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죽음을 불사하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 온 거야? 동독에 먹을 거 있고 집 있으면 됐지. 무엇을 더 바래?”
말하자 말자, 동독 개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모르는 소리 말아. 그런 건 견딜 만해. 모름지기 개는 짖고 싶을 때 마음대로 짖어야 되는 거 아니겠냐? 마음 놓고 짖을 수가 없어 답답해서 넘어 왔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일까요?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속박을 당하고 갇혀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먹고 사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자유가 없이 구속된 삶이라면, 그것이 진정한 삶이 아니다’라는 것을 개의 모습에 빗대어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요 근래 대한민국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야당 대표인 이재명씨가 북한에 불법으로 돈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2018년 이재명씨가 경기도지사로 있을 때입니다. 이때에 이재명씨가 측근인 경기도 부지사인 이화영씨를 ‘평화부지사’라는 자리를 신설해서 앉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9월 18~20일 문재인 전대통령과 김정은이가 평양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되자 이재명씨가 이 수행단에 들어가려고 안달이 납니다. 이재명 지사는 육로로 평양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북측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헬기를 타고 평양에 와서 벤츠로 갈아타는 탑승 루트를 제시합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북측은 이재명씨가 방북하는 헬기와 벤츠 동원비용으로 돈을 요구하는데, 이재명씨가 돈이 없다 보니 쌍방울그룹 김성태 전 회장에게 500만달러(60억)를 요구합니다. 아무리 회장이라도 그리 큰돈을 쉽게 쓸 수 없는 김성태 전회장은 300만달러로 타협했는데, 그 방북 비용 300만달러를 쌍방울에 대납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난 주 이화영씨가 9년 6개월 형을 받은 것이 핵심입니다. 쌍방울 전회장이 나서서 이화영씨의 뒤에는 이재명이 있다고 증언하였고, 이에 이재명씨는‘자신은 절대 모르는 일이고 모든 것이 이화영씨 혼자서 한 일’이라고 발뺌을 하는 모양새입니다.
흔히들 이재명씨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재명씨 보고 하는 말이‘숨 쉬는 것 빼고 모든 것이 다 거짓말로 일관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 남과 북이 더 가까이 가까워지고 문화를 교류하고 인적 자원이 왕래하는 것에 대하여 저는 100%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이재명씨처럼 개인의 야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남북관계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정말로 나쁜 모습이라고 비판하고 싶습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하였다고 국민앞에서 용서를 구하면 되는데 끝까지 변명과 거짓말입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우려할 정도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바른 판단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입을 다물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을 동조하거나 좌경화된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나서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의견이 전체의 국민의 의견이고, 전체의 행동’인 양 떠벌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만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부분 국민들을 호도합니다.
그리고서는 자신과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들은 ‘수구꼴통이며, 개혁되어야 하며 청산되어야 하는 적폐’라고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법에 따라 잘못한 일을 판결하여 법적 제제를 이어가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대한민국에 자유가 사라지고 자신들이 핍박을 받고 있다”는 궤변을 쏟아 냅니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좌경화된 생각과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는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안에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대한민국이 자유 대한민국이고, 개개인이 누리는 모든 자유가 보장되어져 있는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가집니다.
북한을 생각해 보세요. 북한에는 이런 자유가 없습니다. 김정은을 욕하고, 노동당 정치를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북한에는 일절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북한을 찬양하고, 오매불망 북한이 좋다’는 사람들은 모두 북한으로 보내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자유 대한민국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자유대한민국에서 살지 말고 모두 북한으로 넘어가서 살아 보았으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대한민국에서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지킵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 중에서도 특히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던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그야말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렸습니까? 일제의 암울한 시기에 교회는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었고, 믿음을 가진 신앙의 선각자들은 우매한 사람들을 깨우는 지팡이였습니다. 6.25 한국동란 때에도 수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무수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북한공산군에 의하여 살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애써 망각하는 일부의 좌경화된 사람들은 항상 교회를 욕하는데 앞장섭니다. 그리고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나라를 생각하고 헌신하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성도들을 수구꼴통이라고 비난합니다.
대부분의 교회와 교인들이 가진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면 보수주의입니다. 특히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서로 함께 어울릴 수 없다는 절대적인 이념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공산주의에서는 “기독교를 지칭하는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에 대하여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공산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불교도 아니구요. 천주교도 아닙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산사회주의는 기독교와 물과 기름으로 상극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더더욱 싫어하고, 교회와 기독교인을 더 핍박하는 것입니다.
좌경화된 세력이, 그리고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성도들을 싸잡아 욕한다고 하더라도, 성도들은 진리를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대한민국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위태로운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기도로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자유의 울타리’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자유의 울타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이지만, 그런 자유에도 울타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한계가 없는 무한한 자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계가 없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무제한의 자유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직에 허용된 자유만 있을 뿐입니다.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울타리가 있는 자유라는 말입니다.
설교 초두에 등장했던 베를린 장벽을 예로 들어보죠. 베를린 장벽이 공산주의 동독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속박의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서독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뭡니까? 정반대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지켜주는 <보호의 울타리>’였습니다.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는 수족관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물고기가 누리는 최대한의 자유는 “물속에서의 자유”입니다. 만일 물고기가 “난 자유롭게 물 밖에 나가고 싶다” 주장하고 물 밖으로 뛰쳐나온다면, 이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입니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데 무슨 자유입니까?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고 행복할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100% 착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는“자유를 누린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보고는 “자유를 빙자하여 방종하게 행동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신앙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말씀의 테두리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고, 성경에서 말하는 기준을 벗어나서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런 모습을 두고 성경은 말하기는 <죄>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의 자유를 이용해서 자유가 가진 울타리를 뛰어 넘는 어리석은 방종을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요, 기쁨이요,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함으로 가장 복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울타리였습니다.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본문에서 <에덴 동산>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동산이란 히브리어 말은 (ןגב,베간)이라는 말인데, 여기에 사용된 “간(ןג)”이라는 단어는 “울타리를 치다, 보호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으로 보호하기 위해 조성해 놓으신 울타리입니다. 에덴 동산 안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자유를 빼앗는 울타리가 아니라,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은 울타리입니다.
에덴동산의 울타리안에 사는 아담과 하와가 누리는 자유와 그 자유의 한계가 잘 명시된 말씀이 16절입니다.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누리는 완벽한 자유입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대로 먹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는 생명나무 열매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을 했다는 말입니다.
반면 자유의 한계가 드러나는 말씀이 17절입니다.“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모든 나무 열매는 먹고 건드리되, 선악과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먹으면 죽게 되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 여기에서 “행위언약(行爲言約)”이라는 신학적 논리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생명을 주시고, 거역하면 죽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최초의 언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최초의 언약은 아담과 하와가 일방적으로 깨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구속하고, 나를 옭아매는 속박이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세상에 나가 활개 치면서 이런 것 저런 것 다하고 싶은데, 말씀이 나를 제한한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아담과 하와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에덴동산 안에 거하였을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최초로 맺은 <행위언약>은 어려운 것이 없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멸망이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영생’이라는 행위 언약의 주된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깨어지게 되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게 되고, 행위언약으로 인한 구원은 파기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괴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뱀의 모습으로 위장한 사탄이 등장해서 하와에게 말합니다.
창 3:1절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이 말을 들은 여자는 헷갈립니다.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하와가 어떻게 답변을 할까요. 이 대답은 아주 중요한 것을 교훈으로 가르쳐 줍니다.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와가 적당한 대답을 몰라서 ‘차라리 잘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했으면 좋으련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비틀어 바꾸어 답변합니다. 하나님은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말했는데, 하와는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고,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바꾸어 버립니다. 이 간단한 대답이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울타리에서 끄집어내어서 세상 속으로 던져 버리는 계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근래에 이단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다니면서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이 꼭 이 모양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비틀어 놓습니다. 아예 다른 말로 하면, “어?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잖아!”하면서 거부를 해 버리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교묘하게 변질 시켜 놓습니다.
마귀 사단은 항상 이래요. 항상 이간질하고, 항상 싸우게 만들고, 항상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신앙과 믿음의 근간이 되는 전체를 절대 흔들지 않습니다. 전체를 바꾸어 놓으면 바로 표시가 나고, 성도들이 경각심을 가지면서 조심을 하기 때문에 전체는 흔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로 관심도 없을 것 같은 부분에서 살짝 살짝 몰래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함정에 빠지게 하여서 성도의 삶 전체를 매몰시켜 버립니다. 정말로 영적으로 깨어서 삼가 조심해야 할 사탄의 간교한 술법입니다.
저는 판단하기를 사탄의 이런 간교한 술법이 교회뿐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 안에도 차고 넘친다는 점입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헌법을 무시하게 고함만 치면 이기는 뗏법이 등장합니다. 북한과 대치 상태에서 대한민국의 울타리가 되는 반공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안에서 좌경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교묘하게 국민들의 눈을 속이고 귀를 막는 행동을 합니다. 이들은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헌법을 어기고 반공법을 건드리면서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자행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결 같이 목소리를 냅니다. 국민을 위하고 대한민국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만을 생각하고 대한민국의 번영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에 귀를 기울여서 안 됩니다. 헌법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반공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이런 사람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 대한민국의 울타리를 스스로 허무는 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금주 화요일에는 6.25 한국동란이 발발한 날입니다.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안 됩니다. 또한 대한민국백성으로서 자유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의 소중함을 알아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내 자유의 한계는 상대방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까지다”라는 벤쟈민 프랭클린의 말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고, 그 자유로 말미암아 풍성한 축복의 생활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