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에세이】
‘좋은 글귀’를 보면 벽에 걸고 싶다
― ‘가훈’에 담긴 옛 어른의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으며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필자의 말
새해에 대전수필문학회 카페에 올라온 이태호 시인(사진작가, 수필가)의 수필을 읽었다. <나이테> 제목의 이 글에는 ‘가훈’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
“선친이 물려주신 해서체로 쓴 칠언(七言) 한시”라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액자에 담긴 글을 읽고 그 뜻을 암송했던 기억이 새롭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시대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칠언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언급했다.
忠孝是吾家之寶(충효시오가지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인간이 행해야 할 덕목이다. 이 말씀을 집안의 보배로 알라.’ 詩書是士家良田(시서시사가양전) ‘시와 글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은 삶의 씨앗을 건강하게 발아시키는 훌륭한 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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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글을 읽고 “새해에 좋은 글귀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댓글을 달았다. 댓글을 달면서 저명 서예가로부터 받은 붓글씨 한 점이 떠올랐다.
대전 갈마도서관에서 열렸던 ‘가훈 써주기’ 행사장에서 받은 귀한 글씨다. 행사장에 다녀와서 일간지에 쓴 칼럼과 함께 동향(同鄕)인 청양 출신 서예가 이계선 명필의 글씨를 소개한다. ■
2025. 1. 13.
윤승원 소감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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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승원의 세상風情
‘가훈 써주기’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
- 좋은 글귀 벽에 걸기 좋아하는 민족 -
윤승원 논설위원
우리나라 국가 발전의 원동력은 가정교육에서 나왔다. 집집마다 걸려 있는 ‘가훈’과 공부하는 학생의 책상 위에 걸려있는 ‘좌우명’에서 국가와 사회 발전의 근원적인 힘이 나왔다.
좋은 글귀 한 점 벽에 걸어두는 것은 자기 암시이고, 의지의 표현이다. 의지가 나약해질 땐 용기를 주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이에겐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역할도 한다.
공적으로는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되고, 사적으로는 마음 수련과 겸양의 자기 최면효과도 발휘한다.
얼마 전,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횡재’를 했다. 도서관에서 횡재라니, 일진이 썩 좋은 날이었다.
도서관은 책을 읽고 공부도 하는 곳이다. 책 읽고 공부하는 곳에서 횡재를 했다면 ‘지식을 얻는 기쁨을 맛보았다’는 뜻이니,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이날의 기분은 달랐다. 우연히 ‘가훈 써주기’ 행사장에 들러 귀한 글씨 한 점을 받았다. 그것도 평소 좋아하는 글귀를 명필(名筆)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니,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살아오면서 남에게 글씨를 부탁해 본 적이 없다. 유년시절부터 집안에서 지필묵(紙筆墨)을 자주 대할 수 있었다. 좋은 글귀를 보면 습자(習字)하는 버릇이 생겼다. ‘붓을 잡는다’는 것은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다.
붓글씨를 일컬어 우리나라는 서예(書藝)라 하고, 일본은 서도(書道), 중국은 서법(書法)으로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예(書藝)라는 말도 좋지만 서도(書道)와 서법(書法)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서도란 글씨를 쓰는 방법, 또는 그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지만, 길 도(道) 자에는 법(法) 자만큼이나 엄격함이 묻어난다. 예(藝), 도(道), 법(法)이란 연마와 수련의 과정을 거쳐 청심(淸心)에 이르는 일이다.
붓이란 그 속성과 기능을 익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마음수련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단박에 이뤄지지 않는 인내심과 절차탁마 정신도 깃든다.
‘가훈 써주기’ 행사장에 들렀더니, 누구나 마음에 드는 문구를 말해주면 선착순으로 써준다고 했다.
동영상 :
▲ 대전 서구 갈마도서관에서 열렸던 ‘가훈 써주기’ 행사장 풍경 - 서예가 이계선 선생이 지역 주민들에게 ‘가훈 써주기’ 무료 봉사를 했다. 수많은 지역주민들이 줄지어 명필이 써주는 ‘좋은 글귀’를 받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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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대하는 서예가였다. 진땀을 흘리면서 그 많은 분량을 혼자 써내고 있었다. 힘든 일이다. 글자 한자 쓰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가.
혹자는 진을 빼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붓을 잡은 이는 아무 말이 없다. 과묵한 표정으로 오로지 글씨에만 집중한다.
여러 가지 좋은 문구가 견본처럼 놓여 있었다. 가정주부들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가화길상(家和吉祥)과 같은 문구를 좋아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무한불성(無汗不成)과 같은 문구를 선택하기도 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심청사달(心淸事達), 효제충신(孝悌忠信), 역지사지(易地思之) 같은 문구를 선호했다.
서예가가 글을 쓰면 감상평을 하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붓 참 잘 돌아간다. 편안할 안(安)자를 저렇게도 쓰는구나!”라고 감탄하는가 하면, “글씨도 좋지만 뜻도 참 좋네.”라면서 뜻풀이를 상세히 해주는 박학다식한 주민도 있었다.
쉴 틈 없이 글을 써내느라 진땀을 흘리는 서예가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어느 50대 아주머니는 음료수를 권하며 “너무 무리하셔서 몸살 나시겠어요.”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가훈 써주기’는 서예교실 회원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먹을 가는 이, 서진(書鎭)을 놓아주는 이, 낙관을 찍어주는 이도 있었다.
가훈 한 점 받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좋은 글귀를 벽에 걸어두기 좋아하는 전통적인 문화 민족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글귀는 혼자 소유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흔히 큰 뜻을 가진 정치인들이 인터뷰할 때, 동서고금의 명언을 좌우명처럼 인용하는 것을 본다.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바탕에는 부모가 걸어 놓았거나 자신이 신조처럼 삼는 글귀가 있다. 문제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언행일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훈은 수신(修身)의 첫 단계다. 가훈을 되새기면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대열 맨 뒤에서 내가 부탁하여 받은 글귀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이었다.
▲ 필자가 받은 안분지족(安分知足) -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을 앎’이라는 뜻이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다.> 이양하의 명수필 <나무>에도 등장하는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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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앞만 보고 뛰는 젊은이의 눈에 들어오는 글귀는 아니다. 그러나 분수를 알면 긍정과 낙관(樂觀)의 여유가 생긴다.
부질없는 욕심을 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지족상락(知足常樂)의 멋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이 글을 힘 있게 써 준 이는 청양출신 서예가 이계선 선생이었다. 50여 년 붓을 잡아온 그는 어릴 적 서당에서부터 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한 푼 대가도 받지 않고 혼신을 다해 ‘가훈 봉사’를 하는 그의 열정을 보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진정한 서예가의 경지를 느꼈다. ▣ 2011년 8월 10일 금강일보 <윤승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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