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자유시의
정착과 1920년대의 한국 시문학사
이념적 분화
1. ‘문화정치’의 실상과 민족의식의 확립
일제 강점기의 한국 문학을 고찰하고자 할 때, 식민지 상황에 대한 고려는 필수적이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당시 우리 사회 모든 부문의 활동을 철저하게 규정짓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한국 시문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삶의 체험의 표현이라 할 문학은 어느 시기이든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이에 대한 문학적 대응을 보여준다. 특히 주권을 상실하고 민족 전체가 피지배 계층으로 전락한 시대에 현실과 문학과의 연관성은 더욱 밀접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일제는 1910년 이른바 ‘합방’ 이후, 주권 회복을 위한 우리 민족의 저항 운동을 탄압하고 지배 체제를 굳히기 위해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였다. 일체의 군사·정치·문화 활동을 금지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가 된 한국을 장악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탄압과 공포 속에서도 우리의 민족적 저항 운동은 계속되었고, 1919년에 이르러 마침내 전 민족적인 해방 운동인 3·1운동이 폭발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일단 군사력을 동원하여 3·1운동을 탄압하였으나, 더 이상 무단통치만으로는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위 ‘문화정치文化政治’를 내세우며,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전환하고 약간의 출판과 언론, 그리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겉으로 유화책을 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식민통치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경찰기구와 병력이 3·1운동 직후 불과 1~2년 사이에 3배로 증가되었고,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사상통제와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또한 친일세력을 양성하여 친일 여론의 형성, 친일단체의 조직, 독립운동가의 적발과 정보 수집 등에 이용하는 등, 온갖 술책을 동원하여 식민지 지배 체제를 한층 공고하게 만들어나갔던 것이다.¹
‘문화정치’를 표방한 유화책의 기만적인 성격은 무엇보다 일제가 실시한 문화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는 우선 민족적 색채가 짙은 사립학교를 탄압하는 대신 통제가 쉬운 관·공립학교를 육성하여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유교·불교·기독교·천도교 등의 종교세력을 식민정책에 동조하도록 회유하고, 이를 거부하는 경우 탄압하였다. 또한 역사를 왜곡하는 식민사관을 유포하여 한반도 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하였다. 고대사의 경우 조작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가지고 한반도의 일부가 일본의 지배에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중세에는 중국 여러 나라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논리를 퍼뜨렸다. 그리고 어용 경제학자들에 의해 세워진 '정체·후진성론'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는 세계사적 발전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근대 초기까지도 고대사회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일거에 근대적인 것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교육 · 종교 · 학문 등 다방면에 걸쳐 획책된 일제의 문화정책들은 모두 왜곡된 식민교육과 정신적인 세뇌를 통해 한반도를 영구히 식민지로 만들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조직적으로 감행했다. 일제는 이미 무단통치기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많은 농토를 일본인과 일본기관의 소유로 돌린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식민지 한국에서의 쌀 생산 증대와 수탈을 통해 안정된 식량공급원을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 이는 1920년과 1928년 사이의 통계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이 기간 쌀 생산량은 36% 증가하였으나, 일본에 대한 쌀 수출량은 4.2배 이상 증가하였다.² 이 같은 수치는 식량 증산 자체가 아니라 미곡의 수탈과 반출이 '산증식계획'의 주된 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한국 농민들은 빼앗긴 쌀 대신에 만주의 잡곡을 먹어야만 했다.
뿐만아니라 일제는 수리조합사업을 통해 일본인과 일부 한국인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을 촉진하였다. 이는 수많은 중소지주와 자작농이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농민들이 자작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농하여 도시노동자가 되거나 일본 · 만주 등지로 이민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나, 도시노동자가 된 이농민들은 식민지 산업 구조 속에서 저임금과 실업에 시달리며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한편 이와 같은 일제의 음험한 ‘문화정치’와 수탈에 맞서, 3·1운동을 계기로 결집되고 분출한 우리 민족의 저항 운동 역시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다. 3·1운동은 비록 일제의 물리적 탄압에 의해 좌절되었으나, 근대 민족주의의 확립과 본격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운동은 계급과 계층, 성별과 종교를 초월한 전 민족적인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유림儒林이나 일부 개화파에 의해 주도된 혁명이 아니었으며, 동학혁명과 같이 피지배계층의 투쟁도 아니었다. 전 민족 구성원이 피압박민족으로서 뜨거운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일으킨 운동이었다. 아울러 3·1운동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전근대적 성격을 탈피하고 근대적 민족주의로 확립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 이전 지배층과 유림이 주도하였던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과 달리, 3·1운동에 내재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지향하는 근대적인 것이었다. 이는 3·1운동의 민족대표와 청년 지식인들 대부분이 새로운 독립 국가로서 공화주의 국가를 지향했으며, 실제로 상해임시정부가 우리 역사상 최초로 공화주의 정부로 탄생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중요한 민족사적 의미를 지닌 3·1운동은 이후 국내외에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같은해 4월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이 운동의 직접적 결실이라 할 만하다. 상해임시정부는 상해무관학교 설립, 만주의 독립군 지원, 독립운동을 위한 사료 편찬, 기관지 『독립신문』 발행 등의 활동을 펼치며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임시정부와의 관련 속에서 국내외에서 본격적인 군사적 저항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강우규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저격사건(1919), 홍범도의 봉오동전투(1920), 김좌진의 청산리전투(1920), 나석주의 동척폭탄사건(1926)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성숙된 민중의식을 바탕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수많은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일어나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항의하였고, 신분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시작된 형평衡平운동(1923)은 각종 사회단체와 관련을 맺으며 반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일제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하여 전국적으로 ‘조선물산朝鮮物産 장려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책에 맞서기 위한 문화운동도 활발히 펼쳐졌다. 이 시기 문화적 저항은 일제에 의해 허용된 약간의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는 3·1운동 이후 식민 지배 정책을 수정하여 ‘문화주의’를 내세우며 최소한의 출판과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기회로 삼아 『동아』 · 『조선의 민간 신문과 『개벽』 · 『신생활』 · 『조선문단』 등의 잡지가 창간되었고, 이 신문 · 잡지들은 당대 문화운동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구도를 살펴보면, 크게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 세력은 안창호의 준비론과 실력양성론을 사상적 근거로 삼아 민족의식의 개발과 교육에 치중하였고, 마르크시즘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세력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동일시하며 혁명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다. 이 두 세력은 이후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상호 충돌과 침투 과정을 보여주며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축으로 기능하였다.
민족주의 세력은 주로 민족 역량의 배양을 강조하며, 국민 교육운동과 국학 연구를 통해 문화적 저항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민립대학 설치 운동과 민족주의 사학 연구, 고전 및 국어연구와 한글 보급운동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제의 왜곡된 식민교육과 문화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활동이었다. 1920년대 중반 시문학 분야에서 일어난 전통양식 부흥운동도 이러한 민족주의 이념의 문학적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소련혁명(1917)의 영향을 받아 국내외에서 싹트기 시작한 사회주의 세력은 우리 사회에서 192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1920년대 초반 서울청년회(1921), 무산자동지회(1922), 신사상연구회(1923), 화요회(1924), 북풍회(1924) 등 사회주의적 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동하였고, 1925년에 이르러 조선공산당이 조직된다. 이들 세력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각종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벌였고, 문학 분야에서도 같은 해 결성된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³을 중심으로 계급주의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검토한 바와 같이, 1920년대는 일제의 교활한 ’문화정치‘와 이에 대항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운동이 대립하던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일제의 압제가 음험한 형태로 강화되었던 만큼, 이에 대항하는 민족적 저항도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정치·군사적 저항이 쉽지 않아서 일제가 허용한 한계 내에서 문화적 저항 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운동의 이면에는 일부 세력들이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책과 민족분열정책에 넘어가 허울뿐인 문화적 자유에 만족하고 마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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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27~28쪽 참조,
2 위의 책, 127쪽.
3 이후 '카프'로 약칭함.
(전도현, 고려대 교수)
『한국 현대 시문학사』 이승하 외 지음
2024. 4. 2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