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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향유를 부은 세 명의 여인 : 첫 번째 여인
- 한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
누가복음 7장 36-50절/ 36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신약성경 중에서 사복음서(4福音書)에는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향유를 붓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볼 수 있는 성경 구절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13절, 마가복음 14장 3-9절, 누가복음 7장 36-50절, 요한복음 12장 1-8절입니다.
이렇게 사복음서 모두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을 놓고서, 어떤 사람은 네 곳에서의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을 한 사건의 동일한 여자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네 곳의 사건에서의 여인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동생인 마리아로서 동일한 한 가지 사건의 여인인 마리아라고 보고 있고, 어떤 이는 동일한 한 가지 사건이 아니라 각각 다른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아닙니다. 즉,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요. 마태복음 26장 6-13절, 마가복음 14장 3-9절, 누가복음 7장 36-50절, 요한복음 12장 1-8절, 이 네 곳의 각각의 기록은 (1) 마태복음 26장 6-13절과 마가복음 14장 3-9절만 동일한 사건의 기록이고, 이것과 그리고 다른 두 곳의 성경 구절인 (2) 누가복음 7장 36-50절, (3) 요한복음 12장 1-8절은 같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 각각의 서로 다른 상황에서 있게 된 별도의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모두 세 번 나오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 나오는 여인은 마리아 라고 하는 한 여인이 아니고 마리아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인 외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여인도 있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향유를 붓는 사건을 볼 수 있는 곳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모두 네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1)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있었던 것은 누가복음 7장 36-50절입니다. 여기서의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있었던 갈릴리 지역에 있는 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옥합에 든 향유를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의 특징은 한 여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채 다만 ‘죄인인 한 여자’(개역한글), ‘죄를 지은 한 여자’(개역개정) 라고만 밝히고 있는 것이며, 이 죄인인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의 발 뒤쪽에 무릎을 끓고 앉아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그 발에 부은 것이었으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드러내주시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2) 다음 두 번째는 요한복음 12장 1-8절입니다. 여기서는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나아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기 엿새 전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자신이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로 가셨는데 그곳에서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잔치가 벌여졌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한 나사로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마르다가 예수님을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예수께 나아와 향유를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마리아의 향유 부음은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리아의 향유 부음이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있는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고 세 번째가 마태복음 26장 6-13절, 마가복음 14장 3-9절의 한 여인의 향유 부음입니다. 이 두 복음서에서의 한 여인이 옥합에 든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은 같은 동일한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있은 한 여인의 향유 부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있었던 것으로 유월절 절기의 이틀 전에 있었으며, 문둥이 시몬의 집에 가 계셨으며 식사하실 때 있었습니다. 앞서의 향유 부음이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에 있었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으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의 여인의 향유 부음의 성격과 그 의미를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미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힘써 다한 것으로, 온 세상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보시는 대로 마태복음 26장 6-13절과 마가복음 14장 3-9절, 그리고 누가복음 7장 36-50절, 그리고 요한복음 12장 1-8절은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행해진 시기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자인 여인은 서로 다른 인물로서 각각 별개의 다른 사건이며, 이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알게 하며 전해주려는 의미 또한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 각각의 성경 구절에서 보는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내용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서 알게 해주시려는 예수님의 진의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의 시기적 배경
우리는 이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있었던 사건인 누가복음 7장 36-50절을 보고 있습니다. 앞서에서 밝힌 대로 여기서의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있었던 갈릴리 지역에 있는 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마치신 후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버나움으로 들어와 이곳에 파견와 근무하고 있는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치시고(마 8:5-13; 눅7:1-10),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면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시고(눅 7:11-17), 다시 어느 성(동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옥중에 있는 세례 요한이 보낸 두 제자를 만나 세례 요한의 질문에 답하시고,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이 세대의 악함을 언급하신(마11:2-19,눅7:18-35)후에 있은 사건입니다. 짐작하건대, 아마 이때쯤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여인으로부터 향유를 부음 받는 일을 겪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 다시 제2차 갈릴리 전도 순회 여행을 떠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께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께서 제2차 갈릴리 전도 순회 여행을 떠나시기 직전에 갈릴리 주변의 어떤 한 마을에서(가버나움으로 여겨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한 이유
이때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흔히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베드로도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졌고(마 10:2; 요1:40), 이 사건과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사건인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었을 때 예수님이 머물러 계셨던 곳도 나병환자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마 26:6). 바리새인 시몬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자 하였을까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행하신 가르침과 여러 일을 보고 존경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니고데모와 같이 진리 탐구의 의욕에서였을까요? 그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문 내용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에게 그러한 의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초청했겠는가 하는 의아심이 생깁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한 것은 예수님께로 부터 말이나 행동 가운데서 모세의 율법이나 그 모세의 율법을 해석해서 전해 준 조상이 유전을 훼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들에 대해서 책을 잡을 수 있는 빌미를 얻고자 해서 입니다. 그렇게 되면 군중들이 예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추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계시다는 말을 들어 알고는 향유를 담은 옥함을 가지고 왔습니다.이 여자를‘죄인인 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이방인 된 의미의 죄인(눅 5:32)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께 나아와 향유를 붓는 여인에 대한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이 사람(예수님)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바리새인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할 때, 이 여인은 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는 없으나 죄를 지은 행위들, 곧 악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악행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 바리새인 시몬이 갖고 있는 생각을 아시고 그에게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는데,“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짐작컨대, 여인의 많은 죄는 그녀가 창녀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 나와 향유를 부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 뒤쪽에 서서는 울었습니다. 여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자기 머리카락으로 자기 눈물로 적셔진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이 창녀로 죄 많은 사람이라고 할 때 바리새인의 집에 드나드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어떤 사람인지요. 율법과 유전에 가장 엄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기 집에 죄인 된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 바리새인 시몬뿐만 아니라 그 집에 초청받아와 있는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비난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이 여인이 바리새인 집에 들어와 예수님의 발 뒤편에 서서는 울고, 그 눈물로 인해 적셔진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왜 일까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이 여인은 한때 창녀로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떤 여인을 극히 혐오하면서 죄인으로 부르는 대상은 창녀였습니다. 대부분의 창녀들이 그렇지만 가난하여 돈이 필요해서 일수도 있고, 그와 함께 쾌락을 위해서도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천국복음 전파와 가르침,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죄 많은 자신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 여인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 집에 들어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이 여인에게는 바리새인의 집이라고는 장벽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그로 말미암아 돌아올 멸시와 비난도 이 여인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서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를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긴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그것으로 그동안 귀히 간직하고 있던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나와 예수님이 계신 바리새인의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발 뒤편에 섰을 때 여인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는 마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울 뿐이었습니다.여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에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더니 어느덧 예수님의 발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을 바라보면서 여인이 우는 것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계셨습니다. 여인은 자기 눈물로 예수님이 발이 적셔진 것을 알고는 엎드려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에서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에다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다 부었습니다.
예수께 향유를 붓는 여인을 보고서 바리새인 시몬이 가진 생각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이 여인이 하는 행동을 보고서는 마음에 생각하기를“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하면 예수님이 만일 선지자라고 하면 이 여인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 사람인 줄을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하면 죄 많은 여인이 자기에게 다가와 하는 행동을 나무랐을 터인데,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예수는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그가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보아서 예수는 선지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고 하는 뜻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바리새인 시몬이 생각한‘선지자’는 [그 선지자]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그 선지자’는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로 오실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인 시몬이 예수께 이처럼 선지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리라고 약속하시는 예언을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주신 것에서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행한 일(왕상 17:21; 왕하 4:35)과 같은 회개를 촉구하며 능력을 행하신 데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 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지 의문을 품는 생각에 있어왔는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증거하며 가르치심과 함께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언하여 약속해 주신 그 선지자를 보내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오시리라고 한‘그 선지자’가 자신들에게 행하여 나타내 보인 능력을 이제 자신들이 처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의 일을 하실 것을 고대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 시몬 또한 예수님을 메시야의 일을 하시는‘그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여인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예수님이 처신하는 것에서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만일‘그 선지자’라면, 그래서 의로운 선지자라면 지금 자신 뒤에 서 있는 여자가 죄인인 것을 알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렇게 죄 많은 여인과 아무런 거부 반응도 없이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더욱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정결의 규례에 의해 죄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댄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관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자의 신체에 닿는 자는 그 또한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죄많은 여인이 하는 행동을 그녀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계시기에, 만일‘그 선지자’라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라는 것에서‘그 선지자’일 수 없다는,‘그 선지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바리새인 시몬은 이때를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가 원했던 예수님을 책잡을 호기를 마침내 잡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여인이 한 행위가 무엇에 의한 것인지를 말씀하심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아시고 그에게 해 줄 말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시몬이 듣고서는 대답하였습니다.“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판단이 옳다고 하시고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빚진 두 사람이 탕감 받은 비유를 통해서 적은 빛을 탕감 받은 사람과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 중에서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적게 탕감 받은 사람보다 자기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여인이 예수께 한 행동은 많은 죄를 용서받은 그 증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여인은 예수께로부터 많은 죄를 용서받음에 있는 그 증거로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였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는 죄 많은 한 여인이나 바리새인 시몬이나 모두 다 예수님을 사랑하였는데 그 둘 중에서도 죄 많은 한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보다는 더 많이 사랑했다는 사랑의 정도에서 이야기 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관점을‘죄사함’과 관련해서 말씀하셨으며, 저의 많은 죄가 사해졌으므로 죄 사함 받음이 많은 자 또한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신 예수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요, 죄 사함 받은 일이 없는 자는 그런 일이 없으니 그 또한 죄 사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마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은 죄 많은 여인에게서 보는 죄의 탕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과 가르치시는 교훈에서 그리고 행하시는 이적에서 예수님을 단지‘그 선지자’가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분이실 것에 대한 존경에서 갖는 사랑이니 그 사랑의 정도 밖에는 사랑을 예수께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런 그는 예수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같이 하고자 하는 정도의 사랑입니다. 이런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께 표한 사랑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에 의해서 사랑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는 예수님을 책잡고자 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를 마련하면서 빌미를 찾는 시험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사랑함이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에 견줄 때 참으로 적었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비록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였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섬김에 있는 데 따른 존경과 사랑을 해서가 아니고 시험하고자 해서입니다. 그가 비록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죄 용서에 의한 구원에 관한 믿음과 소망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나올 리가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네가 본대로 여인은 나에게로부터 죄 용서받은 증거, 곧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이러 이러한 일을 하였지만 너는 내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 나를 집에 초청한 것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라고 얼버무리겠지만, 좋다! 내게 발 씻을 물을 주기를 했느냐? 내 얼굴에 입 맞추며 인사를 하기나 했느냐? 내 머리에 감람유를 발라주기를 했느냐? 이는 나에 대한 사랑함이 적어서 그렇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먼지 묻은 내 발을 씻어주었고, 그 발에 끊임없이 입 맞추었고, 감람유하고는 그 가치가 비교되지 않는 귀한 향유를 내 발에 부어주었다, 어떠냐? 너와 이 여인 중에서 누가 더 많이 나를 사랑한 것이냐? 너와 이 여인 둘 모두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너와 이 여인이 사랑한 것 중에서 누가 더 많은 사랑에 있는 탕감을 받은 자이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죄 많은 여인은 예수께 자기의 모든 죄의 용서가 있음을 아는 까닭에 예수님을 많이 사랑함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이처럼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려고 하며, 이것이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죄 사함을 받음에 있는 것을 알게 하시는 지혜에 있는 믿음이 저를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보고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모여든 많은 사람에게 알려 35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하나님의 지혜가 참되다는 것은 그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에 의해서 밝혀지는 법이다.”를 확인케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여인의 믿음이 죄에서 구원을 얻는 은혜를 입게 하였음
바리새인 시몬에게 말씀을 다하신 예수님은 이번에는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이것은 죄 많은 여인이 이제야 비로소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여인에게 죄 사함을 선언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때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발로로 예수님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이처럼 죄 사함을 받았으며 이를 알게 하신 지혜에 있는 믿음이 저를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바리새인 시몬에게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음과 그 용서받은 증거로 여인은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의 표시를 하였음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인은 죄 사함의 은혜를 예수님에게 나오는 그때 이미 받았습니다(47절)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의 표시를 한 여인을 향하여 그 여인이 그가 믿고 사랑하는 예수님께로부터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음을 재차 확인하여 주시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속으로 말하기를“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하므로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여인에게“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이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인이 죄 용서함을 받은 구원을 얻은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믿음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라고 함으로써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죄 사함을 주시는 구주이심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에 응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떤 사람인 줄을 아시면서도 불구하고 그의 초청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어 그와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한 한 섭리로써 한 죄 많은 여인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