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메지성을 관람하게 되는 동선...사람들은 서쪽 성채까지 와서 회랑은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천수각을 나와서 비전마루(備前丸跡)를 지나 로 내려오니 국화우물이 있는 마당에 벚꽃이 피어 있는 나무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들을 찍는다. 이곳에서 사진들을 찍고 서쪽 성채(Nishinomaru Gardens 西の丸庭園)로 가서 이 성과 관련이 많은 인물
센히메(千姫)의 유품의 기록물들이 있는 백간회랑(西の丸 長局니시노마루)을 둘러본다.
천수각에서 내려와서 본 서쪽 성채와 회랑
備前丸跡에서 올려다본 히메지성
비전마루 아래에 벚꽃이 피어 있는 나무가 있어서 이곳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고 있어서 번호표를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는다.
우리도 순서가 되어서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긴다.
히메지성은 벚꽃과 가장 잘 어울리는 성이어서 벚꽃과 엮어 본다.
국화꽃 모양의 우물...번주의 접시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
센히메의 관련 유물이 있는 회랑이 있는 서쪽 정원으로 간다.
니시노 마루의 정원으로 이곳도 포토존이라고 한다.
꽃망울을 일찍 터뜨리는 나무도 있고...
백간랑하라..백간주랑이라는 간판이다....한글로는 백간 복도로 되어 있다....백간회랑의 용도에 대해서 설명이 되어 있는데 하녀들
의 거주공간이기도 하고 방어를 위한 건물이라고 되어 있다.
복도...
오른쪽은 방이고 왼쪽은 성벽과 붙어 있다.
히메지성이 공습에 불타지 않고 남아 있음과 성이 어떻게 보존되고 수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기와에 대한 설명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며 가문에 따라 기와의 문양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이 성은 주인들이 바뀌었다
설명서들을 보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센히메...무서운 모습이다.
그러나 위키백과에서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다....도꾸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의 손녀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이 며느
리이다.
이 인형은 위키백과에 있는 인형의 그림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센히메 이야기
센히메(千姫, 1597년 5월 26일~1666년 3월 11일)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와 에도 시대의 인물로, 에도 바쿠후 2대 쇼군인 도쿠가
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장녀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손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후의 혼다 다다토키(本
多忠刻)의 정실이다. 원호는 덴주인(天樹院)이다.
게이초 2년(1597년) 야마시로국(山城国) 후시미성(伏見城)의 도쿠가와 저택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
다와 그의 정실 에요(江与)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게이초 8년(1603년) 3월 24일 센히메의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 휘하의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라는 지위에
서 벗어나 도요토미 가문을 제치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하여 에도에 바쿠후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센히메는 7세
의 나이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외아들이자 도요토미 가문의 당주인 히데요리(秀頼)와 혼인하여 오사카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데요리의 생모는 센히메의 생모 에요의 언니인 요도도노(淀殿; 차차)로, 히데요리와 센히메는 사촌 남매간이기도
하였다. 두 부부 관계는 원만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녀는 없었다.
게이초 10년(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고쇼(大御所)로 물러나고 센히메의 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대 쇼군으로 취임
하였다.
게이초 19년(1614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결별하면서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였다. 게이초 19년의 오사카 겨울 전투
(大坂冬の陣), 게이초 20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를 거치면서 패배한 도요토미 가문은 당주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히데
요리의 생모 요도도노가 함께 자살하면서 멸망하였으나 센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리
와 측실 사이에서 출생한 나아히메(奈阿姫)가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센히메는 나아히메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구하기도 하였다.
나아히메는 덴슈니(天秀尼)라는 법명을 받고 불문에 귀의한 뒤 1645년 36세로 자녀 없이 요절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단절되었다.
겐나 2년(1616년) 구와나 번(桑名藩)의 번주이자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의 손자인 혼다 다다토키와 재혼하였고 동시에 화장비
명목으로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때 쓰와노 번(津和野藩)의 번주인 사카자키 나오모리(坂崎直盛)가 구와나 번으로 향하는 센
히메의 혼례 행렬을 덮쳐 센히메의 가마를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당하여 사카자키 나오모리는 할복하고 사카자키씨는
개역(改易) 처분을 당하는 센히메 사건(千姫事件)이 발생하였다. 이후 쓰와노 번은 시카노 번주였던 가메이 마사노리가 수여 받게
된다.
겐나 3년(1617년) 혼다 가문이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로 영지가 변경되면서 남편 혼다 다다토키와 함께 8월 28일 히메지성(姫
路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인 겐나 4년(1618년)에는 장녀 가쓰히메(勝姫), 겐나 5년(1619년) 장남 고치요(幸千代)가 태어나
는 등 혼다 다다토키와 센히메는 금슬도 좋았지만, 겐나 7년(1621년) 아들 고치요가 세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간에이 3년(1626년)
남편 혼다 다다토키와 어머니 에요가 연이어 사망하자 딸 가쓰히메와 함께 혼다 가문을 나와 친정 에도 성(江戸城)으로 되돌아왔
다. 불교에 입문하여 덴주인이라는 법명을 받은 센히메는 가쓰히메와 함께 에도의 다케바시 저택에서 거처하였다.(위키백과)
500년이 넘은 마루바닥이다
센히메의 복식??...시간도 없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사진만 찍고 지나간다.
백간회랑을 나와서...이쪽에서 가장 성이 잘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러 간다.
니시노마루의 성채쪽의 정원
포토존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
뒤에 성이 이렇게 보이게 된다.
센히메 이야기라는 간판.. 오디오로 들을 수 있다는 간판이다.
백간회랑의 역사와 용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간판이다.
니시로마루의 정원을 나오고
나가는 길에 보이는 천수의 정이라는 모래에 돌을 놓은 곳이 보이는데...마치 고산수식 정원 같은 느낌이지만 의미를 찾아 보아서 설명 된 곳이 없다.
이 때의 시간이 11시 반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입장하는데 줄을 길게 서 있다....우리나라의 사찰이나 궁궐에 이런 줄이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우리도 이곳에서 히메지 성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고코엔으로 간다.
그 사이에 벛꽃이 좀 더 핀 것 같기도 하고....
회랑을 돌아보고 벚꽃이 핀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는 히메지성의 후원(後園)인 고코엔(好古園)을 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