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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死者의 書
바르도에서 들음을 통한 대 해탈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The Great Liberation through Hearing in the Bardo
파드마삼바바 / 지음
프란체스카 프리맨틀과 쵹얌 트룽파 / 영역과 해설
大圓/한글 역
머 리 말
《바르도 퇴돌》은 여섯 해탈의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그 여섯이란, 들음을 통한 해탈, 지님을 통한 해탈, 봄을 통한 해탈,
기억을 통한 해탈, 맛봄을 통한 해탈, 그리고 만짐을 통한 해탈이다.
이것들은 빠드마삼바바*에 의해 엮어졌으며,
42 평화의 신들과 58 분노의 신들이 그려진 만달라 두 개로 이루어진
사다나(sadhana)와 함께 그의 아내 예셰 쵸갈*에 의해 기록되었다.
빠드마삼바바는 이 경전들을 중부 티벳의 감뽀(Gampo) 언덕에 감추었다.
감뽀는 위대한 스승 감뽀빠(Gampopa)가 나중에 그의 승원을 세운 곳이다.
많은 다른 경전과 신성한 물건들이 이런 방법으로 티벳의 여러 곳에 추어졌다.
그것들은 테르마(terma)라고 불리며 '숨겨진 보물'이라는 뜻이다.
빠드마삼바바는 그의 뛰어난 25명의 제자들에게
테르마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바르도 퇴돌은 후에 이 제자들 중 한 명의 환생자인
까르마 링빠(Karma Lingpa)에 의해 발견되었다.*
해탈이라는 말은 이 경우, 누구든 이 가르침에 접하는 자는 -
열린 마음이든 의심을 하든 - 이 보물에 담겨 있는 전승의 힘을 통하여
순간적인 깨달음을 일별(一瞥)하게 된다는 뜻이다.
까르마 링빠는 닝마 전통에 속해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모두 까규 전통에 속해 있었다.
그는 이 여섯 해탈의 가르침을 제 13대 까르마빠인
되듈 도르제에게 처음 전승했으며,
되듈 도르제는 제 8대 트룽파인 규르메 텐펠에게 전승했다.
이 전승은 트룽파 계보인 수르망 승원에서 계속 유지되어 왔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닝마 전통으로 되돌아와 퍼졌다.
이 가르침을 배우는 제자는 두개의 만달라에 대해 완벽하게 정통하여
그 자신의 체험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사다나 명상법을 익히고
경전을 공부한다.
나는 이 전승을 여덟 살 때 받았다.
그리고 나의 스승에게서 이 가르침을 익혔다.
스승은 또한 나에게 죽어 가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이끌어 주었다.
그 후 나는 일주일에 보통 네 번 정도 죽어 가거나 죽은 사람을 방문했다.
그러한 죽음의 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접촉은 특히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을 바라보는 것은, 덧없음이라는 개념이 철학적 견해보다
더욱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 전통의 제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가르침을 서양의 학생들에게 적용하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다나 명상법도 가까운 장래에 번역되어 이러한 전통이 완전히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란다.
촉얌 트룽파, 린포체
Chogyam Trungpa, Rinpo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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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우연의 일치로 나는 이 서문을 계곡 건너 강톡을 바라보고 있는
시킴의 룸텍 승원에서 쓰고 있다. 강톡은 반세기 전《바르도 퇴돌》의
첫 영어판을 카지 다와삼둡이 번역하고 에반스 웬츠가 편집한 곳이다.
이 새 번역은 에반스 웬츠에게 헌사된 출판 시리즈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그들과의 연결이 그 이상임을 말해 준다.
그들의 작업은 널리 알려져 있고 불교에 대한 많은 관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판에 대한 필요성이 요청되었다.
에반스 웬츠는 스스로 그의 서문에서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들의 작업이 '선구자적인 성격'임을 인정했다.
그들의 작업 후, 특히 티벳에서 많은 고승들이 탈출한 이래
티벳 불교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학문적 주제가 아니라
현재 서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이러한 상황이 번역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텍스트의 실제적인 적용, 그리고 그것의 생명력과 솔직한
정신의 전달이 크게 중요하게 되었다.
1971년 버몬트에 있는 타이거 명상공동체의 한 방에서
촉얌 트룽파 린포체는《티벳 사자의 서》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그 내용은 이 책의 해설에 포함되어 있다.
세미나 기간 동안 그는 티벳 원전을 사용했다.
반면 청중들은 에반스 웬츠본을 사용했다.
번역과 표현의 스타일에 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 결과 새로운 판을 마련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번역에는 칼상(E. Kalsang)이 1969년 바라나시에서 발행한
티벳판과 세 개의 목판본이 함께 사용되었다.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몇 개의 탈락된 부분과 오류는
목판본을 참조하여 바로 잡았다.
그러나 이 네 개의 판본은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했다.
그런 까닭에 이전의 번역과 꽤 많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아주 세세한 부분은 그만두더라고 언급해야 할 눈에 띠는 항목이 몇 개 있다.
카지 다와삼둡은 번역에서 원래의 용어를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여
여러 차례 바꾸었다. 각주에서 편집자(웬츠)는
티벳 판본-필사본 하나와 목판본 하나-을 사용했으며
가끔 번역자(라마 카지 다와삼둡)가 잘못된 어떤 단어들을 바로 잡았다고
부기 했다. 이러한 변경의 대부분은 다른 판본에서도 발견되는
신들의 대응 방식, 상징 색 등을 일치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다음과 같다.(참고한 판본은 19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출판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이다)
95 페이지 각주 3번에 여성성의 '쿤투장모'는 남성성의 '쿤투장포'로 바뀌었다.
이렇게 바뀌어 두 번 나온다. 그러나 이 줄의 전체 요점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마음의 합일을 상징하는데 있다. 에반스 웬츠는
이것을 같은 페이지 각주에서 언급했고 다음 페이지 각주 3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나 번역자가 잘못으로
간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106 페이지의 'matter'(물질, 우리는 'form'이라 번역)과 109페이지의 'consciousness'(의식)는
비록 목판본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각기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나타나도록 하려면 서로 바꾸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108 페이지와 111페이지에서 배우자인 '상예찬마'와 '마마키'도 바뀌었다.
114페이지의 넷째 날에 아귀(굶주린 유령)들의 빛이 붉은 빛으로 되어 있고,
117 페이지 다섯째 날 아수라(질투의 신)들의 빛은 초록 빛으로 되어 있다.
반면 이번 판에서 이들의 빛은 각기 노란 빛과 붉은 빛이다.
여섯 세계의 색깔은 124 페이지와 174 페이지에 다시 나오는데
거기서 에반스 웬츠는 티벳어에 대한 각주를 달고, 색깔의 변경은 번역자가 한 것이며
그는 붓다들의 색깔과 일치시키기 위해 색깔을 바꾸었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의 도해(圖解)는 완벽하게 일관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명백한 불규칙은 빈번하게 일어나며 항상 그 뒤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네 판본은 에반스 웬츠의 목판본과 일치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필사본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치는 수정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역 사이의 차이점은 특히 불교 용어법에서 발견될 것이다.
원래의 불교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산스크리트에서 유래)로 쓰여졌고
7세기 이후 티벳어로 번역되었다. 당시 티벳어는 어떤 고차원적으로 발전된
사상의 체계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으므로
불교는 큰 어려움 없이 채택될 수 있었다.
실제로 새로운 철학적인 언어가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20세기 유럽어로의 번역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일으킨다.
서양의 사상은 동양과는 아주 다른 노선을 따라 발달해 왔다.
그래서 만일 철학이나 종교 어휘를 영어로 바꾼다면
그 영어 단어는 불교의 원래의 뜻과는 아주 다를 수 있는 모
든 종류의 연상과 함축을 내포하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산스크리트 단어를 완전히 대신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단어는 읽는 사람의 마음에 잘못 연상될 가능성이 없으나
산스크리트 단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바르도 퇴돌》이 티벳어로 쓰여진 것이지만
어떤 용어는 원래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유지하였다.
신들의 이름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모습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다른 자료에서 확인하기도 더 쉽기 때문이다.
비록 이 특별한 판본에서는 일관되지 않지만 이러한 관례는 종종 티벳 번역자들도 따르고 있다.
두 개의 티벳어 '바르도'(bardo)와 '이담'(yidam)을 소개하는 것은
아마 일관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이유는 단순히 이 단어를 쓰는 것이
가장 쉽다는 것이고 또 이 책의 주요 독자가 될 불교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아주 친근한 말이기 때문이다.
바르도에 대한 가능한 번역인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는 자주 반복되면 어색해진다.
이 말의 산스크리트어는 '안타라바바'(antarabhava)이며 친숙하지 않은 용어이다.
그것은 이러한 가르침이 인도에서보다 티벳에서 더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티벳불교에서 쓰이는 이담이라는 말은 '선택된 신'(chosen deity)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이쉬타데바타(istadevata)와는 다른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와 친밀한 말이다. 그것은 '보호신'(protective deity)
또는 '수호신'(tutelary deity)으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모두 개인적인 수호자나 보호자로 행동하는
외부적 존재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담의 참된 의미는 완전히 내부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다.
이담은 존재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의 표현이며, 그 속성과 관련시켜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의 모든 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의인화된 모습으로 영상화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한 몇몇 단어들이
현대 심리학 언어의 일부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서양의 어떤 심리학파는 종종 서양 철학이나 종교보다 불교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죄에 대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원죄, 범죄, 그리고 처벌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대부분의 서양 가르침에서는 다른 여지가 없다. 대신 불교는 죄와 고통의 근본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원인이 존재의 중심으로서
자신의 자아(self)나 에고(ego)를 믿는데서 생긴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믿음은 원죄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 또는 존재의 참된 성품에 관한 무지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이 그릇되고 외곬수적인 관점을 통하여 전 생애를 경험하기 때문에
진정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것이 세계는 비실재(非實在)라고 말해지는 바로 그 의미이다.
그에 대한 치료는 환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고,
거짓된 것의 부재인 비어있음(空)에 대한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비어있음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은 광휘(光輝, luminosity)이다.
그것은 참됨의 현존이고 삶의 활동이 일어나는 근본 바탕이다.
상태, 생각의 신경 패턴, 그리고 무의식의 영향 같은 개념의 말이
이 책에서는 의례적인 종교 용어보다 더 적절해 보인다.
이 책의 해설에서 나오는 신경증(neurosis)과 편집병(偏執病, paranoia) 같은 단어들은
병리학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마음상태의 자연발생적인 결과를 표현한 것이다.
'투영'(透影, projection)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가짐에 의해 물들여진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그것은 티벳어 낭(snang)을 번역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간에 '빛' 또는 '현상'(appearance)을 의미한다.
카지 다와삼둡은 이것을 '생각모양' (thought-form) 또는 '환영'(vison)으로 번역했다.
'투영'은 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구분을 넘어선다.
이 책과 관련된 불교 심리학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해설에 언급된 상세한 설명에 대한 기초로서 유용할 것이다.
존재의 집중된 자아상태(ego-centred state)의 전개는 오온(五蘊)의 체계에서 분석된다.
온(skandha)의 문자적인 뜻은 무더기(heap) 또는 집단(group)이지만,
그것의 의미는 '정신적인 구성 요소' 라고 할 때 더 잘 전달된다.
첫 번째 구성 요소는 물질(form, 色)로, 개체성과 분리된 존재의 시작이며
주관과 객관으로 들어가는 경험의 경계선이다.
지금 외부 세계에 대하여 아직 발달되지 않은 '자각'(self aware)이 있다.
이 순간 자아는 주변 환경에 대하여 반응을 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인 느낌(feeling, 受)이다.
그것은 단지 본능적인 좋아함, 싫어함 또는 무관심 같은 것으로,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적으로 집중된 실재(centralised entity)가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재반응을 통해 더욱 복잡하게 변한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인 인식(perception, 想)이다.
그것의 최고조의 감각 상태에서 자아가 자극을 느끼면
자동적으로 그 자극에 대하여 반응한다.
네 번째 구성 요소는 의지(concept, 行)이며
인식에 따르는 지적이고 감성적인 판단 행위를 포괄하고 있다.
그것은 물건을 모으고 성격과 행위의 패턴을 조성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식하는 감각과 마음의 결합인 의식(consciousness, 識)이 있다,
이제 자아는 그 자신의 이미지를 사방으로 투영한다.
이 책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자신의 투영을 인식하여 진실의 빛 안에서
자아의 감각을 분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혼란스럽고
무지한 마음의 상태인 이들 다섯 정신적인 구성 요소는 깨달음의 인자가 된다.
그들은 초월적 또는 정화된 모습으로 변화되는데,
그러한 모습은 다르마타(dharmata) 바르도에서 처음 닷새 동안 나타난다.
이러한 환영을 체험하는 동안, 존재의 여섯 세계 또한 나타난다.
이들은 혼란된 마음의 여섯 가지 중요한 상태이다.
자세한 것은 이 책의 뒤에 있는 <해설>에 쓰여 있다.
그들은 또 그 특별한 강박관념의 포기를 가능케 하는 대안과 함께 나타난다.
그것은 집중된 실재의 보호에 집착하기를 그치고,
대신 자신을 지혜와 일치하는 표명*(表明, manifestation) 속으로 용해시킨다.
이 '지혜들'은 다섯 여래의 만달라이다.
여래(如來, tathagata)의 문자적 의미는 '이와 같이 온' 이며
그것은 '본질을 갖춘 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것은 붓다 -'깨달은 자'- 와 같은 말이며 자이나교의 '승리를 거둔 자'와도 같은 말이다.
그래서 그 다섯 여래는 완전히 깨달은 의식인 불성(佛性)의 에너지가 지니고 있는
다섯 가지 주요 양식이다.
그들이 구체화하는 특성은 다섯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또는 마음의 상태인 윤회계에서
이 에너지들은 다섯 가지 독 또는 혼란된 감정들로 나타난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장소, 사건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다섯 중의 하나와 연결된 탁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한 다섯 가족들(families)로 알려져 있다.
만달라의 중앙에 위치한 첫 번째 여래는 바이로차나(비로자나불)이다.
그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발전과 고립되어 있는 혼란 또는 고의로 무시하는
무지의 근본적인 독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는 또 모든 것이 참모습으로 존재하는
무한하고 모든 곳에 두루 미치고 있는 공간인 다르마다투(法界)이다.
이것은 무지의 반대이다. 그는 최초이고 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단순히 여래 또는 붓다 가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름은 또 무지의 반대를 의미한다.
두 번째 여래는 만달라의 동쪽(인도에서는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악쇼비아(아촉불)이다.
다른 판본에서는 악쇼비아가 중앙에 나타나고 바이로차나가 동쪽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그들의 속성이 바뀌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왜 하얀색과
푸른색이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나타나는지, 왜 가끔 만달라 양식에서
명백한 혼동이 생기는지를 말해 준다. 악쇼비아는 바즈라(금강저)가족의 지배자이며
그의 독은 적대감 또는 증오심이다. 이것은 거울 같은 지혜로 변화되며,
그 거울 같은 지혜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비춘다.
만달라의 남쪽 부분 왼편에 있는 라트나삼바바(보생불)는 라트나 가족의 지배자이다.
라트나는 보석이라는 뜻으로 특히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성취 보석이다.
그래서 여기의 독은 무엇이든 많이 소유하는데서 생기는 자만심이다.
서쪽 편의 위에는 아미타바(아미타불)가 나타나며, 그의 가족은 파드마(padma) 즉, 연꽃이다.
그는 모든 것을 걸신들린 듯이 움켜쥐려는 열망과 욕망을 상징한다.
이 독에 대응하는 지혜는 분별이며, 그것은 열망에 침착함과 초연함을 제공하여 자비로 변형되게 한다.
마지막으로 북쪽의 오른편에는 카르마 가족의 아모가싯디(불공성취불)가 있다.
여기에서 카르마(Karma)는 행위를 의미하며 칼이나 십자형 바즈라로 상징된다.
질투심이 카르마와 관련된 독이며,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행위로 몰고 가는
탐욕스러운 야망에서 생긴다. 반면 그것의 깨달은 양상은 모든 행위를 성취하는 지혜이다.
다섯 여래는 많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해설에서 묘사되고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또 그들의 여성 모습과 보살 감화력을 동반한다.
붓다들은 삶의 흐름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적인 깨달음의 속성을 구체화하는 반면,
보살원리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위한 활동적인 임무의 하나이다.
보살들은 다섯 지혜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여성 에너지는 그들을 완성시키고
그들의 완벽한 표현을 허락하는 풍부한 성분을 제공한다.
이들과 이 책에서 나타나는 다른 모든 신들은 실재에 비친 만물의 표정으로 기술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에너지의 표현을 구체화한다. 그 에너지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존재로서 체험하는 에너지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에너지의 견지에서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영향은 항상 우리에게 미치고 있다 해설에서 트룽파 린포체는
그들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말인 감정, 속성, 환경, 삶의 방법, 행위, 사건 등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이 책은 비록 표면상으로는 사자(死者)를 위해 쓰여졌으나 사실은 산자를 위한 것이다.
부처님은 사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은 지금 여기에서 진실을 찾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생의 교리, 존재의 여섯 가지 모습,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중간의 바르도 상태는 이번 생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러한 것들이 또한 사후에도 적용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에게 바르도 퇴돌을 읽어 주는 목적은 그가 생전에 수행했던 것을
그에게 환기시키기 위해서라고 자주 강조되었다.
이 '사자의 서'는 우리에게 삶의 방법을 안내해 줄 것이다.
프란체스카 프리맨틀
Francesca Freman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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