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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매화 향
# 또 다른 변화
서울을 떠나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정말 한 달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세월이 그렇다는 게 굳이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그래도 시골에 와서 뭐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금방 가버릴 줄은 몰랐던 겁니다. 허기야 이것저것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느라 그랬던 것이겠지만요......
그런데, 여기로 온 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변화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땐 이따금 전화를 걸어주던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겁니다.
내가 서울에 없기 때문에, 연락할 일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연락해봤자 느낌이 다르기라도 한 것일까요?
어쨌거나 전화는 용건이 있어서 거는 게 아니라면, 안부를 묻거나 그리워서 하는 것일 텐데도... 그러니까 그들에겐 저에게 용건이 없을 수는 있겠지만, 안부를 묻는 것도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내가) 서울에 살지 않는다고 덜 그리울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상대방이 어디에 살건 그리움은 마찬가지 아닐까요?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이 더 할 텐데요......
그렇다면, '시외전화'라 그런 걸까요?
그것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면 요즘이 시외전화의 요금이 비싸서 전화를 못 거는 시대는 아닌지라......
어디 그 뿐입니까? 핸드폰은 불나게 걸어대는 시대 아닙니까?
그런 걸 생각해 보드라도, 확실히 이상하다는 겁니다.
허기야 '몸이 멀리 떨어져있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긴 합니다만......
그렇게 보면, 몸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느새 마음도 멀어진 것일까요?
그 신호로 나에게 걸려오던 전화도 뚝 끊긴 것일까요?
그런 변화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3 . 28
'춘분'이 지나서였을까? 이제 날이 많이 길어져 있었다.
저녁에 해가 늦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아침에도 상당히 일찍 먼동이 트곤 했다.
새벽잠이 없는 기로는 여섯 시 경이면 훤해서 밖에 나가 뭔가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추워서 밖에 나가기가 꺼려지기도 했다.
그러면,
'격'은 일찍부터 일어나서, 가느다란 소리로... 낑낑대거나 몸짓에 따라 개 줄의 플라스틱 집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곤 했다.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날은 다소 이른 아침인데도 기로가 나가자, 격이 반갑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였다.
기로는 밤 사이에 엎어놓아 바닥에 뒹굴고 있던 물 그릇에 물을 채워주고, 녀석을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격! 잘 잤어?"
개는 뒤집어졌다.
'주인과 개의 교감......' 그런 생각을 하며 기로는 다시 작업방으로 들어왔다.
그런 뒤 얼마 뒤에 다시 밖으로 나가니 날이 밝았다.
마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안개가 껴서 환상적인 분위기였다.
기로는 풍경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다시 들어가 카메라를 챙겨 나왔는데, 며칠 전에는 집 앞에서 사진을 찍어두었기 때문에 호수 외곽도로로 올라가 전체적인 풍경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나는 김에 격을 데리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얼른 개 줄을 풀어 주고는,
"격!" 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불렀건만,
웬걸?
녀석은 따라오질 않았다.
"어서 와!" 하고 다시 불렀는데,
개는 땅을 주시하며 뭔가 냄새를 쫓고 있을 뿐, 기로를 따라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도심의 집에서 묶여 있기만 해서... 사람을 따라 산책 나가는 걸 모르나 보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큰 맘 먹고 시도한 일이었는데... 녀석의 호응상태가 기로에겐 영 찝찝하기만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녀석, 촌스럽기는......" 개에게 들으라고 한 소린지 혼잣말인지 한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개 줄을 묶어 끌고 가려고 시도를 하는데, 녀석은 계단 아래로 내려올 생각조차 없는 듯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참내!"
약간의 실망과 투정어린 탄식을 내뱉고 기로는 개를 억지로 끌고 내려가니, 힘이 얼마나 좋은지 이젠 기로가 끌려갈 형편이었다.
그렇게 녀석을 끌고 호수 둔덕을 내려가는데,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산장집의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하자, 뒷집의 개들도 덩달아 짖다 보니... 온 동네의 개들이 여기저기서 짖어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거야, 참! 개 한 마리 데리고 나가려니, 온 동네가 다 떠들썩하네......"
허기야 이 동네 개들은, 이렇게 사람이 개를 끌고 산책하는 모습을 보거나 자신들의 경험이 없이 다들 갇혀 지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괜스레 마을 주민들한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한 20 여 미터나 갔을까?
갑자기 격이 벌떡 힘을 주면서, 기로는 개 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개는 쏜살같이 집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거야 원! 에그... 촌스런 녀석아!" 하고, 하는 수 없이 기로는 다시 개를 쫒아 올 수밖에 없었는데,
겨우 개 줄을 잡고 집에 돌아와 개 줄을 고리에 끼우니,
집 앞의 풍경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시 나갈 기분도 가셔,
기로는 산책하기 싫어하는 개 때문에 자신의 일을 못한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멍청히 토방에 서 있다가,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그나마 사진 한 컷을 찍고 방으로 들어오면서 보니,
어젯밤에 그가 발을 씻었던 세수대야의 물이 살짝 얼어있었다.
'아직도 이렇게 추운 것인가?'
그러면서 갑자기 기로는 손이 시린 느낌이 들어, 방으로 들어와서는 보일러의 온도를 높였다.
그런데 컴퓨터 앞에 앉아도 손이 시리긴 마찬가지였다.
'아, 언제나 이 추위가 가나?'
방바닥도 보일러 선이 있는 부분만 따뜻할 뿐, 어떤 곳은 냉방이기까지 하다 보니,
'아, 마음 둘 곳이 없다. 춥다는 것이 이런 것인데......' 하고 걱정스럽게 앉아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개가 짖었다.
여기 와서 처음 짖는 소리였다.
한편으론 반가운 마음이었지만, 또,
'무슨 일인가?' 하며 나가 보니,
격이 옆집 할머니 집 쪽을 보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랬다.
할머니가 느릿느릿 토방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야, 이 녀석아! 안 짖어도 될 때는 짖고, 정작 낯선 다른 사람들이 오는 것은... 쥐 소리도 내지 못하니...... 내가, 너를 어쩐다냐?" 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도 기로를 보고는 천천히 무궁화나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머니?" 기로가 목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인사를 하자,
"개 사왔어?" 하고 묻는 것이었다.
"아니요."
"똥 치울라믄 힘든디, 뭐 허러 개를 키워?"
"사온 게 아니고, 형이 가져왔어요."
"그려? 그 전에 우리도 진돗개 한 마리가 있었는디, 저 뒤에 가서 꿩도 잡고 새도 잡고 그렸어..."
"정말요?"
"응."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로는 격을 바라보며,
"니 녀석은... 어림도 없다." 하고 말았다.
*
트럭에 자갈을 하나 가득 싣고 범상이 왔다. 그러더니 오전 내내 그 자갈을 마을길 건너 호수 쪽 주차장으로 해 놓은 곳에 까는 동안, 나는 집 안에서 마당을 골랐다. 그러다 보니, 마당이 점점 정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풀려가면서, 완연한 봄날로 바뀌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아무런 전화도 없었다. 아니, 핸드폰이 한 번 울렸는데 받으니 아무 말도 없어서 끊어버렸다.
그리곤 전화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낮에 흙일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홉 시도 되기 전부터 나는 몇 번을 졸았는지 모른다.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앉아 있으며 있었던 일이다.
수채화를 하자니 스케치북의 종이가 안 좋아 울 것이고, 연필로 하자니 별로 마음에 안 들 것 같아... 망설이다가 열 시가 넘어서야 수채화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격의 끙끙대는 소리에(녀석은 끙끙대는 것도 소리가 적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간다.) 나가 보니, 줄이 엉켜서 짧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가니 개는 난리였다.
줄을 풀어주고 한 번 쓰다듬어 주면서,
"이제, 자!"
명령을 하고(?) 다시 들어왔다.
3 . 29
잠이 깬 상태에서 기로는 그냥 누워 있었다.
그리고 6시 반쯤 일어났는데, 아침 기온이 그리 차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맘먹고 밖으로 나갔는데, 격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였다.
'녀석하고 산책이나 해 볼까?' 하면서, 순간적으로 기로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가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어제처럼, 개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겁을 먹고 안 올지 모를 일이라, 오늘은 가까운 호숫가로 향했다. 그러자 오늘은 의외로 잘 따라 오는 것이었다.
아침 공기가 상큼했다.
개 줄에서 해방된 녀석은 신이 나서 기로 주위를 빙빙 돌다가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창 생동감이 넘치는 젊음을 자랑하는 듯했다.
'저 녀석이, 사람 나이로 치면, 중 고등학교 학생 정도는 될까?' 기로는 그런 식의 어림을 잡아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개를 염두에 두고 몇 발짝 뛰어보기도 하고, 보폭을 늦추기도 하면서, 개와의 교감을 즐겨 보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아, 이런 기분은 아무데서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쩐지 가슴이 탁 트이는 상쾌함이 온 몸으로 퍼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개와 함께 한 호숫가의 아침 산책이 너무나도 괜찮았다.
그러면서 어쩐지 시골로 내려와 살고 있는 게 너무 잘 한 일 같다는 생각도 드는 순간이었다.
문득, 처음 이사하면서 느꼈던 범상과의 갈등이 떠오르면서... 기로는 괜스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범상에게 막 퍼부었던 게 새삼스럽게 미안했던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도 다 이런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따라 붙는 순간이었다.
'夢想?'으로 돌아와서 기로는 나머지 마당 고르는 일을 시작했다.
격은 통나무집과 '夢想?'의 마당을 빙빙 뛰어 돌았다.
아직 어린 티가 있는 녀석은,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 매화 향(梅花 香)
어제와 오늘 이틀은, 그 동안 내가 춥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것에 대한 반박이라도 하듯 날씨가 확 풀린 상탭니다.
그저께만 해도 겨울이더니......
그래서 내 마음도 봄눈 녹듯이 소리 없이 녹아내린 듯합니다.
그런데 어제는 춥지 않았는데도 저녁에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는데, 날씨가 따스해서인지 오늘은 낮이 되도록 방이 식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기엔 아깝기도 하고 또 할 게 있어서 아침나절에 작업방에서 스케치 북과 씨름을 하는데,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습니다.
분명 낯선 향기였는데, 그윽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흔한 게 아닌 어떤 귀한 품격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 그런 향기였습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냄새지?' 하면서도 그림에 빠져 잊었었데, 어쩐지 계속 그 냄새가 내 코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아,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방문을 열고 나가 살펴보았는데 뻔했지요. 아직은 다소 을씨년스러울 수도 있는 초봄의 호수 풍경요.
눈에 띄게 특별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들어와 일을 하는데, 그 냄새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근데, 도대체 이게 어디서 오는 냄새라지?' 하고는 이젠, 뒤에 있는 봉창을 열어 보았지요.
그런데,
아, 거기 커다란 매화나무 고목의 몇 가지에(바람이 센 위쪽은 아직 봉오리 상태 그대로였고, 지붕에 가려진 아래 쪽이 바로 여기 '夢想?' 의 굴뚝이 있는 곳이라 따스해서 그런 건지, 거기 가지에만 희끗희끗 꽃송이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거기서 풍겨 나오는 향기였고, 그 꽃이 바로 ‘매화’였다는 겁니다.
"아, 이럴 수가!"
나는 탄성을 질렀답니다. 그러니까, 뒤안 언덕에 막 피기 시작한 매화의 향이 흙집이면서 대나무 살로 만든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들던 냄새를 내가 고스란히 맡으면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친구로부터 그게 매화나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여태까지 매화가 어떤 꽃인지도 잘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도 그 순간에야 알게 되었답니다.
그저 동양화에서만 나오던(아니면 화투에서 보았던) 그런 상상(비현실)적인 꽃으로만 여겨왔을 뿐, 내가 직접 매화를 보게 되는 순간이었고(아니, 그 전에도 아마 스치듯 보긴 했을 테지만 이렇게 직접적이고 절실하게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향기가 매화 향(梅花 香)이란 것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 느껴본 것이었답니다.
그런데 자연은 참 신기하지요? 여기 호숫가는 아직은 춥기도 해서, 그 큰 나무의 아래 쪽 몇 가지에서 꽃이 피고 있을 뿐인데, 어느새 그 향기에 끌려서 벌들도 난무하고 있었다는 현상이요......
'아, 내가 이렇게 살다니... 이게 웬 호산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구요.
그러면서 나는 마치 옛날(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것 같은 허세라도 부리고 싶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못할 게 뭐겠습니까?
나, 지금 가난한 화가로, 이런 흙집에서 매화 향을 맡으며 사는데, 내가 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박하게 이 호숫가에서 살고 있는데... 그렇게 내 스스로 흥에 겨워 산다는데 누구 뭐랄 사람 있겠느냐구요?
(다만, 그런 품격을 내 스스로가 갖추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아, 이제는 봄이로구나......'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매화를 보면서 바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뒤엔 지붕 위로 하얀 매화가 둥그런 원을 그릴 것인데, 그 생각을 하면... 마치 노래 ‘고향생각’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속에 파묻혀서 내가 살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니 그게 어찌 아니 행복이겠습니까?
여기 시골로 내려와 살면서 느끼는, 그러니까 서울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피부로 느끼는 행복 말입니다.
아,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매화 향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선인들의 삶을 묘사하는 책에서나 그런 일이 있는 것이라고, 또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그저 남들의 일로만 여기며 살아왔던 것인데......
나무 옆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코에 스며드는 그 향기는,
아, 나에겐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자, 아름다운 행복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한 식물의 꽃도 아닌 향기에 이렇게 탄성을 지르고 있다니!
맘 같아선, 한 가지 뚝 꺾어다가 방에 두고 밤에도 꽃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 건 철없는 욕심이지요.
방문만 열면 향기가 들어오는데, 뭘 더 바란답니까?
그건 그렇다 해도,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이 향기를 다 모아다가, 소중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금씩 나눠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이유는요?
3 . 30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게 하나 있다.
이 즈음에 기로가 산장 집 사장 박 만석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밀접해지는 상황인데, 특히 지금부터 나오는 그 집 '막둥이 아들내미의 이름 지어주는 문제' 같은 건 단 한 마디도 홈페이지의 일기나 편지에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장 기로의 홈페이지의 회원일지라도 그 내용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는 얘기이기도 한데,
그러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렇지만 기로가 둔터니 마을에 내려와 살아가는 얘기 중에는 홈페이지에 언급을 하지 않은 그런 중요하고도 어쩌면 또 다른 재미를 줄 수 있는 얘기들이 많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이 상황에서 기로는, 그 일은 너무 개인적이자 실명까지 거론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예 홈페이지엔 거론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런 일은 비단 그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이따금 반복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夢想 別曲’엔, 어떤 에피소드들은 기로의 홈페이지에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얘기도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면 이 ‘夢想 別曲’은 어쩌면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로 나뉠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정사’는 기로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했던 내용이라면, ‘야사’는 그렇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夢想 別曲’이 소설로 나오게 된 당위성도 있다는 얘긴데,
어차피 이미 사이버 상에 공개된 정사만 가지고는 새로울 게 없기도 하고, 굳이 그런 얘기들을 엮어가며 소설로 만들 이유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 홈페이지에 공개한 내용 사이사이에 야사가 들어간 새로운 조합이 바로 ‘夢想 別曲’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이런 상황에서는 늘 그렇듯(?), 야사가 더 끈끈하고 정이 담긴 얘기이기 때문에,
어쩌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랫부분은 '야사'다. 그리고 점점 그 세세한 묘사가 줄어들어가는 '옆집 할머니 이야기'도 이제는 '야사'에 포함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
다음 날, 아침을 먹자마자 기로는 빨래를 해야만 했다.
어제, 세탁기가 작동은 했는데, 물이 안 빠져... 빨래가 밤새도록 비눗물에 담궈져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급속'으로 조절해 놓았더니 세탁기가 돌아가기는 하는데, 몇 분 뒤에 당연히 빠져나가야 할 물은 여전히 작동이 안 돼서... 손으로 빨아야 할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그 빨래들을 다시 꺼내 통나무집 화장실에 가서, 물을 받아 손으로 다시 헹구었고, 일일이 밖의 빨랫줄에 널어야만 했다.
그러느라 힘이 빠졌던 기로는,
'근데, 도대체 멀쩡하던 세탁기가 왜 이 모양이란 말이지? 아무튼 여기로 이사 온 이래, 기계 같은 건 뭐든... 순순히 제대로 돼주는 게 하나도 없어!' 하고 푸념을 하면서 밖으로 나와,
"에이, 마당이나 고르자!" 하면서 허리를 굽히고 앉았는데, 그때였다.
"어이!"
산장 집 아저씨가 또, 닭장 부근에서 기로를 불렀다.
그런데 오늘은 맨손이었다.
"안녕하세요?" 기로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니,
"미안허지만, 나 좀 봐." 하는 것이었다.
'미안하다고?' 하고 고개까지 갸웃했던 기로는, '근데, 저 양반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나?' 하고,
여전히 기로는 박 만석의 행동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아니, 갈수록 박 만석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 양반이, 그토록 냉랭했다니......' 하면서.
그러니까 기로는 여전히 박 만석의 행동에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든 새로우면,
'저 양반이 왜 갑자기 저러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요?" 하고 강조해 물으니,
"응." 서슴없이 답을 하는 것이어서,
"알았습니다. 지금 바로 가요!" 하고 산장 집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보이는 할머니 집을 기로가 살펴보니, 아홉 시에 교회에 간다던 할머니는 방에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 10 시가 다 돼 가는데? 아직도 차가 안 왔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 집 마루엔 교회에 가기위한 가방이 놓여있었다.
그래서 잠시 들러,
"할머니!" 하고 부르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알아듣질 못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괜스레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그냥 산장으로 향했다.
그 때 마을 입구에 작은 차 한 대가 내려왔다.
아마 교회에서 할머니를 태우러 오는 것일 터였다.
그렇게 다소 느긋하게 산장에 도착을 했는데,
"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디, 도와 줄 수 있을랑가 몰라?" 하고, 박 만석이 다소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다소 경계하는 듯한 박 만석 특유의 그런 표정이기도 했다.
'이 양반이 또 왜 이러나?' 하면서도 기로는,
"뭔데요?"
기로 역시 다소 조심스런 자세로 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응, 다른 게 아니고... 내 막둥이 아들 놈이, 이자(이제)... 초등학교 6 학년인디, 이름이 나빠서... ‘박 선교’라고 허는디... 애들이 이름 부를 땐, ‘성교’ 한다고... 애가 커가믄서 지 이름에 질색을 헌다는디......" 하고, 박 만석은 기로의 눈치를 잔뜩 보면서 말을 띄엄띄엄 하는 것이었다.
기로도 듣고 보니, 뻔할 일이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 어쩌면 막 사춘기로 접어들 수도 있는 예민한 시기일 텐데(요즘 아이들은 더 빠르다는데), ‘선교, 성교, 성교..’ 하다 보면, 주변 친구들의 놀림감이 될 게... 물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그러겠네요." 하고 기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히 대꾸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려서, 이름을 쪼까(조금) 바꿔줄라고 허는디... 우리가 그런 걸 알어야 말이지... 그려서 그런 디, 나 좀 도와주믄 좋겄는디?"
박 만석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어투에, 오늘은 또 여짓껏 보지 못했던 상당히 위축된 모습이기도 했다.
"예, 이름이 중요하지요. 더구나, 남자 아이는 하나라지요?"
기로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 일이기도 해서 물으니,
"응, 늦게 얻은 거여......" 하면서, 박 만석은 또 한 번 기로의 눈치를 살펴보는 듯했다.
"글쎄요...... 제가 이름을 지을 줄은 모르지만..." 하고 말을 하는데,
"그려도, 책 까지 쓴 사람이......" 하는 모습이, 어쩌면 박 만석은 기로에게 이름을 부탁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기로는 생각 밖이었다. 그래서,
"제 아는 분 중에 그런 쪽에 잘 하시는 분이 한 분 계시기는 한데......" 하면서, 얼핏 김 선생님을 떠올리며 말을 하자,
"돈 많이 들어가는, 그런 이름 짓는 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돈이 많이 들어가면 곤란하다는 것 같은 표정에, 말투까지 순간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서, 기로는 멈칫! 당황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름이 중요하다니까요. 더구나 하나 밖에 없는 외 아드님의 이름인데...... 그러니, 다소 돈이 들어가더라도, 잘 생각하셔서 하셔야 할 텐데요......"
일단은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기로는 이미 범상으로부터 숱하게 이 산장 아저씨가 지독한 구두쇠(?)라는 얘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어쨌거나 순간적으로 그런 식으로라도 얘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아마 이분은, 나 같은 사람은(아마 책도 내고 했으니) 그저 쉽게, 이름 하나 정도는 그 당장 지어줄 줄 알았던가 보네......'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살림이 큰 집에서, 그리고 식당 음식 값도 결코 싼 편이 아닌 집에서(나야 이 집에서 음식을 사 먹은 적이 없지만 친구가 그랬다.), 외아들 이름 하나 짓는데, 돈을 아끼려고 하다니......'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로의 입장에서도 썩 좋은 감정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에 일기 시작했던 박 만석에 대한 좋았던 생각이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진지하게 부탁을 해 오는 상황에서, 냉정하게 대응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아무튼, 제가 한 번 알아는 보죠......" 하기까지는 했다.
사실 기로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사실 아무렇게나 자신의 감각으로 이름 하나 정도는 쉽게 지어줄 수도 있겠지만(사실, 기로 역시 자신의 조카들의 이름을 지어줬던 전력도 있는 사람이니까.),
아마 이 산장집 부부도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기로에게 부탁을 해 왔으리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집의 상황을 보아, 딸 넷을 내리 낳은 뒤 마지막으로 아들 하나 얻었다는데(아들을 얻기 위해 딸을 그렇게나 많이 보았다는 얘기도 들었던지라), 그런 귀한(?) 아들이라면, 이런 부잣집에서...
'다소 돈이 들어가드래도 심사숙고해서 이름을 지어야 될 텐데......' 하는, 나름 신중한 생각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이런 문제를 김 선생님께 말씀 드리면, 물론 기로가 개인적으로 부탁을 드리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기로 개인이 부탁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의 부탁을 받고 또 김 선생님께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허다 못해 술이라도 한 잔 하실 수 있는 사례는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 만석의 태도가 너무 뜻밖이어서(아니, 너무 쫀쫀해서),
오히려 기로 쪽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로는 또,
'이 양반이 그런 쪽엔 무지하신 건가?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데 저러시나? 그 정도로 돈에 야박한가?' 하면서, '차라리 아주머니하고 얘기를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왜냐면 그런 면에선 김 순임이 더 활달하고 트여있다는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자 대 남자의 얘긴데,
'굳이 여자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은데......' 하는, 좀 보수적인(?) 생각도 들어 잠시 주춤하다가,
그렇다고 아예 못한다고 할 수도 없는 문제라,
그렇다고 또 자신이 아무렇게나 이름 하나를 턱 지어 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나름대로는 고민이 되었는데,
'어차피 이런 문제는 김 선생님과 얘기가 되어야 할 것인데, 어떻든... 부탁은 드려 보자!' 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고,
바로 낮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안 추운가?" 김 선생님은 날씨부터 물었다.
"예, 이제야 봄 같습니다. 어떤 때는 반팔을 입기도 하구요......" 하면서, "저 근데, 선생님..." 하고 조심스럽게 기로는 말을 꺼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뭔디?"
"예, 이름 하나 지어주십사 하구요......"
"뭔 이름?"
"예, 여기 사는 주민 중에... 한 남자 아이가 있는데, 이름이 좀 애매해서 바꿔주고 싶다는데... 성은 박씬데, 이름이 ‘선교’라네요?" 하자,
"그렇겠고만!" 바로 그런 대답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그 집에서... 저에게 간곡히 부탁을 해 왔는데...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무슨 이름을 짓습니까? 그러던 차에 바로 선생님 생각이 떠올라서... 일단은 '저에게 맡기라'고, 그 집에 얘긴 해주었거든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제 대신 이름 하나 지어주셨으면 해서요......"
"그려? 그럼 생일이랑......" 하는 식으로, 김 선생님은 흔쾌히 응해주었다.
"예, 시간도 알아놓았습니다."
"그럼, 한 번 불러 봐..."
그렇게 일은 손쉽게 진행이 되었다.
물론 기로가 부탁드리는데 이름 하나 안 지어줄 김 선생님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그냥 맨 입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기로가 본인 자신의 일도 아닌데 나서기가 난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몇 시간 뒤인 밤에, 김 선생님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수빈’이었다.
"어째 좀 여성스럽긴 한데, 이름이 너무 좋구만......" 해서,
기로 역시 그런 생각이었지만, 기쁜 마음에 그 당장,
A4 용지에 크게 한자랑 써서 바로 산장집에 가서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때 마침 김 순임이 전주 집에 가는 길에 그 이름을 가지고 가겠다면서,
산장 아저씨 트럭을 타고 나가는 것까지 보고는,
기로는 '夢想?'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