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대로 진출하는 디카시
-경남 고성에서 미국 시카고뉴욕으로
2. 왜 디카시인가, 왜 새로운 문예장르인가
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이래, 그리고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연원이 오래된 문학 장르다. 시가 그 장구한 역사과정을 통해 축적한 고급한 수준과 미학적 가치를 폄훼할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시이고 문학이고 예술이며, 항차 후대에 발현된 소설 같은 문학이 넘볼 수 없는 어떤 위의 저력을 가졌다. 디카시는 이처럼 강고하고 창연한 성채에 도전장을 내밀지 않는다. 운동선수들에게 있어서 가장 원대한 꿈은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운동이 아니며 그것만이 체육이 아니다. 내 삶터와 가까운 근린공원에서 평행봉을 하고 배드민턴을 치는 것도 운동이며 체육이다. 디카시는 이런 ‘생활체육’과도 같다.
생활체육이라는 어휘에서 그 어의(語義)를 빌려오자면, 디카시는 일종의 ‘생활문학’이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즐거워할 수 있는 시, 누구나 창작할 수 있고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행복한 시운동이 디카시의 꿈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時)의 고금과 양(洋)의 동서를 넘어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의 장르를 제안하는 것이 디카시의 손짓이요 몸짓이다. 꼭 어느 누군가가 따라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으며 동시에 어느 누군가는 안된다고 저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디카시는 하나의 시대사적 운명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활자매체 문자문화의 시대에서 전자매체 영상문화의 시대로 현저히 이동해 있는 지금, 디카시와 같은 문예 장르의 출현은 어쩌면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게서 노인까지 누구나 손에 핸드폰,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시대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 ‘손 안의 보물’로 사진을 찍고 좋은 사진은 오래 들여다보곤 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아주 극적인 광경이나 장면, 아주 뜻 있고 보람 있는 영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여기에 몇 줄의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시적 문장을 덧붙인다. 이 짧은 시행이 촌철살인의 표현과 기개를 가졌으면 그 묘미 또한 더할 나위가 없다. 디카시 카페를 중심으로 SNS를 통하여 많은 동호인들이 이렇게 창작된 디카시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내다보지 못했던 지난날에는 꿈에서도 그리기 어려웠던 시의 모양이다. 디카시를 새로운 문예장르라고 호명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짧고 한정적인 분량의 시가 그 성가를 자랑하는 경우는 문학사에서 드물지 않다. 한국 시조는 디카시에 비해서는 긴 편이지만, 아주 길지는 않다. 일본의 하이쿠는 17자의 문안에 담긴 시 문학으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였다. 그러나 ‘가장 짧은’은 이제 디카시와 엇비슷하여 크게 변별력이 없어질 형국이다. 하이쿠는 그 17자 안에 반드시 하나 이상의 계어(季語) 곧 계절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기레지(切字) 곧 감탄 어미를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규제 조건은 하이쿠를 고급한 시로 추동하고 많은 수발(秀拔)한 하이쿠 시를 생산하게 한 요체가 되었다. 디카시는 이와 같은 수준 있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 본격문학이 아니라 생활문학이라는 신조를 문전에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의하고 자유로울 것은 분명하나 그에 따른 경각심도 필요하다.
생활문학으로서의 공감과 감동, 재치와 유머, 평범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한 칼'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디카시와 친숙하고 디카시를 즐거워하는 그야말로 동호인 그룹과, 디카시를 통해 영상과 문자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결합을 시도하며 형식적 특성에 준하여 시적 미학을 추수하려는 전문창작자 그룹의 구분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야 디카시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고 내일의 길을 열어갈 동력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그룹은 반목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격의 없이 교통해야 할 것이다.
특히 주의할 것은 영상에 따른 시적 문장이 중언부언 길이는 경향에 대한 경계다. 어쩌면 영상에 덧붙인 시행은 다섯 줄도 많은 편이다. 이 대목은 이론가가 창작자에게 언표(言表)하기에는 매우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국면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이 문예장르의 형식적 특성에 대한 공감대가 일반화되기까지는 어쩌면 일종의 필요악일 수도 있다. 또한 지금까지는 주로 정지된 사진과 시적 문장을 결합하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창작자의 성향과 기호에 따라 동영상과의 결합이 등장하고 빈번해질지도 모른다. 이를 유념하여 필자는 ‘사진’ 대신 ‘영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김종회교수의 디카시 강론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쓴다] 중에서
2024. 10. 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