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실상사 농사공동체 / 최석민 대표
남원 실상사 농장 대표 최석민씨
‘법당’대신 ‘들’로 출가 자연과 함께하는 행복
비닐하우스 사이에 웃자란 풀을 베는 솜씨가 제법이다.
농부 티가 난다. 아침부터 찌는 더위에 낫질을 하느라 힘들 텐데도,
연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영락없는 바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성자 같다.
그가 바로 최석민(42)씨다.
그는 귀농한 6명의 농부와 견학자 3명 등 9명과 함께
논 8000평, 밭 8000평을 일구고 있는 전북 남원 실상사 농장의 대표다.
승려의 길 걷다 노동현장으로 공장서 턱뼈 중상 후 실상사행
농장식구들… 산들바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는 1999년 석 달 과정의 실상사 귀농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애초 그가 가려던 길은 농부가 아니라 승려였다.
고등학교 때 불교 책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던 그는
79년 졸업하자마자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해 여섯 달을 지냈고,
다시 해인사로 발길을 돌려 행자 생활을 했다.
그러나 책에서 보았던 이상과 불교계 현실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고민하다가 산을 내려가 80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들어갔다.
만해사상 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세상에 눈을 떴던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 83년 강제징집을 당했고,
85년 제대 뒤 인천의 알루미늄 새시 공장에 용접공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87년 대학 선배의 권유로 실천불교승가회의 전신인
대승불교승가회 조직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10~20년씩 공부한 스님들도 끝내 깨달음의 성취에만 매달려
신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흐르는 모습에 실망해
90년에 다시 노동현장으로 돌아갔다.
서울대 간호학과를 나와 자신과는 다른 개신교 쪽의
산업선교회에서 지역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빈민 활동을 하던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때였다.
결혼 뒤에도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생산직으로 7년간 일하며
노조활동을 했던 최씨는 일하던 중 턱뼈가 바스러지는 중상을
입고서야 사직했다. 그 뒤 경기남부산업안전보건연구회를 결성해
산재 피해자들을 도왔다.
그러나 산재 환자들이 보상을 받아 삶이 더욱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 파탄에 이르곤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 자체가 바뀌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성 변화를 위한 생태적 삶을 결심하고 실상사 행을 결행했다.
절을 떠난 그가 다시 절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법당이 아니라 들로 나갔다.
오전 10시30분 새참 시간.
근처 논밭에서 일하던 농장 식구들이 원두막에 모여들었다.
수박과 떡과 막걸리를 먹으며 웃는 그들 사이로
지리산에서 불어온 산들바람이 더위를 씻어준다.
이 삶에 이런 낭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농약을 쓰지 않고 땀 흘려 농사를 짓지만 판 수익금을 나눠봐야
월 50만원도 채 안 되니, 자녀를 둔 농장 식구들은
살림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아침이면 30분씩 농장 식구들과
위파사나 명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명저를 읽고 토론하고,
자연에서 배워가는 이 삶을 돈과 바꿀 생각이 없다.
얼마 뒤에는 아내도 내려올 예정이다.
‘법당’이 아니라 ‘자연’으로 출가한 그는
물 한 바가지와 산들바람만으로도 웃고 춤추며 커가는
벼와 감자와 배추를 닮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2002년 8월 9일
조현 기자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