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위난 극복과 평화의 댐
국가가 외부로부터 위기에 쳐했을대 온 국민이 저항하고 참여하는 국민운동은 어느 시대에나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근세에 일어난 국가위기극복을 위한 범국민은동을 경제적 차원으로 한정하여 본 대표적인 사례로는 국채보상 운동, 금모으기 운동, 금강산 댐 등을 들수 있다.
국채보상 운동(1907)은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 제공한 차관, 당시 1300만 원(圓)을 국민들이 갚자고 대구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전 국민이 합심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운동이다. 이 국채보상 운동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맞서 주권을 회복하고자 일어났던 국권수호 운동이라는 점을 들어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로부터 약 90년이 지나서(1997~1998) 우리 경제가 IMF 경제 위기를 맞았을 때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민족의 자존심이 다시 나타난 난 것이었다. 금모으기 운동은 우리나라가 1997년부터 경제 위기가 닥쳐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을 때 나라의 외채를 갚기 위해 국민이 각자가 소유하던 금을 국가에 자발적으로 내어놓았던 운동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에 세계 4위이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누계 약 351만 명이 참여하여 18억 달러어치의 금, 약 227톤을 모았다. 그러한 엄청난 국민적 호응은 국가 경제의 위기를 이겨내려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정신이었다.
국채보상 운동이나 금모으기 운동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운동이지만 이와는 결이 다른 것이 있다. 이미 희대의 사기극으로 평가받은 ‘평화의댐 건설 국민성금 모으기 운동’이라는 것이 있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금강산 댐(任南댐)을 건설하여 200억 톤의 물을 방류하면 서울 시내가 물에 잠긴다는 '북한 수공침략'이라는 국가 안보 위기론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금강산댐의 수공(水攻)에 대비하여 ‘평화의 댐’을 건설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조직적인 방위성금 모금운동을 벌이었다.
당시 이규호 건설부 장관이 발표한 ‘대 북한 성명문’에서 북한의 금강산댐 공사는 남한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댐이라고 주장했다(1986.10.30). 만약 북한이 금강산댐을 고의로 무너뜨린다면, 200억 톤의 물이 하류로 내려오면서 서울에 대 홍수가 일어나서 물바다가 되는데 그 참상은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63빌딩 중턱까지 물이 차 오를 수 있다고 발표했다. 더구나 정부와 매스컴은 북한이 서울에서 개최되는 88올림픽을 못 열리게 하려는 수공설이라고도 보도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는 수공전략에 대응하여 ‘평화의 댐’이라는 대응 댐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1986.11.26.).
나중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러한 ‘평화의 댐’ 건설계획은 전두환 정부가 불안정국을 돌파하려고 당시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주도한 것이었다. 당시 시국을 보면 국외에서 일어난 아웅산묘소 테러사건(1983.10.9),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1983.9.1)과 같은 대형사고의 공포가 가시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민주화 투쟁으로 5・3 인천사태(1986.5.3), 10・28 건국대항쟁(1986.10.28) 등으로 대내외적으로 안보정세가 불안한데, 거기에다 북한이 댐을 터뜨려 수공을 벌일 거라는 공포까지 가세하였다.
어느 정권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정권의 들러리를 위한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학자들이 있게 마련이고, 충성경쟁이 일어나는 것은 역사의 상식이다. 이 당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인사는 선우중호(鮮于仲皓)이다. 그는 1986년 전두환 정부가 벌인 금강산댐 수공(水攻) 위협 사건에서 당시 서울대 토목공학과 교수로서 KBS로 전국 방영된 학술토론회에 나와 금강산댐이 무기화되어 하류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며 대응 댐 건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원폭보다 센 수공? 금강산댐 '공포 사기극' 전말, 프레시안 2017.01.29.) 이러한 사실이 서울대 총장 후보 때 문제가 되었고, ‘63빌딩이 물에 잠긴다는 설명에 대해선 그때도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는 발언도 했다(나무위키).
사실 우리는 금강산 댐에 대한 대응 여부를 떠나더라도 북한 쪽에서 홍수나 폭우로 물이 내려올 경우를 상정하여 (평화의 댐)의 건설은 검토해야 할 사항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연재해를 대비하기 위한 논리보다는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국가안보 논리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였고 공사자금도 국민 참여형식을 빌어 국민에게 강제로 모금했다는 것이 문제이었다.
평화의 댐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북한강에 있다. 평화의 댐 건설 총 공사비용은 1700억 원 정도이었고 1988년 6월 정부에 전달된 국민성금 총액은 661억여 원이었다. 평화의 댐은 1987년 2월 28일 착공하여 1989년에 1단계 댐이 완공되었고, 2005년 10월 19일에 모든 공사가 완공됐다. 평상시에는 물을 가두지 않는 건류 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북한의 금강산댐의 노후화라든가 자연재해에 대비해서라도 평화의 댐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02년에 위성사진에서 금강산댐이 균열이 생긴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임기 중에 증축하게 되었다. 댐의 높이를 좀 더 올리는(80m→125m) 등, 2단계 공사(보강공사)가 시행되어 2005년 10월 19일에 완공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북한의 ‘금강산 댐’의 공식적인 이름은 ‘임남댐(任南堰堤)’이다.북한은 1986년에 금강산발전소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임남댐의 건설은 1986년 10월 21일부터 시작되어 1992년 12월 상류의 가물막이 공사를 완공하였으나 북한의 경제난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1999년 1월 본댐 공사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여 2000년 10월 높이 88m, 최대 저수량 9억 1000만㎥ 규모의 1단계 공사를 완공하였다. 하지만 1단계가 완공되기 전인 2000년 4월부터 댐에 물을 채웠으니 2002년 1월 댐 상층부의 균열과 훼손이 발견되었다. 같은해 4월 위성사진을 통해 임남댐이 큰 비에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착공한지 17년만인 2003년 12월 임남댐은 본댐과 여수로 공사를 완료하여 지금의 규모(높이 121.5m, 너비 710m)를 갖추었다(임남댐, 위키백과).
한국 정부는 '북한 수공설'에 대한 우려와 국민의 긴장국면 속에서 그 대응으로 평화의 댐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비록 평화의 댐 공사는 김영삼 문민정부가 실시한 감사에서 대국민 사기극으로 밝혀졌지만, 남북관계의 최악의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변수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홍수조절 전용 댐으로서 필요하기도 하다. [2021.07.28.]
[참고: ‘63빌딩 중간까지 물이 찬다’,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隨想3, 우민화의 떡밥, 노답의 타령, 한국문학방송,
2021.10.5.: 106~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