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6년 동국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하면서
장교로써 군에서 부처님의 법을 전파하는
군법사 후보생(정식명칭은 군종사관후보생-ROTC와 비슷한 개념인데
종교 성직자이면서 장교인 것이 다르다-)으로 선발되었다.
그 후 대학 재학중에 관련 교육들을 이수하고 졸업을 한 후
1992년 군에 입대를 하였다.
여기서 군법사란 흔히 이야기하는 무속인의 법사개념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전파하는 스승으로서의 법사의 개념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속으로 국방부의 요청을 받은 조계종이
불교를 대표하여 불교 수행자를 군에 파견하는 것을 말하며
'군승(군스님)’이라고도 부른다.
이 군법사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군법사 후보생이라는 제도로 1학년 때 소정의 시험을 거쳐
‘사관후보생’으로 선발되어 대학 졸업후 2년간의 수학기간을 거쳐 선발되는 방법과,
‘군종요원’이라 하여 대학을 졸업한 조계종 스님 가운데
‘요원시험’을 거쳐 선발되는 방법이 있다.
나는 이중 후보생 과정을 마치고 1992년 2월부터 4월까지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에서 도반 스님들과 입대전 교육을 받았으며
4월부터 6월말까지 경북 영천의 육군 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7월 공군(계급 중위)으로 임관을 하였다.
첫 임지를 신설기지인 충북 충주의 공군기지
(그 때는 중원기지라 하였으나 지금은 시군통합으로 충주기지라 한다)로 받았는데
그당시 그곳은 법당 골조만 완성 되어 있는 상태였다..
황량한 그곳에서 처음엔 신도가 없어 많은 고생을 하였다.
믿을 곳이 없었던 나는 골조만 덩그러니 있었던 법당에서
새벽 도량석을 하며 기도를 올렸고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한 덕인지
불보살의 가피로 ‘정일 큰스님(당시 법주사 주지)’과
‘천태종 운덕 큰스님(총무원장)’, ‘
이 억수 장군(뒤에 공군참모총장님이 되심)’님과
‘김 주식 장군’님 내외분을 비롯한
박 종헌(1기 회장, 당시 대령 뒤에 장군 진급하심)장군과
현 문준(2기 회장) 대령등 많은 신심 있는 분들을 만났고,
2년의 기간 동안 대웅전의 낙성(사찰명은 ‘호국 황룡사였다..
정일큰스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과 교육관의 낙성, 종각의 타종식을 봉행하였으며
많은 불자 신도들을 조직하여 공군에서 손꼽히는 법당의 하나로 만들어 내었다..
지금도 나는 충주기지 법당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으며
그당시 나를 도와주셨던 수많은 신도님들에게 감사를 하고 있고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서 나를 든든히 후원해 주셨던
’이 억수 장군님‘과 ’김 주식 장군님,
그리고 나에게 법당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많은 비책을 가르쳐 주셨던
모친이신 ‘법련스님’께 아직까지도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맑고 청정한 신심으로 열심히 살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충주기지에서는 신도님들의 대소사가 대부분 이루어지는
‘기도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졌는데 신도님들의 진급이나 자녀들의 학업등
삶을 살면서 고통받을 여지가 있던 많은 문제들이
대부분 해결되는 불가사의함을 보이기도 했고,
부대의 대형사고를 미리 나의 꿈에 현몽해주는 이적이 있기도 했다...
또한 92년 입대 직전 나는 나의 삼재의 끝에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큰 곤욕을 치룰 뻔한 일도 있었는데
그러한 나의 개인적인 일도 모두 원만하게 잘 해결되었었다.
물론 이런 일들이 그냥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무릎에 고름이 잡힐 정도로 절을 하며 기도를 했고
어렵고 힘든 현실을 해결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방석 위에 나의 땀과 눈물을 적셨었다.
나는 1994년 7월 다음 임지인 공군 오산기지(호국 천룡사)로 이동하여
1년 동안 근무를 했는데 여기서도 처음엔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이유는 호국 천룡사 역시 간이법당만 있던 곳인데
나와 함께 임관을 하신 동기법사님의 노력으로 2년 동안 법당을 완성했지만
중간에 신도님들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해 법당이 거의 초토화 되어 버렸었고
처음 부임하여 봉행한 기도에서 단 1명만의 신도님이 기도를 오셨을 정도로
법당은 황량해져 있었다.
충주에서 매기도마다 4~50분이 참여 했던 곳에서 있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몇 달간의 갖은 고생을 한 끝에 나는
‘안 택순 장군’님을 만나게 되었고 안 장군님과
충주에서 부터 인연이 있었던 ‘장 성문 장군(당시 대령, 뒤에 진급하심)’의 도움으로
전역할 즈음엔 차량 세 대를 동원하여 성지순례를 다녀올 정도로
법당을 원상회복 시켜놓았다..
안 장군님과 장 장군님 내외분에게도 역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도와주신 모든 분들이 잘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을 드리고 있다..
오산기지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법당 옆에 거대한 부대 물품보관 창고가 있어
신행생활에 막대한 피해를 줬었다..
(차로 석등을 들이받는 등의 사고가 빈번했다..)
이 창고를 이전하기 위해 나는 백방으로 뛰어다녔는데
안장군님을 비롯한 불자들과 여러 부대 지휘관들의 협조를 얻어 본부에 건의하였고
당시 본부에 계셨던 이장군님과 김 장군님등의 도움을 받아
가장 윗분인 김 홍래 당시 공군참모총장님의 배려로 이 흉물을 철거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인근의 공군 평택기지에도 법회지원을 나갔는데
그곳에서도 법당에 탱화를 새로 봉안하였으며
오산기지 예하의 두 개의 부대에서도 황 진우 중령(현재 대령)과
이 병일거사님을 비롯한 불자들의 도움을 받아
‘의상암’과 ‘망일암’ 두 곳의 작은 법당을 낙성하였다..
오산기지에서는 애피소드도 있는데
마지막 한 달은 민간인의 신분으로 무보수 근무(월급 없는..^^)를 했는데
그 이유는 직전 년도 까지 7월말에 전역을 하셨기에
우리도 당연히 그런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전역 1주일전 6월말 전역이라는 통보를 받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민간인 신부으로 근무한 한 달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것이 상당한 고통이엇다..
아뭏튼 이렇게 해서 3년간의 군법사 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 3년의 기간동안 나는 많은 개인적 발전을 이루었다..
많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으며 많은 것을 배운 시기였다..
참으로 바쁘게 산 때였는데 충주에서는 부대법당과 함께
인근의 육군 대미부대 법회를 지원하였었고,
오산에서는 인근의 평택기지와 가끔 예하부대에
법회와 정신교육등의 지원을 나갔었다..
그 당시 만난 인연들..
계급에 관계 없이 상하가 모두들 나를 성심성의껏 후원해줬던 그 분들은
참으로 소중한 분들이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2004년 1월)도 이어져
현재 카페에는 충주에서 만난 ‘금강심(서정희)’님과 ‘항상심(백혜원)’불자님,
오산에서 만난 ‘푸른구름(이병일)’님 등이 카페 회원들로 활동하시고 계시며
인터넷은 아니더라도 군을 전역을 하신 많은 분들이 신도님으로 등록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공군에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인연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런 인연들을 뒤로 하고 나는 1995년 7월
공군오산기지 호국 천룡사 주지를 끝으로 공군대위로 전역을 하여
공군법사로서의 소임을 마쳤다..
첫댓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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