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를 통하여 아들이 노물재의 부인이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동생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태종과 가까이 하였을 것이다. 또한 정자순의 사위 김작의 딸인 증손녀가 성종의 후궁이었다는 것, 딸이 여류시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당시 15살이면 혼인을 하던 때라 30대에 손자를 보았다.
생몰연대를 찾아볼 수 있을지...
●정절
부친 정절(鄭節)은 1396년(태조 5)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와 장령(掌令)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400년(정종 2) 지형조(知刑曹)를 거쳐 1401년(태종 1)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1406년(태종 6)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거쳐 1408년(태종8)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역임했다.
● 정절의 사위 김고는 안동인으로 문과, 사간을 지냈으며, 제학을 지낸 김익달의 아들이다.
김익달의 딸은 여흥군 민무회(태종의 처남)에게 출가했다.
●子 정결
노물재의 사위이다.
정결(鄭潔)은 1444년(세종 26) 1월 사헌부감찰을 지내고,1453년(단종 1) 1월 단양군사로 부임하였고 1455년(세조1) 군사(郡事)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면서 품계가 가좌(승급)되었고, 손자 유의(有義)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증손 구(球)는 종부시 부정(宗簿寺副正)을 지냈다.
●노물재
본관은 교하(交河). 할아버지는 천우위대호군(千牛衛大護軍) 노균(盧鈞)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노한(盧閈)이며, 부인은 심온(沈溫)의 딸로서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1431년(세종 13) 유거감찰(謬擧監察)에 임명되었을 때 최안우(崔安雨)의 천거에 사사로움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파직되지는 않았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노회신(盧懷愼)·노유신(盧由愼)·노사신(盧思愼)·노호신(盧好愼) 등 4명의 아들이 있었다.
○노한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 첨의정승(僉議政丞) 노책(盧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창성군(昌城君) 노직(盧稙)이고, 아버지는 대호군(大護軍) 노균(盧鈞)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왕수(王琇)의 딸이다. 좌의정 민제(閔霽)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김작(金碏) 정자순의 사위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 좌의정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승(金陞)이고, 아버지는 김종숙(金宗淑)이며, 어머니는 이양직(李良直)의 딸이다.
정창손의 사위 좌의정 김질의 동생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이 되고, 1477년(성종 8) 첨정(僉正)으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는 등 관료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학문에도 힘썼다.
그 뒤 동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고, 1482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경기관찰사를 거쳐 1484년에 병조참판·수지중추부사, 1487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딸이 후궁이 되자 권력을 누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명빈김씨
조선 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후궁.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김작의 딸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김작(金碏)이며, 어머니는 정자순(鄭子順)의 딸인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정자순(鄭子順)의 딸 정씨
광주정씨 정찬우의 부인으로 한시에 능했다.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는 “사족(士族)부인 정씨(鄭氏)는 형제들이 학문할 때 옆에서 본래 글을 배웠는데 자못 시를 잘 지었다고 기록되었다.
하루는 두견화가 활짝 핀 것을 보고 남편이 시를 지으라고 청하였다. 정씨가 그 자리에서 즉시 시를 지었다.”는 창작 배경과 함께 정씨의 〈영두견화(詠杜鵑花)〉 한 편이 실려 있다.
詠杜鵑花(영두견화)
昨夜春風入洞房(작야춘풍입동방) 어젯밤 봄바람이 방에 들어오더니
一張雲錦爛紅芳(일장운금난홍방) 한 폭 구름 비단 붉은 꽃에 향내 서렸네
此花開處聞啼鳥(차화개처문제조) 이 꽃 피는 곳에 새 울음소리 들리니
一詠幽姿一斷腸(일영유자일단장) 그윽한 자태로 울 때마다 남의 애를 끊네
이 작품에 대해 서거정은 “비록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난 사람도 어찌 이보다 더 잘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만일 정씨가 가르침을 받았다면 시문의 아름다움이 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해설>
봄바람이 불어오는 2월(음력)이 되면 진달래가 만발하여 온 산은 불이 붙은 듯 빨갛게 물든다.
석양에 반사되는 만산(滿山)의 진달래꽃은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 꽃은 두견새가 밤마다 슬피 울어 흘린 피로 물이 든듯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 시에 진달래꽃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두견새가 흘린 피로 빨갛게 물이 든 꽃은 두견화, 곧 진달래인 것이다.
●孫 정유의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부인은 조말생의 아들 조찬의 딸이다.
● 조말생(趙末生, 1370년 ~ 144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字)는 근초(謹初)·평중(平仲), 아호(雅號)는 사곡(社谷)·화산(華山).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언·감찰·헌납 등을 지냈다. 1403년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그 후 장령·예문관 직제학·승정원 동부대언 등이 되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 때 병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 부인 -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신하(申夏)의 장녀
• 장남 - 조선(趙璿, 1410년 ~ 1437년) : 한원군(漢原君), 소회공(昭懷公)
• 장자부 : 태종의 딸 정정옹주(貞靜翁主)
• ●차남 - 조찬(趙瓚) : 중군사직(中軍司直)
• 차자부 : 조대림과 경정공주의 딸, 평양 조씨
• 3남 - 조근(趙瑾, 1417년 ~ 1475년) : 전주부윤(全州府尹)
• 사위 - 신대홍(辛帶紅) : 회인현감(懷仁縣監)
●광주정씨 군수 정대덕(鄭大德)은 정유의의 사위이다. 윤자운(尹自雲)의 딸이 어머니이다.
● 曾孫 정수의 처부는 부정(副正) 이신(李晨)이다.
이신은 세종 즉위년에 좌의정으로 발탁된 이원(李原)의 손자이다.
이원(李原, 1368년 ~ 1429년)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용헌(容軒), 자는 차산(次山)이다. 고려 말의 문인 이암(嵒)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이강(李岡)의 아들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생으로 알려져 있다.
1418년 이원(李原)은 우의정 영경연사(右議政領經筵事)이 되었으며, 1421년 세종3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2월에 좌의정 박은이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여,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을 삼고, 이원(李原)으로 좌의정을 삼고, 정탁(鄭擢)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이신은 이원의 아들 이대(李臺)의 2子이다.
●정원(鄭源)1495(연산군 1)∼1546(명종 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중원(仲遠). 정자순(鄭子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결(鄭潔)이고, 아버지는 현감 정유강(鄭有綱)이며, 어머니는 신찬(申澯)의 딸이다. 장령 정희등(鄭希登)의 종숙(從叔)이다.
정원은 을묘생이고 자(字)는 중원(仲遠)이며 기묘년에 급제하였다. 한림으로 있다가 물리침을 당해 외관(外官)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기도 하였다. 외 자(外字)는 산 자(散字)가 옳다.
기묘년 겨울에 한림으로 뽑혔다. 경진년 봄에 김충암(金冲庵)의 조옥(詔獄)에서 망명(亡命)한 사안을 사초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논박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계미년에 다시 한림이 되었다. 언관이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관으로 제수한다는 것으로 탄박하여, 드디어 서경(署經)을 하지 않고 기한을 넘겨서 산관(散官)으로 되었다. 정유년에 비로소 높은 요직에 올랐고 을사년에 승지로 있다가 창성(昌城)에 귀양갔다. 정미년에 사사(賜死)되고 적몰(籍沒)당했다가 지금 임금 경오년에 직첩(職牒)과 가산을 돌려받았다.
●玄孫壻 박조(朴照)
정수(鄭琇)의 사위이다.
중종 때 통정 사평을 하였으며, 태종 때 좌의정을 한 박은의 증손자요, 경주부윤을 지낸 박훤의 손자이다. 연산군 때 좌의정 박숭질의 아들이다.
딸은 세조의 증손 인원정 이정에게 출가하였다.
저는 박조의 후손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