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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반 린(1606-1669)이 1663-1669년사이에 그린 유화이다.
이 그림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탕자의 귀향을 표현한 것인데 렘브란트 자신의 신앙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 그의 생애는 몹시 사랑하던 아내 사스키아(1642 사별)와 아이들, 마지막 남은 27살의 외아들 티투스(1668 사망)마저 잃는 등 크나큰 상실과 고통으로 점철되었는데, 이 그림은 그가 죽기 전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한 묵상과 기도 화해 예절 마들렌 로울러 지음 ; 이선영 옮김 / 발행:성서와함께. 2001년 *****************************************************************
렘브란트가 그린 이 그림의 주제는 인류전체의 영적 회귀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반갑게 맞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한 켠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며, 뒤쪽에서는 익명의 사람들이 우리처럼 멀찍이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잠시 머물러 그림의 색채와 형태만을 감상해 보십시오. 렘브란트는 어두운 갈색과 황토색, 흰색등 한정된 색상만을 사용하지만 모두 내적인 열기로 가득 차 있는 색조들입니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붉은 색과 따뜻한 황금색이 이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렘브란트는 일생동안 빛의 신비를 추구한 예술가입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빛과 어둠을 혼합하여 새벽의 눈부신 일출과 태양빛의 불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욱 심원하게는 부활의 신비를 묘사하여 그 신비가 벌써 우리 눈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그림의 왼편에 위치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그림은 마치 내부에서부터 빛을 발하는 둥근 천장 아치 같기도 하고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극적 사건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높이 매달아 놓은 등불 같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감싸는 사랑의 몸짓으로 아들을 반갑게 맞아들입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이해하도록 매우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그의 하느님은 언제나 솔선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 품에 꼭 껴안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집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15,4)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 마들렌 로울러의 자비로우신 아버지 중에서**
그림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중심인물들을 더욱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지독한 폭풍우를 겪고 나서 항구에 닿은 배처럼, 혹은 엄마의 품안에서 고이 잠든 아기처럼 완전한 평화와 안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옷은 바람과 조류에 시달린 나룻배의 돛처럼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허름한 의복이 다리 주위에 깊고 어두운 주름을 지며 늘어져 있습니다. 지금 막 빛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존재에 아직도 어둠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1요한1,5).
젊은이는 죄수나 이가 득실거리는 사람 또는 병자처럼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의 몸에는 상처가 났고 낡아빠져 무용지물이 된 샌들 한 짝은 먼지 속에 버려져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은 무심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존재와 아들을 가슴에 끌어 안은 이 노인의 약한 심장박동만을 느낄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두 손은 다른 어느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을 드러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고유한 체취와 값진 옷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애정이 오가는 이 순간의 친교를 고스란히 맛보기 위해 아버지의 두 눈은 지그시 감겨 있습니다. 두 인물은 찬란한 빛을 발하는 하나의 모습을 이룹니다. 렘브란트가 진홍색 지붕과 순금 기둥으로 만들어낸 만남의 아치 아래에서 그들의 심장은 하나로 일치하여 박동하며 호흡이 합쳐집니다.
그림의 오른쪽에 큰 아들이 서 있는데 그 역시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작은 아들에 대한 연로한 부친의 아낌없는 사랑에 의아해하며 주변에 서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겉옷은 중심인물들의 색채를 반영하며 그들의 빛나는 일치로부터 위엄과 확신을 받고 있습니다. 빛의 가장자리에서 부각되는 그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빛을 흡수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또 지난 일에 대한 아픈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려는지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예수님의 빛을 우리 삶속에 더 흡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할 때 즐거워하기 힘들며 그들의 좋은 몫을 부러워합니다. 여기에서 고통이 올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청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우리를 치유해주시는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낌없는 父性(부성)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합시다.
아버지는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림 속의 아버지를 두눈이 슬픔에 젖어 있는 노인으로 묘사한 것은 그의 체험과 고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자신이 늙고 그러면서 얻은 지혜로 인해 그런 특별한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했고 말년의 기쁨이었던 아들을 수년동안 기다리느라 아버지의 얼굴에는 골이 패였습니다.
부드러움과 힘 자체이신 아버지, 하느님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그러면서 우리를 낳아 보살펴 주신 부모님을 생각해 봅시다.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4,8). 유다인 마을의 이 老주인은 얼마나 푸근합니까!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유다 공동체와 접촉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성서의 백성으로 인정했고 그들을 존중했는데, 이는 그 당시에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초상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보다 그들을 더 잘 그렸던 화가는 없습니다.
그분의 가려진 두 눈은 우리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시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분의 지친 눈길은 열정적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화려한 의복과 유다인들이 쓰는 부드러운 감촉의 두건은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풍요로운 은총을 나타냅니다. 또 이는 작은 아들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림속의 젊은이를 봅시다. 불행하게도 세상의 도처에 집 없는 이들이 보입니다. 밤이 되어 추위가 뼛속을 쑤실 때면 젊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골목과 지하도로 들어갑니다. 렘브란트에게 밤의 의미는 점점 더 강조됩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에게 밤에 대해 깊이 직관하도록 준비시킵니다. 한순간 어둠의 힘이 그리스도의 권능을 압도했던 밤이 찾아온 것입니다.(요한 13,30) 그러나 우리는 새날의 동이 틀 무렵 무덤사이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새벽의 빛살이 가장 깊은 어둠을 가르는 순간 밤과 낮은 역전됩니다. 밤 전체가 광채입니다. 이는 참으로 축복받은 밤이요 새벽보다 더 아름다운 밤입니다. 그림속의 두 중심 인물은 밤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밤은 작은 아들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살았던 밤입니다. 인물 주위에는 땅거미가 깔려 있습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다른 인물들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어떠면 그들은 장면의 한 부분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우리와 함께 신비를 바라보는 단순한 외부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날의 빛이 밝아오고 아들과 우리 각자를 위해 새로운 창조가 실현됩니다.
바로 이러한 심층구조안에서 예수님만이 참으로 인류를 아버지께 다시 데려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탕자인 듯이 탕자의 이야기를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당신이 지니신 부성의 본질을 흐트려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성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종의 신분을 취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신성을 다 내어놓으셨다고 말합니다.(필립2,6-11)
렘브란트가 그린 젊은이의 모습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남루한 의복이 눈길을 끕니다. 인류의 공동 의복인 이 남루한 옷은 전쟁,기아,착취등 세상의 모든 비참함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없신여겼다"(이사53,3)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렘브란트는 우리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관계를 묵상하도록 제시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 되어있는 모습의 중심부는 심장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두 인물이 하나로 밀착되어 있어 어디에서 한 인물이 끝나고 어디에서 다른 인물이 시작되는지를 거의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그곳의 명암이 인류와 하느님 사이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어 인간과 하느님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가슴으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자신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 마들렌 로울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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