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아스에 대한 복수
헤라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자에게 어김없이 복수하였다. 그녀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사람이거나 부당하게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을 저주하였기 때문인데, 다음 이야기는 부정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자에게 헤라가 어떻게 복수를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펠리아스와 네레우스는 포세이돈과 살모네우스의 딸 티로의 쌍둥이 형제였는데, 그들의 어머니 티로는 포세이돈의 자식을 낳은 다음, 나중에 이올코스의 왕 클레테우스와 결혼하여 세 명의 아들인 아이손과 펠레스, 그리고 아미타온을 낳았다.
당연히 펠리아스는 이올코스의 왕위계승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클레테우스의 적장자로서 왕위 계승권이 있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 아이손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다.
우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전에 전개된 이야기해야겠다. 우선 펠리아스는 어머니는 티로이므로 아이손과 같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펠리아스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 아이손의 아버지는 이올코스 왕 클레테우스라는 것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그전에 펠리아스의 생모인 티로가 자신의 계모인 시데로의 학대를 받고 있었는데, 그 계모은 마치 팥쥐의 어미처럼 티로를 괴롭혔다. 이름부터가 '철(鐵)의 여인'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티로는 시데로의 박해가 자식에까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어린 두 아들(펠리아스와 네레우스)을 피난시킬 목적으로 마굿간에 버렸으나 마침 말을 치는 사람이 발견하여 그들을 키우게 되었다.
성장한 펠리아스 형제는 비로소 어머니가 티로이며 자신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데로가 어머니 티로를 학대한다는 사실에 격노하여 헤라 신전의 제단으로 몸을 피한 시데로를 펠리아스가 그 자리에서 죽인 적이 있었다. 이게 바로 문제였다. 그 사건으로 심한 모욕감을 느낀 헤라는 펠리아스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권탈취의 행복감에 젖은 펠리아스는 아낙시비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카스토스와 알케스테스 등 많은 딸들을 낳았다. 헤라는 그러한 펠레우스를 내려다보면서 저주의 조소를 퍼부었다.
"ㅎㅎㅎㅎ, 좋아하네! 그래 착각도 자유고, 뭐 돈드는 일 아니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네 놈은 네가 그렇게 귀엽게 바라보는 그 딸년들에 의해서 죽을 것이다."
한편 이올코스의 계승 서열 1순위지만 졸지에 펠리아스에게 왕위를 빼앗긴 아이손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조용한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이아손이다(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비슷하여 혼돈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아버지가 아이손이고 아들이 이아손이다). 아이손은 아들이 태어나자 그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치 신생아가 죽어 슬픈 시늉을 하면서 한편으로 그 아이를 켄타우로스 족인 케이론에게 맡겨 영웅으로 키우게 하였다.
세월이 지나 이아손이 성장하여 이올코스로 돌아와 펠리아스에게 찬탈한 왕위반환을 요구하자 그를 죽일 목적으로 '황금의 양가죽'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모험을 요구하였는데, 여기서 아르고스 원정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잠깐 문제의 황금 양가죽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옛날 아이올로스의 아들이며 테살리아의 왕 아타마스는 네펠레를 왕비로 맞이하여 아들 프릭소스와 딸 헬레를 얻었으나 얼마 후 아타마스는 왕비에게 싫증을 느껴 그녀와 이혼하고 테바이의 왕 카드모스와 왕비 하르모니아의 딸인 이노와 재혼하였다. 네펠레는 행여나 자기 자식이 계모 이노에게 구박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들을 계모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시키기로 결심하고 위험에서 구해달라고 기원하니 헤르메스가 네펠레를 가엽게 생각하고 황금 털을 가진 숫양 한 마리를 주었다.
황금 양은 프릭소스와 헬레 남매를 업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즉 다다넬즈 해협에 도달했을 때, 헬레가 양의 등에서 떨어져 바다 속으로 빠졌다. 그래서 그 바다를 '헬레스폰토스'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양은 프릭소스를 태우고 콜키스 왕국에 도착하여 아이에테스 왕의 환영을 받았는데, 프릭소스는 양을 제우스에게 바치고 황금 가죽은 자신을 받아준 아이에테스에게 답례의 선물로 준 바가 있었다. 지금 그것을 이아손에게 찾아오라는 것이다.
'콜키스에 있는 황금 양가죽을 찾아오라'는 펠리아스의 속셈은 '가서 죽어라'는 뜻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을 시킴으로써 왕위를 지키고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을 구실로 제거해 버리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아테나의 도움으로 이아손은 아르고스에게 명하여 50명 정도를 태울 수 있는 배를 만들도록 하였고 배의 이름을 '아르고 호(號)'라 명명하였다. 이아손은 모험을 좋아하는 그리스 각지의 영웅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아르고나우테스(아르고 호의 승무원)'라고 불렀다.
항해는 그들의 뜻대로 순탄하지 않았으나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콜키스에 도착하여 아이에테스 왕이 제시한 난제를 마술사 메데이아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성공적으로 황금 양가죽을 손에 넣은 이아손은 동료들과 메데이아를 데리고 급히 배를 타고 테살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약속한대로 왕위를 되돌려주어야 했던 펠리아스는 속으로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온갖 핑계를 대면서 미루기만 하였다.
당시 이아손에게는 한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부친 아이손이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그 오랜 세월이 너무 야속했다. 이아손의 고민을 알고 있었던 마법의 명수인 네데이아는 시아버지 아이손의 청춘을 되돌리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다음에 대수술을 하였다. 늙은 아이손의 목에 구멍을 내어 모든 피를 흘러나오게 한 다음, 입에 주문을 외면서 끓은 마법의 용액을 부어넣었더니 젊은 피가 넘쳐 흐르는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헤라는 메데이아를 자신의 복수수단으로 삼아 펠리아스에게 보냈다. 펠리아스의 딸들은 메데이아가 늙은 아이손에게 청춘을 돌려준 것처럼 자기네 아버지에게도 똑같이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메데이아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아손을 핍박하고 그의 아버지인 아이손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펠리아스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하리라 벼르고 있었던 차에, 그의 딸들이 자진해서
나선 것이다.
'ㅎㅎㅎㅎㅎ..... 딱 걸렸네!'
겉으로는 '참으로 아버님은 효녀들을 두셨군요' 하면서 얼굴에는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어디 한번 죽어봐라' 였다.
일단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이므로 시범을 보여주어 딸들을 안심시켰다. 메데이아의 시범을 본 펠리아스의 딸들은 기뻐하면서 구체적인 일정을 마련해놓고 밤이 되자 메데이아와 펠리아스의 딸들은 그의 침실로 들어가서 왕을 토막내어 솥에 넣고 삶아 버리고 메데이아는 무사히 왕궁에서 도망쳐 나왔다(그림: 아이손을 젊게 만드는 메데이아).
헤라는 펠리아스를 죽이는데 메데이아를 이용을 했지만 그녀는 사람을 죽인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더욱이 황금 양가죽을 손에 넣은 이아손과 동료들이 콜키스에서 도망할 때 메데이아는 그녀의 남동생인 아프시르토스도 데려가 위기탈출용으로 살해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죄과는 남편 이아손의 배신으로 이어졌다. |
트로이아에 대한 복수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드」에 따르면, 헤라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 이유는 트로이아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트로이아 왕자 파리스가 헤라에게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건들었기 때문인데, 통칭 '에리스의 사과 파동사건'에서 헤라와 아프로디테와 아테나 세 여신이 각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입장이 난처해진 제우스가 파리스를 미인대회 심사위원장으로 위촉하였고 세 여신은 서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란 칭호를 받기 위해서 심판인 파리스에게 댓가성 뇌물을 약속한 바 있었다.
당시 헤라는 아시아 전체의 지배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파리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다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파리스는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미인계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파리스에게 원한을 품은 헤라는 파리스와 그의 고국 트로이아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감행하였다.
파리스는 트로이아의 왕자였다.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미천하게 키웠다. 왜냐하면 그가 장차 나라의 화근이 되리라는 불길한 예언이 있었기 때문인데 온실 속에서 키우면 장차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을 우려가 있어 제우스의 양치기로 보내는 등, 세상물정을 알라는 뜻으로 그리했던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를 유혹하여 트로이아로 데려옴으로써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헤라는 포세이돈과 아테나와 함께 그리스 진영에 가담하여 트로이아를 공격하였다. 거세게 밀어붙이는 그리스 군에 맞서서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가 중심이 되어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당시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와 트로이아 사이에서 벌어지고 전쟁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들은 결국 그리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헤라와 아테나는 당연히 트로이아 군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판정한 파리스가 속해있는 트로이아 군의 편을 들었다. 아프로디테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설득하여 트로이아 편에 가담케 했으나, 헤라의 영향으로 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을 들었다.
제우스는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를 아꼈으나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으로 양쪽 진영을 대하면서 올림포스 신들에게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헤라는 제우스 몰래 그리스군 을 돕기 위해서 아프로디테에게 욕정을 일으키는 '케스토스'라는 허리띠를 빌려서 제우스를 유혹하는 동안에 포세이돈이 그리스 군을 지원하여 트로이아 군을 물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제우스가 전쟁상황을 방치하고 헤라에게만 매달리는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헤라가 트로이아 전쟁에서 그리스 편을 든 이유는 파리스 때문이었는데, 단순히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신을 뽑아주지 않은 데에 대한 모욕감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설상가상으로 파리스는 멀쩡하게 잘 살고있는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 부부의 가정을 깨트린 파렴치한 가정 파괴범에 대해서 끝까지 그리고 철저하게 복수하였다. 다시 말해서 가정과 결혼의 순결을 수호하는 여신이었다는 말이다.
파리스는 헤라의 저주 속에 운명적인 헤라클레스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유일하게 치명적인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었던 그의 옛 애인이었던 오이노네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치료시기를 놓치게 하여 그의 목숨을 끊어 놓았다.
그러나 파리스가 죽었다고 헤라의 복수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쟁 도중에는 같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 헥토르가 전사하더니 그리스 군이 만든 목마가 트로이아에 들어온 운명의 그 날 밤 향연에 지쳐 골아 떨어진 많은 시민들이 거의 무저항 속에서 참살을 당하고 트로이아는 완전히 정복되고 말았으며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과 그의 막내아들 폴리테스도 죽었을 뿐만 아니라, 왕비 헤카베와 딸 카산드라는 포로가 되어 그리스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끝장을 보고 마는 헤라의 집념어린 복수는 이처럼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