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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삼일운동 추도비문과 얽힌 이야기
추도시
시. 박세영
글. 이주홍
비바람 지나 간지 스물여섯 해
두렁바위 들꽃엔 이슬이 방울방울
불에 타고 총 칼에 쓰러진
임들의 한 맺힌 넋이드뇨
조국을 찾으려던 장한 그 뜻
이제 겨례의 산 힘 되었기에
왜놈은 망하고 인민의 나라 섰으매
거친 밤 촉새 되어 울던 노래 그치라
-제암리 삼일운동순국기념관 입구 4차선 도로 건너편 버스 정류장 뒤편 작은 공원에 외롭게 추도시비가 서있다. (본래 시비는 지금의 자리 길 건너 편에 있었으며 몇차례 이전 되었다.)
1946년 4월 제암리 희생자 건립위원회 명의로 제작 건립 되었다.
현재의 비문의 내용은 <..왜놈은 망하고 한민의 나라 섰으매...>라 각자되어 있다.
그러나 건립 당시에는 <...왜놈은 망하고 인민의 나라 섰으매...> 였다.
이 추도시 기념비를 '남로당'이 세웠다하여 1961년대 5.16 혁명군 정부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처했을때 당시 향남면의 공무원이 "인"자를 "한"자로 수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당시 박세영 시비의 "인민"을 "한민"으로 글자를 고친 사람이 당시 향남면 서기 송현목과 제암리 거주하던 안**(안용웅씨의 부친)이라 전한다.
1961년 초 5.16 혁명군 정부 시절로 당시 향남면장 안정순은 상부의 공문(박세영 시비 제거) 지시를 받아 향남면사무소면서기 2인( 안**와 송현목)에게 작업을 지시 하였다.
그들 두사람은 제암리 삼일만세운동 시비의 내용 중에 <인민> 이란 단어의 <인>자를 <한>자로 개각하였다.
당시로서는 상부의 조치를 거역하는 행위였다. 자칫 일신의 화를 초래할 수 있는 행위였다.
하여간, 어떤 생각에서 였는지 시비를 파손하지 않고 글자를 간단히 개각함으로서 "박세영의 삼일만세 위령 추도시비"가 현존하기에 이르렀다.
역사 속의 <인민人民>이란 말은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고려, 조선시기에 이르기 까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우리민족의 관념 단어였는데, 1945년을 깃점으로 남북대립 분단 시기 이후에 남한에서는 북한과 대별하여 <백성百姓>이란 단어를 <국민國民>이라 하였고 북한에서는 <인민人民>이란 말을 거부감 없이 두루 사용하였다.
민족분단의 이년을 분기하는 가장 표면적 상징 단어로 깃발을 나붓끼는 그 의미를 살피게 하고 있음을...
어찌 되었던지, 제암삼일만세운동 추모시비를 파손하지 않고 슬기롭게 글자를 고침으로서 당시 사회 상황과 민족의 역사문화 발자취를 남겨준 향남면서기 안**과 송현목 두사람의 긍정적 융통성의 인간 됨을 살펴 볼 수 있다.
* 추도시를 지은 박세영은 1907년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박세영은 월북하여 북한의 애국가 창작에 참여했으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역임, 작가동맹, 문학예술총동맹 등의 임원을 지냈다.
1965년 '공로시인'칭호를 받았으며 1989년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였다. 대표작 <산제비> <타작> 등이 있다.
201 년.
화성향토역사문화 연구소 박 대 진
첫댓글 1950년 초5.16혁명군 정부시절 ===
1961년 5.16혁명군 정부시절로 고쳐야 되네요 그리고 제암리 유족회장 안용웅님의 아버님께서 개각하였다고 들었음
송선생님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