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명예의 전당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하고 꽤나 생각
했었는데 이충희 감독이 올랐더군요. 제가 참 좋아하는 분입니다.
명예의 전당 이충희 편이 실린 후, 독분 비관에 이충희 감독에 대한 글이
많이 올라올 줄 알았는데 생각 만큼은 글이 안 올라 왔더군요.
(대신 몇 분께서 올리신 글은 제가 다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충희 감독이 워낙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 후추인 여러분들께서
굳이 글을 안 올리신 것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아니면 월드컵이 다가오니까 농구에 대한 관심이 조금 떨어져서 그런가요?
이번 명예의 전당 prologue 첫 부분에 이충희를 '잘 드는 칼' 헹켈에 비유를
하셨더군요. 정말 정확하게 비유를 하신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충희는 진짜 '잘 드는 칼'이었습니다.
국내 여러 스포츠 종목 선수 (추억의 선수)중 '잘 드는 칼'에 비유해도
될 만한 선수가 몇 있었지요?
배구의 강만수, 야구의 장효조, 핸드볼의 윤병순 정도를 꼽고 싶은데......
그래도 저는 이 중에서 이충희가 가장 '완벽하게' 잘 드는 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 친한 친구와 저의 대화입니다.
친구: 네가 농구 감독이라면 이충희하고 허재 중에서 누구를 택하겠니?
나: 이충희
친구: 허재가 이충희보다 키도 크고 개인기도 훨씬 좋쟎아.
더군다나 허재는 만능인데다가......
나: 그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단다.
친구: 근데 왜 이충희를 택해?
나: 확실하니까!
이렇듯 저의 답변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잘 드는 칼' 이충희 감독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을 했기 때문에
저도 글을 좀 올리겠습니다.
글 순서는 이렇게 가져가 볼까 합니다.
* roby10이 생각하는 이충희
*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의 '기적의 금메달'
* 2m38cm의 '인간 장대' 목철주
제 개인적으로 '이충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충희는 팬들에게 무척 다정 다감하게 대해 주는
선수였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곳, 저곳 경기장을 빨빨거리고 다니면서
수 백여명의 국내,외 선수들에게 싸인을 받아보고, 또 기회가 닿으면
이야기도 조금 씩 해 봤는데 그 선수들 중에서 가장 기분좋게 싸인을
해 주었던 선수가 바로 이충희였습니다.(국내 선수 중엔 권명희(농구),
이에리사, 양영자(탁구), 이태호(축구), 이범주(배구), 그리고 방렬 감독이
팬들에게 매우 친절했습니다. 외국 선수로는 단연코 로베르토 바지오가
최고였구요. 정말 바지오는 최고입니다.)
사실 지금 뿐 아니라 20 여년 전에도 일부 유명 운동 선수들의
'시건방진 자세' 와 '상식 이하의 무례함'은 못 봐줄 만큼 대단했었
습니다. 예를들어 경기에서 졌다던가 아니면 지쳐있는 상황에서 수십명,
수백명의 팬이 달라 붙으면 당연히 짜증이 나겠지요.
더군다나 게임에 졌는데 싸인을 해 줄 기분이 어디 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싸인을 부탁하는 팬들한테나,
사진을 함께 찍고 싶어하는 팬들에게 곁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거만을
떠는 선수들이 간혹 있었답니다.
자기 이름 세 글자 써 주기가 그렇게도 싫고 귀찮은지....... 더구나 자기
좋다는 사람들한테.....저는 정말 지금도 그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는 방송에 나와서 팬 여러분들의 성원에 감사 드린다는 둥,
팬 여러분들께 최선을 다 하겠다는 둥....... 이 지랄들 하고 있으니......
특히 여자 농구의 P모 선수와 P감독, C감독...... 이 사람들한테
기분상한 농구 팬들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빠 부대의 원조' 이충희에게서는 이런 '거만함' 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저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무척 팬들한테 다정하고,
친절했었어요.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싸인을 해 줄때는 가볍게
말까지 시켜 가면서 부드럽게 대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이충희의 이런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플레이 면에 있어서의 이충희 장점은 저는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슛 정확하고 기복이 없다는 건 여러분들이 저 보다 더 잘 아실테고.)
첫째는 강인한 체력이고,
둘째는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이었습니다.
바로 이 두 부분이 완벽했기에 이충희가 '사상 최고의 득점기계' 로서
롱런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이충희의 체력은 정말 '경이적' 이었습니다.
상대의 밀착 마크를 따돌리려고 코트 사방 팔방을 쉴세없이 옮겨(뛰어)
다니는 모습은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코트에 가셔서 이충희의 경기 모습을 직접 보신 분들은 너무도
잘 아실겁니다. 이충희가 어느정도 코트를 뛰어다니는가를.....
이충희는 그렇게 많이 움직이면서도 좀처럼 지치질 않았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의 체력이었지요.
반면에 이충희를 전담 마크했던 상대 선수들을 보면 대개 벤취로
들어와서 가뿐 숨을 몰아쉬고, 몸이 축 늘어지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거든요.(이충희 전담 마크맨으로 유명했던 선수로는 삼성의 이영근과
신동찬(80년 대 초~ 중반까지)그리고 그 후, 기아의 정덕화를 들 수
있겠지요. 이 선수들 중 정덕화가 이충희를 가장 잘 마크했던 선수였지요?)
이번 명예의 전당 글에도 나오지만 전성시절 이충희는 순발력 좋기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예전에 농구 해설자 한창도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 나는데 이충희는 태릉 선수촌에서 대표팀 연습을 할 때 100m를 뛰면
12명의 선수 중 거의 꼴등을 한답니다. 그런데 코트에서 대각선으로 뛰는
연습을 할 때는 1등을 한다더군요. 그마만큼 이충희가 순발력이 대단했다는
증거이겠지요. 인터뷰 보니까 50m, 60m는 장재근보다 빠르다면서요?
이충희의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냉정함'을 들 수 있겠습니다.
거기다가 이충희는 매우 대담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국내, 외를 막론하고 어느 상대 팀이 됐건 간에 슛터인
이충희 마크에 온 신경을 집중 해야 했습니다.
상대 팀에서 수비가 가장 좋고, 발이 빠른 선수가 경기 내내 이충희를
지겨울 정도로 따라 붙었지요. 그런데 이충희는 상대 팀의 어떠한
수비수가 붙어도, 또한 어떠한 거친 파울을 당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이충희는 좀처럼 흥분을 하질 않았고, 끝까지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분위기에 휩쓸리지도 않았구요. 그렇기때문에 슛의 기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설사 슛이 터지질 않아도 마지막까지 포기를 하질 않았어요.
그러다 결국 막판에 한 방 해 주는게 이충희 레파토리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흥분을 하게 되면 당연히 슛감각이 떨어지기 마련이지요.
한 10 여년 전인가 삼성의 이인표 감독이 어느 신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농구장에 들어 온 관중의 반은 허재 팬이고, 반은 허재의 적이다.
그 이유는 허재의 불 같은 성격과 좋지 않은 매너 때문이다.
허재는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거친 파울을 당하면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고
그 즉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렇기때문에 허재의 적이 생기는
것이다. 허재의 1대1 개인기는 NBA에서도 통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나,
너무도 쉽게 달아 오르는 성격 때문에 자기 스스로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이충희는 어떤 경우라도 이성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 페이스를 유지해 나가는 장점이 있는데 허재가 이충희에게 이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인표 감독의 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충희가 이 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했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이 경기는 한국 농구사 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사에 있어서
'최고의 빅 게임' 중 하나로 손 꼽힐 만한 명승부일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 봐온 남자 농구 게임 중 가장 기억에 남고
감격적인 순간이 바로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거든요.
우선 제가 당시 뉴델리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남자 대표팀 구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어렴풋이 기억나는대로.......)
그리고 난 다음에 중공과의 결승전에서 우리 선수들이 어떤 플레이를
펼쳤는가를 말씀드려 보도록 하지요.
이번 명예의 전당 글에도 나와 있지만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멤버가
한국 남자 농구 사상 '최초의 드림 팀' 입니다. 정말 최강의 멤버로 구성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에 남자 농구는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아무리 남자 대표팀이 최강의 멤버로 구성 되었다고는
하지만 장신들이 우글거리는 중공을 깨기란 불가능 했었거든요.
중공의 벽은 그마만큼 높고 험했습니다.
남자 농구는 그져 은메달 정도 기대했었지요. 사실 그럴수 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박찬숙, 권명희, 김화순등이 이끄는 여자 농구에 금메달을 더
기대했었습니다.(올드 팬 여러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 전까지 10 여년 간, 한국 남자 농구는 중공의 벽에 번번히 막혔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요.)
그런데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한국 남자 농구에 희소식이 전해 집니다.
그것은, 수년 간 한국을 괴롭혀 왔던 중공의 공포의 센터
2m38cm의 목철주(무티에츄)가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 나오질 않는다는
낭보가 날아든 것입니다. 공포의 센터 목철주의 불참 소식은 한국으로서는
정말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었지요.
('인간 장대' 목철주에 대해서는 마지막 단락에 가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다 또 하나의 희소식은 무릎 부상에서 회복한 '농구 천재' 신선우가
3년 여만에 대표팀에 복귀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신선우의 복귀는 우리 대표팀에 엄청난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한국 남자 농구가 중공을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지요.
그럼 여기서 당시 신선우의 대표팀 복귀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기억나는
대로 또 알고있는 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전까지 남자 대표팀 코칭스탭은 김인건
감독(당시 삼성 감독)과 박한 코치(당시 고대 감독)였습니다.
이 두 분이 아시안 게임 이 전에 사퇴를 하게 되지요.(그 이전에는 어떤
분들이 코칭 스탭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두 분의 바통을 방열 감독과 이병국 코치가 이어 받으며 뉴델리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게 됩니다.(방열 감독(당시 현대 감독)은 70년 대 중반,
쿠웨이트 남자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뉴델리 아시안 게임을 앞둔 남자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최강인 중공과의
승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북한과의 게임도 예정 되어 있었기때문에 상당한
중압감이 있었습니다. 중공, 일본 이전에 우선 북한부터 작살내야 했던
것이지요.(그 시절 남북 대결은 어느 종목에서나 피튀기는 혈전이었습니다.)
이 때 방열 감독은 많은 고심끝에 '천재 센터' 신선우를 대표팀에 복귀
시키기로 결정 합니다. 당시 대표팀 최장신 센터였던 조동우(197cm)가 간염
으로 인해 제외 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센터진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표팀으로서는 더더욱 신선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신선우는 78년에 박수교, 최희암등과 함께 연대를 졸업한 후, 현대에
입단을 했는데 대학 시절에 이어 또 다시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해
2~3 년간 코트를 떠나 있었습니다.
(저는 신선우가 무릎 연골이 파열된 걸로 알고 있는데 신동찬 감독
얘기로는 무릎 힘줄(인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이 끊어진 거라고
하더군요. 제가 6년 전에 신동찬 감독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당시 신선우는 대표팀 복귀에 조금은 난색을 표했던 걸로
저는 기억 합니다. 그 이유는 신선우가 무릎 수술 후 어느정도 회복은
됐다 하더라도 100%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고, 엄청난 부담감이 있는
대표팀 보다는 소속 팀인 현대에서 전력을 기울이고 싶다는 의견을
내 비쳤던 것으로 기억 됩니다.(현대 입단 후 부상으로 인해 팀에 제대로
기여를 못했다는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선우는 결국 방열 감독의 설득을 받아드려 3년여 만에 대표팀에
복귀를 해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 참가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럼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멤버를 살펴 보도록 하지요.
코칭스탭.
감독: 방열
코치: 이병국
선수: (신장, 포지션, 소속팀)
4번 임정명(190cm. 센터. 삼성)
5번 이영근(185cm. 가드. 삼성)
6번 박인규(185cm. 포오드. 삼성)
7번 이장수(192cm. 포오드겸 센터. 현대)
8번 이충희(182cm. 포오드. 현대)
9번 이민현(188cm. 가드. 고려대 4년)
10번 박수교(주장. 184cm. 가드. 현대)
11번 신선우(189cm. 센터. 현대)
12번 신동찬(189cm. 가드. 삼성)
13번 안준호(193cm. 센터. 삼성)
14번 박종천(194cm. 센터. 현대)
15번 조명수(192cm. 포오드. 현대)
평균신장: 188cm
(한, 두 선수의 백넘버가 틀릴 수 있는데, 아마 거의 확실할 것입니다.)
한국 대표팀은 예상대로 승승장구 하며 무난히 결승 토너먼트에
올라 갑니다. 한국은 결승 토너먼트에서도 북한과 일본(준결승)을
차례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 해, 드디어 금메달을 놓고 중공과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기대했던 여자 농구는 진월방의 중공에 덜미를
잡혀 은메달에 머물었을 겁니다.)
지금부터, 이 날 중공전에서 뛰었던 우리 선수들이 결승전에서 어떤
플레이를 했었고, 또한 어떤 타입의 선수였는지 한 명, 한 명 조금 씩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당시 중공과의 결승전 TV 중계는 KBS. MBC 합동 중계였고,
캐스터는 최창섭 아나운서, 해설은 김인건(당시 삼성 감독)감독이
었습니다.)
중공과의 결승전 한국의 베스트 5는 다음과 같습니다.
10번 박수교, 12번 신동찬, 8번 이충희, 4번 임정명, 11번 신선우였습니다.
(종료 2~3분 여를 남기고 임정명이 5반칙으로 퇴장 당하자 9번 이민현이
들어 옵니다.)
이 날 한국의 작전은 철저한 지공이었습니다.
포인트 가드는 12번 신동찬이었습니다.
신동찬은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드문 장신 가드(189cm)였지요.
장신이면서도 드리블 칠 때 자세가 무척 낮아서 안정감이 있었고
중거리 슛도 일품이었습니다. 리바운드 가담 능력도 좋았구요.
특히 수비력이 발군이었습니다.
신동찬은 슛이 정확하면서도 결코 난사 하질 않고 결정적일 때 한방
터뜨려주는 가드였지요.
주장인 10번 박수교는 한국 농구 최고의 테크니션 답게 화려한
드리블과 아울러 이충희와 함께 정확한 중거리 슛을 터뜨려 중공을
괴롭혔습니다. 원래 박수교의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이지요.
김동광 은퇴 후 대표팀 주장과 포인트 가드 계보를 이어받은 박수교는
대단히 화려한 농구를 구사했던 선수였습니다.
허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국내 최고의 테크닉을 자랑했던 선수가
'여우' 박수교였습니다.
8번 이충희에 대해서는 굳이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이충희는 이 경기에서도 늘상 해 왔던 대로 했습니다.(동영상
모습 그대로입니다.)
사실 이충희 없이는 작전을 세울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충희가 있기에 중공과 '맞짱'을 뜰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4번 임정명은 190cm가 채 안 되는 단신 센터였지만 처절하리 만큼 중공의
장신 센터들과 몸 싸움을 펼치며 자기를 희생하는 플레이를 했습니다.
임정명이 중공의 센터들과 심한 몸싸움을 해 주는 틈을 타서 리바운드는
주로 신선우가 했던 걸로 기억나네요. 목철주가 빠진 중공이라지만
당시에도 2m대의 센터는 즐비했습니다.
이 때도 중공의 평균 신장이 아마 196cm가 넘었을 겁니다.
제 기억으로는 뉴델리 아시안 게임, 대 중공전에서 임정명이 가장 큰
활약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사실 임정명을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플레이
스타일 만큼은 참 좋아했어요.
특히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을 때의 임정명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습니다.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양쪽 무릎에 흰 색의 특수 무릎 보호대를 착용한 11번 '천재 센터'
신선우는 임정명과 함께 골밑을 사수 하면서 경기의 흐름을 조절
해 나갔습니다. 아울러 완벽한 피딩(볼 배급) 능력을 보여 주었어요.
신선우는 공격시에 주로 하이 포스트에 서 있다가 볼이 자기한테
투입이 되면 수비수들을 교묘히 끌어 드리면서, 외곽에 있는 이충희와
박수교에게 정확한 어시스트를 해 주었습니다.
신선우의 볼 배급 능력은 거의 살인적이었습니다.(이것이 바로 신선우의
'주특기' 입니다.)
또한 지공을 펼칠 때는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신선우가 주도를 했습니다.
신선우는 센터로서는 정말 보기드물게 완벽한 드리블 능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비하인드 백 드리블'을 완벽하게 치고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아마도 경기 흐름 파악 능력과 피딩 능력에 관해서 만큼은 신선우가
역대 한국 센터 중 최고가 아닌가 보여집니다.
이충희 감독 명예의 전당 'BEST OF THE BEST' 부분에 당시 대 중공전
동영상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게임 종료 30초를 남겨 놓고 중공이
1점 차(85 대 84) 로 따라 붙지 않습니까.
그 때(30 초를 남겨 놓은 상태) 우리 측 앤드 라인에서 프런트 코트까지
중공 선수의 타이트한 맨투맨 마크를 받으면서도 여유있게 드리블 치며
나가는 선수가 바로 '바가지 머리' 신선우입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 센터가 드리블 치고 나간다는 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코트 안에는 드리블 좋은 가드 박수교, 이민현,
신동찬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럴 정도로 신선우가 드리블 능력이 좋았고,
징그러울 만큼 노련했어요. 신선우는 한 게임당 득점이 4~7점 정도 밖에는
되질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전문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농구 천재' 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선우는 프리 드로우를 할 때 항상 오른 발을 뒤로 들고, 왼 발 하나로
지탱하며 슛을 쐈습니다.(깽깽이 발로) 농구 해설자 김승규씨는 신선우의
그 슛폼을 가리켜 '개다리 슛자세' 라고 했습니다.)
중공과의 결승전, 마지막 2~3 분 여인가를 남기고 주전 센터 임정명이
결국 5반칙 퇴장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최대 위기였지요.
이 때 방열 감독은 임정명을 대신해 가드인 9번 이민현을 기용합니다.
(리바운드를 포기하고 외곽 공격으로 승부를 건 것 같습니다.)
이민현(고려대 4년)은 당시, 대표 팀에서 가장 막내였었어요.
사실 상식적으로는 임정명 자리에 박종천이나 안준호 혹은 이장수 같은
센터를 기용했었어야 했는데 방열 감독은 의외로 이민현을 코트에
넣었습니다. 그 정도로 이민현이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주는
선수였습니다. 아주 훌륭한 식스 맨이었지요.(김현준은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는 선발이 안 되었습니다.)
이민현은 가드였지만 키가 컸고, 어느 정도 포스트 플레이가 가능한
선수였습니다. 또한 당시 국내에서 가장 빠른 플레이를 구사하는 선수가
이민현이었지요. 이민현은 기대대로 끝까지 차분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대 중공전, 동영상에서 마지막 종료, 부자가 울릴 때 박수교가
높이 던진 볼을 가운데서 점프를 하며 뒤로 쳐내는 선수가 이민현입니다.
이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한국 남자 농구가 10 여년만에 중공을 깨고
기적의 금메달을 획득한 것입니다. 대단히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제 눈으로 한국 남자 농구가 중공을 이기는 것을 처음으로 보는 순간이기도
했지요.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유감 스럽게도 이 당시 뛴 짱꼴라들의 이름은 한 명도 생각이 안 나네요.)
대 중공전 동영상 마지막 부분을 보시게 되면 우리 선수들이 부둥켜
안고 좋아할 때, 그 사이에 유일하게 누런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분이 계시지요? 그 분이 우리 대표 팀 닥터였던 하권익 박사입니다.
이장학(당시 양정고 감독) 국제 심판의 모습도 보이는군요.
당시 남자 농구 금메달은 슬픔과 충격에 잠겨있던 국내 스포츠 팬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뉴델리 아시안 게임 바로 몇 주 전, 라스베이가스에서 김득구가 맨시니와의
사투 후에 세상을 떠났거든요.
제 글이 지루하진 않으신가요?
그럼 여기서 한 템포 쉬어가는 의미에서 '농구화' 에 대한 얘기 하나 해
드리고 2m38cm의 '인간 장대' 목철주로 넘어 가겠습니다.
이번 명예의 전당, 대 중공전과 대 일본전 동영상을 유심히 보시면
우리 선수들이 신고있는 농구화가 다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그 신발은 일제 asics TIGER 라는 농구화입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대표팀 선수들은 전원 asics TIGER 농구화를
신었습니다.(특히 남자 선수들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 고급 스포츠화(이를테면, 나이키와 프로 스팩스등)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게 대략 80년 ~81년 경이었을 겁니다.
(주방장님! 맞나요?)
그 이전까지는 국내 성인 운동 선수들 대부분이 일제인 asics TIGER 를
선호했었습니다. 물론 농구 뿐아니라 축구, 배구 종목도 마찬가지였지요.
사실 그 당시(80년 이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국산 스포츠화가
없었습니다. 가죽으로 된 국산 농구화가 아이야 없었거든요.
그져 시장 신발 가게에서 파는 2.000원~ 3.000원 짜리 하얀 색의
'BB 농구화' 라는 것이 그런대로 먹어 줄 정도였으니까요.
(여자 농구 선수들은 BB 농구화를 많이 신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옆에 세 줄 그어진 '런닝화'라는
1.500원 짜리 얇은 운동화가 인기 제품이었는데 운동회 날, 그 런닝화
한번 신어주면 서말구, 장재근이 안 부러웠거든요.
그런 가운데 asics TIGER 라는 일제 농구화는 당시 가격이 무려 6만원
정도였습니다. 대단히 비싼 거였지요.
국내에 나이키가 처음 나왔을 때 가죽 테니스화가 2만원대 였거든요.
2만원대 운동화도 사실 당시엔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각 학교 마다 '나이키 도둑 놈들' 이 참 많았었습니다.)
그리고 asics TIGER 농구화는 아무 체육사나 백화점등에서 쉽게
살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서울 종로 1가에 가면 남양 체육사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주문을 해야 살수 있었어요.
특히나 당시 중, 고등학교 농구 선수들에게는 일제인 asics TIGER 농구화가
부러움의 대상이었지요.
국내 선수들이 당시에 일본으로 전지 훈련을 가면 이 신발을 많이들 사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지요.
요즘은 우리 농구 선수들 대부분이 국산 농구화를 신고 뛰고 있지요?
근데 요즘은 국산 농구화도 드럽게 비싸던데요.
(동남아 국가 축구 선수들이 한국에 전지 훈련을 오면 동대문 운동장
근처, 축구 전문점이나 체육사에 놓여진 국산 키카 축구화가 거의
동이 난답니다. 그 쪽 국가에서는 키카 축구화가 먹어 준다네요.)
위에서 언급 했었던 중공의 센터 목철주('무티에츄' 라고도 했습니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목철주 뛰는 모습을 어릴 적에 몇 차례 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세히는 설명 드릴 수 없이니 이에 관해서는 널리 양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윗 글에서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한국 남자 농구가 당시까지 수 년간
중공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은 오로지 2m38cm의 '인간 장대' 목철주라는
공포의 센터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철주가 78년 방콩 아시안 게임에도 나왔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한국 대표팀의 최장신 센터가 197cm의 조동우였는데 대 중공전에서
조동우가 목철주를 마크 하다보면 전반 10분이 채 안되서 파울 4개가
될 정도였습니다. 도저히 마크가 불가능했었습니다.
골 밑에서는 한 마디로 속수무책이었어요.
거기다가 목철주는 체격까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현재 중국 대표팀 센터이자 NBA에 나가 있는 왕즈즈나 야오밍 그리고
북한의 리명훈 보다 목철주가 더 클 겁니다.
목철주가 골밑에 버티고 있는한 한국이 중공을 이기기는 사실상
100% 불가능했습니다.
(조동우 이 전에 우리 대표팀 주전 센터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 대표팀에도 오카야마(2m24cm 센터)라는 선수와
키타하라(2m4cm 포오드)라는 장신 선수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충희 명예의 전당, 동영상을 보시면 대 일본전 경기 장면에 이 두 선수
의 모습이 나옵니다. 5번이 오카야마이고, 4번이 키타하라입니다.
(제가 오카야마 전성 시절에 직접 옆에 가서 서본 적이 있는데
제 자신이 비참해 지더군요.)
그러나 오카야마는 스피드와 기량이 너무나 떨어져 우리로서는 어느정도
마크가 가능했었습니다. 오카야마는 게임 중에 넘어지면 자기 스스로 잘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둔했거든요.
중공의 목철주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카야마 보다는 2m4cm의 포오드 키타하라가 요주의 인물이었지요.
한 3년 전인가 방열 감독께서 테레비 어느 프로그램에 나오셔서
무슨 주제를 놓고 주부들에게 강연을 하신 것을 우연치 않게 조금
본 적이 있습니다.('서로 도우며 살자!' 라는 이와 비슷한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방열 감독께서 주부들에게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때 중공의 센터 목철주를 과연 어떻게
마크를 해야 할까? 하고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우리 선수들에게 30cm 굽 높이의 특수 운동화를 신기고 연습을
시키는 등, 중공을 꺾기 위해 온갖 준비를 다 했었다. 또한 중국인들의
민족성을 알기 위해서 중국 소설도 많이 읽었다.......' 라고 하시면서
당시를 회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는 목철주가 참가를
안 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위에서 제가 말씀 드렸다시피 목철주가 뉴델리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중공 대표팀에서 은퇴를 한 걸로 저는 기억하거든요.(부상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 기억이 맞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목철주가 참가를 안 했기 때문에 한국이 중공을 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철주가 빠진 중공을 이기고 한국이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그 금메달이
'과소 평가' 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목철주가 빠진 상태였어도
당시 중공에는 2m대의 장신 선수들이 넘쳐 흘렀었고, 우리 보다는 전력이
휠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공은 신장만 큰 것이 아니라 슛 정확한
놈들도 많이 있었어요.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의 남자 농구 금메달은
'위대한 금메달'임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혹시 후추인 여러분들께서 이 부분의 글을 읽으시고
'roby10, 이 새끼 미친거 아냐?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방열 감독이
목철주가 나왔다고 하는데 어따 대고 감히 목철주가 안 나왔다고
헛 소리를 해!' 라고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 것 같은데
사랑하는 후추인 여러분!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목철주가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는 나오질
않았습니다. 미친 척(?) 하고 저를 한번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자신이 없거나 아니면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한다던가 박박
우겨대는 놈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를 한번 믿어 주십시오.
만일 제 기억이 잘못 되었다면 여러분께 사죄 드리는 뜻으로 3 개월
정도 독분비관과 누드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한국 남자 농구가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 후 또 다시 중공의 벽에
가로 막힌 것은 다름아닌 83년 아시아 남자 농구 선수권 대회였습니다.
(아마 이 대회는 84 LA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한 대회였을 겁니다.)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던 중공은 한국을
꺾기위해 '인간 장대' 목철주를 다시 중공 대표팀에 복귀 시킨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은 주전 센터 신선우가 대표팀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194cm의
박종천이 임정명과 더블 포스트를 섰지요.
83년 ABC 남자 대회 한국의 베스트 5는 다음과 같습니다.
10번 박수교(주장), 12번 신동찬, 8번 이충희, 4번 임정명, 13번 박종천입니다.
(청소년 대표를 거친 한기범(당시 중앙대 2년)과 김유택(중앙대 1년)이
이 대회부터 성인 대표팀에 선발 되었을 겁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우승을 노렸지만 공포의 센터 목철주가 복귀한 중공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하며 LA올림픽 티켓까지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시 경기 장소는 홍콩 엘리자베스 체육관이었던 걸로 기억 됩니다.)
또한 한국은 이 대회에서 일본에게도 패하는 수모를 당하지요.
그럼 여기서 당시 일본과의 경기 때 벌어졌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좀 해 드려볼께요.
대 일본전 종료 10 초를 남겨 놓고 '미스테리 사건'이 벌여졌거든요.
(이것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아마 일본과의 게임이 준결승전이었을 겁니다.
한국과 일본은 경기 내내 시소 게임을 벌이다가 게임 종료를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스코어가 동점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한국이 공격권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 상황에서 한국은 이충희가
상대 수비수에게 파울을 얻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남은 시간은 10초.
일본은 당시 팀 파울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게 프리 드로우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열 감독이 프리 드로우를 포기하고,
아웃 오브 바운드(드로우 인)공격을 지시했습니다.
(당시 '룰'이 지금 하고는 조금 달랐지요.)
프리 드로우를 쏠 선수가 다른 선수도 아니고 '천하의' 이충희였는데
말입니다.
10초가 남은 상황에서 아웃 오브 바운드로 시작 된 한국의 공격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연장에 들어간 한국은 일본의 기세에 눌리면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지요.
그 경기 후, 방열 감독은 매스컴으로 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방열 감독의 미스테리'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였으니까요.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시의
방열 감독 작전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제가 방열 감독의
팬이라 그런지 몰라도......)
당시 방열 감독은 그 순간에 만의 하나 이충희가 프리 드로우 첫 구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던 게 아닌가 보여집니다.
만일 이충희가 프리 드로우 첫 구를 실패 한다면 리바운드는 일본이 따낼
가능성이 매우 컸거든요.(한국은 임정명이 5반칙으로 퇴장 당한 후 신예
김유택이 코트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됩니다.)
일본이 리바운드에 성공하면 남은 10 초 동안 2m24cm인 오카야마를
이용해서 충분히 득점을 올릴 수 있었을 뿐더러 또한 파울도 얻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한국 역시도 팀 파울에 걸려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방렬 감독은 이와같은 생각을 했었던 게 아닐까요?
방열 감독이 원래 '수' 를 잘 읽지 않습니까!(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래서 그 때 '방열 감독의 미스테리'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생각하니 지금도 참 애가 타네요.
만일 후추인 여러분이 농구 감독이라면 그 상황에서 과연 어떤 작전을
지시하셨겠습니까?
이충희에게 프리 드로우를 맡기시겠습니까?
아니면 방열 감독처럼 아웃 오브 바운드 공격을 지시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KUKI 동생은 어떤 작전을 펼치시겠수?)
비록 이 대회에서 한국 남자 농구는 중공과 일본에 덜미를 잡혀
이미지를 구기지만 그 해 12월 부터 시작 된 점보 시리즈를 통해
농구 팬들의 스트레스를 확 풀어 주며,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긴 글 읽으시느라 힘 드셨지요?(저는 지금 거의 제 정신이 아닙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글은 이만 여기서 접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저의 이번 글이 반응이 좋을 시에는 조만간에
'이충희와 80년대 초반~ 중반의 남자 농구' 에 대해서도 글을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80년 대 초~ 중반 남자 농구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현대VS삼성의
빅 라이벌전 이야기가 중심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