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운동 나갈 때마다 나는 항상 오른손엔 보온병을 왼손엔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
카메라를 들고 다닌지는 꽤 되었지만 보온병을 들고 다닌지는 보름이 좀 지났다.
보온병을 챙기게 된 것은 정확하게 열 이레 전이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장씨가 방치하다시피 키우던 개가 몸을 풀면서 부터이다.
그는 버린 개를 주워다가 보신탕에 넘길 때까지 그렇게 키운다.
그날도 몹시 추웠다.
산자락엔 개집이 셋 있는데 제일 왼쪽의 개집 지붕이 바람에 날아간 것이 보였다.
덮어주려고 가까이 가니 꼬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떨고 있는 어미개 품에는 어미를 꼭 닮은 강아지 네 마리가 어미젖을 한사코
파고들고 있었다.
젖몸살이 심한지 제일 아랫쪽 젖이 돼지 오줌보처럼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후 부터 나는 항상 보온병에 뜨거운 물과 마른 멸치를 넣어서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어쩌자고 이 추운 겨울에 몸을 풀게 되었누?'
젖몸살과 살을 에이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미개와 네 마리 강아지, 생명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처음엔 마른멸치에 뜨거운 물만 부어서 가지고 갔다.
어미개가 차츰 몸을 회복하자 생선뼈나 밥을 섞어서 가지고 갔다.
강아지 네 마리가 매달려 죽자살자 젖을 빠는데 어미개가 비루먹은 꼴이기 때문이었다.
잘 나지 않은 젖을 얼마나 빨았는지 젖꼭지 끝에 아직도 고름이 맺혀 있다.
얼마나 아렸을까! 아기가 손으로 엄마품을 파고들며 젖을 빨 듯이
강아지는 오른 앞발로 어미 가슴을 더듬으며 젖을 빤다. 꼭 갓난아기 같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들은 네 마리가 거꾸로 매달려서,
또는 좌우로 엉켜서 한꺼번에 젖을 빨면 고름 맺힌 젖이 몹시 아플텐데
어미개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굉장히 순둥이 같다.
순둥이는 지나치게 부끄럼이 많다. 뜨거운 국밥을 부어 주며 나오라고 아무리 불러도
꿈쩍도 않는다. 절대로 내 앞에서는 먹지 않으려는 듯, 견공의 위신을 세우는 건가.
꼴로 봐서는 허겁지겁 먹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한날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살펴보니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쑤욱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 기겁을 하고 집으로 쏘옥 들어가버렸다.
나오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려고 했는데...... 아직 나를 경계하나보다.
어제 아침, 강아지들은 드디어 눈을 떴다. 그새 보름이 지났나보다.
그중 한 마리는 제법 뽈뽈 기어나온다. 아주 귀엽다.
분홍빛 주둥이와 흑요석 같은 눈이 앙징스럽다.
곧 어미 밥그릇에 주둥이를 박고 먹이를 가로채겠다.
저 생명들이 무사히 이 겨울을 건너길 바란다.
언제 보신탕 집으로 뿔뿔이 흩어질지 모르는 것이 견공의 운명이겠지만
헤어질 때 까지만이라도 견공 가족으로 따뜻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때 까지 나는 오른손에 보온병을 들고 가는 것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저와 같은 수필문학회 회원의 글, 불자 교사
*****************윤회와 생명계의 냉엄한 현실.
교수님의 저서 <<불교 초보 탈출 100문 100답>>(불광출판사)은 초보 불자에게 불교를 이해하고 궁금한 부분을 알게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초보 불자를 위한 많은 책을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질문: 인간은 수행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는데 지긋지긋하게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인간이 전생을 알수없는데 윤회가 지긋지긋한지 알수 없습니다. 전생에 내가 현생에 나라는 사실도 실감할수 없고 현생에 내가 내생에 어떻게 태어나게 될지 알수없습니다. 내생에 태어난 그가 현생에 나인지 알수없는 상황 즉 전생, 현생, 내생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윤회가 어떻게 지긋지긋한지 알수 있을까요. 그리고 각각의 생이 괴로워도 인식이 단절되었기에 그냥 살면 되는 것 같은데(축생이든 아귀든 지옥이든)요. 해탈을하여 육도윤회를 끊던 해탈을 못하여 육도윤회를 하든 결국은 공한것 같은데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김성철 교수님의 답변(홈페이지 체계불학에서)
윤회를 발견한 분은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없을 경우에는 말씀하신 대로 그냥 살면 될 것입니다.
내생을 몰라도, 크게 악한 짓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겁니다. 내생을 모르셨던 공자님처럼....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생이 있는 것이 확실하겠다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지긋지긋하게 태어난다는 것도 제 얘기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나 그냥 살면 될 것 같다고 하셨고, 윤회를 하든 해탈을 하든 결국 공하다고 하셨는데 만일 그런 생각을 확신하신다면 지금 현생에 축생이나 아귀, 지옥중생처럼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불교수행 가운데 자타상환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나와 남을 바꿔 보는 수행으로, 역지사지와 그 의미가 같습니다. 들짐승의 경우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일지 몰라도 그들 스스로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삶입니다. 매일 매일 굶주림의 괴로움과 살해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것이 들짐승입니다.
아귀의 괴로움과 지옥의 공포가 섞인 곳이 축생계입니다.
예를 들어
모기는 목숨 걸고 식사합니다.
오리나 닭, 돼지는 독감에만 걸리면, 그 주인께서 산 채로 집단 매장하여 살해합니다.
.... 우리 입장에서 축생을 보지 말고, 축생 입장에서 축생을 볼 경우 너무나 비참한 삶인 것을 알게 됩니다.
아귀와 같이 살아 보려면, 실제로 몇 일 굶어 보면 됩니다.
지옥중생과 같이 살아 보려면, 실제로 심하게 얻어맞고 고문을 당해 보면 됩니다.
지금 인간의 몸을 하고도, 그냥 대충 살 경우, 서울역 대합실의 노숙자가 되어 축생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돈을 쌓아 놓고 있지 않은 이상 ..... 우리의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인간의 몸을 하고 있고, 인간 가운데 한국이라는 부유한 나라에서 살아가기에 굶는 걱정 하지 않고, 한국인 가운데 '독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삶'을 살고 있기에, '생명세계의 비정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지금 이러한 삶은 모든 생명들의 삶 가운데 극히 희귀한 삶입니다.
다른 예를 들면, 우리는 병에 들면 슬퍼하고 죽으면 매장합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너무나 호사스러운 삶입니다.
대부분의 생명은 살해당하여 죽음을 맞이하고, 죽은 후에는 그 몸뚱이가 먹이가 되어 남에게 먹힙니다.
살해당하지 않고 병에 들어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특권이고,
죽은 후 그 고기가 남에게 먹히지 않고, 그대로 매장된다는 것이 인간의 특권입니다.
모든 생명체의 삶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열심히 살아가던' 중소기업의 사장이라고 해도 부도를 맞으면, 축생과 같이 전락합니다.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자가 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우리의 얼굴, 기억, 몸이 모두 썩어 없어지고,
다시 태어날 때 우리의 의식은 새로운 수정란을 찾아 부착하여
어미의 자궁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지구상에 형성된 수정란 가운데에서, 인간의 수정란은 거의 찾기 힘들 겁니다.
맑은 밤하늘 가득한 별과 같은 수정란들 가운데, 한 두 개 정도가 인간의 수정란이고,
다른 것은, 물고기, 개미, 벌, 돼지 ... 바퀴벌레... 등등의 수정란들일 것입니다.
이런 통찰이 생길 때, 우리가 죽은 후 내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야말로 김환기 그림의 제목과 같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입니다.
다른 모든 생명에 비해 인간이란 생명체는 지독하게 행복하다는 점에 대해 통찰할 때,
부처님 모든 가르침이 사실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첨부한 파일은 '윤회를 논증해 본 제 논문'과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냐랴!'와 '죽은 후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영상물(KAIST대학원에서 생명윤리 특강할 때 강의자료로 제가 만들었던 겁니다)'입니다. 아래쪽의 삼각형을 클릭하면 작동합니다.
영상물 첫 장면은 침대에서 죽어가는 환자의 눈에 비친 병실 천장 모습입니다.
********수필 거룩한 본능(김규련)
거룩한 본능/김규련
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도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첩첩 산중의 마을이다.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뜻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꿩이나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 있게 훨훨 흔들며 노송(老松)의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 다니는 품이 정말 대견스럽다. 붉은 주둥이와 긴목, 새하얀 털로 덮인 날개 밑으로 쭉 뻗어 내린 검붉은 두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의 오후, 마을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황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이들은 그 황새가 길조(吉鳥)라고 믿고,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금년엔 찻길이 뚫리겠지, 올해는 꼭 전기가 들어오겠지 하고 .
그런데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이 마을을 지나가던 밀렵군이 그 황새를 보고 총(銃)을 쏜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지가 있는 노송 숲으로 뛰어 모였다. 밀렵꾼은 도망을 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 며칠 뒤였다. 밤 바람이 일기 사작했다. 지창(紙窓)에 갈잎이 날려와 부딪혔다. 그런데 조금은 귀에 익은 황새의 울음소리. 탁탁탁 타르르 탁탁. 사랑방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을 도리는 듯한 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말없이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 밤, 밤 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앗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지 않은가. 총 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새는 인제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의 짝한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려고 저마다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부리가 멍들어 부서지도록 울어댔다. 탁탁탁 타르르 탁탁 그날 밤엔 늦도록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질 않았다.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 날 아침, 기이(奇異)하고 처참한 변이 또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靈物)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鳥類)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愛情)이 별스러운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생태요, 본능(本能)이라 했다. 그러나 하찮은 그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수필 어미소의 울음(김희준)
어미소의 울음
작은 형이 태어난 올 소 띠 해에 극장가는 ‘워낭 소리’라는 한 편의 기록 영화를 보러 왓다가 눈물을 적시고 가는 사람들이 이백 만이 넘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냉혹한 현실에서 상영 극장이 허용되지 않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기록 영화들이었다. 우리 가족도 다행히 이번에는 내가 사는 도시에서 아주 오랜 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
촬영지는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산골로 처가가 있는 봉화(奉化) 땅이고, 노부부는 장인, 장모님과 같은 연세였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사계절 속에서 펼쳐지는 늙은 소와 노인 부부의 삶은 우리 부부에게는 친숙하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서울 사람은 자막에서 ‘왜서?’라는 봉화 말을 ‘왜 멈추나?’로 잘못 옮기고, 나는 '업이야~!'라고 하는 우리 민속 말을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고서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피켓을 들고 한미 에프티에이 협상을 반대하는 시위 농민들 앞으로 노부부의 소달구지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어쩌면, 우리는 그 소달구지를 타고 고향을 아득히 멀리 떠나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 나이에 시골을 떠나서 도회지에서 오늘도 오디세이아의 긴 여정을 걷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영화는 자각하게 하였다. 삶의 고단함을 체념 섞인 넋두리를 내 뱉으며 익살로 까지 승화시키는 할머니의 말은 생활의 비바람에 풍화되어 가는 내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힘이 있었다.
코흘리개를 면한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어머니는 형과 나에게 호통을 쳤다. 싸리 소쿠리와 시렁에 걸린 호미를 들고 아지랑이 아롱이는 들판으로 나가 소에게 먹일 쑥을 캐러 나갔다. 갯가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버들강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형과 나는 시내의 얼음 녹은 차가운 물에 손이 시린 지도 모르고 쑥 뿌리의 흙을 헹궜다.
감꽃이 지고 풋감이 땅 바닥으로 쏟아지면 동네마다 아이들이 누런 암소를 몰고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서리를 해 온 감자를 구워 먹고, 억새로 엮은 총을 들고는 꿩 새끼처럼 온 산을 기어 다니며 놀다보면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넘어갔다. 소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풀을 뜯어 먹다가 배가 불룩하여서야 산 아래 골짜기로 내려왔다. 하루는 우리 집 소만 보이질 않았다. 자꾸 벗겨지는 고무신을 주워 신으며 황급히 찾으니 저 혼자 칡넝쿨 밭에서 잎을 뜯어먹느라 내가 다가가는 줄도 몰랐다. 벌겋게 물들은 서천의 저녁놀 속에서 들려오는 멧비둘기의 구슬픈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넘었다. 컴컴한 대문을 소를 몰고 들어서면, 어머니가 반겨 맞아 주며 홍두깨로 민 '늘인 국수'를 차려 주었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타닥타닥 생풀 태우는 모깃불이 피워진 마당에서 잠들었다. 멍석 위에서 삼베 홑이불을 덮고 별똥별 지는 밤하늘을 보다가 까무룩 잠들곤 했다. 가끔씩 쥐가 와서 내 몸을 물어도 겁이 나지 않는 밤이었다. 내 곁에는 어머니와 누나와 형이 있고, 사랑방에는 아버지가 주무시며, 마당가엔 우리 집 누렁 암소가 송아지와 함께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 물결 위로 솟구치며 분수처럼 숨을 뿜어내는 고래처럼 암소의 거친 숨소리가 이따금씩 어린 나의 잠결에 들려오곤 하였다.
누런 벼를 거두고 나면 들녘엔 거루갈이를 하여 보리씨를 파종하였다. 보리가 파종된 고랑을 묻을 량이면 정말 신명이 났다. 아버지와 나란히 소가 끄는 번지 위에 올라타고 보리고랑을 묻으면 얼마나 ‘호시’가 좋았던지. 감나무에 몇 알의 까치밥이 찬바람을 맞으며 매달려 있는 삼동(三冬)이 오면, 아버지는 볏짚 단을 먹이고 나는 한쪽 발로 작두날을 밟으며 여물을 썰었다. 가마솥에 부엌에서 나온 '꾸중물'을 붓고 볏짚 여물 위에 등겨와 콩깍지를 안치고 쇠죽을 끓였다. 솥에서 김이 풀풀 나면 나는 솥뚜껑을 열고, 암소는 군침을 흘리다 시장기를 참지 못하고 목을 빼고 긴 혀를 내밀었다.
형과 내 생일이 다 지나고 무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가 지게문의 창호지를 물들일 무렵이었던가 보다. 배가 불룩해진 누렁이는 마침내 한낮의 마당에서 새끼를 낳았다. 온 식구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때, 어머니는 소반에 우물에서 기른 정화수 한 그릇 올리고 그 곁에서 어미 소가 무탈하게 새끼를 낳고, 태어난 새 생명이 무사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산고도 잊은 채 어미 소는 조용히 새끼의 젖은 몸을 핥아주고 바닥에 떨어진 태반마저도 거둬 먹었다. 거룩한 모성애와 지고한 생명 탄생의 신비로운 현장을 생생히 그렇게 지켜보았다.
다시 날이 차가워지고 농한기가 돌아오면 젖을 빨며 자란 송아지는 제법 자랐다. 우리 형제들의 학비를 대느라 부모님은 어미 소와 송아지를 몰고 쇠장에 갔다. 팔려나간 새끼와 생이별을 하고, 매정한 주인 손에 내몰려 혼자서 십리 길을 걸어 다시 집에 돌아오는 어미 소는 동구에서부터 울며불며 새끼를 찾았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온통 서럽게 물들였다. 몇날 며칠 밤낮을 지새우며 누렁이는 온 마을이 떠나가도록 애타게 새끼를 찾으며 울음을 토해 내었다. 목이 쉬도록 울음을 우는 암소를 가여워하며 온 식구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구간의 소와 바람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랑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뒤척이며 잠들던 어린 나도 아버지도,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어 갔다. 아메리카 흑인 노예들의 서러운 눈물을 나는 우리 집에서 소를 키우며 어린 날에 온 몸으로 알았던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젠 이승에서 바이 뵈올 길이 없지만,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던 어미 소와 송아지의 그 눈망울이 지금도 내 가슴 속에서 서늘하게 밟힌다.
송아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이 든 나는 이웃집 송아지를 보고도 혹시나 팔려간 우리 집 송아지가 아닌가 하고 살피기도 하였다. 송아지가 보이지 않는 마구간과 마당은 텅 빈 것만 같았다. 한 번은 몇 십리 먼 곳으로 팔려나간 송아지가 고삐를 풀고 탈출하여 엄마소를 찾아 우리 집에까지 찾아 온 일이 있었다. 하지만 새 주인이 된 청년이 뒤쫓아 와서 가지 않으려 목을 빼고 네다리로 버티는 가련한 송아지를 다시 끌고 가고야 말았다. 송아지를 팔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울먹이며 아버지에게 말하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날 저녁도 다음날 아침도 나는 툇마루에 웅크리고 앉아서 밥 먹기를 거부하며 침묵으로 항명하는 작은 소동을 벌였다. 그 일 뒤로 한 동안은 쇠고기 국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내가 커면서 불살생을 제일의 계율로 삼고 뭇 생명의 아픔을 연민하는 종교에 사무치도록 귀의하게 된 것도 이런 일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을지 모른다.
등허리가 휘어진 노부부가 청량사(淸凉寺) 가파른 돌계단을 숨차게 올랐다. 솔바람 시원히 불어오는 탑전에서 늙은 소가 저승에서는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비는 영화 의 시작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소는 죽어서야 귀가 멀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노인과 한 집에서 살다가 삶의 무게를 져온 멍에를 벗었다. 평생을 목숨 줄에 매달려 울리던 워낭마저도 노인이 낫으로 싹둑 끊어내고서야 이승의 생애를 마감하고 안락한 세계로 떠날 수가 있었다. 늙은 암소의 눈물 맺힌 순한 눈망울은 영사기의 불빛이 꺼지고서도 내 가슴에서 오래도록 오련히 남았다. 그것은 생명 가진 존재들이 짊어진 숙명이고,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었다.
***수필 강아지와 종소리(김희준)
강추위가 몇 날 며칠 동안 물러나지 않던 월요일 아침 이었다. 키울 사람을 찾아 달라는 메시지와 강아지 사진이 손전화 창에 떴다. 미국인 선생님이 보낸 것이었다. 타이어가 질주하는 읍내의 로터리에 강아지가 버려져 있었고, 차가 급정거하는 현장에서 어린 생명을 구해 집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인간 세상의 법률에 따라 미국에서는 사흘, 한국에서는 열흘 안에 버려진 동물들을 안락사 시킨다.
한 주일이 지나서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강아지를 품에 안은 그와 나는 읍내의 약국을 찾아 갔다. 약사님과 미국인은 영어로, 나와 약사님은 한국어로 인사를 나누고, 사람과 강아지는 부드러운 음성과 자애로운 눈빛으로 정을 나누는 희유한 일이 벌어졌다. 약사님은 삼백 마리의 버려진 개들을 보살피는 동물 보호 센터를 전 재산을 바쳐 운영하고 있다며, 사람들은 후원금 내기에 정말 인색하다고 하였다. 나는 지갑을 털어 그 자리에서 알량한 돈이지만 흔쾌히 보시하였다. 마음속으로 달마다 후원금이라도 꼬박꼬박 내기로 맹서하였다.
그와 내가 불교 신자라고 하니 약사님도 불자라고 하였다. 중중무진(重重無盡) 화엄연기(華嚴緣起)의 이 우주에 인연과보는 한 치의 어김도 없다. 한량없는 선업(善業)을 짓고 사는 이 분께 나는 덕담을 건넸다.
“약사님은 정말 복 받으실 겁니다.”
미국인 선생님은 플로리다의 열대 낙원 섬에서 청춘의 한 때에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자유를 찾아 혈혈단신 황량한 알래스카의 야생 속에서 여름 한 철을 살았다. 그 곳에서 내면에 잠들어있던 감수성이 깨어나고, 삶이 온통 경이로움으로 가득 찰 정도로 사물과 세상을 다시 발견하였다. 산에는 연연한 진달래가 피어나고, 담장 너머로 백목련(白木蓮) 꽃잎이 미풍에 흩날리던 봄날에 이 작은 읍내에 왔다. 학교 앞의 절에서 백팔 배와 명상 수행을 하고, 육식을 일절하지 않을 만큼 연민심이 많다. 나에게는 서천(西天)에서 온 이 분이 백의(白衣)의 관세음보살님인양 하였다.
이사를 가며 주인들이 버린 개와 고양이들이 주택가를 떠돌며 길거리에서 무리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냥꾼을 고용했고, 엽총으로 동물들을 쏴 죽이는 참극이 며칠 동안 일어났다. 약사님은 버려진 동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 처절한 소리에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요즈음은 수의사 자격증을 획득하려고 주경야독의 만학도가 되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라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유럽 대륙의 유대민족을 대량 학살한 나찌와 그에 휩쓸려 광기에 도취된 대중 속에서 수 천 명의 동족을 구해 낸 쉰들러를 닮았을까. 약사님은 지옥 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 계시는 지장보살님의 '아바타(Avataara, 화신)'일 터이다.
강아지를 맡긴 다음 날 오후이다. 매화가 망울을 터뜨리는 새 봄이 오기 전에 한국을 떠나는 그를 위해 내가 안내해주마고 약속했던 경주로 갔다. 때마침 서울에서 온 두 분 도반과 백합 법우님이 동행 했다. 단아한 불교 문명이 꽃핀 고도, 월성(月城)의 짧은 겨울해가 아쉬웠지만 날은 포근하였다.
박물관에 걸린 신종(神鐘)의 명문에는 대승불교를 흥륭시킨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 이름이 등장한다. 그만큼 전 아시아가 불교 문명을 꽃 피우고 살아온 역사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뜰에 놓인 원형의 돌조각 앞에서 그는 한국이나 중국에는 살지 않는 공작새와 사자의 의미를 물었다. ‘부처님의 설법은 사자후와도 같아서 세상의 온갖 희론(戱論)을 잠재우며, 인도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인 아소까(Asoka)가 공작왕조(孔雀王朝, 마우리아왕조)의 황제이라’는 설명을 하였다. 우리 겨레 제일의 고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황제는 아육왕(阿育王)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인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통일제국을 만드는 막바지에 벌린 깔링가국 정복 전쟁에서 무려 십만의 사람들을 살륙하고, 몇 십 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전쟁의 참혹함을 겪고서 마음에 도사린 불인지심(不忍之心)에 황제 스스로가 치를 떨었다. 무력으로는 끝끝내 인간 사회를 조복(調伏)할 수가 없고, 부처님의 담마(Damma, 진리)와 자비로서만 제국과 세계의 평화를 이룰 수가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부처님의 발자취마다 돌기둥을 세웠고, 제국의 지방마다 담마 행정관을 파견하였으며, 변방마다 담마 칙령을 바위에 새겼다. 인도 주변의 아시아 전역과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에까지 담마 사절단을 파견하여, 불교가 세계 종교가 되었다. 황제는 백성들의 복지를 국정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더위와 갈증에 지친 여행자를 위해 가로수를 심고, 물 단지를 설치하며, 우물을 파고 보시하였다. 사람과 동물을 치유하는 데 쓰이는 약초를 국경 밖에 까지 보내어 심도록 하였고, 다친 사람과 동물을 위한 병원까지 지었다. 사자 조각을 머리에 이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황제가 세운 돌기둥을 인도 성지 순례 중에 부처님이 사랑했던 도시, 유마힐 거사의 고향, 바이샬리의 절터에서 보았던 기억이 났다.
미술실 평상에 미국인 법우와 나란히 앉아 삼화령 미륵삼존불의 그 천진하고 자애로운 얼굴을 우러르며 '사랑의 부처님(Maitreya)'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정병(淨甁)을 든 채 마치 미로의 비너스상처럼 늘씬한 몸매를 하고 당당히 서 있는 석조 관세음보살님을 뵙고 박물관 마당을 걸어 나올 때였다. 일천 이백 년의 세월을 산악처럼 우뚝한 자태로 걸린 신종의 푸른 몸에서 장중하고도 은은하고 여운이 긴 둥근 종소리가 백설(白雪)처럼 천지간에 흩뿌려졌다. 삼한을 일통하여 한 고을을 이룬 문무대왕의 후예로 아육왕을 닮은 신라의 전륜성왕, 전쟁으로 한 번도 백성을 놀라게 하지 않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청동 십이만 근을 부어 주조한 이 신묘한 악기(樂器)는 상기도 서라벌 누리에 울리고 있느니.
종종 걸음으로 남산 기슭을 올랐다. 바위에 새겨진 황룡사 구층 목탑이 또렷하였다. 대숲길을 비질하고 솔가지를 스친 바람이 탑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연주하여 내 마음의 때를 씻어주었다. 보리사 부처님을 보고서 미국인 법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도 그날에야 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천년의 풍우(風雨)를 견디며 오늘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법열(法悅)에 잠긴 미소를 던져주는 부처님 전에 우리는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는 신조(神鳥), 까마귀가 떼 지어 하늘을 빙빙 돌며 풍욕(風浴)을 즐기는 저녁 어스름에 산비탈을 내려왔다. 인간의 세 치 혓바닥을 즐겁게 하기 위해 날마다 뭇 생명들을 대량으로 도살하고,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아마존의 숲을 불태우며, 일각수(一角獸)가 나타나 억만년을 흘러온 어머니의 강, 그 가슴을 파헤치고 있다. 유마힐 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하였다. 이 야만의 시대에 지옥에서 들려오는 뭇 생명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고 사는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신종에 새겨진 한 구절이 내 마음 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일승원음(一乘圓音)을 듣고 뭇 생명들 모두 괴로움을 여의고 극락을 얻으소서. 부처님 진리의 바다에 함께 들고, 악귀(惡鬼)와 어룡(魚龍)마저도 구원 받기를 발원 하옵나니 ......”
***생명과 평화를 위한 틱낫한 스님의 설법
우리가 음식으로부터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기쁨도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고통에 다다르게 만드는 일시적 기쁨이다. 즐거워 먹는 그러나 몸에 해로운 음식, 흥겹게 마시는 술, 지나치게 섭취한 입에 단 음식, 몸속으로 독을 불러들이는 이런저런 것을 흡입하는 쾌락들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즐거움을 구별해 내야 한다. 하나는 치유와 배양이고, 다른 하나는 손상을 가져온다.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은 유기적인 결합 구조를 보여 준다. 그 구조 속에서는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이 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과 우리 자신이 한 덩어리로 조화를 이룬다. 한 입씩 베어 문 채소들 속에도 태양과 지구의 삶이 담겨 있다. 두 별의 하루하루가 방울진 간장 속에도 있고 두부 한 모 속에도 있다. 우리는 식빵 한 조각에서도 우주를 엿보고 맛볼 수 있다. 이러한 한 톨의 귀한 곡식 안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가족과 더불어 또 친구와 함께 빙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귀한 일이다. 세상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굶주린다. 한 그릇의 밥, 또는 한 조각의 빵을 쥐고 있을 때,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되새기자, 그리고 밥 한 그릇 변변히 차려 놓지 못하는 사람, 함께 식사할 친구가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내 안에선 그들을 향한 애달픈 마음이 차오른다. 이렇게 자비가 일어나는 것 또한 마음 깊은 수행이다. 이런 수행을 하고자 굳이 절이나 교회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 저녁 밥상을 마주한 그 자리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알아차려서 온 마음을 기울이며 식사를 한다면 사랑과 연민, 이해의 씨앗을 길러 낼 것이다. 이 씨앗은 허기지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우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굳건하게 다질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지금 얼마나 많은 고기를 먹고 있는지 진지하게 살피는 일이다. 2,000년이 지나도록 많은 불교인이 채식주의를 수행해 왔으며 동물을 향한 자비심을 꾸준히 키워 왔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을 쏟아 온 것이다. 요즘에 와서 다시 이 식사법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다. 우리 지구를 지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견해다. 채식주의 다이어트 식사법을 바꾼다면 세계 기아(엠비씨 다큐멘터리 아프리카의 눈물)와 지구 온난화(엠비씨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에 가장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다.
동물을 먹잇감으로 길러 온 그동안의 관행은 가장 나쁜 환경 파괴를 일으켰다. 온실가스 배출의 4분의 1이 고기를 먹으려는 데서 나왔다.
음식을 생산하고 먹는 우리 인간의 방법이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횡포가 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몸과 이 땅에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같은 대지는 우리가 먹는 방식 때문에 깊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살을 먹으려고 키우는 가축들이 우리가 먹을 물을 오염시킨다. 축사와 도살장에서 나온 오물은 샛강으로 흘러들고 큰 물과 합쳐져 먹는 물로 이어진다. 세계 수질 오염의 가장 큰 주범이다. 가축에게 줄 사료를 키우고자 미국에서만 100억 제곱미터도 넘는 숲이 깎여 나갔다. 열대 우림도 깨끗하게 밀려져 나간다. 특히나 열대의 숲(엠비씨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은 우리 지구를 시원하게 지켜 주는 방어선이다. 더불어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의 주요 군락지이기도 하다. 이런 안식처를 제공하는 숲이 불에 타고 있다. 이곳은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초지로 인공 조성된다.
우리가 키우는 수백만 톤의 곡물도 사람이 먹으려는 것이 아니다. 곡식은 소에게 주고 인간은 대신 그 소의 고기를 먹으려고 농사짓는다. 또한 많은 양의 곡물은 밥이 아닌 술이 되기 위해 재배된다. 미국 환경 보호 당국은 2000년도 미국 곡류 생산 분포에 대해 옥수수 재배 협회의 보고를 발표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 양의 약 80퍼센트가 미국 내 혹은 해외의 축산, 양계, 양어를 위해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 손에 들린 고기 한 조각을 지그시 바라보자. 황금물결 치는 너른 평야와 굽이치며 흐르는 강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 한 조각의 고기가 되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곡식 알갱이와 맑은 물이 그대의 술을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날마다 죽는다. 그와 같은 양의 곡식이라면 이 아이들을 다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들이켜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먹어 대고 있다.
축산업이 변하도록 우리가 압력을 가해야 한다. 당신과 내가 소비하는 것을 멈춘다면 그들은 생산하는 것을 멈출 것이다. 고기를 먹음으로써 우리도 그들과 같이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숲을 파괴하고, 공기와 물을 오염시킨다. 채식주의자가 되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우리 지구별의 건강을 되찾아 줄 수 있다. 육식을 지금 당장 완전히 멈출 수 없다면 조금씩 줄이도록 노력해 보자. 그 정도의 결정은 지금이라도 내릴 수 있으리라 본다. 한 달에 열흘이나 닷새 정도 고기 없이 식사하는 다이어트를 함으로써 당신은 기적을 보여 줄 것이다. 이 기적은 개발도상국들의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더불어 온실가스 배출량을 눈에 띄게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매끼 식사 때마다 어머니 대지를 도와줄 건지 상처 낼 건지 결정한다. “오늘 뭘 먹을까?” 하는 질문이야말로 매우 의미 깊은 물음이다. 날마다 아침마다 당신은 이 생각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떠올리고 가치를 매기며 집중한다. 바로 마음을 깨워 당신의 소비를 미리 점검하는 수행을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도 모르게 시작된 알아차림(사띠, 마음챙김, 正念, Mindfulness) 수행이다. 자연히 우리가 먹고 마시던 습관들을 자세히 검토하게 된다. 당신이 가지고 있던 고기와 술에 대한 욕망은 서서히 가라앉게 된다.
많은 불교 종파의 비구, 비구니 수행자들은 채식주의 전통을 지킨다. 중국과 베트남에는 재가 수행자들도 많이 따르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 달에 열흘 정도는 고기를 먹지 않도록 절제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고기 섭취량을 반으로 줄여 줄 것을 다급하게 간청한다. 요 근래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많은 미국인 불자가 내게 와서 말했다. 고기 먹는 것을 끊거나 반으로 줄인다는 서약에 동참했다고 말이다. 이는 육식에 대해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인 깨달음이다. 만약 그대가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부분적인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서약할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그대는 웰빙의 감각을 느낄 것이다. 평화, 기쁨, 행복이 서원을 한 그 순간에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럿이 함께하는 우리의 깨달음은 세계 전반에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세심히 살피는 소비를 연습해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ㅓ도 그렇고 가족이나 사회, 우리 지구별을 위해서도 꼭 실천해야 한다. 이 알아차림 소비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어린이와 함께할 수 있는 수행이다. 조직과 커뮤니티의 지도자들도 알아차림 소비를 수행할 수 있다. 특히 영향력을 갖춘 이들은 행동으로 보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의 동참을 불러낼 수 있다. 그대가 혹시 어느 도시의 시장이라면 그대는 폭력과 고통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의 고난은 알아차리는 소비를 시작함으로써 덜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대통령도 알아차림의 소비를 해야 한다. 그가 아무리 높은 권좌에 있더라도 알아차림의 소비 방법에 동참할 수 있다. 대통령의 내면에도 불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해와 사랑과 연민의 씨앗이 있다.
옹졸한 이기심에서 벗어나 우리가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상호 연관괴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가치에 눈뜨게 된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인류 전체, 우주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대의 몸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은 그대의 조상님들, 부모, 미래의 자손, 그리고 이 사회를 사랑스럽게 보살피는 것이다. 건강은 단지 몸뚱이만을 일컫지 않는다. 이는 또한 정신에도 적용된다. 알아차림 소비는 우리와 지구에 건강과 치유를 가져다준다.
음식 먹고도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정성을 다해 마음으로 살피는 소비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네 종류의 자양분’이라는 법문에서, 붓다는 음식을 일러 네 가지 소비 대상 가운데 단지 한 가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두 번 째 소비 대상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는 눈, 귀, 몸, 그리고 의식을 통해 소비한다. 영화를 볼 때, 잡지를 읽을 때, 광고를 볼 때, 대화를 할 때도 우리는 소비하고 받아들인다.
때때로 우리는 편안한 음악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텃밭에서 올라오는 싱그러운 향기를 들이켜기도 한다. 세상을 에워싸고 있는 온갖 아름다움도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가 그보다 훨씬 자주 섭취하는 것에 독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도심을 운전하며 길을 지날 때 그대 눈에 스치는 광고들은 그대로 당신 안에 자리한다. 그대가 대화를 나눌 때, 상대가 내뱉는 미움과 파괴적인 말들은 종일 당신과 함께 머무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의 요즘 미국 어린이들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살인자의 수는 8,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텔레비전에 나오는 폭력적인 행동도 10만 건을 넘어섰다. 아직 자그마한 몸집의 어린이들이 섭취하기에는 너무 많은 독이다. 우리가 몸과 의식 속으로 들어가도록 방치한 독들은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로부터 내려온 우리의 몸과 의식을 무너뜨린다.
우리의 감각이 흡수하는 소비를 그려 보이기 위해 붓다는 피부병을 잃고 있는 암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불쌍하게도 피부병이 지독히 심해져 암소의 살점 일부가 떨어져 나가 버렸다. 피부가 없어진 부분을 벌겋게 속살이 노출되었다. 온갖 벌레들이 달아붙어 소의 피를 빨고 연한 살점을 뜯어 먹는다. 암소로서는 그저 속수무책일 뿐이다. 오래된 나무 옆에 매일 때면 고목 껍질에 붙어 있던 모든 작은 생명이 암소를 타고 오르거나 날아와 앉는다. 땅에 누우면 흙 속에 살던 미세한 생명들이 기어올라 와 살을 비집고 끼여 들어온다. 물가로 이끌려 가면 물속에 있던 작은 생명들이 튀어나와 암소의 살을 뜯고 피를 빨아 댄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피부가 없는 소와 같이 된다. 우리는 수많은 독소가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또 파괴시키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두고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세 번째는 목적 또는 의지라고 불리는 음식이다. 이는 우리의 가장 깊은 의도로서 우리가 인생을 통해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말한다. 무언가를 하겠다는 우리의 욕망은 우리에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줄 수 있다. 붓다는 아주 명쾌한 예시를 보여 주었다.
<한 마을에 건강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마을 밖에는 아주 뜨거운 석탄들로 곽 채워진 큰 구덩이가 있었다. 누구라도 그 구덩이로 떨어진다면, 극도의 화상을 입을 것이었다. 굉장한 고통 받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하루는 아주 힘센 두 남자가 이 젊은이를 구덩이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그 구덩이 안에 들어간다면 상상도 못할 고통을 겪게 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힘이 센 두 남자가 계속 그를 구덩이 방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들 두 힘센 사내들이 지금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다. 이들은 우리의 탐욕을 대신하는 것이다. 유명해지고 싶다면 이러한 의도는 굉장히 강할 수 있고 우리를 그 고통으로 가득한 구덩이로 끌어당길 수 있다. 명예를 얻거나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도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돈을 벌겠다는 탐욕을 가지고 있어도 이 탐욕이 우리를 끌고 갈 수 있다. 탐욕이 우리를 먹어 치운다. 깨달음이나 마음 챙김을 위한 공간일랑 남겨 두지도 않는다.
네 번째로 우리가 소비하는 요소는 의식이라는 음식이다. 이는 우리의 의식 전체를 일컫는다. 의식적인 마음(제6식 의식) 무의식적인 마음(제8식 장식, 아뢰야식)까지 포함한다. 다음은 의식이라는 음식에 대해 붓다가 해 준 이야기이다.
한 범죄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왕은 병사들에게 그 남자를 포박하여 성 안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완수한 병사가 이제 그 범죄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명령을 기다리며 왕에게 물었다. 왕은 말했다.
“아침에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100번 찌르라.”
병사들은 왕의 분부대로 이행했다. 나중에 왕이 병사들에게 물었다.
“범인은 어떻게 되었느냐? 100번을 다 채워 찔렀느냐?”
병사들이 대답했다.
“예 그리하였습니다. 폐하, 그러나 죽지 않았습니다.”
왕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한낮에 밖으로 데리고 나가 100번 찔러라.”
병사들이 일을 마쳤을 때 왕이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병사들이 말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저녁에 데리고 나가 다시 100번 찔러라.”
아마도 그때 그 남자는 죽었을 것이다. 경전에는 더 이상 언급되어 있지 않다. 붓다가 물었다.
“제자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남자는 고통스러웠겠는가?”
제자들들이 대답했다.
“부처님, 100번 찔림을 당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런데 300번이라니...... 가히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우리의 의식 깊은 단계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칼부림을 당해 오고 있다. 인간이 이곳에 있기 전에도 지구에는 이미 말하는 첫 번째 고결한 진리(고성제)이다. 이는 삶이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는 두카(dukkha, 괴로움, 고통)이다. 병이나 화, 절망이나 우울함으로 드러나는 그 모두가 두카라 부를 수 있다. 우리 내면에는 이전 세대들이 겪었던 그 모든 고통이 또한 새겨져 있다. 이렇게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자리 잡힌 그러한 고통들이 붓다가 묘사한 범인의 상처이다. 300번 칼로 찔리는 무수한 상처들. 이러한 상처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계속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한 말에 상처 입는다. 그러고는 그들이 우릴 찔렀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우리를 찔러 댈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은 혼자서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이 붓다가 말하는 두 번째 고결한 진리(집성제)로 인간과 인간 아닌 생명 모두 고통 받고 있다는 말이다. 그 안에는 모든 옛 세대의 고통도 함께 있다. 여기에는 우리 시대의 집단적 의식이 가지는 고통도 포함된다. 우리들은 모두 서로 다른 핏줄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안에 함께 엮여 존재한다. 이 지구별에 오늘날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얽혀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있지 않을 수 있지만, 그대의 가장 깊은 의식의 단계에서는 그 전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쟁 통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영향 받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속에서는 그 여향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은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받아들인다.
당신이 고통 받고 있을 때, 그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아보는 일은 참으로 쓸모 있는 일이다. 그 고통이 집단의식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그대가 속한 혈통에서 온 것인지 되짚어 보는 것이다. 어쩌면 방금 전 누군가가 했던 말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저 사람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고통을 여의기가 너무나 어렵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고통이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탓만 한다면 우리 눈에 그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저질러 온 우리 잘못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원인이 되는 요소들도 볼 수 없다. 그러면 이 고통에서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큰마음으로 더욱 성숙한 의식의 단계에서 이 고통을 본다면 결과는 달라진다. 개인이 느끼는 고통스러움도 덜어진다. 그리고 그 고통 자체도 멈출 수 있다. 이 부분이 세 번째 고결한 진리(멸성제)인 참되게 사는 법, 바로 웰빙이다.
불교의 네 번째 고결한 진리(도성제)는 알아차림(마인드풀니스, 마음 챙김, 정념)의 길을 따르면 고통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자손으로써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는 소비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지구별을 살릴 수 없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단 한 사람의 깨달음으로는 어림없다. 인간의 자손이라 불리는 모든 이들의 집단적인 깨달음만이 살길이다. 우리의 수행은 반드시 집단적인 각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안에 있는 붓다(이해와 사랑과 연민, 불성佛性, 품성稟性, 신성神性)와 날마다 접촉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깨달음이 각자의 눈에도 보이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일 수 있다. 오로지 깨어 있음만이 우리 지구를 살릴 수 있다.
*괄호 안의 내용과 일부 번역의 수정은 베낀이가 하였습니다.
-틱낫한 지음, 안희정 옮김, <<우리가 머무는 세상>>, 판미동, 2010, 54 - 68쪽 .
The World We Have(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세계)
-A Buddhist Approach to Peace and Ecology(평화와 생태환경에 대한 불교적 접근)
by Thich Nhat Han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