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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文化遺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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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전설 (史話, 傳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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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족이나 사회의 전반적인 삶의 모습을 문화라고 할 때 문화유산이란 곧 우리 선조들이 이룩한 모든 것이 다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한 인간 집단의 생활 양식의 총체이다. 따라서 광범위한 의미의 문화란 정신적 예술적 표현의 총체라 할 수 있는데 본 장에서는 좁은 의미에서 선조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 유형의 문화유산과 현대적 의미의 문화예술 곧 학술과 함께 문학 미술 음악 연예 등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하여 노력하는 오늘날의 문화예술 부문까지 기술하고자 한다.문화유산이란 곧 문화재를 말한다. 문화재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구전, 음악, 인종학적인 유산, 민속, 법, 습관, 생활양식 등 국민적인 체질의 본질을 표현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래서 근래에는 [문화재]라는 말보다 [문화유산]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그래서 본 읍지에서도 문화재보다는 조금 범위가 넓은 문화유산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문화재로 지정된 이외의 우리 선조들이 남기신 문화유산을 살펴보고자 한다.문화재는 문화재법에 의하여 형태별로 4가지로 나누는데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이다. 또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지정되는 국가 지정문화재와 함께 지방 지정 문화재가 있는데 국가지정 문화재중 유형문화재를 국보, 보물, 사적, 명승으로 천연기념물, 무형문화재, 민속자료 등으로 구분한다. 지방지정 문화재란 지방장관이 그 관할 구역 안에 있는 문화재로서 국가가 지정하지 않은 문화재 중 보존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것을 [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창녕군은 제2의 경주라 할 만치 국보 2점을 포함하여 보물 9종, 사적 5종, 중요무형문화재 2종, 중요민속자료 2종 등이 있으며 도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13종, 기념물 4종, 민속자료 1종, 문화재자료 19종이 있다. 비지정 문화재로 향토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는 것은 모두 24종에 이르고 있는데 우리 고장에 있는 문화재로서 국가 지정문화재는 없고 도지정문화재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문화재 현황
구 분 |
지정번호 |
문화재명 |
수량 |
소유자 |
소 재 지 |
지정일 |
관리단체 |
도지정 기념물 |
60 |
曺遇禧 曺益修墓 |
1圓 |
조씨문중 |
성사리(관동) 산172-1 |
83. 8.12 |
조병태 |
문화재자료 |
83 |
九陣山城 |
1圓 |
국유 |
고곡리 산193 |
83.12.20 |
창녕군 |
향토문화재 |
12 |
縣監高裕善政碑 |
1기 |
창녕군 |
칠현리 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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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현리 |
위의 도지정 문화재 및 비지정문화재(향토문화재) 이외에 우리 읍에 있는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 것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조사된 석비 중에 묘비나 제단비 정 재실 안에 있는 것 중 시대가 조금 뒤떨어지는 개인 명의로 된 비들은 [제9장 민속 종교] [三. 민속문화유산, 비석]에서 다루었다.
남지읍향토문화유산일람
구 분 |
문 화 유 산 명 |
수량 |
소유자 건립자 |
소 재 지 |
관리단체 |
선사유적 |
詩南 덤벅굴 |
1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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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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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
詩南古墳 |
1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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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남리 산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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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山 말무덤 |
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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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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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支 조산분 |
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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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리 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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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
鼓谷山城 |
1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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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곡리 산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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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지 |
鼓谷里 밤밭골 窯址 |
1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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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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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비 |
縣監洪鍾華愛民善政碑 |
1기 |
남곡리 |
칠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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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監趙雲漢愛民善政碑 |
1기 |
오영대외 |
성사리 5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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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守閔丙吉愛民善政碑 |
1기 |
수개동민일동 |
수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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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監李穫遺墟碑 |
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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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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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陽河氏列行碑 |
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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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리 상대포 |
연안차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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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李氏孝列碑 |
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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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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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性德施惠不忘碑 |
1기 |
신전동민일동 |
신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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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지 |
道山書院址 |
1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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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리 518 |
영산신씨 |
명승지 |
吾與亭 |
1원 |
밀양양씨 |
시남리 산68 |
밀양양씨 |
南旨鐵橋와 帝王潭 |
1원 |
남지읍 |
남지리 남포 |
남지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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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
黃氏窟 |
1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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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 |
황씨문중 |
1. 기념물
사진설명 ( 조우회 조익수 묘 ( 曺遇禧 曺益修 墓 ) 전경 )
* 경남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0호 (1983. 8. 12 지정)
* 성사리(관동) 산 172-1
관동 마을 서쪽 서재골로 가는 길 위쪽 산 능선에 동향으로 있는 창녕 조씨(曺氏)의 분묘인데 그 봉분이 특이
하고 거대하므로 인근에서는 조능(曺陵)이라 불린다. 이 분묘는 고려시대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시의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피장자는 고려 때의 사람 창성부원군 조우희와 조선조 초기 관직을
지낸 병마절제사 조익수이다. 조우희는 고려말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으로 유명한 창성부원군 조민수 (曺敏修) 장군의 아버지이며 조익수는 조 장군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조우회의 아버지는 조원주(曺元柱)이다.
조우희의 묘는 산 능선의 상부에 있는데 원형이며 그 아래에 있는 조익수의 묘는 그 분묘의 모양이 고려 때의 분묘 특징 그대로 나타낸 사각형 분묘로 기단석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사각형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성토하여 봉분을 만들었다. 고려 시대의 분묘의 특징을 잘 남아 있다하여 도지정 기념물 60호로 보호되고 있다.
1999년 읍지편찬위원회 조사위원의 조사에 의하면 위에 있는 조우희의 묘는 봉분 전면에 거대한 화강암 장대석이 호석(護石)처럼 봉토를 받치며 있는 묘비가 있다. 이것은 아래변 길이가 3.m, 윗변 2.4m, 높이가 70cm로 [麗朝正順大夫判典儀寺事贈左侍中府院君昌寧曺公諱遇禧之墓] 그 왼편에 계속하여 [配贈貞敬夫人星山李氏墓有昌寧龍藏寺西子坐]라고 새겨져 있다. 봉토의 둘레는 13.8m(전면의 호석 겸 비석과 합하면 16.8m), 높이는 1.5m이다. 넓고 얇은 상석과 높은 향로석이 앞에 있으며 축대 좌우에 문무석이 2기가 서 있다. 이 문무석의 높이는 1.2m 정도가 되었다. 축은 내축, 외축 등 1단씩 3개의 축대로 되어 있다.
조우희의 묘 아래에 있는 분묘 앞 왼쪽에 [曺益修墓] 라 새겨진 고색창연한 묘비가 있다. 조선 초기 경상도 병마절도사 초토안무사를 지낸 조익수 묘비의 비신(碑身)은 높이 120cm, 너비 50cm, 두께 21cm이며, 좌대는 거북 형상인데 길이 130cm, 높이가 20cm, 폭이 67cm이며, 이수는 용의 조각이 아름다운데 높이가 60cm로 전체 높이는 200cm이었다. 비문은 당시의 행적과 증직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멸이 심해 비의 전 후면에 많은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음은 확인되었으나 알아 볼 수 있는 글이 적어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좌대, 비신과 이수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방식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 사회제도와 관직의 연구자료로 가치가 높다.
분묘는 장대석 8개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지상)에 2단으로 장대석을 8개씩 쌓았는데 전 후면에 3개씩 좌우에는 상대석 2개를 걸쳐 사각으로 짜 눌러 놓은 축대 형식으로 전면의 너비가 360cm, 옆면 길이가 420cm로 분묘는 직사각형의 형태이다. 2단의 축대 높이는 97cm이며, 그 위에 봉토를 평평하게 올렸는데 기단에서 봉토 위까지 높이는 110cm 정도가 되었다. 2단째의 보통 장대석 하나의 길이가 220cm, 높이가 33cm이며 그 아래 장대석은 길이는 위와 비슷하나 높이가 60cm정도가 되고 돌을 잘 다듬어 빈틈이 없도록 쌓았다.
묘 앞 좌우에 문무석이 2기가 서 있는데 높이는 160cm이며 내축 외축 등이 1단씩 3개의 축대가 있고 상석이 넓고 얕은데 향로석은 없어지고 그 기초만 있다. 이곳 문무석은 뒤쪽 조우희 묘의 문무석보다 조각 솜씨가 좋아 보였다.
2. 문화재 자료 (文化財資料 )
▣ 구진산성 (九陣山城 )
* 경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83호(1983. 12. 20. 지정)
* 고곡리 산 193
이 구진산성은 고곡리의 서쪽 구진산에 있는 가야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구진산은 고곡리와 칠현리와의 경계선에 있는데 산정을 중심으로 토석 혼용의 성이 있는데 가야시대 산성이라 전해온다.
사진설명
<구진산성 평면도 및 단면도>
성의 넓이는 고곡리 산 193번지 외 215번지(5정 4,200보) 220번지(3정 250보)등 1,441,000m2로 큰 성인데 특이하게도 장방형의 형태를 갖고 있다. 즉 남북 550m, 동서로 262m 이며 성벽은 토석
혼합으로 윗면 1.5m, 높이 3.7m, 아래면 3.4m의 사다리꼴로 쌓았으나 오랜 세월 자연적으로
붕괴되어 황폐해져 버렸다.
연대나 유래를 살필만한 기록은 없으나 자연 요새인 낙동강을 사이에 둔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의
산성과 동일한 능선에 축조되어 있는 사실을 보아 이 성의 동쪽 낮은 산에 위치한 고곡산성과 함께
가야시대의 축조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휘하의 의병들이 무너진
성을 수축하여 지켰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에서 곽재우의병장이 이끄는 의병과 왜군이 접전하게 되는데 아홉 번의 격전을 치르며 진(陣)을 아홉 번 치고 아홉 번 승리한 구전구승
(九戰九勝)의 산이라 하여 구진산(九陣山)이라 불렀다는 지명 유래가 전해져 오므로 이 산성은
낙동강으로 나가거나 창녕현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켰던 요새였음에 틀림없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6 25한국전쟁 당시 우리 고장은 낙동강 교두보의 역할로 [돌출부 전투]로 유명한데 바로 이 산에서 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피란을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이 산성 내에는 피아간 군인의 시체가 무수히 있었다고 한다. 어지러이 판 참호와 사방에 흩어진 유골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전적지 순례를 하러 육군 병사를 비롯하여 많은 군 관계자가 찾아오는 것으로 보아 고금을 통해 이 산성이 중요한 요지임에 틀림없다고 평가되고 있다.
1958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한 바 있고, 1983. 3. 1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고, 다시 1983. 12. 20 경상남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8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산성이 아래쪽 고곡산성과 혼동되어 문화재 안내표시판이 고곡산성 입구에 게시되고 있었으며, 최근 고곡산성의 지표조사와 보수가 추진되면서 이 산성의 이름으로 혼용되고 있다. (고곡산성 참조)
지금 현재 평지는 소나무와 억새가 우거진 산지로 변했고 일부는 마을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3. 향토문화재
* 창녕군 향토문화재(비석) 제13호
* 칠현리 111-3
칠현리 옻고개 정상 도로변 바위에 기단이 없이 서 있는 이 비석은 조선 영조 때 창녕현의 현감을 지냈던 (도임 영조 33년 정축:1757 - 이임 영조 36년 경진:1760년) 고유(高裕)의 선정을 기리는 비이다. 최근 도로를 확장하면서 당초 자리에서 조금 옆으로 기단을 만들고 이전하였다.
고유현감의 은덕을 입은 남곡면의 사람들이 건륭(乾隆) 27년(1762년) 3월에 세운 것인데 비석의 크기는 기단이 없이 높이 80cm, 폭은 35cm인데 또 창녕읍 옥천리에도 고유 현감의 선정비가 하나 더 있다.
비의 전면 중앙에는,{本郡縣監高侯裕淸德愛民善政碑} 비의 전면 우측에 명(銘)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上句湮滅) 盡除民廢 來暮急速 黎情落寬} ( 민폐를 없애고 정사가 늦게 닿아도 공사는 빠르니 은근한 정이 고요히
떨어지도다) 비의 전면 좌측 하단에 건립일자와 건립자가 있는데,{乾隆二十七年壬午三月 日南谷面立} 이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선정비의 건립 유래는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아이를 낳지 못해 시가에서 쫓겨난 한 아낙네가 칠현 마을에 개가하여 와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소박 당한 옛 아내의 정을 잊지 못한 전남편이 찾아 왔다고 한다. 그녀는 문전박대를 않고 전남편을 반갑게 맞아 닭을 잡아 대접했다. 그런데 그것을 먹자마자 옛 남편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옛 남편을 독살하였다는 살인혐의로 그녀는 곧 구금되었다. 여인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고유 현감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끝에 옛 남편이 지네의 독이 들어간 닭고기를 먹고 죽었음을 밝혀내 여인의 살인 혐의를 벗겨 주었다고 한다. 고 현감이 멋지게 살인사건을 해결해 주자 이를 칭송하여 남곡면민이 정성을 모아 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제10장 사화전설 참조)
고유 현감은 우리 창녕현의 명환(名宦)으로 창녕현읍지에 오른 분으로 21세에 반궁친시(泮宮親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창녕현감 재직 시에는 조정에 소를 올려 창녕현민의 세 부담을 줄였으며, 그 이후에 벼슬이 동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송사 처리에 아주 밝아 송첩(訟牒)이 뜰에 가득한데 판결이 신과 같았다고 관찰사 윤동수(尹東受)가 감탄하였다고 한다.
1. 향토 문화유산
1) 선사유적
사진설명 ( 시남리 덤벅골 )
(1) 시남 ( 詩南 ) 덤벅굴
시남리 덤벅골 낙동강을 북쪽으로 바라보며 강 절벽위에 있는 굴로서 선사시대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길이가 약 10m나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1999년 3월, 읍지 편찬위원회 조사위원들이 실측 조사하였더니 굴 입구는 높이 1.8m, 폭이 1.75m이고 굴의 길이는 6.3m, 굴의 안쪽 높이는 1.5m, 너비는 1.15m인데 안쪽은 좁아 사람이 들어 갈 수 없었다.
굴안 좌우 벽에 사람의 큰 손자국이 있고 바닥에도 큰 발자국이 있다고 이전 조사 기록에 있으나 금번 탐사 결과 굴을 이룬 돌은 수성암계 청석으로 굴 벽에는 손바닥 자국이라 할 만한 흔적이 여러 군데 보였으나 발자국은 훼손이 심하여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마을에 전해 오기는 옛날 한 힘이 센 장수가 이 굴속에 살았는데 그때의 그 흔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적이 생성된 시기가 선사시대로 추정되는 것은 우리 나라 고성, 또는 울산에서 발견되는 공룡 발자국의 생성 시기가 선사시대이므로 손자국 또는 발자국의 생성 시기도 같은 생성 시기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 선사시대에 강 가까이 있는 이 굴에서 사람이 살면서 고기를 잡아먹으며 맹수들의 접근이 어려운 이 굴에서 살았으리라 추정된다. 6 25 때도 이곳에 청단리 변모씨 일가가 피란을 하였다가 몰살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굴 바로 맞은 편 절벽 동쪽에 작은 굴이 하나 더 있는데 굴 입구의 높이는 1.8m, 너비는 1.8m, 굴의 길이는 7.1m로 그 깊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쪽은 낮고 좁아서 사람이 기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 굴에 불을 때면 연기가 유어면 어디에서 솟아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근에 있는 시남리 고분과 관련지어 보면 우리 읍에서 가장 역사 깊은 유적이 이곳에 있으니 시남리가 우리 고장에서 최초로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추정된다.
2) 고분 (古墳)
(1) 시남리 고분 (詩南里 古墳)
* 시남리 산 40
이 고분은 유어면과 경계지역인 진골에 있는데 수량은 1기이다. 봉토의 높이는 약 5m이며 직경은 약15m 의 비교적 큰 봉토분으로 조사되었다. 조사 당시 동민들은 고려장 터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했으며, 내부는 석실(石室)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래 전에 도굴되어 토기편 등이 채집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99년 3월 조사위원의 조사 결과 이 고분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산 40번지 끝자락 진골의 길가에 큰 돌무더기가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는데 이 돌무더기는 도로 확장 때 도로부지로 다 들어가고 그 일부 돌무더기는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아마 이 돌무더기가 조사된 고분으로 추정되며 봉토는 무너져 내려 석실을 조성하였던 돌만 남아 돌무더기처럼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서 작은 고분들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도굴되었으며 여러 곳에서 많은 토기들과 함께 길고 큰 숟가락과 젓가락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 되어 흔적이 살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주민의 증언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시남리에는 많은 고분들이 있었고 이들 고분들이 존재함에 따라 계성면 계교, 계남일대나 창녕읍 교동 송현동 가야 고분처럼 가야시대의 고분임에 틀림없으나 고고학계의 조사가 전연 없어 그 실태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2) 龍山 말무덤
* 용산리 마분산
이 고분은 홍의장군 곽재우 말무덤이라 전해오는데 낙동강변 개비리(영남수리 양수장 위) 산의 정상에 있는데 수량은 1기이다. 봉토의 높이는 약 5m 가량이며 둘레는 20여m 되는데 오래 전에 도굴되어 봉토가 일부 함몰되었다. 내부는 석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봉토 주위에는 기단석을 쌓아 돌렸는데 파손되어 있다.
의병군과 함께 싸웠던 말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전해 오지만, 이 고분은 낙동강 절벽을 의지하고 왜병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군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여기에 묻힌 자가 말이 아니라 이 싸움에 참가하여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말무덤은 전설과는 달리 예사 무덤이 아닌 것이다.
말무덤의 [말]은 말(馬)이 아니라 크다는 뜻의 접두어(接頭語) [말-]이다. 접두어[말-]은 어떤 명사 위에 붙어서 그 물건이 큼을 나타내는 말인데 [말매미] [말벌] 등등으로 큰(왕) 매미, 큰(왕) 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큰 무덤이란 뜻으로 [말무덤]이라 사람들이 불렀는데 후대에 와서 이것을 모르고 용맹한 말 전설과 융합되어져 그만 말(馬) 무덤이 된 것이 아닌가한다. 도천면 송진에도 똑같이 곽망우가 전쟁 중에 타고 다니던 말이 죽자 묻어 주었다는 커다란 고분이 있는데 이 역시 말무덤이라 불리고 있어 그 역시 말의 무덤이라 보기에는 너무 큰 고분이다. 그러므로 이 말무덤은 전사한 의병들의 시체를 격전장소의 산봉우리에 합장(合葬)하고 커다랗게 봉분을 지어 자손 만대에 그들의 용맹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송진의 말무덤 장소 역시 임진왜란 때 격전지이고 전승지이며 우강산성의 옆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일대는 빼어난 경관이 있는 강변의 절벽을 따라 칠현리-창아지-용산리-남지리 등을 연결하는 개비리길 도로와 마분산 등산로 등의 개설, 의병군의 첫 전승지 기강나루와 함께 임진왜란의 살아 있는 전적지로 개발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훌륭한 관광지가 될 것이다.
(3) 아지 ( 阿支 ) 조산분
* 아지리 227
아지리 마을 앞에 10평정도 되는 큰 자연석으로 주위를 쌓아올려 조성된 고분형태의 커다란 무덤으로 마을에서는 조산분이라 불린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이틀에는 당산제를 모신 후에는 이 조산분에도 제물을 차리고 정성 드려 제사를 지낸다.
전하는 말로는 예전에는 이곳에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어느 해 마을 처녀가 이곳에 빠져 죽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 마을에 재앙이 듦으로 우물을 메워 처녀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니 그 후부터 재앙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여름 정자나무 아래 더위를 식히려 모여 앉은 촌로들은 정말 저것이 무엇인지 학자들이 와서 발굴하였으면 좋겠다고 궁금증을 나타냈는데,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 이 근처의 출입을 자제하고 잡스러운 행동을 금기시 하고 제사를 올리는 것으로 보아 마을 지도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3) 성곽 ( 城郭 )
사진설명 ( 신라시대의 성으로 조사된 고곡산성의 터(남쪽편) )
(1) 고곡산성지 ( 鼓谷山城址 ) * 고곡리 산 220
고곡리에는 산성이 2개 있는데 경남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83호로 보호되고 있는 구진산에 있는 구진산성과 남곡중학교 남쪽 앞산인 종산(鍾山)에 있는 고곡산성이다. 이 성은 구진산성과 함께 가야시대의 고성(古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낙동강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성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어 산정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이 산의 동부 6부 능선을 타고 서남으로 타원형으로 축조된 석성으로 홍의장군 곽재우의병장이 이끈 의병군이 낙동강에서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막으며 내륙을 지킨 전승지의 산성으로 이름나 있다. 그래서 곽재우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안의 면적은 고곡리 산 220번지(2정 2,800보) 일대로 약 6,600평 정도이다.자연석 또는 다듬은 돌로 쌓은 성벽은 최고 높이는 약 4m이며 주위의 길이는 약 1.5km이다. 내성도 자연석(화강석)으로 사다리꼴로 쌓았는데 성의 윗면은 2.2m, 높이는 3.5m, 하부 면은 5.7m으로 규모가 큰 성벽이었다. 외성은 산비탈 경사를 이용하여 성을 쌓아 인공적인 절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성벽의 보존상태는 극히 나빠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해 무너져 내린 석재가 북쪽으로 갈수록 넓게 흩어져 너덜강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 성문과 성벽의 흔적만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1958년 10월 문화재 지정을 신청한바 있으나 아직 지정되지 않았는데 구진산성보다 성벽이 많이 남아 있고 도로변이어서 올라가기에 용이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최근에는 이 두 성을 혼동하거나 또는 2개의 성을 하나의 성으로 보는 일도 더러 있다. 뿐만 아니라 잠깐 왜병들에게 점령되었던 일이 있었든지 왜성이란 말도 있는데 왜성이란 왜병들이 미쳐 철수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남해안에 갇혀 있을 때 남해안 일대에 쌓았던 성을 가리키므로 우리 고장 산성과는 전연 상관없는 일이므로 왜성이란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주민들에게는 이 성이 곽재우성이라 불리고 있다. 곽재우장군이 이 성에서 왜병과 격전을 치르고 성을 수축하였기 때문으로 남곡초등학교와 남곡중학교 교가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앞에는 곽재우성 굳게 쌓였고 ] [정의의 곽충의성 앞에 높이고 홍익의 뜻을 받은 동방의 횃불 ] 현재 성내는 개인 소유여서 개인 분묘가 들어서 있다.
사진설명 <고곡산성 평면도와 단면도>
이 산성은 일부 성벽이 매몰되었거나 파손 도괴(倒壞)되었으나 최근 문화공보부의 지원에 의하여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다. 1997년도에 추진된 사업비는 1억4천만원이었다. 지표조사 보고서를 간략하게 수록한다. 이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전부터 전해 오던 성에 관한 설명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고곡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 鼓谷山城 地表調査 報告書) 요약
* 조사 시행일 : 1997. 7∼8월
* 시행청 : 창녕군 * 현장조사 : (주)옛터건축사사무소
I. 머리말
창녕군에서는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산성에 대한 복원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앞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산성은 구진산의 동쪽자락에 해발 84.5m의 낮은 산의 6부 능선을 타고 서남쪽 사면을 평면 타원형으로 석축을 둘러쌓았다. 원래 토석혼축성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표조사와 병행하여 실시한 시굴 Trench 조사 결과, 토석혼축성이 아닌 협축식석성(夾築式石城)으로 산성의 입지조건이나 출토유물로 볼 때 초축(初築) 시기가 조선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었으며, 삼국시대의 대 가야방비용 또는 낙동강에 출몰하는 왜구의 방비용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기저부의 잔존(殘存)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성곽 복원에 더없이 좋은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 자문위원 : 심봉근(동아대학교 박물관장, 도문화재 위원) 이상정(경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도문화재 위원) 고영훈(경상대학교 건축공학과장, 도문화재 위원) 이굉지(경상남도 문화재 연구위원)
* 조사 책임 및 보고서 집필 : 이원길(옛터건축사사무소 대표) 송계현(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나동욱(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II. 위치(位置)와 연혁(沿革)
산성의 위치는 북위 35°26', 동경 128°26' 사이, 고곡리 산220번지 일대,
III. 유적 현황 (遺蹟 現況)
이 산성은 부근에 있는 산 중에서 가장 높은 구진산의 동쪽으로 돌출한 해발 84.5m의 낮은 산의 동남쪽 사면에 평면 타원형으로 석축을 둘로 쌓았다. 이 성의 주변 북쪽으로는 해발 240.7m의 고운봉에서 내려온 낮은 산과 동쪽으로는 아지마을의 뒷산인 206.8m의 산이 분포하고 있어 남쪽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주변의 야산으로 들러 싸여 성 내부가 조망될 수 있는 상태이다.
도로에서 입간판이 있는 곳에서 오르면 성벽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조사 후 문지(門址) 로 밝혀진 이 부분은 융기상의 성벽이 보이고 있었고, 성벽 내부의 채움석으로 보이는 잡석편이 추정 성벽 내외로 흘러내린 상태였다. 이곳 주변은 협축의 성벽으로 추정되는데 서북쪽으로 약 15m 정도, 동남쪽으로 약 10m 정도 계속되다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을 제외한 부분은 석재들이 외벽쪽으로 흘러내린 상태를 보이고 있었고, 성의 안쪽은 평평한 길을 이루고 있어 내탁식(內托式)성벽으로 추정되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추정높이 약 5m의 외벽이 평면상 거의 직선을 이루며 정상쪽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성 내부 약 7m 안쪽까지는 비교적 평탄면을 이루어 회곽도상(回郭道狀)을 이루고 있다. 그 안쪽으로는 약 2m 정도의 암반이 벽을 이루듯이 서 있는데, 석벽의 질이 성벽석과 같아 이곳의 암반을 채석하여 성벽을 만들고 그 부분을 이용하여 성내 순환도로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부 성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다시 내려와 경사를 이루는데 외벽은 북쪽 성벽에 비하여 비교적 많은 성석들이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문지 주변에서 보이는 잡석편은 보이지 않고 성벽 안을 채우고 있는 장대석(長大石)들이 보이고 있다.
사진설명 (복원된 고곡산성의 성벽) 북쪽편
성벽은 남쪽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꺾이면서 경사지게 계속되는데, 경사가 완만한 이 성벽은 거의 직선상으로 성벽에서 가장 낮은 지점을 돌아 문지로 연결된다. 이곳도 역시 4m 내외의 회곽도상의 평탄면이 계속되고 있는데, 성 외벽 동쪽으로는 대부분 경사가 급한 지역으로 성벽의 유실이 심한 상태였다. 문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0m 지점이 성내에서는 가장 낮은 곳으로 배수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유실이 심하여 지표상으로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형상 성내는 대부분 동남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은 정상부 평탄면과 이곳에서 남쪽 조금 아래에 동서방향으로 민묘(民墓)가 들어서 있는 곳뿐이다. 이곳 주변에는 성벽에 사용된 가공된 석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정상부의 경우 기와편이 눈에 띄기도 하였다. 현재 성내에서는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없는데 성의 정상부에서부터 동남쪽 성벽 아래까지 곳곳에 자연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용수의 확보가 곤란하였을 것으로 보였다. 촌노들의 동북쪽 성 아래에 샘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현재 이곳을 흐르는 작은 개천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내에 필요한 물은 이곳에서 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IV. 유구 (遺構)
성곽은 대부분 붕괴된 석재가 성밖으로 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린 상태로, 지표상 나타난 상태로서는 성벽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정확한 성의 윤곽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굴트렌치를 넣어 조사하였다.
① 문지(門址)
문지는 성벽의 동쪽 끝 지점으로 좌우부분은 협축식성벽으로 추정되었다. 촌로들이 어렸을 때 이곳에 규모가 큰 문지가 있었는데 마을에서 집을 짓거나 담장을 만들면서 뜯어 갔다고 한다.
외벽은 생토암반층을 파고 바닥을 정지한 후 30∼50×5∼50×17cm 크기의 할석(割石)을 면이 넓은 쪽을 밖으로 하여 수평줄을 맞춘 [品]자상으로 축조하였는데 이음새의 틈이 거의 없도록 하였다. 석축은 6단으로서 잔존 높이가 1.1m이다. 한번의 증축이 있었던 것을 생각되었다.(이하 생략)
② 성벽
◇ 문지에서 10m 지점(북쪽) - 내벽의 축조는 문지의 내외벽과는 달리 문지 내벽 상부에서 주사된 것과 같이 30∼40×40×20cm 비교적 큰 할석으로 내벽을 쌓았는데 3∼4단이 잔존하고 있으나 붕괴되기 직전의 상태이다. 내벽 바닥의 석축은 비교적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 정상부 - 남쪽의 잣고개와 통하고 있어 문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외벽에서 약 7m 안쪽에 암반벽이 약 2m정도 수직으로 서 있어 성벽은 주로 성 내부의 암반지대에서 채석하여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성축은 지표하 2m 지점의 암반 위에 축조되었으며, 7단 정도가 잔존하여 있다. 외벽의 석축은 높이 12m 정도로 6단이 잔존하여 있다.
◇ 서쪽 - 외벽의 석재들은 규격화되어 있지 않으나 수평줄에 맞추려한 의도가 보인다. 내벽의 지표하 60cm까지 갈색부식토가 형성되어 있으며, 토기편이나 철기들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퇴적층이 낮은 점, 유물의 출토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정상부의 건물지와 관계 있는 듯하다.
◇ 남쪽 - 성벽은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붕괴된 석재로 복원한다면 현재 잔존 높이에서 약 3m 정도 더 복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성벽체는 길이 60cm 내외의긴 돌로써 성벽의 진행방향과 직교되게 차곡차곡 쌓았다. 외벽은 판석상(板石狀)의 장대석으로 틈이 없도록 축조하였는데 7단 정도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는 낙동강 쪽을 주 방위선으로 하여 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③ 정상부(성 중앙)
사진 설명 ( 고곡 산성 )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 석재들이 간간이 눈에 띄고 있다. 정상부에서 문지로 통하는 곳에 건물지와 관련 있는 유구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민묘가 들어서 있다. 민묘의 서쪽 부분에 석재가 집중되어 있어 폭 1m의 남북으로 십자트렌치를 넣었으나 곧 암반생토층이 노출되었다.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기와편과 분청사기편 철우(鐵偶) 등이 수습되었고 사유지로 인하여 확장조사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만 기와가 조사되거나 분청사기편이 조사되므로 조선시대의 기와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남쪽의 비슷한 지형에서도 간간이 석재들이 박혀 있어 이 두 곳이 건물지 존재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
V. 유물 (遺物)
유물은 대부분 내벽 퇴적층에서 출토되었으며 토기편과 약간의 철기, 자기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① 토기류 - 회청색 경질토기 뚜껑편, 회백색 경질토기 고배편, 회청색 경질토기 호편, 흑청색 경질토기 장경호편, 회청색 경질 완편(毴片 : 문지에서 출토, 소성이 양호하며 속심은 자색이다.) 등 24점
② 기와류 - 암기와편 5점
③ 철기류 - 확쇠, 판상(板狀) 철기, 철부개편(鐵釜蓋片), 철우(鐵偶 : 삼각형의 몸체에 머리를 약간 든 형태로 다리가 4개 있었으나 1개만 남아 있다. 등 부분에 말갈기와 같은 돌대(突帶)가 남아 있다. 길이 7.7cm, 잔고 3.5cm), 철정(鐵釘 : 목제를 박는데 쓰이는 것으로 머리부분은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 등 7점
④ 자기류 - 분청사기편(회청색조) 5점, 백자편(옅은 회색, 황록색) 2점
⑤ 기타 - 청동함편으로 동체부는 삭아 없어지고 테부분을 중심으로 남아 있다. 길이 15cm, 잔고 4cm, 두께 0.1cm
VI. 성벽 축조수법(城壁 築造手法)의 고찰(考察)
토성에 비하여 석성 축조는 공역이 많이 들고 축성재료인 석재의 운반 가공 등이 어려운 반면 한 번 축조되면 방어력도 우수하고 유지 및 관리에도 다소 편리하다. 견고성 유지를 위하여 성벽의 기저부를 보강하기 위한 기단보축기법이 사용되었는데 함안 성산산성, 창녕 목마산성, 대전 계족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이 성에서도 조사되었다.
석성의 축조방식에는 성벽의 안팍에서 체성을 쌓아 올리는 협축(夾築)방식과 눈에 보이는 외벽만을 돌로 쌓아 올리고 그 내부에는 흙이나 잡석을 채워 넣어 성벽을 축조하는 편축(片築)방식으로 대별된다.
이 성에서 협축된 성벽이 확실히 조사된 곳은 문지 등 성벽 여러 곳으로 내벽을 쌓고 일정한 깊이를 되메우기한 형태이다. 그 외의 성벽도 지표상으로는 편축으로 보이나 모두 협축으로 추정된다.
고대산성의 체성 벽면에는 여러 가지 축조형태가 나타나는데 이 산성은 비교적 다듬은 형태의 장방형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이 형태의 특징은 일정한 모습의 성돌을 사용하여 축조하기 때문에 비교적 수평선을 맞추어 같은 줄로 [品]자형 축조기법(橫範堅築)이다.
이 산성의 경우 고대 산성 중 시기가 늦은 형식이다.
VII. 맺음말
성벽구조를 살펴볼 때, 지표상으로는 토석혼축으로 된 내탁식성벽으로 보이지만 내 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성벽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성벽의 길이는 기존에 알려진 1km보다 훨씬 작은 428m로서, 성벽의 폭은 대개 5.2m 내외이다. 성벽은 규격화된 성돌을 수평줄눈을 맞춰 쌓은 [品]자형 기법의 협축식석성으로 밝혀졌다. 또한 내외의 성벽을 채우는 수법에 있어서 비교적 길쭉한 석재를 이용하여 성벽이 진행하는 방향과 직교되게 쌓되, 윗돌이 아랫돌을 누르도록 하여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고 있다.
한편 문지가 조사되었는데, 1차의 폭이 4.6m, 2차가 3.2m로 일단 초축과 동시에 축조된 문지는 아니지만 문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확쇠가 좌우에 출토되었다.
이 산성의 축조시기에 있어서 이 산성의 출토 유물이나 성벽의 축조수법으로 보아 신라의 축조로 추정된다.
먼저 지리적으로 이 산성은 낙동강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 성곽의 주 방어선이 강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낙동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창녕이 신라가 가야 백제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문지를 비롯한 성벽 부분에서 [기단보축]의 수법이 보이고 있는데 신라의 축성기법으로, 현재 확인되고 있는 삼년산성, 명활산성, 성산산성, 계족산성 등에서 이와 같은 수법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의 축조 시기는 일단 빨라도 신라에 의한 하주 설치(A.D. 555)년대 이후로 볼 수 있다.
셋째, 출토유물은 단각고배편(短脚高杯片)이 다수를 차지하며, 경부파상문호(頸部波狀文壺), 타날문호(打捺文壺),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 평저토기편(平底土器片) 등 7세기를 중심으로 한 유물이 많다. 그 외 생활토기인 다수의 호편(壺片)과 철기들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분청사기나 백자편 등이 조사되어 조선 초기에도 성의 사용이 짐작되고 있다.
끝으로, 이 산성의 명칭에 관한 것으로 남지읍 고곡리에는 현 남곡중학교 앞산과 북실의 서쪽 구진산의 꼭대기에 산성이 있다. 여러 문화재 관련서에서 금번 조사된 고곡리에 있는 산성을 구진산성으로 부르고, 구진산 꼭대기에 있는 성을 전기 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성의 이름을 혼돈한 것으로 창녕군지에 나오는 것처럼 구진산 위에 있는 성을 구진산성으로 부르고, 금번 조사된 성은 삼국시대의 성으로 밝혀진 만큼 지명을 빌어 고곡산성으로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VIII. 산성 복원사업 계획서
(전략) 이 산성의 복원 계획과 더불어 이 산성의 문화재 등급을 격상시킬 수 있도록 노력함도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성벽을 기준으로 하여 성벽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주변 유적의 정비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면 창녕군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길이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이하 생략)
4) 도요지 (陶窯址)
사진설명 ( 조선시대 관요가 있었던 밤밭골의 도요지 )
(1) 鼓谷里 밤밭골 窯址 * 고곡리 밤밭골
조선시대에는 지방마다 관에서 운영하는 관요(官窯)를 두었는데 그 중 창녕현의 관요는 창녕인수부(昌寧仁壽府)로 바로 우리 고장 고곡리에 있었다. 인수부는 태종 17년(1417) - 세종 6년(1462)에 궁중에 설치된 세자부(世子府) 소속의 기관이었는데 대체적으로 이들 관요에서는 인화분청자기(印花粉靑磁器)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도자기를 생산한 시기는 상당히 오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 [창녕현] 란에 보면 관요인 자기소(磁器所)가 남곡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昌寧縣 磁器所一 在縣南 南谷里 下品
이곳 창녕인수부에서 생산된 자기는 [하품]이라 하였으니 하품은 일반 생활용의 그릇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도 밤밭골 인수부 요지 터에서는 자기 파편이 발견되고 있으나 가마터는 함몰되어 그 자취가 불분명하다.
5) 석비 (石碑 )
사진설명 (조각 솜씨가 뛰어난 이수와 귀두를 갖춘 조익수 묘비)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사실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돌에 글을 새겨 오래 보존하려는 경향이 높았다. 곧 비(碑)는 어떤 사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나무 돌 쇠붙이 등에 글을 새겨 세워 놓은 것인데 대체적으로 돌로 제작한 비석이 많다. 우리 창녕군에는 국보로서 진흥왕순수비가 있는데 이는 신라 진흥왕 때 건립된 비석으로 역사적, 금석문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는 조릉 앞에 있는 고려시대 건립으로 추정되는 조우희와 조익수의 묘비와 조선시대의 비석이 몇 기 있을 뿐이다. 비석을 크게 나누어 묘비(墓碑)와 사적비(事蹟碑)가 있다. 묘비는 죽은 이의 행적을 기리는 것으로 묘 앞 또는 근처 길가나 묘소 입구에 세우는데 신도비, 묘갈, 묘지, 제단비 등으로 당대에 가장 명망이 있고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부터 글을 받아 가장 유명한 서가(書家)로부터 글을 얻어서 비를 세우는 것이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인데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하였다. 이 비석들은 역사적 인물에 대하여 좋은 면만 서술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는 적고 그보다는 서예사(書藝史) 자료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을 가름하고 있다. 그 외 탑비, 능묘비, 기공비(紀功碑), 송덕비, 사비(祠碑) 개인의 일대기비 등 사묘비도 있는데 이 비들은 개인적인 면이 강한데 충신 열사의 기공비인 경우에는 사묘나 단소(壇所)에 부속되어 세워졌다.사적비는 묘도문자(墓道文字)와는 달리 어떤 특수한 사실을 기록 기념하는 것으로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戰蹟碑)나 기념비, 사찰에 대한 기록인 사적비(寺蹟碑), 향교나 서원의 사실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 명인이 탄생 또는 거주했던 자리 또는 고적에 세운 구기비(舊基碑), 유허비(遺墟碑), 기적비 등이나 표석, 관아 입구나 도로변에 있는 현감 군수의 치적을 기리는 덕정비, 선정비, 송덕비, 거사비(去思碑), 거사불망비(去思不忘碑), 시혜비(施惠碑), 추모비 등, 국가의 교화정책과 관련하여 정려비인 효자 열녀의 행적을 기록한 효자비, 열녀비, 열부비 등도 있다. 최근에는 개인의 시가(詩歌)나 산문을 새긴 노래비나 문학비 등 일종의 기념비도 건립되고 있다. 위의 분류에 따라 우리 고장에 있는 비석들 중에서 묘비 성격의 석비인 묘갈 사묘비 제단비 등과 광복 이후 건립된 사적비인 공적비 송덕비 시혜비 기적비 전적비 등은 제9장 민속 란에서 기술코자 한다. 본 장에서는 사적비 성질의 것 중에서 다수인인 동민 또는 유지, 지역민들이 세운 것 중 시기가 해방이전의 비석을 다루고자 한다. 그 비석이 역사적으로 그 사실이 인정되는지 어떤지의 문제나 또는 문화재나 금석문 자료를 보는 측면에서 문화유산으로의 가치가 충분한가 어떤가 하는 가치평가는 후세 전문가에게 맡기고 다만, 세운지 오래된 것으로 조사된 몇 기의 비석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그 비문과 번역문까지 실어서 후세의 향토연구 자료로서 제공하고자 한다.
(1) 현감 (縣監)의 공덕비(頌德碑)와 덕정비(德政碑)
(1-1) 홍종화현감 선정비(洪鍾華縣監 善政碑)
* 소재지 : 칠현리 옻고개 도로변
* 건립자 : 남곡면민
칠현리 옻고개 도로변 고유현감선정비 곁에 서있는 비로 기단이나 옥개석은 없이 자연 암반 위에 있었다. 비석의 높이는 90cm이며, 크기는 42cm×12cm인데 창녕현의 현감으로 순조 병오(丙午 : 1846년)에 도임 하여 경술(庚戌 : 1850년)에 임천군으로 이임한 홍종화(洪鍾華)의 선정비이다. 그런데 남곡면민에게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고 이곳에 왜 비가 서게 되었는지 자세한 연유는 전해오지 않아 이곳 향로들도 유래가 불명이라 한다. 아마 이곳 길은 창녕현에서 진주감영으로 현감이나 관리들이 자주 오가던 길목이었으므로 면민들이 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의 전면 중앙에,
{縣監洪侯諱鍾華愛民善政碑} 전면 좌측 하단에, {道光二十九年己酉 四月 日 南谷 立}이라 새겨져 있다.
도광 29년 기유는 헌종 15년(1849)으로 홍 현감이 창녕현에서 이임하기 1년 전 시기이다.
사진설명 (홍종화,조운한현감 애민선정비)
(1-2) 조운한현감 선정비 (趙雲漢縣監 善政碑)
* 소재지 : 성사리(황새목) 532-5
* 건립자 : 성사동민(도감 오영대 유사 이희증)
영산현의 현감으로 재직하였던 조운한 현감은 고종 때인 정묘(丁卯 : 1867년)에 도임 하여
경오(庚午 : 1870년)에 백천으로 이임하였던 인물로 재임 때 삼세(三稅 : 전세 등 국세)를
도천 송진에서 밀양까지 현민들이 직접 실어다 갖다 바쳐야 했는데 송진 쇠나리에서 배에
싣고 가다가 도둑을 맞거나 홍수로 파선되어 세곡(稅穀)을 잃어버리면 새로이 양곡을 구하여 실어다 주어야 하는 이중 손실을 보곤 했다. 이러한 폐단을 안 조 현감이 진주목사에게 청원하여 세곡을 쇠나리에서 바치면 끝나도록 조처하였다. 이에 현민들이 그의 선정을 잊지 못하여 고종 13년인 병자(丙子 : 1876년) 8월에 비를 세운 것이다. 비는 기단이나 옥개석은 없으며 비석 높이는 118cm 크기는 14cm×43cm이며 전면 에,{縣監趙侯雲漢愛民善政碑} 비의 후면에 비문이나 명은 없이 건립 연대와 건립시의 도감(都監) 오영대(吳永大) 유사(有司) 이희증(李希曾)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진설명 (민병기군수 애민선정비)
(1-3) 민병길(閔丙吉)군수 선정비 * 소재지 : 수개리
* 겁립자 : 수개리동민 일동
구한말 창녕군의 군수로 고종 을사(乙巳: 1905년)에 도임 하여 순종 1년 정미(1907년)에 영광군으로 이임한 민병길 군수의 선정비로 수개리 - 창녕간의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을 세운 연유는 다음과 같다. 수개리 안산 갈마지 만댕이 명당 자리에 창녕에 살던 유력자 동래 정씨가 묘를 들이자 그곳에 묘를 쓰면 마을에 해롭다는 풍수지리설의 유래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온 동민이 반대하게 되었다. 급기야 동래 정씨와 동민들간에 시비가 붙었는데 수개 동민 다수가 진주 감영에 투옥되는 불상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동민들은 힘을 모아 송사를 하였는데 나중에는 식량뿐만 아니라 놋그릇까지 거두어 비용으로 쓰니 동민 모두가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민 군수가 정씨 문중과 동민들 사이에 중재로 나서서 수개 동민을 구해 주었는데 이에 감동한 동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병오(1906년) 3월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문제의 그 묘는 이장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한다. 수개에서 창녕으로 가는 길가에 기단이나 옥개석도 없이 세워졌는데 비명이 사언시(四言詩)로 명(銘)이 새겨졌으나 마멸이 심해 몇 자는 알아 볼 수가 없다. 비의 전면에는,
{行郡守閔侯丙吉愛民善政碑} 비명(碑銘)은 다음과 같다.
{茹剛矜弱 民隱細繹 直○失金 淸○○名 訟山於府 郡勢可知 積眞積費 將無泂爲 索敞還蘇 雲天更披 片珉不孤 高僕竪碑
面書記 河斗鍊 丙午 三月 日 樹介洞民 立}
(2) 遺墟碑와 記蹟碑
(2-1) 縣監李穫 遺墟碑
* 소재지 : 시남리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곽망우당 의병군 휘하에서 활약하여 그 공이 커 현풍현감으로 제수 받은 이확(李穫)이 말년에 시남리에서 살다 별세하였는데 그의 복거(卜居) 유허인 시남리와 청단리 갈림길목에 기사년(己巳年 : 1928) 6월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는 수풍각(樹風閣)안에 성주이씨효열비와 함께 섰는데 비의 높이는 135cm이며 크기는 44cm×22cm인데 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縣監野軒李公遺墟碑} 비문은 다음과 같다.
{忘憂郭先生之壬辰擧義也. 部伍瀮定有首先應募者 縣監成公天祚別提曺公以復辛公裕慶 第四李公穫字景實時年三十二身長九尺力擧千斤 父老言爲兒遊嬉坐壇上 稱大將指麾群兒讀書至古人忠義處 輒慨然及赴陣作詩以自誓癸巳斬賊將扁密等十人于靈山戰昌寧沃野中賊丸用式如常時 甲午入淸正陣探情形 丁酉服從郭先生贊篐軍機橘智正乞通信斥之 乙巳朝廷錄其勛除玄風縣監有著績 己未卒葬昌寧牛山睐午原 子孫仍爲昌人 噫國人承二百年昇平之餘 猝遇强敵列郡無人色萊州堄地主鎭將敎授官金州則四義士同殉凶鏑所觸人人知難乎免矣 公能挺身大叫手執義旗赴紅衣之陣 公其勇矣乎 竟劃助東南秚蔽之功而名載龍蛇之錄 人到于今誦之 但子姓不振滠典社儀漠然不及 識者恨之今十一世孫鍾和鍾泰鍾潤鍾錫等 不忍棄其遺址 竪石而識之 遣東厚謁文于相稷 相稷昌人也 敢於鄕獻而辭不文哉 公星州人號野軒國朝名相亨齊文景公稷六世孫 參判師純水使永提主簿敞學生元佑智老以上五世也 配金氏子碩籾孫震哲曾孫時周公始居靈山之長加里而今竪碑于昌寧南谷詩南者從晩年所卜也 銘曰 驅賊如撻 風生戎軒 視民如孩 春和鈴軒 晩而自好 逍遙野軒 過者式閭 如見九尺之軒軒
己巳 六月 下浣 光州 盧相稷 撰 金州 金勳錫 書}
{망우곽선생이 임진창의(壬辰倡義)할 때 부오(部伍)가 겨우 정하매 먼저 응모한 이는 현감 성천조 별제(別提) 조이복 신유경 제사(第四)에 이확으로 자는 경실이니 당시 나이 32세로 신장이 구척이며 힘은 천근을 들었다. 선배들이 말하기를 아이 때 유희하매 단상에 앉아 대장이라 칭하면서 뭇아이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책을 읽을 때면 옛 분들의 충의를 보고는 문득 개탄하더니, 진중(陣中)에 나아가서는 스스로 시를 읊어 맹서도 하였다. 계사년에 적장 편밀 등 10인을 영산전투에서 베었으며 창녕 옥야에서는 적환(敵丸)을 맞았으나 무(武)를 쓰는데 있어서는 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갑오년에 가등청정의 진에 들어가 정탐을 잘 했으며 정유에는 다시 곽선생을 따라 군기(軍機)를 도왔다. 귤지정걸의 통신을 막고 을사에 이르러 조정에서 그 공훈을 기록하여 현풍현감을 제수 하였으며, 그 외 현저한 업적이 많았다. 기미에 졸(卒)하니 창녕 우산(牛山) 오좌에 장사하니 그 자손도 이로 인해 창녕인이 되었다.
슬프다, 국인(國人)이 2백년의 승평대(昇平代)를 이었다가 창졸에 강적을 만나니 여러 고을마다 인색(人色)이 드물었도다. 동래서는 갖옷의 현령 진장 교수가 죽고 김해에서는 사의사(四義士)들이 다 함께 죽으니 흉적(凶賊)이 이르는 곳마다의 사람마다 그 어려움을 면할 수 없었음을 알지어다. 공히 능히 몸을 떨쳐 크게 부르짖으며 의기(義旗)를 손에 들고 홍의장군(紅依將軍) 진지로 나아가니 공의 그 용맹함이여, 마침내 동남의 적을 막은 공이 크니 그 이름이 용사록(龍蛇錄)에 실리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를 칭송하나 다만 자손이 부진하여 증직(贈職)이 막연하니 아는 이는 이를 한탄하노라. 이제 11세손 종화 종태 종윤 종석 등이 그 끼치신 유지(遺址)를 버리기 아까워서 비를 세워 이를 기록하고자 동후를 보내서 상직에게 글을 청하니라. 상직은 창녕인이라 감히 향헌(鄕獻)에 글을 못한다하여 이를 사양하겠는가. 공은 성주인으로 호는 야헌이요 국조 명상이신 형재 문경공 직(稷)의 6세손이요, 참판 사순, 수사 영분, 주부 창(敞), 학생 원우, 지노 등은 확의 윗대 5세니라. 배위는 김씨요 자는 석주, 손에는 진철, 증손으로 시주가 있다. 공은 처음 영산 장가리에 살았으나 이제 창녕 남곡 시남에 비를 세우니 만년에 복거(卜居)하던 곳을 따랐다. 명(銘)에 왈,
적을 몰기를 시달같이 함에 바람은 융헌(戎軒)에 나고, 백성을 보기를 어린아이같이 하니 봄기운이 영헌(鈴軒)에 화창하도다
늦게 스스로 자호(自好)함은 야헌(野軒)에 소요함이로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몸을 구부려 헌헌구척(軒軒九尺)을 뵈옵는 듯 하도다.
기사 6월 하완 광주 노상직 찬 금주 김훈석 서}
(3) 효자 열녀 열부비 (孝子 烈女 烈婦碑 )
(3-1) 진양하씨 열녀비 (晋陽河氏烈行碑)
* 소재지 : 신전리(상대포 구제)
남편(차형규)이 도둑의 횡포로 인하여 죽자 두 달 후 남편을 따라 자진한 진양 하씨의 열행을 기려 세운 비다. 비는 당초 비각 안에 있었는데 6 25때 포탄에 맞아 파손되어 복구치 못하고 비만 보존되고 있는데 비석의 높이는 150cm로 크기는 22.5cm×43.5cm이며 옥개석이(높이 40cm) 있다.
1923년(癸亥) 9월 하순에 건립된 이 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진양 하씨는 의령군 의령면 중마리에서 태어났는데 가세가 가난하였으나 인물이 출중하여 반포리 반개에 살았던 만석꾼의 가문인 연안 차씨의 장남인 차형규와 15세에 결혼하였다. 하씨는 시부모에게 효성이 있어 항상 시모의 머리를 빗질하여 주고 지성껏 모심에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부곡 지이다리{茵橋}에 근거를 둔 도둑 떼들이 아지에 있던 차형규 조모의 무덤을 파서, "너희 조모의 머리를 우리가 갖고있으니 대구 고기 한 짝과 술 한 통 그리고 돈을 가져와서 머리를 찾아가라." 하였다.
차씨 집에서는 그 외침에 놀라 이튿날 밤 시키는 대로 가져갔더니 숲 속에 가져온 물건을 두고 가라하여 그대로 내려놓고 돌아 왔다. 그 다음날 차형규가 조모 산소에 가보니 과연 시신의 한 삽 정도 자른 머리 부분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수 묻어 놓고 돌아오다가 너무나 심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그로 인하여 큰 병을 얻어 두 달 동안 고생을 하는데 백약이 무효라 결국 사망하였다. 진양 하씨는 남편을 잊지 못하여 매일 남편의 무덤에 가서 통곡함에 가족들이 찾아가서 데려오곤 하였다.
그때 차씨 가문은 성사리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는데 남편의 무덤은 성사리 뒷산에 있었고, 진양 하씨는 이 뒷산을 밤에도 혼자 올라가서 무덤에서 통곡하였던 것이다. 남편이 죽은지 2개월이 되던 어느 비오는 날, 소복 단장을 하고서 간수를 마시고 미역을 입에 물고 남편 빈소 제상아래 곱게 누워 자진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남편 묘소 맞은 편 산에 있다.
차씨 가문에서 열녀비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영산향교의 승낙을 요청하니 딸 넷을 둔 어미가 남편만 그리워 했다하여 일부 반대를 했으나 결국 목숨을 바쳐 남편을 사랑한 그 뜻을 칭찬하고 열녀비를 세워도 좋다고 승낙하였다. 비문과 서류를 다 갖추어 준비중이었는데 이 일을 담당하였던 차형규의 동생이 갑자기 사망하고 이에 놀란 차형규 아버지도 한달 후 사망하자 그만 집안이 몰락하여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김기봉이 신영규 이주목 김연동 등과 합심하여 추진하여 비를 세우고 정려각도 지었다. 정려각의 이름을 순열각(殉烈閣)이라 했다. 이 순열각안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소변을 하면 반드시 아이가 병을 얻었으므로 인근 마을 사람들도 두렵게 여기고 스스로 제사도 모시었다 한다.
(증언자 : 마산리 홍포 차갑이 1906년생 하씨의 시누이)
비의 앞면에는, {朝鮮故學生車亨奎妻孺人晋陽河氏烈行碑} 라 새겼으며 비문은 다음과 같다.
{烈婦河氏晋陽人年十五歲適延安車亨奎 以善事舅姑稱舅力穡成家惜穀貨遂稟陳大義搋得歡心於窮乏者隣女惑失禮苟活必斥之. 戊午夫疾尤禱天請代及氣絶撮指灌血甦旬餘竟不起訣三女曰吾未育子男不從夫無所從欲自裁舅姑泣而喩曰 而有身若生男而夫死而不死婦唯之然常露地宿曰, 不忍獨取便身日暗着嫁時盛服就靈床前閉吸臥適家人偶見驚呼婦開眼語曰, 冀或求嗣苟延至此覺其忘願速歸見夫遂絶家衆救不及就夫墓合附距夫死三十八日 多士會鄕校通諭隣郡圖所以闡揚之僉曰, 宜立石記蹟以勵鄕里遣金相閏李周穆碣文于相稷. 相稷曰, 杞梁殖無子故共姜赴淄水死惠士玄妾子不死王氏必不經於樹 今河氏疑腹有兒保三十八日命縷其心及王氏飮食寒煖猶恐不至之時覺其妄死不留時實孟姜下則無子亦死而己之意諸宗人追念烈婦求嗣之苦心以其夫弟琫奎之子鎭鎬爲夫後 夏俊令女養子爲曺氏後者其事略相似幷書之爲 車氏婦河孺人烈行碑在靈山南谷之坊馬山之里鳩峴道上焉 亨奎父炳允母辛氏炳允故琫奎亦夭鎭鎬瀮六歲辛氏述家夫喜施之志析産以則族戚因奉副鄕士議爲此役亦可書也
銘曰, 西火之鄕古多女士或罵賦殉或蔽夫死餘韻興起乃生河氏夫子有疾醫師彈技旣涷 于天又撮其指承舅姑意謂腹有嗣旋覺其妄須未敢寄靈床之側實爲死所不呼不吸從容以處 鄕人曰, 咨吾郡之榮末俗滋僞倫彛不明一婦成仁八方足勸爰樹短石寔由輿論 鷲山弄弄 洛江洋洋 烈婦之名 與之俱長
癸亥 九月 丁浣
光州 盧相稷 撰 鷲城辛泳麟書 刻手 金昌瑨}
{열부 하씨는 진양인이니 15세에 연안 차형규에게 시집가서 구고(舅姑)를 잘 섬긴다고 칭찬을 들었으며 그의 시아버지는 성가(成家)함에 곡식을 아끼기에 힘썼다. 대의를 품진(稟陳)해 궁핍한 자에게서 환심을 얻었으며, 이웃 부녀들이 혹 예를 잃고 구차히 살려함에 반드시 나무랐다. 무오년에 남편의 병이 극심하니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로 청했으나 급기야 남편이 기절하게 됨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관구(灌口)하였더니 십여 일 동안은 회생하다가 마침내는 불기하니라. 세 여식에게 영결(永訣)하기를 "내가 아들을 기르지 못했으니 가장을 따르지 못하면 갈 곳이 없으니 자재(自裁)한다"고 하니 구고께서는 울며 깨우쳐 주기를 "너가 아이를 배었으니 만약 생남하게 되면 가장이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라" 하니 며느리가 "그리하겠노라."하고 항상 노숙하면서 홀로 몸 편하기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어느 날에 남몰래 시집올 때 입은 성복(盛服)을 입고 영상(靈床)에 나아가 숨도 쉬지 않고 누웠더라. 집안 사람이 우연히 이를 보고 놀라서 며느리를 부르니 며느리는 눈을 뜨고 말하기를 "혹 구사(求嗣)를 하게 되기를 바라 구차히 연기해서 살려는 것은 망령된 일이므로 속히 돌아가 가장 보기를 원한다" 하고 드디어 죽으니 집안 사람이 이를 구하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남편 묘에 합부(合俯)하였다. 남편 죽은지 38일 만이었다. 많은 선비가 모여서 인군(隣郡)에 까지 와론(瓦論)하여 천양(闡揚)하기를 도모하였다. 뭇 사람이 말하기를 비를 세워 사적을 기록하여 향리에 포장(褒奬)하기로 하며 김상윤 이주목을 보내어 상직에게 비문을 청했다. 상직이 말하기를 기양식은 자식이 없는 고로 맹강이 치수에 빠져 죽고 혜토현의 첩자(妾子)는 죽지 않고 왕대는 나무에 목매지도 않았다. 지금의 하씨가 배속의 아이 있음을 의심하여 38일 동안 명을 이어가는 마음은 왕씨와 같은지라 부모 섬김에서 음식과 한난(寒暖)에 정성이 이르지 못할까 저어하다가 이때에 와서 그 망령됨을 깨닫고 죽음의 때를 머물지 아니한 것은 실로 맹강을 본받아 자식이 없으면 역시 죽음뿐이라는 뜻이리라. 모든 사람이 이 열부의 구사지고심(求嗣之苦心)을 진념(進念)해서 그의 부제(夫弟)인 봉규의 자인 진호로하여 부의 후계로 삼았다. 이는 하준의 영녀(令女)가 양자로 하여 조씨의 후계한 것과 같다. 아울러 써서 차씨 부인 하유인(河孺人) 열행비(烈行碑)로 하니 비는 영산 남지 마산리 구현(鳩峴) 도상에 있다. 형규의 부는 병윤이요 모는 신씨라 병윤이 죽고 봉규는 요사(夭死)하고 진호도 겨우 6세라 신씨는 남편께서 베푸는 것을 즐겨하던 그 뜻을 술(述)해서 재산을 갈라 족척(族戚)에 나누어주고 인해서 고을 선비들의 의논을 받들어 이 역사를 하니 또한 가히 쓸지어다. 명왈(銘曰), 서화지향(西火之鄕)에 예로부터 여사(女士)가 많으니 혹 적을 꾸짖어 죽기도 하고 혹은 가장을 감싸다가 죽기도 했다. 그 여운이 흥기해서 이에 하씨가 낳도다. 가장이 병이 들매 여사가 그 기능을 다하고, 이미 하늘에 빌기도 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관혈(灌血)도 하고 구고의 뜻을 받들어 배에 아기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드디어 그 망령됨을 깨닫고서 영상 곁이 죽을 곳이라 하여 숨을 조용히 끊으니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슬프다 우리 고을 영화로다. 세상 풍속에 거짓이 많음에 윤의(倫義)가 밝지 않은데 일부(一婦)가 성인(成仁)하니 팔방에 족히 권할지니라. 이에 비석을 세우니 진실로 여론을 말미암이로다.취산(鷲山)은 율율(弄弄)하고 낙강은 양양(洋洋)하도다 열부의 이름이 더불어 길지어다. 계해 구월 정완 광주 노상직 찬(撰) 취성 신영린 서 각수(刻手) 김창진}
(3-2) 성주이씨 효열비 (星州李氏 孝烈碑 )
* 소재지 : 시남리
시남리 입구 청단 마을 갈림길 도로변에 수풍각(樹風閣)이란 비각이 있는데 이 안에 있는 비로서 시남리에 살았던 성주 이씨의 문중에 효열로 인근에 이름나 이씨 쌍효(雙孝)라 일컬었던 이동화(李同化)와 동생 동석(同碩), 효와 열이 뛰어난 이동화의 부인 강씨(姜氏), 또 그 후손으로 부사순종(夫死殉從)한 국용(國容)의 처 김씨, 쇄지주혈(碎指注血)하다 역시 부사순종한 교병(敎秉)의 처 김씨 등 성주 이씨 문중의 효열 사적을 적은 비로 계해(1927년) 3월에 건립한 것이다.
비석의 크기는 135cm 높이에 44cm×22cm인데 옥개석은 40cm이며 현감야헌이공유허비와 함께 서 있는데 비의 전면에는,{星州李氏孝烈碑} 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다음과 같다.
{夫聖人憂患後世而非倫常無以敎萬民人生散殊於天下群群而不亂以有倫常也 國朝五百年雖閭巷之陋有一節則褒之示倫常至重爲人類而不可不勉也 雖然九州人卒若是其庶矣 亦若是其鮮能何哉乃若一門之內孝烈幷看 者是宜褒揚其至行樹百代之風祥也 縫腋之士卒涷以聞封疆之臣御使裡行莫不嗟歎而夫及上聞遭値天下之亂名湮沒以不稱 悲夫盜甁不幸而肝人肉墓有表石伯夷餓死首陽砥柱之碑人到今而稱之古之人善惡有表所以勸懲也 過是碑者庶有徵於斯文而知所以勸之也 昌寧孝子松溪李公諱同化字道源高麗幐西郡公長庚之後本朝開國功臣領議政文景公稷十世孫龍蛇倡義功臣穫玄孫也 父時周母崔氏肅宗癸未公生幼時至性巳知事親之節六歲見堂燕礍其子歎曰 觀於微物亦可知父母之恩 七歲登庭前枾木枝折墜傷血淋淋笑而起母曰 婾還不痛磨何笑爲曰 却硲父母心驚動自不知痛 十歲遭父喪日侍墓側朝礍悲號不御酒肉以禮終制侍母病三年嘗糞甛苦禱天請命母嘗思生魚時則天寒氷合沿江終日號泣而歸路中山澗有魚自泳中躍出其長尺歸供之母 疾己享年九十終廬墓如前喪有弟曰 同碩同居一室孝友隆篤事生同其養事死同其廬 世傳李氏雙孝者是也 公有妻曰姜氏至孝至烈每夜盡誠祝天請身代姑病夫病虐聞人肉最良自割股肉以饋之果己鄕里爲之語曰 有是兄而有是弟有是夫而有是婦也 李公不幸絶嗣伯公有後裔若柯而今皆蕉牱矣 聞其來孫國容妻金氏夫死殉從 來孫敎秉妻金氏夫病碎指注血不效自投井以殉是皆習熟於家庭之傳而種豆得豆其理然也 余嘗銘人之碑而揄揚人之孝烈多矣 乃若本狀之不可信者謝而去之今觀其士林請褒之狀類多一時知名之士必不以無美阿好之是故樂爲之銘 銘曰 茫茫禹旬 五品不遜 帝哀下民 生此孝順 惟此孝順 感撤神明 中原有囱 載飛載鳴 桓省閨房 烈烈其逑 噫彼時人 兄弟爲仇 婦姑勃蹊 夫妻反目 稴於詩南 視此片石
孝子沒後一百四十九年 癸亥 三月 日
仁州 張錫英 撰}
{성인이 뒤 세상을 걱정하여 윤상(倫常)이 아니면 백성을 가르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인생이 천하에 흩어져 많고 많으되 문란치 아니함은 윤상이 있음이다. 국조 오백년에 비록 누추한 여리(閭里)에도 한 절행이 있으며 포창(褒彰)하여 윤상이 지중함을 보이니 인류가 가히 힘쓰지 아니하지 못함을 보임이라. 연이나 온 세상 사람이 이같이 많으되 또한 이같이 능한 이가 적음은 어떤 연유뇨? 이토록 일문에 효열이 같이 높았으니 마땅히 그 지행을 포양(褒揚)해서 백세의 풍성(風聲)을 세울지어다. 많은 선비가 장계(狀啓)하니 도신(道臣)과 어사가 차단하지 않은 이가 없으되 임금에게 주달(奏達)되지 못하고 천하가 요란함을 만나 인몰되니 슬프다, 도척이가 불행하되 간인육묘(肝人肉墓)에 표석이 있고 백이는 수양에 아사하되 지주비(砥柱碑)가 있어 지금까지 일컬으니 고인이 선악을 나타냄은 이른바 권선징악이라. 이 비를 보는 자는 거의 이 글을 증거 삼아 권선할 바를 알지어다.
창녕효자 송계 이공은 휘가 동화요 자는 도원이니 고려 용서공 장경의 후요, 조선 개국공신 영의정 문경공 직(稷)의 십세손이며 용사창의공신(龍蛇倡義功臣) 획(粇)의 현손이라. 부는 시주요 모는 최씨이니 숙종 계미에 공이 생하다. 어려서 이성이 있어 이미 어버이 섬길 도리를 알았고 6세에 제비가 그 새끼 먹이는 것을 보고 탄식해 왈, 미물을 보면 또한 가히 부모의 은혜를 알리라 하고 7세에 뜰 앞 감나무에 올라가 가지가 부러져 낙상하여 피가 나되 웃으며 일어나거늘 어머니가 왈, 네가 안 울고 웃는 것은 어떤 일인고? 하니 대답하기를, 부모가 놀랄까 두려워 아픔을 잊었다 하다. 10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매일 시묘하며 조석으로 슬피 울고 주육(酒肉)을 멀리하여 예로써 상을 마치고 모병 3년에 상분감고(嘗糞甘苦)하고 하늘에 빌어 명을 청하며 자당이 생선을 원하매 때마침 강물이 얼었으므로 종일토록 울다가 귀로에 고기가 얼음 위로 뛰어 나오니 이로 공양하다. 어머니가 구십에 종(終)하니 여묘(廬墓) 여전하고 아우 동석과 동거일실(同居一室)하여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살아 섬김이나 사후 섬김도 형제가 같이 하였으니 세상이 이씨의 쌍효라 일컬었다.
공의 배(配) 강씨도 효와 열이 지극하여 매양 밤이면 정성으로 시어머니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고 가장이 학질로 고생함에 인육(人肉)이 좋다함을 듣고 스스로 다리 살을 베어드려 과연 완쾌되니 향리에서 말하기를, 이런 형에 이런 동생이 있고 이런 가장에 이런 댁이 있다 하더라. 계공(季公)은 불행히 절사(絶嗣)하고 백공(伯公)은 후예가 있으되 초졸(蕉牱)하다.
들으니 그 후손 국용(國容)의 처 강씨는 부사순종(夫死殉從)하고 또 후손 교병(敎秉)의 댁 김씨는 부병(夫病)에 손가락을 으깨어 주혈(注血)하였으나 효력이 없으므로 샘에 빠져 순종하니 이가 다 가훈을 지킴이니 종두득두(種豆得豆)의 이치이다.
내가 일찍 사람의 비에 명(銘)하여 효열을 천양(闡揚)한바 많으나 만약 본장(本狀)이 불신하면 사각(辭却)하였다. 이제 사림의 청 포장을 보니 이름난 이가 많아 반드시 행적 없음을 과장함이 아님을 알았는고로 내가 즐겨 명을 하노라.
넓고 넓은 우역(禹域)에 오륜이 불손하니 상제가 하민(下民)을 슬퍼하매 이 같은 효자를 낳았도다. 이 효자는 신명이 감격했으며 중원에 척령(甈州)새가 있어 같이 날고 같이 울었고 또한 규방(閨房)에 들어 열렬한 그 짝이로다. 슬프다 저 세상 사람들은 형제간에도 원수를 삼고 고부간에 서로 싸우며 부부간에 반목하도다. 어찌 시남의 이 비석을 보지 않느뇨.
효자몰후 일백사십구년 계해 삼월 일 인동 옥산 장석영 찬}
(4) 시혜비 (施惠碑)
(1-1) 김성덕 시혜불망비(金性德施惠不忘碑)
* 소재지 : 신전리(죽가:竹街)
* 건립자 : 신전리 동민일동
1920년대에 이 마을에 살았던 김성덕이 흉년이 들어 전 동민이 굶주리고 국세도 내지 못하자 사재를 털어 마을의 세금 전부를 대납했을 뿐만 아니라 곡식까지 나누어주어 구휼하였기에 동민이 감동하여 1920년 12월에 보은의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비는 3단으로 된 1m 높이 기단 위에 빗돌의 높이는 130cm이며 크기는 48cm×20cm이며 옥개석을 얹었는데 높이가 30cm이다. 흙담 울타리가 있고 철문을 달아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 {前主事金性德施惠不忘碑} 비문은 다음과 같다.
{浰哉碩人 財以發身 廉穗替稅 惠及鄕隣 補戶出義 財穀狶貧 永矢不忘 堪語是珉}
(장하도다 임이시여 그대 재물로서 발신(發身)하였도다 , 수곡도 탕감하고 세금도 대납하였으니 그 은혜 이웃 고을까지 미쳤도다
의로써 많은 사람을 돕고 재곡(財穀)으로 가난한 이를 먹였으니, 그 덕 영구히 잊지 않고자 맹세하여 감히 이 돌에 새겨 전하노라.)
6) 서원지 (書院址)
(1) 도산서원지 (道山書院址)
* 마산리 518
도산서원은 숙종 때의 성리학자로 1686년 마산리에 집을 짓고 은거하며 명례학(明禮學)을 강론하였던 신몽삼(辛夢參)을 배향한 서원이다.
경상도 지방을 순시하던 암행어사가 신몽삼의 학행을 알고서 조정에 천거하여 황산도 찰방, 익위사세마 등 벼슬이 제수 되었으나 그가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는 가례집해(家禮輯解)가 있다.
서원의 건립 연대는 철종 10년 기미(1859년)년으로 영산현 유림의 공의로 신몽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의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향인들의 학문 지도로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거 고종 6년(1868)에 철폐된 뒤에 아직 복원되지 못했다. {취산군지}(鷲山郡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道山書院 在治西三十里馬山亭 哲廟己未建 一庵辛夢參享焉 戊辰畋
지금 서원의 터가 300여 평 보존되고 있는데 영산 신씨 가문에서 복원할 계획이라 한다.
7) 명승지 (名勝地)
{창녕군지}에 남지의 명승지로 올라 있는 곳은 오여정과 남지철교 등이다. 이 두 곳은 제1장 향토의 환경 [資源]란에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그 대강만 기술코자 한다.
(1) 이이목나루의 오여정 (吾與亭)
* 시남리 이이목
시남리 이이목나루 곁 절벽에 있는 오여정은 강 건너 넓은 백사장과 함께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위치한 정자이다. 진사 양훤(楊暄)이 만년을 유유자적 보냈다는데 낙동강 푸른 물결과 절벽의 백일홍 숲이 아름답다. 전에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2) 남지철교와 제왕담(帝王潭)
* 남지리 남포리
남지철교는 전국에서 보기 좋기로 유명한 철교이다. 함안쪽 용화산(龍華山) 절벽은 봄 여름 가을 푸른 잡목 숲과 단풍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남지공원으로 불린다.
제왕담은 웃개나루를 건너 있는 절벽으로 강물 깊이가 수 백 길이나 용이 산다고 전해 온다. 절벽에 괴암괴석이 즐비하며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많이 즐겼다고 한다.
낚시터로도 유명했으며 웃개나루를 오가던 나룻배의 한가로움도 멋이 있었다. 제3의 다리인 신남지교가 본동 마을 동쪽에 가설 개통되면서 새로운 풍물을 제공하고 있는데 요즘은 잉어횟집이 번창하다.
8) 동굴 ( 洞窟 )
(1) 대곡 황씨굴 (大谷 黃氏窟 )
* 대곡리 뒷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 곽 망우당 진의 아장(亞將)으로서 화왕산성과 구진산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고 전해오는 인물인 황사성의 가족들이 피란 하였다는 길이 10m되는 자연 동굴이다. 후대에 조금 손을 봐 굴안 넓이가 3평정도 되는데 황사성이 이 굴에 가족을 두고 출전하여 그만 전사하고 말았으며 그 아내마저 이 굴에서 사망하였고 그 가족들은 굴을 의지하고 그 곁에 집을 짓고 살게된 것이 대곡리에 살게된 시초였다고 한다. 따라서 황사성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여 무덤이 없어 최근 제단비를 건립하였다.
(2) 詩南 덤벅굴
사진 설명 ( 시남리 덤벅골 )
시남리 덤벅골에 있는 선사시대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는 길이 약 10m의 굴이다. [향토 문화유산] 첫머리 <1. 선사유적>란에서 다루었으므로 상세한 기술은 생략한다.
四. 향토 문적 ( 文蹟 )
사진설명
( 광해조의 선비 어촌 양훤이 이이목의 뛰어난 경치를 읊은 시. 오여정에 걸려 있다.)
1. 학문의 발흥
우리 고장의 문화예술의 전통은 북쪽 지역은 창녕현에, 남쪽 지역은 영산현에 속함에 따라 수령방백의 관장구역이나 향교 출입도 각각 달랐으므로 자연히 그 문화 발전 형태도 서로 조금은 달랐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좁은 지역 안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을 것이며 나아가 선비들의 교유(交遊)나 학문이나 문학적인 내왕도 긴밀하게 유지되었을 것이다.또 우리 고장은 지리적으로 웃개나루나 도흥나루를 건너 칠원현, 함안현과 내왕이 잦고 북으로는 창녕이나 합천과 통하는 육로가 발달하여 있었으며 박진나루와 기강나루를 건너 의령현과도 내왕이 잦았으므로 어떻게 보면 영산이나 창녕과 함께 인근 현의 선비들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는 우리 고장 용산 기강에 망모암을 짓고 은거하기 이전 칠원현 내내에서 우거(寓居)하였으며 그의 정사(精舍)를 낙동강 건너 함안땅 합강에 짓고 합강정이라 부르며 용산에서 강을 건너다니며 망우당 곽재우(도천 우강에 망우정을 짓고 말년을 보냄), 퇴휴당(退休堂) 황열(黃悅, 오위도총부도사를 지낸후 칠원현 용성리 낙동강변에 강정을 짓고 말년을 보냄, 현재 구마고속도로 서쪽 강변, 유허비가 있다) 등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선조조(1607년) 봄, 조 간송 22세 때 아버지 입암 조식(趙埴)과 함께 도흥나루에서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하여 인근 선비 32명이 범주주유(泛舟周遊) 하였다고 한다.간송은 그의 나이 49세 때(1633년) 기강으로 와 은거하면서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지금 합강정에 그의 문집 4권과 속집 2권, 금라전언록(金羅傳言錄) 1권, 봉선초의록(奉先抄義錄) 1권 등의 목판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들 목판은 1980년 경상남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간행된 서책은 우리 고장에서 오래된 문집이며 문화 자료라 할 것이다. 6 25때 용산리 종가가 불타는 바람에 짐으로 져도 두 짐이 넘을 서책들과 와가 4동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일제 때 금융조합에 다니던 일본인이 탐내었던 합강정에 있는 은행나무와 문짝 만한 화폭의 흥선대원군의 친필 난초그림이 있었는데 그것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한다. 아마 조간송 문집 외에 많은 옛 선비들의 문집이 있었을 것이므로 전쟁의 참화는 귀중한 문화재까지 소멸시킨 것이다. 조 간송 외에 같은 시기의 사람으로 망우당 휘하 의병으로 참전하였던 시남리에 유허비가 있는 이확(李穫 : 현풍현감) 등도 역시 명문가의 출신으로 학풍이 도도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도산서원의 일암(一庵) 신몽삼(辛夢參)은 인조 때의 이 고장 선비로 남긴 저서로는 {가례집해(家禮輯解)}가 있는데 일제 때(1929년) 후손들이 정리하여 {가례집해} 전9권을 낸바 있다.고곡리에 살았던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성천기(成天祺)는 대지면 미산에서 명종 7년(1552년) 태어나 산청의 오 덕계(吳健) 문하에서 수학한 후 같은 문하생인 정 한강(창녕현감)과 함께 창녕현 안에 관산재, 팔락정 등 8정재를 세우고 강학하였다. 그 후 벼슬길에 올라 도총부도사를 지냈으며 말년에 고곡리로 입향을 하니 묘소가 구진산 기슭(머찔)에 있고 내견재에 배향되었다. 오랜 연구와 많이 쌓은 학문을 지닌 청환이었다.시남 이이목에서 오여정(吾與亭)을 짓고 말년을 보낸 진사 어촌(漁村) 양훤(楊暄)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인근 선비들과 교유하며 지냈던 선비이다. 어촌 양훤은 동계 정문간공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곳 오여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며 허미수와 절친하게 지냈는데 사후에 사림이 유어면 광산에 광산서원을 세워 배향하고 있다.조선조 및 구한말 학자로서 우리 고장에서 문명(文名)을 빛냈던 인물들의 행적이나 활동상황이 {창녕누정록}(昌寧樓亭錄) 기문(記文)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 한시 창작을 한 이는 낙강동범계(洛江同泛契- 남지 영산지역 漢詩동호회 회원 98명) 및 창남시사(昌南詩社) 동인으로 한시 창작 활동에 참여 활동한 황호근(黃鎬根), 김성봉(金聖鳳) 등이 옛 선비의 맥을 이었다.
2. 향토 문적 ( 鄕士 文蹟 )
1) 기문 ( 記文 )
향사(鄕士)는 고을에 살았던 선비를 말한다. 옛 학자들의 글이 많이 남아 있으나 그 중 이 고장 용산리에 살았던 조선시대 선조, 광해조 때의 대 유학자 간송 조임도의 시문과 망모암의 기문, 신전리에 살았던 선비 초산 정기형(鄭基炯)이 쓴 초산정의 기문 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望慕庵記
庵庵以望慕名望慕我先人也 吾父之沒二十有七歲 吾母之亡十有三年 面目不可復見 聲音不可復聞 其可瞻望而想慕者 松楸與丘壟 草樹與烟雲也 不見不復聞者勢也 吾無如之何矣 可望而可慕者 吾猶致力焉 此吾之所以名 吾庵而爲終身寓慕之地者也 噫 萬曆戊午秋始自咸移奈內 崇禎癸酉春再遷于岐江 岐江靈山也 奈內漆原也 奈內之去松楸十里許 岐江之去丘壟一牛鳴 奈內與岐江皆非我桑梓也 而不靈漆其心而心乎 丘壟者爲望慕故也 況戊午之居奈內也 父雖沒而母猶在 或有時而寬懷 癸酉之來岐江也 母亦歸于泉下在 今日望慕之懷 無亦切於昔年乎 空山閒寂與世隔絶宿草蕪沒 斷雲凄凉徘徊瞻眺此感何極 霜露旣降百物凋落則 心悽愴而 癈傷索然無生意者 秋之望慕也 雨露旣濡草木萌芽則 心盌瓶而驚動如將見之者 春之望慕也 流金攎土日輪如火則 地下得無泙乎 風寕 雪虐朔氣凝筂則 地下得無寒乎 八表同昏雨濕天陰則 地下之意象如何 百花開遍月白鵑啼則 地下之懷抱如何 孤兒在世隻影崣崣 地下有知則 應惻灊而 憐之一女出嫁亦旣抱子 精靈有感則 必陟降而臨之矣 知耶不知耶感耶不感耶 地下之有知無知 精靈之感與不感 皆不可度思而 世世年年觸物生悲 朝朝暮暮隨事起感歌焉而 怨生於聲詠焉而哀寓於詞 事事物物無一非惱我方村哀哀 此恨死而後己則 此身未化此恨未 巳望慕之情寧有極乎
時 皇明崇禎紀元癸酉 月 日
庵主孤哀任道泣血書
망모암기
암(庵)의 이름을 망모(望慕)라 하였음은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을 바라보고 사모함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지 27년이요. 나의 어머님께서 돌아 가신지 13년이라. 얼굴을 다시 볼 수 없고 말소리도 다시 들을 수 없으니 그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소나무 가래나무와 산소요, 풀과 나무와 안개구름이다. 볼 수 없고 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어찌할 수가 없다.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이 내가 힘을 다할 수 있는 일이요. 이것이 내가 암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이요.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깃드릴 곳이다.
아! 만력무오(1618)년 가을 비로소 함안으로부터 내내(奈內)로 이사하여 숭정(崇禎) 계유(1633)년 봄에 다시 기강(岐江)으로 옮겼으니 기강은 영산이요 내내는 칠원(漆原)이다. 내내는 선산에서 10리이고 기강은 산소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고 내내와 기강은 모두 나의 고향이 아니니 영산 칠원에 있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산소란 바라보고 사모하기 위해서이니 하물며 무오년에 내내에서 살았을 때에 아버지는 비록 돌아가셨으나 어머니께서는 아직 계셨으니 혹시 때때로 용서받는 마음도 있었었다. 계유(1633)년 기강에 올 때는 어머니 또한 돌아가시니 오늘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전날보다 더 간절함이 없으리요.
사람이 살지 않는 산중은 고요하고 적막하여 세상일과는 멀리 끊어져서 묵은 풀이 무성하게 덮여 있고 조각구름이 처량한데 이리저리 다니면서 바라보는 이 감회를 어찌 다하리요.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려서 온갖 물건들이 시들어 떨어지면 마음은 몹시 구슬퍼서 탄식하고 상하게 하니 외롭고 쓸쓸하여 눈물이 나며 생생한 모양이 없는 것이 가을의 망모(望慕)이다.
비와 이슬이 내려 초목을 적셔 싹이 새로 트면 마음은 두렵고 근심이 되어 장차 나타날 것 같이 놀라 움직이는 것이 봄의 망모(望慕)이다.
쇠와 돌을 녹일 듯 태양이 불같은 때에는 지하에서 덥지 않을는지? 바람이 차고 눈이 내려 북쪽 찬바람에 얼어붙으면 지하는 춥지 않을는지? 세상이 모두 어둡고 비가 내려 습기 차고 하늘은 음침한 때에 지하의 의상(意象)은 어떠할는지? 백가지 꽃이 널리 피어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어옐 때 지하의 회포는 어떠할까? 고아로 세상에 남아 외로운 그림자가 서늘함을 지하에서 아신다면 응당 가없게 여겨 슬퍼하시고 가련해 하시리라. 여식하나를 출가시켜 이미 아들을 두었으니 정령께서 감회가 계시다면 반드시 오르내리시며 보시리라.
아닙니까 모르십니까? 느끼십니까 느끼지 못하십니까?
지하에서 아시고 모르시고 정령께서 느끼시고 느끼지 못하시고 모두 헤아릴 수 없고 해마다 사물에 닿으면 슬픔이 일어나고 아침저녁 일마다 느낌이 일어 노래하면 원망스러움이 소리에 생겨나고 읊으면 슬픔이 글 속에 깃 드려 모든 사물이 나를 번뇌케 하지 않음이 하나도 없어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니 이 한스러움은 죽은 뒤에 끝날 것이니 이 몸이 죽지 않으면 이 한이 끝나지 않으며 바라보고 사모하는 정이 어찌 있으리요?
시황명(時皇明) 숭정기원 계유(1633)년 월 일
암주 고애 임도 읍혈서
草山亭記
鷲城西有輪谷其中皆山也 曰聖芝 曰道天 曰道草 三峰蔚然深秀 磐踞凝重彷彿長人立於車輪左右夾持也 余生長道天之下 守芝山之親塋 占草山之自號 此 三峰皆爲吾有也 意山川之勝固有主人 焉則以吾無似獨專三峰 顧其偶然哉 洴昔我八世祖以東平君 諡襄平公之五世孫 生伽耶山庄甫 十餘歲當壬亂瘄齡 多變固與長成不同 簯母夫人死節之日 重與大人相失 流離輾轉固其勢也 及到玆山之下而避听 傳子孫輪 雖卑僻而 後世子孫所可導而勿失者也 不肖孫基炯 旣專有三峰 因感三峰之所自來者矣 而家貧力綿 常以墳菴之未成爲恨亦以 自己之無居室 爲念 今年春 肯垿若干楹慕先焉 名曰永慕處己焉 揭之草山 爲子孫者登草山而求永慕之意則 孝悌之心當油然自生 亦知草山之意有所在也夫
戊戌六月下澣不肖孫基炯泣血書
초산정기
영산의 서쪽에 윤곡(輪谷)이 있고 그 가운데는 모두 산이니 성지(聖芝)라 하고 도천(道天)이라 하며 도초(道草)라 하는 세 봉우리가 무성하게 우거져서 깊고 빼어나 그 서리고 어엿함이 마치 큰사람이 차바퀴의 좌우를 끼고 서있는 것 같다.
나는 도천산 아래에서 나고 자랐으며 성지산의 부모님 산소를 지키고 도초산의 초산(草山)을 나의 호(號)로 삼았다. 이 세 봉우리를 모두 내가 가진 것이 된다. 산천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원래 주인이 있다고 뜻함이니 내가 삼봉을 혼자 독점한 것 같지 않은가.
돌이켜 보니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옛날 나의 8세조 동평군께서는 시호(諡號) 양평공(襄平公)의 5세손으로 가야산 농막에서 나고 나이 10여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어린 나이로 많은 재난을 겪고 참으로 성장함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거늘 하물며 어머님께서 절개를 지켜 돌아가신 날 거듭하여 아버지와 서로 헤어져서 유리전전한 것이 그때의 형세였다. 이 산 아래에 이르러 피난하여 머물고 자손들에게 윤곡을 전하였다. 비록 작고 궁벽한 곳이나 후세의 자손들이 지켜서 없이하지 않아야 할 곳이다.
불초한 손자 기형(基炯)은 이미 삼봉을 오로지 가지게되고 따라서 삼봉에 오게된 것을 감격하나 집이 가난하고 힘이 약하여 항상 재실을 짓지 못하여 한이 되고 또한 스스로의 거처할 집이 없음을 생각하였더니 금년 봄 선조를 추모할 수 있는 집 몇 칸을 지었다. 이름을 영모(永慕)라 하고 거처하며 초산정(草山亭)이라고 헌판을 걸어서 자손된 자 초산에 오르고 영모의 뜻을 구한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하는 마음이 왕성하게 생겨나고 또한 초산의 의미를 알게 하는데 있음인 저.
무술년 6월 하순 불초손 기형 읍혈서
2) 제영 (題詠)
옛 선인들은 우리 고장과 연관된 한시들을 많이 남겼다.
{창녕현지}와 [축산군지}에 실려 있는 한시 중에서 우리 고장 출신 인사의 작품이거나 우리 지역과 관련이 있는 시는 다음과 같다. 또 남지팔경에 대한 시를 수록한다.
洛江詠 承旨 成安義
薄言作勝遊 于彼洛江頭 西洞紅花老 南郊綠草柔
神淸風外笛 興溢鏡中舟 惜景歸來晩 荊門月色浮
잠깐 뛰어난 놀이를 말하노니 저 낙동강 머리였노라 , 서동에는 꽃들이 지는데 남쪽들엔 푸른 풀이 부드럽도다
들려오는 젓소리에 마음은 더욱 맑고 맑은 물 배 위에선 흥이 더욱 넘치네, 풍경에 마음 홀려 돌아옴이 늦었더니 내 집 사립문엔 달빛 높이 떠 있노라.
雙樹亭 詠老梅 澗松 趙任道
公館栽培隱逸花 使君多暇日閒亞 身居塵臼心邱塾 月白淸宵倍憶家
忘憂亭 澗松 趙任道
千載蘇仙赤壁遊 吾熵此會亦風流 淸江夜興渾如舊 只欠當年七月秋 熵 제
景洛亭 (元韻) 一庵 辛夢參
十年營創數椽家 寥落孤村旁岸沙 莫笑生涯渾冷談 箇中收拾足烟霞
物外江山與日新 淸宵把釣珌漁人 相逢莫問魚多小 灭管風流自在身 珌 ,
雨細淸江邊 風輕白鷺眠 烟波無限興 痖帳獨回船
玉川洞 澗松 趙任道
溪流如玉石如枰 手弄潺洊坐濯纓 安得移家專一塾 抔蘿烟月送餘生
흐르는 시내 옥같이 맑고 반석은 장기판처럼 반듯한데, 손끝으로 물소리 내며 갓끈을 씻노라
어찌하여 집을 옮겨 이 구럭에 온전히 잠겨 벽라연월(抔蘿烟月) 속에서 한 세상 지낼꼬
龍山卜居 澗松 趙任道
龍山一樹紫薇花 花外茅畯是吾家 (下韻缺) 畯 첨
江齋 十二詠 澗松 趙任道
- 望慕庵
望慕何由見 松間宿草荒 空懷風樹恨 莊誦蓼莪章
吾與亭 (原韻) 漁村 楊 暄
江梅初爲歲寒栽 誰料春來尙未開 桃李卽今方張王 愧將寒瘦妬蜂媒
南嶺孤松萬丈長 坐看終日托心腸 傍人莫道槐黃近 萬曆年中老上庠
남지팔경 석계 황치제 ( 南旨八景 石溪 黃致宰 )
철교 ( 鐵橋 )
洛江之上水西東 大陸相連踞半空 不但行人無病涉 雄偉應擅萬邦中
에헤라 좋네 남지철교를 찾아가자 ,낙동강 맑은 물은 서동으로 흐르는데
대륙은 서로 연해 반공에 높이 솟고 ,끊임없는 길손이 호기가 절로 난다.
울창한 그 행세는 만방에 제일이다.
화산낙조 (華山落照 )
片紅粧點碧山客 乍照危岩忽染松 丹霞凌雲蒼空去 彩鳳玲瓏繞月從
에헤라 좋네 화산낙조를 찾아가자 ,구구봉 봉우리마다 분홍청산 단장하고
살픈 산머리에 솔가지를 물들인다.붉은 저녁 노을 하늘에 능란하고
유유한 채색봉은 달빛에 영롱하네.
경양춘풍 (景讓春風)
駭紅軟綠護山窓 此際東風動滿江 暖吹豪客詩毫末 細拂佳人舞袖雙
에헤라 좋네 경양대 춘풍을 찾아가자 ,분홍꽃 흰 배꽃에 연하도다 푸른 들판
강에 찬 봄바람은 청춘의 단꿈 실어 ,금잔디에 가로 누은 시객의 붓에 불어오고
춤추는 가인들의 소매 끝에 향기롭다.
합강어적 (合江漁笛)
亭下烟波欲暮時 漁舟一葉故遲遲 長笛數聲先哲地 南天萬漉鶴相隨
에헤라 좋네 합강어적을 찾아가자 ,정자아래 비단 물결 해는 이미 저무는데
한 조각 조각배는 두둥실 한가롭고 ,긴 젓대 맑은 소리 옛 꿈을 자랑한다
저 남천 일 만 길에 청학이 노닐구나.
홍포모연 (鴻浦暮烟)
薄紗凝翠出千扉 晩浦歸鴻逈帶飛 和雨輕沾江岸柳 乘風細繞野人衣
에헤라 좋네 홍포모연을 찾아가자 ,엷은 비단 푸르게 어리어 일천사립에 솟아나고
늦은 가을 돌아가는 기러기 떼 멀리 날고 ,그 연기 비에 젖어 강 언덕 버들에 잠겼구나
바람에 실어 가늘게도 들사람 옷깃에 둘렀구나.
율림청풍 (栗林淸風)
洛涯寥郭一村區 時有淸風我不孤 淵明去後今千載 璴北何人獨未汚
에헤라 좋네 율림청풍을 찾아가자 ,앞 강물가 넓고 넓은 새마을이 여기로다
수시로 부는 맑은 바람 이내 몸 외로움 씻어주고 ,도연명 간 뒤 천년이요 율곡이 간 뒤 삼 백세로되
아름다운 옛 정을 누가 여기서 잊을손가
학성추월 (鶴城秋月)
道草山光近我家 良宵銀月可看書 對君淸興應無盡 百載光輝自有餘
에헤라 좋네 도초산 명월을 찾아보세 ,도초산 푸른 숲이 우리네 집에 가까우니
어진 밤 은쟁반 달빛에 글을 읽고도 남겠구나 ,그대를 대하는 맑은 정서 끝없이 흥겨웁고
천 년인들 변할 손가 상상봉 명월을 베고 잔다.
송포귀범 (松浦歸帆 )
江天遙望衆峰齊 鷺隨孤帆共向西 泛彼來人應有思 乘船猶勝入山兮
에헤라 좋네 송포귀범을 바라보자 ,강 하늘 멀리 보니 일만 봉우리 즐비하고
외로운 해오라비 제멋대로 따라온다 ,저기 저 배 탄 손님아 뱃노래를 불러보세
산 경치도 좋다지만 뱃노래 흥을 당할소냐.
[ 윗시의 해석은 석계 황치재의 손자인 農豚 黃世淳(신전리,교장)이 하였다.]
사화 (史話)
사진설명
( 인조때의 선비 조 간송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와 남지의 상징 남지 철교 )
우리 선조 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꺼려하였다. 사화(士禍)가 일어나면 남겨놓은 글로 인하여 집안이 몰락하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님의 정치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외에 얼마 되지 않은 사서(史書)만 오늘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 고장을 배경으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들도 많았으리라. 누군가 열심히 기록하여 놓았더라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으련만 이 책 저 참고서적을 뒤져 몇 가지 사화를 찾아냈지만 역시 역사 이야기일 뿐 더 큰 의미는 찾기 힘들다 할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남긴 야사(野史)는 어떨 적에는 정사(正史)보다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지므로 {창녕군지}에 실린 사화 중 우리 고장과 연관 있는 것을 순서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1. 홍의장군 곽재우 (紅衣將軍 郭再祐 )와 구진산성 ( 九陣山城 )
홍의 장군 곽재우는 우리 고장을 무대로 활동한 의병장이었으며 동시에 말년을 우리 고장의 선비들과 고유하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에 우거하다가 별세한 후 우리 고장 앞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풍땅에 묻혔는데 이광정(李光庭)의 창암유허비문(滄巖遺墟碑文)에서 밝힌 그대로 문무유선(文武儒仙)의 선인으로 이 고장에 그의 정신이 살아 남아있다 할 것이다.
문무유선이라 한 것은 그가 처음에는 조남명(曺南冥)의 제자로서 학문을 닦으며 과거를 보려고 하였으니 유생(儒生)이었고, 다음에 세상을 마다하고 우리 고장 용산리 기강나루에서 5리 상거인 지정면 돈지라는 강변 마을인 강호(江湖)에 숨어 낚시질을 즐겼으니 고결한 처사(處士)였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하루아침에 칼을 들고일어나서 왜적과 싸웠으니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었으며, 국난을 평정한 뒤에는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우리 고장 인근 우강리 강정(江亭)에 돌아와서 거문고와 서책(琴書)을 벗으로 삼고 풍월을 읊조리며 솔잎으로 양식을 하고 살았던 만년(晩年)은 누구나 그를 선생이라 도인(道人)이라 불렀기 때문이었다.
곽재우의 본관은 현풍이며 아버지는 월(越)이며 감사를 지낸 분이다. 그는 외가인 의령 세간리에서 명종 7년(1552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모아 우리 고장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먼저 승전한 곳이 용산리 기강나루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강을 따라 올라오던 적선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는데 곧 의병의 첫 승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창나루의 뒷산인 창진산 봉우리와 강 건너 함안 대산면의 용화산 봉우리를 연결하는 줄을 매어 놓고 그 줄에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군장을 갖춘 병사의 허수아비를 매달아 띄워 흔들고 잡아당기게 하였다. 왜군이 강을 바라보니 천군만마가 하늘을 나르며 강을 건너 다니는지라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다고 한다.
홍의장군은 그 후 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가야 때의 고성(古城) 구진산성과 고곡산성의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고 산성의 월송정(月松亭)에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는 한편 기강나루와 박진나루 등 강의 요지마다 나무 말뚝을 강 속에다 박아 적선이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하였으며 강안에 초병(哨兵)을 잠복시켜 적의 동정을 재빨리 알고 대처하며 공격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이 고장을 지켰다.
치열하였던 전투는 지금까지 남아 전해오는 용산리 말무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의병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는 산을 마분산(馬墳山)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망우당 곽재우의 의병군의 활동을 전하는 전적지로는 수개, 성사리 매전 등 여러 곳에 전설처럼 전해 온다.
{창녕군지}에 실려 있는 망우당의 만년 생활을 참고로 싣는다.
◎ 망우정의 생활
이곳에 배 한 척과 거문고 하나를 두고 책상에 경전과 선술(仙術), 의약 등 서적을 쌓고 소요(逍遙)히 혼자 즐기면서 세상 생각을 잊으려 했다.
또 영산 창녕 인근 문사들과 교유하여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타계할 때 이곳의 어진 선비들에게 망우정을 물려주어 정자 이름은 사후에 [여현정]으로 개명하였다.
◎ 망우정에서의 만년
만년은 인근 선비들과 교우하며 선도를 닦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으며 마시지 않아도 목마르지 아니하였다 한다.
하루는 박수홍(朴守弘)이 만나러 갔더니 반겨 맞아 얘기를 나누며 술 몇 잔을 마시다가 조금 후에 그릇에다 귀를 기울이니까 술이 귀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정사년(1616; 광해 9년) 병이 들었는데 침이나 약을 거절하면서,
"사생은 명(命)에 있다." 했다 한다.
4월 10일 66세로 우강리 망우정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때 뇌성이 울리고 비가 크게 쏟아지고 붉은 기운이 하늘을 덮어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2. 간송 조임도 (澗松 趙任道)와 사우(祠宇)의 자미화(紫微花)
{취산군지} [이사](異事)에 보면 망우당 유허비에 관한 이사와 함께 조간송 사우(祠宇)의 자미화(紫微花 : 백일홍나무, 배롱나무)에 대한 일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依舊簇立云趙澗松先生祠宇內有紫微花一樹 本先生手植而 屢世經驗則 其宗家運否則其本死幾年間之無枝葉 幾年後其家運復則 或一?生芽惑中心出芽云而
(조간송 선생님의 사우 안에 자미화(백일홍) 한 나무가 있으니 이는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다. 여러 대(代)로 경험한바 그 종가의 운이 쇠(衰)한 즉 그 나무가 말라 죽어서 몇 해고 원 줄기와 가지와 잎이 없어지고 또 몇 년 후 그 집안 운이 돌아 온 즉 그 한쪽에 눈이 트고 혹은 중심에서 눈이 나와 옛날처럼 순이 무성하게 자라나더라고 한다.)
위에 기록되어 있는 간송 조임도는 우리 고장의 선비이다. 또 수 백년 묵은 자미화는 지금도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는데 여러 해를 지났는데도 그 원둥치의 굵기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조임도는 선조 18년(1585)에 태어나서 현종 5년(1664)에 죽었는데 자는 덕남(德男) 호는 간송으로 본관은 함안이며 입암(立巖) 식(埴)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학업을 닦았다.
그가 우리 고장에 살게 된 것은 1633년으로 함안에서 당시 칠원현 내내(奈內 : 현재 칠서면 계내리)로 어머니를 모시고 1618년 가을에 이사를 왔다가 숭정 계유년(1633년) 봄에 기강(岐江 : 지금의 용산리)으로 옮겨왔다고 그가 쓴 [망모암기](望母庵記)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낙동강변 용화산(龍華山) 기슭에 소정삼간(小亭三間)을 지었는데 그 중 하나는 망모암이라 하였고 그 왼쪽 하나는 사월루(沙月樓)라 하였고 오른쪽 한 칸은 연어대(鳶漁臺)라 하였는데 이를 합하여 합강정사(合江精舍)라 하였는데 여기서 간송은 큰 뜻을 품고 가차없이 자신을 필달하면서 숨어살았다. 광해조 때 정인홍이 오랫동안 권세를 잡고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도암(陶庵) 이언적(李彦迪)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진계(陳戒)의 소를 올리고 마침내 미움을 받아 기강으로 피신, 몸소 고기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한다. 간송은 평소 존모(尊慕)하기를 곽망우(郭忘憂) 정동계(鄭桐溪) 이외재(李畏齋) 문모계(文矛溪) 유수암(柳修巖) 허미수(許眉未) 등 제공(諸公)이었는데 서로 도의풍절(道義風節)이 같았다 한다. 1660년 76세 때 망모암을 지었고, 1664년 2월 15일 향년 80세에 타계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천거로 벼슬이 내리기를 공조좌랑(工曺佐郞)에 이르렀고, 현종 때 어사 남구만(南九萬)의 서계로 행의(行誼)의 표장과 쌀과 콩을 하사 받았으며 후에 사후인 1666년 사림들이 행의순영(行議巡營)에 글을 올려 사헌부지평으로 추증되었고 1721년에 함안 사림들이 상소하여 송정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 송정서원(松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이광정이 서문을 쓴 간송집(澗松集)이 있다.
전해 오기는 임금님께서 간송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망모암을 찾아왔더라고 한다. 그런데 간송은 짚신을 삼으며 집에 들어오는 손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임금님임을 알았으나 짐짓,
"선 빚 얻고 후 빚 갚다니!" 하면서 맞았다. 임금님이 하도 기가 막혀,
"낙동강 구구봉(용화산)을 줄까? 낙동강 칠백리를 줄까?" 물었다. 간송은 구구봉을 달라고 하여 용화산을 하사 받았고 한다. 그래서 용화산 구구봉이 함안 조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전한다.
간송의 제삿날에는 합강정에 배를 띄워서 밤새 강을 건너 다니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 한밤중이 되면 통갓을 쓰고 한복을 잘 차려 입은 선비 두 사람이 합강정에서 배를 타는데 사공은 아무 소리도 않고 용산리 쪽으로 배를 건너다 주게 되었으며 새벽이면 도로 그 선비들이 배를 타는데 합강정으로 건너다 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결국은 귀신을 실어다 준다는 이야기이니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3. 고창녕 고유 (高昌寧 高裕)
원님의 명재판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창녕군지]에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유는 일찍 경상도사가 되었는데 관찰사 윤동수가 그에게 검전(檢田)의 일을 맡겼는데 송사하는 사람과 공문이 뜰에 가득했으나, 그 판결함이 신과 같아서 관찰사가 크게 놀라 칭찬했다 한다. 다음 이야기는 명재판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창녕 현감에 있을 때, 창녕 현민들의 조세 감면에 크게 힘을 써 큰 혜택을 입혔다.
더욱이 원님 재판 이야기는 그의 유명한 재판중의 하나로 이 사실을 전하는 선정비가 칠현리 옻고개에 서 있다. 남지읍 칠현 옻고개에 사는 부인이 그를 찾아온 본 남편을 죽였다는 살인 사건이 터져 고 현감이 현장에 갔다.
살인 혐의를 받은 여인은 영조조(1750년대) 호남 전주의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박씨로서 개가해 와서 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17살 때 정읍의 부농의 큰아들 이씨(16살)와 결혼했는데 그 시어머니가 성미가 고약해 강제로 시집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팔자를 한탄하며 죽으로 여드레나 굶다 뜻대로 되지 않아 이래도 저래도 못하고 흘러 흘러 남지 칠현까지 왔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21살의 김가라는 남자와 재혼하였다.
여러 해가 흐른 어느 날 오후, 빨래 길에서 옛 남편 이가를 만났다. 이가는 어머니의 처사를 원망하고 동서남북 그의 아내를 찾고 다니던 중 수소문 끝에 이곳에 왔던 것이었다.
본 남편을 만나니 반가웠다. 박여인은 과거의 정을 잊지 못해 집으로 안내하고 닭을 잡아 정성껏 대접했다.
이게 웬일인가? 닭고기를 먹은 이가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져 죽어 버리고 말았다.
문초 끝에 사건의 경위를 알게 된 원님은 전남편 이가가 먹고 남은 닭고기를 개에게 주었더니 개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현감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 집 지붕을 벗겨라!"
하고 명령했다. 초가지붕을 벗기자 뜻밖에도 100년 묵은 길이가 1자나 되는 지네가 나왔다.
"지네는 닭과 상극으로 이가가 죽은 것은 지네의 독 때문이니라. 저 여자는 무죄이다. 풀어 주어라"
원님의 명쾌한 판결에 모든 사람이 경탄하고 감사를 했다.
박 여인은 2년간 불철주야 길쌈으로 돈을 모았는데 이 돈으로 가매장하여둔 전남편의 유골을 그녀가 손수 짜 만든 무명베로 청결하게 싸서 전라도 본집으로 이장하게 했다.
그 후에 현감의 명판결을 기리고자 수백 명 동리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석비를 세워 고창녕 고유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 했다 한다.
고창녕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 외에 여러 가지가 민담(民譚)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우리 지방에도 널리 퍼져 있다. 고창녕과 수숫대, 고창녕과 과부 외에 살인범을 잡은 고창녕 이야기(옥천, 합천 해인사 등 2종)가 있고, 소를 찾아준 고창녕, 벙어리 새경을 받아준 고창녕, 감사 아들을 벌한 고창녕, 독값을 받아낸 고창녕, 노총각을 장가보낸 고창녕(2편) 등 많은 민담이 전해 와 선정을 베푼 창녕고을의 명환(名宦) 고창녕 원님의 이야기가 경남뿐만 아니라 전국에 널리 퍼져 있고 그리고 실제로 있었던 주인공의 활동 현장을 그대로 확증해 주는 칠현 옻고개의 선정비는 오늘날 우리 읍민에게 더욱 사실로 와 닫게 하고 있다.
고창녕 곧 창녕현감 고유(高裕, ?∼정조 기해:1779)는 본관은 상주이며 자는 순지(順之) 호는 추담(秋潭)이다. 벼슬은 영조 19년(1743)에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직강, 정언, 지평, 장령, 필선 등을 거쳤으며 경상도도사, 창녕현감, 안무목사 등을 지내고 동부승지에 올랐다. 영조 33년(1757)에 창녕현감으로 도임하여 1760년에 이임하였다. 판결이 신과 같다는 평을 받았다. 창녕현의 명환(名宦)으로 기록되었다.
4. 아들은 牧使 아버지는 縣監
조운한(趙雲漢) 현감은 1867년(정묘)에 영산현감으로 도임하여 1870년(경오)에 백천으로 전임한 나이 많은 영산현감이었다.
그가 부임해 보니 삼세(三稅-國稅)를 내는데 고을 사람들이 배에 직접 실어 밀양 삼랑진까지 싣고 가서 바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가 막심했으니 도천, 송진나루에서 배에 싣고 가면 홍수가 나서 파선하기도 하고 도둑 떼에 양곡을 빼앗기기도 하여 다시 양곡을 거두어 실어가야 되었으므로 세곡을 이중삼중 부담하는 결과였다.
"원님, 세곡을 송진나루에 내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거기서부터는 나라에서 책임지게 되면 얼마나 이 폐단이 줄겠습니까?"
주민들의 진정을 듣고 조현감은 진주목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몇몇 관속을 거느리고 진주 목사가 있는 동헌으로 갔는데 큰일이 났다. 조현감이 무엄하게도 상관을 만나려면 마땅히 문전에서 가마에 내려 걸어가야 되는데 버젓이 가마를 탄 채 동헌 마루까지 가는 게 아닌가?
"원님! 내려야 됩니더."
"그냥 가자! 괜찮다."
"안됩니다요."
"괜찮다"
원님은 자꾸 괜찮다는 소리만 반복하자 따라간 이속들은 간이 콩알만해졌다.
목사가 보였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려니 겁을 냈는데 '어허! 어인 일인가?' 목사가 대청에서 뛰어내려 왔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바로 진주 목사는 조운한 현감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건의를 받고 그 뒤부터는 삼세를 송진나루까지만 운반하면 되었다니 주민의 큰 부담과 노역을 덜게 했다 한다.
그러나 영산 고을에는 오랫동안, "아들은 목사 아버지는 현감."하는 말이 돌아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현감조후운한애민선정비」라 새긴 선정비를 남지읍 성사리의 주민들이 1876년에 세웠다.
이 비는 지금 성사리 황새목에 서 있다.
전설 (傳說)
사진설명 ( 합강정 )
선조들이 글로 그들의 지혜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남겨 주지는 않았더라도 구전(口傳)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많은 지혜와 자손들에게 가르칠 교훈과 도덕적인 덕담(德談)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해학(諧謔)까지 담긴 이야기가 바로 설화이며 설화 안에는 신화 전설 민담동화 야담 소화 등이 있다. 흔히 구전설화 중 민담을 신화나 전설과 구분한다.
전설은 과거의 특정시대에 일어났던 일회적인 사건을 그리는데 민담은 과거 언제 어디서나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사건을 그리며, 전설은 진실성이 문제가 되는데 민담은 진실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전설은 현존 증거물에 대하여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과 경험을 설명하려는 객관성을 띄는데 민담은 주관적 서술이며, 전설에는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피안(彼岸) 관념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존재하지만 민담에서는 주인공을 돕거나 힘이 되고 목표를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전설은 사회적 맥락이 큰데 반하여 민담은 사회적 맥락이 작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의하여 민담 성격의 이야기는 [전설]에서 제외하였다.
전설이나 민담 등 구전 설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다듬어지고 보충되고 곁가지가 쳐져서 마치 길가에 나뒹구는 조약돌처럼 흔히 접할 수 있다. 어릴 적 할머니나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들었던 재미나던 옛 이야기가 모두 전설이요 민담, 야담이며, 사랑방 가득 모여 새끼를 꼬며 막걸리나 동치미를 먹으며 주고받았던 가슴 속 깊이 숨겨졌다가 나오는 애환 서린 이야기들이 모두 우리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며 구전설화였다. 설화를 전설이나 민담, 야담 등으로 세분하기에는 어려우나 우리 고장을 무대로 일어난 이야기만을 전설로 취급하여 수록하고 사건의 장소 인물이 우리 고장과 관련이 없거나 불분명한 것은 민담 또는 야담으로 보고 제외하였다.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원형을 지키지 못하고 변형되고 나누어지고 생략되고 덧붙어져 어떤 것은 소멸되어져 지금 우리들에게 전하여져 온다. 채집(採集)을 하면서 가급적 촌로(村老)의 이야기 투를 그대로 유지하며 기술하는 것이 가장 좋으나 심한 사투리, 전후의 맥락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여 정리 과정에서 독자가 읽기에 편하도록 설명이 덧붙어 졌다.
{창녕군지}에 실린 전설과 {남지읍향토지}에 실린 것]을 참고하여 옮겨 싣는데 같은 이야기라도 내용이 약간 다른 것은 절충하여 실었다.
◎ 쥐설과 연잎설
* 남지리
남지 웃개나루에서 주막을 하다 쥐 덕분에 부자가 됐다가 떠나지 않았기에 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웃개(남지리)는 옛날부터 김씨, 이씨가 살았는데 쥐가 많아 쥐설이라 했고, 땅의 생김새를 따서 배 떠나는 설 또는 연잎설이라 했다. 연잎설이라는 것은 연잎에 물이 어느 정도까지는 담길 수 있지만 더 많이 담기면 그만 기울어져 쏟아져 버린다는 뜻으로, 능력껏 부자가 되면 이곳을 떠나야지 더 살면 그만 망해버린다는 것(배 떠날 설도 같다. 배가 짐을 많이 실으면 파선을 하게되니 알맞게 짐을 실었을 때 떠나야 한다)
김씨는 가난해 마방을 하는 사람이었다. 길가는 행인과 말을 재워주는 곳으로 처음 시작했을 때는 무척 가난했으나 웃개나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점점 살기가 좋아졌는데, 다만 손님들이 들면 이상하게도 엽전이나 자그만 물건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것이었다.
주인 김씨는 자꾸만 손님의 돈이 한 푼 두 푼 없어지는 이유를 몰라 고민을 하던 중 어느 날 밤 쥐가 손님방을 들락거리면서 엽전을 물어내는 것을 발견했다. 이튿날 지난밤 보아 두었던 쥐구멍을 파헤쳐 보았더니 그곳에는 수년간 쥐가 물어다 모은 돈이 고스란히 그곳에 있는 게 아닌가?
단번에 부자가 된 그는 이곳이(연잎설)이니 떠나가야 제 재산이 유지될 것인데 돈을 더 벌 욕심으로 마구간과 집을 다섯 채나 더 짓고 죽솥과 밥솥을 수십 개 거는 등 집을 늘여 크게 지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김씨는 이웃 동리에 노름하러 나간 사이 불이 났다. 전재산은 삽시간에 몽땅 다 타버렸고, 원래대로 가난해져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연잎설>은 살아남아 외지에서 떠돌다 웃개에 와 정착하면 잘 살게 되는데 토박이는 반대로 보통이 아니면 몰락하고, 조금 한 밑천 잡았을 때 떠난 이들은 타지에서 잘 사나, 이곳에서 부자라 소리를 들으며 그냥 있은 이들은 수년 내 망해 버렸다 한다.(1979년 남지읍 상남동 김응용 남 60세)
◎ 욱개둑의 처녀무덤
* 남지리 937번지 (남포 욱개둑)
사진 ( 남지철교 동편 강가 욱개둑에 있는 처녀무덤 )
남지 철교가 가로지른 낙동강 강변 욱개둑(철교 아래 일대의 들판)에는 아무도 벌초를 않아 잡초만 무성한 네모진 무덤이 있다. 매년 홍수에 곧잘 물에 잠기면서……. 사람들은 이 무덤을 처녀무덤이라 부른다.
백여 년 전, 이곳 웃개(보통 '욱개'라 발음한다)에 김 참봉이란 학자가 살았다. 그러나 벼슬하기 전 청년 시절은 가난하여 스스로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해야 했던 외동아들이기도 했다. 김 참봉네는 자손이 귀하기도 하여 산소를 제비설에 써서 많은 자손을 보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아이가 나면 죽거나하여 몇 대로 걸쳐 외동이었다.
어느 해 큰 장마 끝에 홍수가 났다. 김 참봉이 애써 가꾼 농사도 물 속에 잠겨 들었다. 홍수는 사흘은 물이 붓고 사흘은 물이 빠지는데 그가 물 빠질 사흘이 될 때쯤 웃개둑(지금 남지철교 근처) 밭에 나갔다. 심어놓은 농작물은 하나도 쓸모 없이 되어 낙심하여 밭을 돌아다니는데 아직 덜 빠진 물가에 뭔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여자 시체로 물에 불어 큰 황소같이 된 큰 덩치가 떠 물가로 밀려와 있는 것이 아닌가? 강 상류 어디선가 익사해서 떠내려 온 듯했다. 삽으로 밀어내 강물에 띄어 버릴까 하다가 김 참봉은 이것도 인연이겠거니 바로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주었다. 그날 밤 꿈에 죽은 여자가 나타났다. 큰절을 올리더니, "고맙습니다. 서방님. 은혜를 보답하겠습니다. 내년부터 고추를 심으면 고추농사는 잘 될 것입니다." 하고 사례하면서 사라졌다.
김 참봉은 이듬해 시험삼아 고추를 심었다. 그러나 현몽 그대로 고추농사는 잘 되지 않고 평년작에 그쳤다. 그래서 김 참봉은 그 꿈을 개꿈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김 참봉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얻어 몇 대 외동을 면했고 그가 죽기 전에 두 아들에게서 손자 열 댓명을 봤으며, 그 후손들도 아들 못 낳아서 걱정하는 집안이 없다니 처녀의 보은인 <고추농사가 잘 되리라>는 것은 그대로 되어진 것이라 한다.(1979년 남지읍 상남동 김응용 남 60세)
☞ 뒷 이야기 : 그래서 남지에 고추 농사가 잘된다는 속설이 전해 오는데 비닐하우스 고추농사가 크게 성해진 것도 어쩌면 이러한 전설과 인연이 있지나 않을까? 그렇다면 이름 모를 처녀의 은덕을 입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처녀무덤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1999년 3월에 현장을 찾으니 무덤의 흔적은 간 곳이 없고 감자밭이 되어 버렸다. 감자 얼마를 더 얻기 위해 무심한 밭주인이 무덤을 없애버린 모양인데 진혼제나 잘 지내고 술이나 한 잔 뿌려주었는지 .
◎ 곽망우당 말무덤
* 용산리 알개실
용산리 알개실 서쪽 마분산(馬墳山)에 곽망우당 말무덤이라 불리는 무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하시바(羽紫)가 이끄는 왜병이 이 근처를 침공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이끄는 의병이 구진산성을 근거로 낙동강과 남강을 오르내리며 왜병을 게릴라식으로 격퇴할 즈음이었다.
홍의 장군은 쳐들어오는 왜병을 막기 위해 자신의 말에다 벌통을 매달아 적진에 돌입케 했다. 벌통이 말의 뜀박질에 흔들리자 벌이 쏟아져 나와 왜군을 닥치는 대로 쏘아대니 적진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며 큰 혼란이 벌어졌다. 이 틈을 타서 의병군이 일제 공격하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의병은 이겼다. 그러나 아깝게도 말은 적에게 사살되었다. 뒤에 말의 공을 높이는 뜻으로 그곳에 말의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이 말무덤산은 6 25동란 때에도 유엔군과 북괴군이 일대 격전을 벌인 곳으로 여기서 공산군이 섬멸되고 진격의 공세를 유엔군이 가다듬은 계기를 가져오게 한 곳이기도 하다(1970년 빛벌문화 수록)
그 외 곽재우장군의 말무덤이라 전하는 곳이 도천면 우강리 망우당이 만년을 보낸 망우정 북쪽 지금 송진공동묘지 위에 1개 더 있다.
** 말무덤의 [말]은 말(馬)이 아니라 크다는 뜻의 접두어(接頭語) [말-]이다. 접두어[말-]은 어떤 명사 위에 붙어서 그 물건이 큼을 나타내는 말인데 [말매미] [말벌] 등등으로 큰(왕) 매미, 큰(왕) 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큰 무덤이란 뜻으로 [말무덤]이라 사람들이 불렀는데 후대에 와서 이것을 모르고 용맹한 말 전설과 융합되어져 그만 말(馬) 무덤이 된 것이 아닌가한다. 이 말무덤은 전사한 의병들의 시체를 격전장소의 산봉우리에 합장(合葬)하고 커다랗게 봉분을 지어 자손 만대에 그들의 용맹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 장군이 태어난다는 적산줄기
* 마산리 당포
아주 옛날에 당나라 군대가 땅굼 마을로 들어 와 진을 쳤다. 그들은 주둔하면서 근처 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놀았다. 하루는 장수가 적산줄기를 보고서 앞으로 조선을 구할 큰 장군이 태어나겠다고 점쳤다. 당나라 장수 이여송이 방해를 하고자 장군 혈맥(전산줄기)을 채찍으로 두 동강을 내고 떠났다. 그후 잘린 적산줄기에 3일간이나 피가 흘렀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 3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자리에는 산세가 붉은 황토색이며, 잘린 자리는 톱으로 자른 것처럼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다. (남지읍 당포 윤남주 여 75세)
◎ 배설
* 남지리
남지는 나루터에서 시작하여 주택이 증가된 동네이다. 선박이 출입하는 포구로서 배설이라 한다. 선박에 화물을 알맞게 실어야지 과적을 하면 파선되듯이 이곳에서 보통 부자는 상관없으나 큰 부자는 소문만 나면 얼마 못 가서 파산된다고 한다.
타지에서 들어온 사람은 잘사는 사람이 많지만, 토박이는 반대로 보통이 아니면 몰락한다. 한 밑천 잡았을 때 떠난 사람은 타지에서 살고 있다. 그런 탓인지 1924년경에는 백호미만의 남지리가 영남수리공사 착공 이후부터는 급속도로 인구가 증가되어 토박이는 점점 사라지고 타지에서 모여든 주민이 대부분이다. 물론 타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도 보통이 넘어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만 나면 배가 화물을 과적하면 파선되듯이 살림살이가 얼마 못 가서 파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설에서는 부자가 망한다고 전해 온다.
그러므로 남지의 보통 주민들은 부자는 포식으로 괴롭고 빈자는 굶주림으로 괴로우니 부자도 빈자도 아닌 그 중간 살림살이를 원하고 있었는데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부터는 보통 이상의 부자가 날로 늘어나도 파산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남지읍향토지 실림)
◎ 설뫼샘
* 학계리 명지
1922년 가을 의령군 부림면 입산(설뫼)리에 살던 순홍 안씨 안태일의 유복한 가문에서 뜻밖에 액운을 만나 4형제가 연달아 병으로 죽으니 일시에 4과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미망인들은 가풍의 미덕을 지키기 위해 개가하지 않고 통곡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에 남지 일촌(명지의 옛 이름)에는 좋은 집터 "명지"(名地)가 있다는 풍수의 말을 듣고 이사를 왔다고 한다.
대지 2천 여평에 옥바위를 다듬어서 주추와 기둥을 높이 세워 와가 10동을 대궐같이 높이 지어서 수십 명의 남종, 여종과 가정 "훈장"(교사)까지 채용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던 중, 어느 날 큰 과부의 아들이 월촌 옆(지금의 옥산) 구비미 앞, 동산에서 큰 구렁이를 때려죽인 후부터는 병으로 눕게 되자 백약을 복용하여도 효력이 없고 난데없이 집안에는 구렁이가 우굴우굴 기어다닌 것이다. 밥솥에도 구렁이가 도사리고 있고 침실에도 쌀뒤주에도 구렁이가 도사리고 있으니 징그럽고도 몸서리가 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이라 내일이면 8월 추석이라 추석 음식을 만드는데 축담 밑에 둔 큰 독에다 부글부글 끓은 탕수국을 넣었는데 그곳에 4살 된 넷째 과부의 귀여운 독자가 실족하여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니 집안은 벌집을 쑤신 듯 통곡이 진동하는 비극의 추석이 되고 말았다.
그후 며칠이 지났다. 18세 된 처녀종이 늪 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에 뇌성 벼락을 맞아 즉사하니 집안은 연달아 일어난 액운을 당하고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구렁이는 집안에 여전히 우글우글 성하게되니 결국 구렁이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 4과부들은 어디로 인지 마을 사람들 모르게 이사를 가고 말았다.
그후 왜놈 목수들이 그 집을 허물어뜨리는데 기와 한 장을 들면 구렁이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한다. 풍수의 말을 듣고 명지를 찾아 이곳 일촌으로 이사온 설뫼집 4과부는 집안에 뱀이 성하여 망했다고 "뱀 사"(巳)자 사가부(巳家富)라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설뫼집 4과부 가족들이 마시던 샘물은 동네 유일의 식수용 샘물이였는데 상수도 시설이 완비된 지금은 쓸모 없는 우물이 되었지만 옛날 그대로 남아 있어 사람들은 설뫼집 샘이라 부르고 있다.(남지읍향토지 실림)
◎ 옥산 장군 새미
* 학계리 옥산
1838년경에 현재 옥산마을 동사 앞 삼거리에 공동샘물이 있었는데 이 샘을 장군 새미라 불린다. 이 샘의 물은 수질이 강하여서 이 샘물을 먹은 동리 사람들은 힘이 세어지고 성질이 포악해 진다고 하는데 이 마을 사람 중에서 그런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네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행인이 있다면 마을 사내들이 나서서 불문곡직 말 다리를 분질러 벼렸다고 한다.
김해 김씨 65세손 김재성 절충장군은 힘이 대단하여 개비리에서 40관 되는 차돌을 꼴망태에 넣어 가지고 와서 동네사람들의 힘내기를 하였다. 그런데 힘센 사람들의 지나친 힘 자랑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일로 송사가 잦아서 동네가 소란하므로 그 샘물을 묻어버리고 그 곳에서 남쪽으로 50m 떨어진 지점에 샘을 파고 그 물을 마신 후부터는 온순하고 지나치게 거세고 힘센 사람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남지읍향토지 실림)
◎ 걸어온 강
* 용산리
사진설명
( 의병들의 첫 승전지 거룬강 나루 강 건너가 의령땅이며 오른편이 함안땅이다)
임진왜란 때, 용산리 앞 강 건너 함안 땅 백사장에서 왜놈 모곡(개다니)장군의 명령을 받고 수천명의 왜병이 창녕군을 점령하려고 도강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남강은 수심이 얕아서 도강은 문제없지만 낙동강은 넓고 수심을 알 수 없어 도강을 못하고 있는 것을 의병 곽재우장군은 미리 짐작하고 있어 낙동강 도선을 모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왜군들에게 도강이 큰 문제였다.
꾀 많은 곽재우장군은 의병들과 같이 달밤에 사다리 5개를 길이대로 이어서 창나루 수심이 깊은 곳에 물위에서는 안보일 정도로 사다리(수중교)다리를 만들었다. 그 다음날 의병들은 하의를 걷고 사다리다리를 타고 걸어서 강을 건너갔다. 왜병들은 멀리서 의병들이 낙동강을 걸어서 다니는 것을 보고 수심이 얕은 강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놈들은 밤이 되면 낙동강을 걸어서 건너 창녕군을 점령하는데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승리의 축배주까지 마셨다.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곽재우 장군은 의병들과 같이 강물 속의 사다리를 잡아 당겨 거두어 치웠다. 왜병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캄캄한 밤 자정이 되자 군기와 군량을 짊어지고 죽음의 낙동강변, 사람들이 하의를 걷고 강을 건너던 곳까지 와서 정말 수심이 얕은 줄로만 알고 용감하게 진군하기 위해 하나 둘 셋 상관의 구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낙동강에 뛰어 들어갔다. 으악!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수심이 얕다고 믿었는데 상상 밖이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10척 이상이나 되는 깊은 강물에 뛰어들어간 왜병들은 갑자기 서로 잡고 당기고 밀고 군기와 군량을 짊어진 채 한 놈도 남김없이 수마들이 통쾌하게 삼킨 것이다. 그 이튿날 놈들의 시체가 낙동강을 메웠다고 한다.
그 당시 사다리다리를 타고 걸어서 강을 건너 왔다고 해서 걸어온 강이라고 부르고 있다.(남지읍향토지 실림)
◎ 구진산성 축성
* 고곡리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고곡리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산성을 쌓기로 하였다. 원래 이 산성은 가야시대 때 쌓은 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성은 낡고 성벽은 허물어져 왜병과 싸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안 동네 아낙네들이 앞치마에 돌을 주어 올려다 산성을 쌓았다 한다. 그래서 왜적들과 싸워 많은 적을 몰아내고 큰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 산성을 곽재우 산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은 구진산성이라고 한다. 곽재우 장군이 진을 아홉 번 쳐 아홉 번을 다 이겼다는 얘기도 있고, 이 근처의 9군데에 진을 쳤다는 설도 있으나 낙동강을 건너 영산 창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을 지킨 산성임에는 틀림없다. (고곡리 607 성정수 남 68세)
◎ 아지 용갱이의 용
* 아지리 용갱이들
용갱이들은 아지 마을 동편에 있는 들이다. 용이 등천을 하였다 하여 이 골짜기를 흐르는 내의 이름을 용갱이라 부른다. 전에는 물이 많아 늪을 이루었다고 한다.
절골에서 흘러내리는 냇가에 옛날에는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곳에 수 백년 묵은 용이 살고 있었다 한다. 사람들이 항상 이 용에게 농사가 잘되게 제사를 지내며 순풍순우를 빌었는데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용의 덕으로 매년 농사가 잘되었는데 드디어 용이 등천을 하게 되었다. 용이 등천을 하면서도 동민들의 정성을 고마워하여 앞으로 풍년이 들도록 이 들에 물이 풍부하리라 하였다. 따라서 용이 보낸 강이 흐른다하여 용갱이들이라고 한다.(창녕군 지명사)
◎ 엄나무징이의 5효자
* 두곡리
예전 두곡 마을에 김녕 김씨의 선조가 아들 여럿을 낳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에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어 부득불 집을 떠나면서 마을앞 고개에 엄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 나무를 나를 보듯이 가꾸어라.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을 것이고 이 나무가 죽거든 내가 죽은 줄로 알아라."
하고 길을 떠났다. 여러 해가 지날 동안 아들들은 그 엄나무를 아버지를 대하듯 지극 정성으로 가꾸며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여러 해가 흘러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더니 아들들의 지극 정성이 하늘에 통하여 마침내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 왔다.
그 후 부모들이 돌아가시자 마을 뒷산에다 묘를 들이고 5형제들이 여막을 짓고 그 부모 시묘살이를 생전과 같이 지극히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효성이 널리 알려져 이에 나라에서 효자로 정려(旌閭)하였으니 이 엄나무가 있었던 고개를 엄나무징이(두곡고개)라 불리며 5형제 효자들이 시묘살이한 산이라 하여 효자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창녕군 지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