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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金文)이란 상대(商代)부터 춘추전국(春秋戰國)시기까지 약 1200여 년간의 각종 청동기물에 새겨진 문자를 가리킨다. 고대에는 동(銅)을 길금(吉金)이라 불렀으므로 길금문(吉金文)이라고도 하고, 청동기에 새겨 넣은 글자라는 의미에서 명문(銘文)이라고도 하며, 명문(銘文)이 새겨진 동기(銅器) 중에 가장 많고 중요한 것이 종(鐘)과 정(鼎)이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하고, 음식기로 사용된 이기(
器)라는 청동기에도 많이 새겼기 때문에 종정이기문자(鐘鼎彛器文字)라고도 부른다. 또한 금문(金文)을 새길 때의 음각(陰刻)을 관(款)이라 하고 양각(陽刻)은 지(識)라 하기 때문에 이들을 합하여 관지(款識)라고도 부른다.
금문(金文)은 갑골문(甲骨文)처럼 칼로 문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주조(鑄造)한 것이기 때문에, 갑골문(甲骨文)에 비해 필획이 두텁고 덩어리 형태(이를 괴상(塊狀)이라 한다)가 자주 보이며, 문자가 보다 규격화되어 좌우나 상하를 바꿔 쓰는 이체자(異體字)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금문(金文)의 주재료인 청동기는 사실 은상대(殷商代)부터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은상대의 청동기에는 글자가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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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닭은, 은상대(殷商代)에 있어 문자는 왕실의 점유물이었고, 또 상대(商代) 왕실에서는 문자를 신과 의사소통할 때 사용되는 신성한 것이라고 여겨 점칠 때에만 사용했기 때문에 청동기에서 주(西周) 초기, 대우정(大盂鼎)과 그 명문(銘文)글자를 새겨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탓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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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물 중에서 금문(金文)이 있는 청동기는 하남성(河南省) 정주시(鄭州市) 등에서 출토된 상대(商代) 중기의 청동기이다. 하지만 명문(銘文)은 극소수의 몇 점의 청동기에서만 보이고, 글자수 역시 두세 자 뿐이어서 별 의의가 없다.
은상대(殷商代)의 청동기가 주로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던 반면, 주대(周代)에 들어오면 왕으로부터 신하가 관직이나 토지, 기타 물품을 하사받았을 때나 어떤 공적을 세웠을 때 그것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기념할 내용이나 사건을 기록한 기념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청동기에 새기는 명문(銘文)의 글자수는 당연히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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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시대의 청동기로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약 2천 건 정도로, 서주(西周) 초기의 청동기는 상대(商代) 후기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았으면서도 무늬는 좀 더 화려해지고 형태는 더욱 정교해졌다. 이 시기에는 명문(銘文)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여 보통 100字 내외가 많고, 글자의 필획 또한 대부분이 ‘삐침’의 맛을 현저하게 보이고 있어서 강한 기세를 느낄 수 있으며, 내용은 주로 전쟁이나 분봉(分封)에 관한 기록이 많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동기로는 영이(令彛), 대우정(大盂鼎)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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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 중기인 공왕(共王), 의왕(懿王) 이후부터는 자형(字形)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된다. 두터운 선은 가늘어지고, 덩어리 형태는 쓰기 편한 선 형태로 바뀌었으며, 사물의 외형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그리던 선이 직선으로 바뀌었다. 또한 몇 개의 선을 하나의 획으로 잇는 경향이 보이게 된다. 청동기의 무늬는 점차 간단하고 소박해지기 시작한 반면, 명문(銘文)은 더욱 장편화되어 모공정(毛公鼎) 같은 경우 글자 수가 총 497자에 달한다. |
서주(西周)중기 모공정(毛公鼎) ▶ 명문(銘文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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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 중기의 명문(銘文)들은 책명(冊名)의 성질을 띤 것들이 많은데, 주(周)나라 왕이 신하들에게 내린 직책이나 하사품에 관련된 서술이 많기 때문에, 관료 제도와 계급제도의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금문(金文)은 대부분 고정된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문자 또한 매우 규칙적이고 가지런하다. 뿐만 아니라 토지의 전매와 양도를 기술한 산씨반(散氏盤)이나서주(西周) 말기, 괵계자백반(
季子白盤)과 그 명문(銘文) 전쟁에 관한 일을 기록한 우정(禹鼎), 다우정(多友鼎) 등, 이 시기에는 금문(金文)의 내용이 가장 풍부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주금문(西周金文)’이라고 일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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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 말에 이르면 어떤 명문들은 그 글자체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이 시기의 금문(金文)은 전혀 굵은 선이 없고, 행간과 자간이 일정해지며, 옆으로 기울어진 듯하면서도 고른 대칭을 이루고 있고, 자형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특징적인 청동기가 바로 괵계자백반(
季子白盤)인데, 문자가 네모반듯하게 가지런하며, 이후 진(秦)나라 사람들이 사용한 대전(大篆)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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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春秋時代 :
B.C.770-B.C.476)에는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고 제(齊), 진(晉), 초(楚), 진(秦)
등 제후국의 세력이 점차 강하게 되었기 때문에 청동기물 역시 각 제후국마다 취향에 따라
제각각 현란하게 장식되어 화려해졌으며, 금은(金銀)을 상감하는 기교들도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문자의
형태에도 장식화, 미술화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표현되면서 소위 과두문
과
조충서(鳥蟲書)가 나오는데, 과두문
은 북방에
위치한 진(晉)에서 유행한 서체로,
머리 부분은 뾰족하면서 배가 살찐 올챙이 모양의 글자라하여 붙여진 이름이고,조충서(鳥蟲書)는
남방의 오(吳), 월(越), 초(楚) 지역에서 주로 사용된 글자체로, 글자에 새나 벌레 모양의 장식을 더한 것이다.
이러한 서체(書體)들은 수식과 장식이 지나치게 많아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한자(漢字) 본래의 상형성(象形性)이 감소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B.C.475-B.C.221)는 워낙 혼란의 시대여서 무슨 공적을 세운다고 하여 일일이 청동기를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기록해 둘 정도로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에 청동기는 더 이상 기록의 도구로 이용되지 않았고, 글자는 돌, 옥, 비단 등 청동기 이외의 여러 재료들에 주로 사용되었다.
물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 청동기가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기물의 형태는 간단하고 소박하게 변하였고 무늬가 없는 무바탕의 기물이 유행하게되었으며, 극소수의 기물을 제외하고는 기물의 제작자와 감독관의 이름만을 새기는 것이 고작이었고, 글자체도 거친 것이 많다. |
춘추(春秋)시대 월(越)의 월왕구천검 (越王句踐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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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春秋)시대 진(晋)의 난서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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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주문(
)과 고문(古文)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진계문자(秦系文字)와 육국문자(六國文字) |
전국문자(戰國文字)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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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각 나라별로 한자 자형이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일곱 개의 제후국(지도)이 각각의 세력을 형성하며 난립하였고, 한자 자형 역시 나라별로 약간씩 다르게 발전하였다. 그 중 서쪽에는 후에 전국을 통일한 진(秦)나라가 자리잡고 있었고, 동쪽에는 나머지 육국(六國)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육국은 다시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진(晉)이 셋으로 갈라지면서 세워진 한(韓), 위(魏) , 조(趙)(이 세 나라를 삼진(三晉)이라고도 한다) 및 연(燕)나라가 북쪽에 위치하고, 동쪽에는 제(齊)나라, 남쪽에는 초(楚)나라가 있었다. 서쪽의 진(秦)나라에서 사용한 한자(漢字)와 동쪽의 육국(六國)에서 사용한 한자(漢字)는 자형상 차이가 컸기 때문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자 자체(字體)를 진(秦)나라에서 사용한 진계문자(秦系文字)와 육국(六國)에서 사용한 육국문자(六國文字)로 나누고, 이들을 전국문자(戰國文字)로 통칭하기도 한다. |
1.3 주문(
)과 고문(古文)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진계문자(秦系文字)와 육국문자(六國文字) |
진계문자(秦系文字)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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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계문자(秦系文字)는 주문(
) 혹은 대전(大篆)이라고 부른다. 진(秦)은 원래 주(周)가 도읍을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옮겨 동주(東周)시대로 들어선 이후에, 주(周)의 옛 땅에 세워진 나라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상 진(秦)은 서주(西周)의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글자의 자형 역시 금문(金文)에 비해 보다 더 네모반듯한 정방형(正方形)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는 서주(西周)시대 금문(金文) 자형과 유사한 면이 많다. 주문(
)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의 태사(太史)라는 관직에 있던 주(
)라는 사람이 처음 이 자형을
만들었기 때문에 ‘주(
)가 만든 글자’라는
의미에서 주문(
)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주문(
)을 대전(大篆)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진시황(秦始皇)이 전국을 통일하면서, 국가의 통일과 함께 동시에 문자(文字)의
통일도 단행하면서 주문(
)을
기초로 하여 소전(小篆)이라는 자형을 만들었는데, 그 소전(小篆)은 주문(
)을 근거로 한 것이었으므로
‘소전(小篆)과 유사하면서 소전(小篆)보다 먼저 사용된 글자체’라는 의미에서 대전(大篆)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주문(
) 자료로는
한대(漢代)의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자전(字典) 속에 실려 있는 220여자의 주문(
)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의 석각문자(石刻文字)인 석고문(石鼓文)과 저초문(詛楚文)이 주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학자들마다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으므로 그냥 하나의 설로만 기억해 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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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說文解字)』에 수록된 주문(
文) 자형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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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古文)은 육국고문(六國古文) 혹은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하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진(秦)을 제외한 동쪽의 육국(六國)에서 사용한 한자를 가리킨다. 진대(秦代)의 분서(焚書)를 피해 사람들이 감춰두었던 책들이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하나 둘씩 발견되었는데, 그 책에 쓰여진 글자체는 한대(漢代) 사람들이 이전 시기의 한자 자체(字體)로 알고 있던 대전(大篆)이나 소전(小篆)과도 달랐고,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隸書)와도 달랐기 때문에 이를 아주 오래된 ‘상고(上古) 시대의 글자체’라고 오인하여 고문(古文)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은 천하를 통일한 후 문자통일 정책을 펴서 천하 통일 이전 육국(六國)에서 제각각 사용되던 육국문자(六國文字), 즉 고문(古文)을 모두 폐기토록 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정책으로 인해 많은 소중한 고서(古書)들이 사라져간 것처럼, 진시황(秦始皇)의 문자통일 정책으로 인해 고문(古文) 역시 역사에 더 이상의 흔적을 남길 수 없게 된 형편이었는데, 다행히 한대(漢代)에 들어와 고문(古文)으로 기록된 책들이 발견되었고, 동한(東漢) 시기의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편찬하면서 고문(古文)을 500여자 수록해 두었으며, 위(魏)나라 때 만들어진 '삼체석경(三體石經) : 에서도 고문(古文)을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일부나마 고문(古文)의 자형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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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說文解字)』에 수록된 고문(古文) 자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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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문자(戰國文字) 자료로는 육국(六國)에서 만들어진 청동기의 금문(金文)을 비롯하여, 화폐나 도장 에 새긴 문자, 초(楚)나라 때 비단에 글을 새겨 놓은 백서(帛書) - 이를 ‘초백서(楚帛書)’라 한다 - 와 초(楚)나라 때의 죽간(竹簡) - 이를 ‘초간(楚簡)’이라고 한다 - 등이 있는데, 육국고문(六國古文)은 글자체가 워낙 다양하고, 형태나 의미가 달라도 음만 같으면 바꿔 쓰는 통가자(通假字)를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해독하기가 쉽지 않아 현재까지도 연구성과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육국고문(六國古文)을 금문(金文)이나 주문(
文), 소전(小篆)과는 완전히 다른 자체(字體)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체적인 면에서는 자형 차이가 심하지만, 모든 한자 자체(字體)는 이전 시기에 사용된 자체(字體)의 글자와 그 다음 시기 자체(字體)의 글자가 동일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고문(古文)은 주문(
文)이사
소전(小篆)과 100% 다른 자체(字體)’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주문(
文)은 금문(金文)에서
변화된 자체(字體)이고, 소전(小篆)은 그 주문(
文)을 근거로 만들어졌으며, 고문(古文) 역시 금문(金文)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의 자형 구조가 동일한 글자가 있는 것처럼 주문(
文)과 고문(古文),
소전(小篆)이 완전히 동일한 글자도 있고, 소전(小篆)과 주문(
文)이 동일하거나 소전(小篆)과 고문(古文)이 동일한 글자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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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통일의 필요성을 느낀 진시황(秦始皇)은 ‘동일한 글자 쓰기’, 즉 서동문(書同文) 정책을 실시하여 당시 승상이던 이사(李斯)로 하여금 기존의 진(秦)나라에서 쓰던 대전(大篆)의 자형을 간략하게 만들어 통일왕조에서 사용할만한 한자를 정리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통일왕조 진대(秦代)의 공식서체로 사용된 소전(小篆)이다. 지금 볼 수 있는 소전(小篆) 자료로는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실린 소전(小篆)이 대표적이다. 한대(漢代)에는 이미 예서(隸書)를 공식서체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허신(許愼)은 소전(小篆)을 표제자로 삼아 총 9,353자의 소전(小篆)을 수록하여 자전을 만들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역대로 귀중한 저서로 학자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2000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그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또 그 덕분에 소전(小篆) 역시 많은 수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외의 소전(小篆) 자료로는 진시황(秦始皇)이 전국 통일 후 총 7곳에 세웠다는 각석(刻石)이 있다. 태산(泰山)을 비롯하여 낭야대(琅邪臺),
역산(
山) 등에 자신의 공적을 칭송한 문장을 새긴 돌비석을 세웠는데, 모두 이사(李斯)의 필체로 쓴 소전(小篆)이라고 하며, 이들을 각각 태산각석(泰山刻石), 낭야대각석(琅邪臺刻石),
역산각석(
山刻石) 등으로 부른다. 하지만 지금은 태산각석(泰山刻石)과 낭야대각석(琅邪臺刻石)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소전(小篆)은 전체적으로 약간 타원형이고, 획의 굵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며, 곡선의 형태가 많고, 좌우
혹은 상하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주문(
文) 자형 중에서 동일한 형태가 중복되는 편방은 생략시켰고, 전체적인 형태를 간단하게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던 편방을 하나의 형태로 통일하였고, 한 글자 안에서 편방의 위치를 고정시켰다. 몇
글자만 예로 들어 주문(
文)과 소전(小篆)을 비교해
보자. (앞 글자는 주문(
文), 뒷 글자는 소전(小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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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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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의 근대문자(近代文字)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나? |
2.1 예서(隸書) |
예서(隸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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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비(禮記碑) | |
진시황(秦始皇)이 공식적인 한자 자체(字體)로 공포한 것은 소전(小篆)이었지만, 민간이나 하급 관청에서는 예서(隸書)라는 글자체를 사용하였다. 이 예서(隸書)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일화가 하나 있다.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전국이 통일된 직후는 건국(建國) 초기인데다가 진시황(秦始皇)이 워낙 엄격한 법률로 사회 전반을 통치하려 했기 때문에 단순한 법률 위반자에서부터 진시황(秦始皇)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소위 범죄자가 급증하게 되어 감옥은 늘상 사람들로 넘쳐 났고 감옥의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간수들은 바쁜 일과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관리들은 많은 행정를 소전(小篆)으로 작성했는데, 소전(小篆)은 주문(
文)을 간략화 시켜 만든 자체(字體)이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 상형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자형 구조가 복잡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문서를 기록하는데는 불편함이 따랐다. 당시,감옥을 관리하던 간수 중에 정막(程邈)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업무상의 과실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고, 감옥에 있는 시간 동안 자신이 간수 일을 맡으면서 진대(秦代)의 공식 자체(字體)인 소전(小篆)으로 바쁜 업무를 처리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던가 하는 점에 착안하여 소전(小篆)의 글자체를 대폭 간략하게 만들어 진시황(秦始皇)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바로 예서(隸書)이며, 감옥 업무 때문에 만들어진 글자라는 의미에서 ‘노예, 말단관리’라는 의미의 ‘예(隸)’자를 따서 예서(隸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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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막(程邈)이 정말로 진대(秦代)에 예서(隸書)를 만들었다면 진대(秦代) 이전에는 예서(隸書) 자형이 보이지 않아야 하겠지만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초기의 진(晉)나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후마맹서(侯馬盟書)나 초(楚)나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초백서(楚帛書) 중의 몇몇 글자에서도 예서(隸書)와 동일한 자형구조가 보이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마왕퇴백서(馬王堆帛書)정막(程邈)의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일 뿐이며, 예서(隸書)는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이미 조금씩 사용되다가, 진대(秦代)에 와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위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예서(隸書)는 보다 빠르고 편리한 서사(書寫) 작업을 위해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자체(字體)였다. 갑골문(甲骨文) 이후 소전(小篆)까지 한자 자체(字體)는 상형적인 그림이 점차 간단한 선으로 바뀌어 오긴 했지만, 그래도 소전(小篆)은 여전히 곡선이 많고 자형구조가 복잡하여 쓰기에 불편했다. 하지만 예서(隸書)에 와서는 둥근 곡선이 쓰기 편한 직선으로 바뀌고, 복잡한 자형 구조가 대폭 간단하게 변화되었으며, 왕(王)과 옥(玉)은 왕(王)으로, 육(肉)과 월(月), 주(舟)는 월(月) 하나로 쓰는 등 여러 개의 편방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에 소전(小篆)에 비해 훨씬 쓰기 편리하게 바뀌었다.
예변(隸變)이란? 갑골문(甲骨文) 이후 소전(小篆)까지 내재되어 있던 상형성(象形性)이 예서(隸書)에서부터는 사라져 버렸고, 한자(漢字)는 더 이상 보면 알 수 있는 그림 같은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는(혹은 의미를 알기 어려운) 선과 선이 결합되어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부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자(漢字)는 예서(隸書) 이전 소전(小篆)까지를 고문자(古文字), 예서(隸書)부터를 근대문자(近代文字)로 구분하며, 소전(小篆)에서 예서(隸書)로의 변화를 ‘예변(隸變)’이라고 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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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예(秦隸)와 한예(漢隸)란? |
전국시기를 거쳐 진대(秦代), 그리고 서한(西漢) 초까지 사용된 예서(隸書)를 진예(秦隸), 한무제(漢武帝) 이후 한대(漢代)에 사용된 예서를 한예(漢隸)라고 하는데 진예(秦隸)의 자료로는 호북성(湖北省) 운몽현(雲夢縣)에 있는 수호지(睡虎地)에서 발견된 진(秦)나라 때의 죽간(竹簡)인 운몽수호지진간(雲夢睡虎地秦簡)과 호남성(湖南省) 성도(省都) 장사시(長沙市)에서 발견된 한대(漢代) 초의 마왕퇴백서(馬王堆帛書)가 대표적이고, 한예(漢隸)의 대표적인 자료로는 희평석경(熹平石經)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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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隸書)와 초서(草書)는 소전(小篆)과 예서(隸書)의 관계와 같다. 공식자체인 소전(小篆)이 쓰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민간에서 소전(小篆)을 간단화시킨 예서(隸書)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처럼, 한대(漢代) 사람들은 한대(漢代)의 공식자체인 예서(隸書)가 쓰기에 불편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서(隸書)를 빨리 쓸 수 있게끔 윤곽이나 글자의 일부만을 필기체 형식으로 흘려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서(草書)이다.
즉 한대(漢代)에 예서(隸書)가 공식 자체(字體)로 사용되자, 하급 관청이나 민간에서는 또 그 예서(隸書)가 쓰기 어렵고 불편하다고 느껴 그것을 실용적으로 간략화시켜 초서(草書)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서(草書)의 발생은 글씨 쓰는 재료의 변화와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한대(漢代)에 예서(隸書)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한대(漢代)에 개인의 돌비석[石碑] 건립이 유행했는데, 돌비석에 한자를 쓸 때는 둥근 필획이 많은 소전(小篆) 보다는 직선화된 예서(隸書)가 훨씬 더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동한(東漢) 부터는 종이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직선으로 딱딱 끊어지는 예서(隸書)보다는, 그 예서를 흘림체 형식으로 연결해서 쓰는 초서(草書)가 훨씬 더 쓰기에 편리했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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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楷書) | |
해서(楷書)는 정서(正書) 혹은 진서(眞書)라고도 하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자체(字體)이다.
해서(楷書)는 동한(東漢)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고, 당대(唐代)에는 표준 자체(字體)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예서(隸書)의 단정한 형태와 초서(草書)의 쓰기 편리하다는 장점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해서(楷書)가 당대(唐代)에 발달하게 되는데는 당대(唐代)의 인쇄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의 목판인쇄는 대략 7세기 중엽인, 당대(唐代)에 시작되었는데, 해서(楷書)는 예서(隸書)보다도 더욱 직선적인 서체(書體)였기 때문에 목판 인쇄에 아주 적합하였으므로, 인쇄에는 대부분 해서(楷書)를 사용했고, 인쇄물(印刷物)의 자체(字體)가 해서(楷書)이다 보니 표준자체의 위치를 쉽게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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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서(行書) | |
행서(行書)는 해서(楷書)를 약간 흘려서 쓴 필기체이다.
예서(隸書)의 필기체로 만들어졌던 초서(草書)는 지나치게 흘려쓰는 바람에 글자 식별이 점차 어렵게 되어 다시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의 장점을 취해 또박또박 한 획씩 쓰는 단정한 형태의 해서(楷書)가 나타났고, 해서(楷書)를 사용하다보니 다시 좀 더 빨리 쓸 수 있는 필기체 형태가 필요하게 되자 행서(行書)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흘려 쓸 경우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단점이 있음을 초서(草書)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행서(行書)의 경우 흘려 쓰기는 쓰되 글자의 본모습을 잃지 않게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즉 행서(行書)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빨리 쓸 수 있으면서도 글자 식별에 무리가 없기 때문에 동한(東漢) 시대에 처음 사용된 이후 지금까지도 필기체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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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현대한자(現代漢字)-간체자(簡體字) |
간체자(簡體字)와 번체자(繁體字)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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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수립 이후, 중국 정부에서는 문맹(文盲) 퇴치를 목적으로 한자의 간화(簡化) 방안을 만들고 그 한자간화방안(漢字簡化方案)에 따라 한자 2,235자의 형태와 획수를 간략하게 만들어 보급에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대륙과 싱가포르에서 사용되는 간체자(簡體字)이다.
현대에 들어와 만들어지고 현재 사용되는 한자(漢字)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를 현대한자(現代漢字)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간체자(簡體字)가 만들어진 후, 간략화 시키기 이전의 기존 한자는 ‘형태가 복잡한 글자’, 즉 번체자(繁體字)라고 부르는데 현재 우리나라, 대만, 홍콩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가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간체자(簡體字)의 등장은 이전 시기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공식 자체(字體)를 간략화시켜 등장한 자체(字體)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 | |
우선 이전의 자체(字體)들은 민간에서 민간인들의 필요성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자체(字體)였고, 간략화를 시켰다고는 하나 그 이전 자체와 비교했을 때 그다지 파격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간체자(簡體字)는 정부의 주도 하에, 면밀한 계획과 검토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체(字體)이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형태는 그 이전 시기의 자체와 비교했을 때 형태의 파괴가 지나치게 심했다. 예를 들어 ‘창(廠)’자의 간체자인 ‘
’, ‘종(從)’의 간체자인
‘
’, ‘기(幾)’의 간체자인 ‘
’, ‘중(衆)’의 간체자인 ‘
’ 등을 보면, 형태가 지나치게 간략화, 부호화 되었기 때문에 간체자(簡體字)
자형만 보면 본래의 글자가 무슨 글자였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더욱이 ‘위(衛)’자의 간체자인 ‘
’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또 ‘운(雲)’의 간체자인 ‘云’, ‘기(幾)’의 간체자인 ‘
’, ‘후(後)’의 간체자인
‘后’ 등에서 간체자 형태인 ‘云’, ‘
’, ‘后’는 원래 “말할 (운)”, “책상 (궤)”, “임금 (후)”라는 고유의 음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자인데, 이것이 ‘운(雲)’, ‘기(幾)’, ‘후(後)’의 간체자가 되면서 ‘云’, ‘
’, ‘后’만 보고서는 이것이 ‘구름’이라는 의미인지
‘말하다’라는 의미인지, ‘조짐’이라는 의미인지 ‘책상’이라는 의미인지, ‘뒤’라는 의미인지 ‘임금’이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문장 속에서 앞뒤 문맥에 따라 어떤 글자를 쓴 것인지 파악이 가능하긴 하지만 고유명사, 즉 인명이나 지명 같은 경우에는
도저히 파악할 방법이 없게 된다. 간체자(簡體字)는 중국의 문맹률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복잡한 한자를 빨리 쓰는데는 유리했지만, 형태가 지나치게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형태로 의미를 나타낸다는 한자의 표의성(表義性)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고, 간체자(簡體字)만을 학습한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번체자(繁體字)로 남아 있는 중국 고서(古書) 해독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전통 문화의 계승 차원에서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출처-우리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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