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사람들.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반항하다 모진 구타를 당하다 죽은 이.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은 이. 이들에게 저승에서는 이승에서와 같은 고통이 없게 하소서!
죽어야하는 죄인이지만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게 있어서 글을 남깁니다. 내가 죽는날까지 도망자의 신분이기에 남을 속이고 있지만 여기에 적는 말은 진실뿐임을 밝힙니다. 저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죽은 피해자와 그분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며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젊음을 구속당한채 보내야 하는 여린마음의 동생들에게 깊이 사죄한다.
나는 아마 이세상에서 제일 나쁜놈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한일을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 대해서 잘못 아는 것이다. 나는 의적도 난놈도 아니고 나쁜놈에다 죄인일 뿐이다.
나는 그간 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소년소녀가장들을 도왔다. 전엔 그게 잘하는 짓인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느꼈다. 단돈 천원을 도와도 내가 정당하게 힘들여 땀흘려 번돈이 진정한 도움이라는 것을… 나는 교도소에서도 문제수였다. 처음 무기형을 선고 받고 자포자기식으로 살았다.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서 징벌을 여러차례 받았고 내일이 아닌 남의 일로 인해서 나 혼자 교도관에게 맞고 잡힌적도 있다. 물론 내 행동이 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도관들의 행동도 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소내 규율은 잡는다고 운동잘하는 교도관들을 선출해서 이유없이 막무가내로 두목급들을 구타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나 혼자서 난동을 부렸다. 이로 인해 나는 문제수로 낙인이 찍혔고 교도소 네곳을 거쳐서 청송 제2교도소에 가게되었다. 청송을 가기전에 대전에서 교육을 받는데 아마 예전 삼청교육이 힘들었어도 이만했을까 싶다.
30㎏의 모래 가마니를 어깨에 매고 훈련을 받는데 3시간을 땅위에 내려놓지 않고 훈련을 받는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작해서 여러가지를 하는데 젊은 나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연세 많은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시는걸 옆에서 부축했더니 머리, 어깨를 안가리고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것도 웃으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죽이지만 않으면 돼. 병신이 되어도 우리에겐 책임이 없어. 국가에서 허락한 일이야!』
8주동안 계속된 훈련은 정말 그들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훈련으로 인하여 허리, 관절등에 고질병이 생긴 이들이 무수하다. 이유없이 날라오는 몽둥이 고통때문에 괴로워하면 손가락질하며 웃는 그들의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 중 절반 정도는 자기가 교육을 받기전의 교도소로 다시 가고 나머지는 청송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수갑을 찬채 몽둥이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열두시에 그곳에 도착해서 6시경에 방에 들어갔으니얼마를 맞았겠는가. 연세 많으신 분들도 머리를 맞아 피가 나는데도 멈추지 않고 매질과 기합이 계속됐다.
한겨울에 방안에 있는 물이 꽁꽁어는데 정좌를 하고 문앞에 경비교도대 의 얼굴만 보여도 머리가 마루바닥에 꽝소리가 날정도로 절을 해야 했다. 운동시간을 15분정도 그것도 기합으로 시작해서 기합으로 끝났다. 새로지은 특별교도소로 옮기기 얼마전에서야 자유롭게 운동을 할수 있었다.
새로지은 교도소에 옮겨서 생활하는 도중에 영하15도쯤 내려가는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데 마루바닥에서 담요 세장으로 살아야 하고, 방안에 있는 물이 꽁꽁어는데, 얼굴을 내놓고 자야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정좌하고 앉아있어서 몸이 꽁공얼어붙어서 발을 손으로 문지르면 자세불량으로 얻어맞고 밤에 얼굴을 내놓고 자면 추워서 잠을 잘수가 없었다.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자면 깨우고, 그래도 너무 추워 수건으로 덮으면 자다말고 끌려나가 두드려 맞기를 여러차례, 추워도 참고 그냥 자자고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위장병과 간염이 생겨 열이 39도를 오르내리고 너무나 아파서 방안을 굴러다니면서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하니까 보건의가 와서 체온계를 떼고는 "열이 있네"하면서 해열제만 한 알 주고는 그냥갔다. 해열제를 먹었는데 고통은 가시지 않고 속에서 피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달라고 소리치니까 대답이 없어 방문을 발로 찼다. 방문을 발로 차니 교도관 여러명이 오더니『이새끼가 방문을 차 어디 한 번 죽어봐라』하면서 끌고 나가 온 몸을 묶힌 채 얻어맞고 밟혔다. 그것도 약1시간 반동안 아마 내 체력이 강해서 살 수 있었지 보통사람이었다면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나를 밟으면서 그들이 하던 말과 얼굴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 새끼가 쌩까네』하면서 웃는 모습. 그들은 때리면서 상대방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그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들의 목이라도 물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죽음을 많이 생각했다. 죽을려고 몇번 생각했지만 죽을 수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부터 나는 탈옥을 계획했고 내 계획이 성공할 때까지는 5년이 걸렸다. 5년동안 나는 간과 쓸개를 빼 놓고 살았다. 나는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짓은 하지 않았다.
5년동안 허점을 찾느라 보냈고 허점을 발견하고 실행까지 3개월이 걸렸다. 쇠창살 2개를 절단하는데 2개월이 걸렸고 중을 빼느라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실행당일 나는 못으로 만든 칼 하나에 팬티 하나만을 걸치고 나왔다. 만일 발각되면 죽을려고 했기 때문이다. 창을 빠져 나오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억지로 몸을 밀어넣어도 몸이 꽉 끼어 움직이기도 힘이 들었다. 무리를 주어 빠져 나오는데「힘이 들지만」성공했다. 등과 어깨는 찢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남은 것은 3개의 담 간이벽위로 쳐진 5m의 담을 밑으로 뚫고 들어가는데 2시간이 걸렸고 공사장에서 쓰는 철근을 담에 대고 1번째 담을 넘었다.
나를 발견하고 총을 쏘는데 걸리는 시간을 5,6초 잡았고 내가 담을 넘는 시간을 5초 잡았는데 내가 담위에서 발견되면 3초 정도의 시간이 나에게 있고 그 시간이면 어둠속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너무 빨리 넘어서일까 아니면 경비교도대원이 자고 있었는지 발견되지 않았다.
담을 모두 넘어 농가에 있는 자전거를 타고 화원에 가서 옷을 훔쳐 입고 부산 시내도 들어갔는데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서울에 가기로 하고 첫 택시를 잡았는데 기사가 젊은 사람이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것 같아 그 차를 보내고 다음 택시를 잡았는데 연세가 지긋한 분이였다. 그 차를 타고 가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분에게 자식들이 몇 있어서 자식들 얘기를 한 것 같다.
택시가 서울에 가까워질 때 내가 기사에게 나는 탈옥을 한 탈옥수이고 오늘 새벽에 나왔으니 지금 라디오를 틀면 나에 대한 얘기가 나올거라고 하면서『나는 아저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제발 내가 아저씨를 해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하면서 차 운전은 내가 하게 해달라고 했다.
톨게이트를 지날 때 아저씨가 만약 신고를 했어도 나는 차만 몰고 그냥 왔을 것이다.
서울에 도착해서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전화할데가 있는데 돈이 없어 그러니 500원만 주세요 했더니 그래도 차비는 있어야 할게 아니냐며 나에게 2만원을 더 주셨다. 그 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아저씨께 정말 감사드린다. 나는 아저씨가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만 하고 바로 서울을 빠져나와 천안으로 갔다.
천안에서 3일 정도를 산속에서 잤고 남의 집 지하실에서 몇일을 자다가 TV에서 한일전 축구경기를 중계한다기에 다방에 가서 축구경기를 보다 해분이를 알게되어 해분이와 일년여를 살게 됐다.
그간 나는 남의 돈을 훔쳤다. 70평이상 되는 빌라 100평,120평되는 빌라들… 해분이와 살았던 얘기는 쓰지 않겠다. 나를 두번 팔아서 그녀가 미워서가 아니다. 나를 두번 팔았지만 그녀에게 피해는 주고 싶지 않다. 내가 만약 그녀와의 생활을 쓴다면 나는 거짓말을 해야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나는 그녀를 이용하지 않았고 내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 집에 들어갈려고 하는데 계단 불이 다 꺼져 있었고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눈주위에 강한 충격이 왔고 눈을 뜨기도 호흡을 하기도 힘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곳에서 빠져 나왔고 되도록이면 멀리 피할려고 쉬지않고 달렸다.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얼굴과 머리는 손을 대지도 못할 정도로 따가웠고 화끈거렸다. 억지로 눈을 뜨고 뛰었는데 금방 날이 밝았다. 땅을 파고 땅속에 숨었다. 밤이되어 밖에 나와보니 사람들은 평소와 똑같이 생활하고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고 혹시나하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 근처로 접근했는데 몇명의 사람들이 집주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이 잠깐 가계쪽으로 간 틈을 타서 해분이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이제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이 발각됐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나와 함께 갈래?』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좋은 여자 있으면 그 여자와 함께 살아. 나는 지금 갈 수 없어』 그때 나는 그녀가 이제는 자신이 위험하니 나와 헤어질려고 하는 줄 알았고 나는 그동안 고마웠고 잘 살아라는 말을 하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10여일을 떠돌다 성경이를 알게됐고 성경이의 모습이 선화와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 그때문에 정이 갔고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내가 도피처가 필요했기에 빨리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던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내가 성경이를 이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결과는 그렇게 되었지만.
성경이와 함께 해분이를 만나러 갔다. 옷과 짐, 그리고 내가 기르던 강아지를 가지러 간 것도 이유이지만 해분이와 헤어질 때 해분이가 살림을 차릴 여자가 있으면 꼭 한 번 데리고 오라고 했다. 얼굴 한 번 보게. 그때 처음 둘이 얼굴을 대했고 그 때문에 해분이와 그날 많이 싸웠다. 그때는 여자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몰랐다. 나는 해분이가 나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하는줄만 알았고 그녀의 말대로 성경이를 대려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송탄에 와서 몇일 있는데 아침에차 있는 곳으로 가니 차 사이드미러가 접혀 있고 거기에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쪽지를 읽으려고 하는데 뒷쪽에서 크락숀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해분이 차가 거기에 있었다.
너무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서 왔다고 했다. 난 성격이 모질지 못하다. 성경이와 해분이 어느 한쪽을 버렸다면 이렇게 힘든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날 나는 해분이를 데리고 성경이와 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둘이 얘기를 하라고 했고 성경이가『해분이 언니와 오래 살았으니 언니와 함께 살아』라고 했다. 성경이는 정말 순진하고 정이 많은 아이다. 착하고 불쌍한 애. 나는 성경이에게 무엇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 죽는 날까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해분이와 2,3일을 지내면서 성경이가 너무 불쌍하고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그때 성경이가 울면서『오빠 잠깐이라도 좋으니 얼굴 한 번만 보자 정말 죽고 싶어』라고 했다. 나는 성경이의 우는 소리를 듣고 너무 괴로웠다. 성경이는 전에 사는 것이 괴로워 물속에 뛰어든적이 있었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이 있어 인공호흡을 해서 다시 살아났지만, 내가 성경이를 만나기 전이었지만 그일 때문에 너무 걱정이 되어 해분이에게 성경이를 잠깐만 만나고 올테니 기다리라고 했는데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무일도 없고 잠깐만 얘기만 한다고 했는데도 절대 안된다고 했고 그 때문에 언성이 높아지고, 나는 성경이에게 그냥 가버렸다. 그때부터 성경이와 함께 살았는데 해분이의 계속된 전화와 전화추적을 통해 금방이라도 경찰이 들어올것 같은 불안감 대문에 너무 힘들었다. 그때문에 성경이에게 잘 해주지도 못했고 신경이 괴로워져 많이 다퉜다.
분명이 12월이나 1월달이면 전화추적이 들어 올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하루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했는데 그럴수 없었다.
나에게 경찰들이 들어 닥치기 하루 전날 나는 성경이에게 오늘 떠난다고 말하고 울고 있는 성경이를 놔두고 집을 나왔다. 그날 저녁 내내 성경이가 너무 불쌍해서 너무 괴로워 술을 마셨고 그녀를 떠날수가 없어 다음날 다시 들어갔다. 그날 떠났더라면 그녀에게 피해는 없었을텐데…
잠을 자고 있는데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집에 올 사람이라곤 성경이 친구밖에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성경이에게 문을 열으라고 하고는 주방에가서 칼을 잡고 오이를 썰고 있었다. 성경이가 누구냐고 하니 신문사에서 나왔다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신문을 안본다고 하면서 문을 열자 4,5명의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내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까스총을 쐈는데 손 바닥으로 눈을 보호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총을 나에게 던졌다 피하면서 저희들끼리 도망치다 넘어지곤 했다. 앞뒤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빌라 전체가 다 포위되어 있었다. 나는 집을 바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가 다른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총을 가지고 와서 두번째로 집으로 들어가는 중에 내가 나왔다. 계단에서 나오면서 포위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일이냐고 물어보니 위험하니까 빨리 들어가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나를 못알아봤는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여기 있다』고 소리치자 금방 그 주위를 둘러쌌다.
나는 빨리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쇠파이프가 날아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손으로 막고 뛰었다. 나는 그때 칼이 있었고 내가 만약 사람을 해치려고 했다면 팔도 부러지지 않았고 더 쉽게 빠져 나왔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검도에 자신있다고 해도 칼만 있으면 열명도 짧은 시간안에 자신있게 처리할 수 있다. 나에겐 힘과 스피드와 칼과 주먹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그 곳에서 나에게 쏜 총알이 몇발인지 모른다. 총소리가 여러번 났고 10여분을 추격전을 벌였지만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곧바로 전주로 갔다.
수중에는 돈이 십원도 없었고 때문에 나는 전에 훔친 수표를 바꿔 돈을 마렸대고 3일뒤 귀경차량을 따라 대전으로 왔다. 팔이 부러진 것을 전주에서 깁스를 하고 대전에 왔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서 10여일뒤 대전 병원에 갔더니 다시 어긋났다고 해서 다시 깁스를 했고 그 다음날 성경이가 걱정이 되어 성경이에 대해서 알아볼 마음으로 해분이에게 전화를 했다. 해분이와 할 얘기도 많았고, 내가 그대 제정신이 아니었던것 같다.
지금같았으면 절대 전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분이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천안 인터체인지에서 해분이차가 나오는 것을 보고 뒤를 따랐는데 조금 이상했다.
뒤의 봉고차가 이상했는데 운전에 자신이 있어 내가 차에 타고 있는 한 잡히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에 게속 뒤를 따랐다. 뒷좌석에도 사람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해분이를 믿었다. 차를 세우고 해분이 차있는데로 다리를 절며 가는데 뒷좌석에 업드리고 있는 두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차있는데로 뛰었는데 잘 뛸 수가 없었다. 왼팔은 깁스상태였고 오른발은 금이 가 있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나는 붙잡혔고 그때부터 몸싸움이 시작됐다. 둘다 총이 있었는데 공포탄이었다. 총을 쏘면서 겁을 주고 둘이서 붙잡고 총을 들고 머리를 찍고 그래도 내가 반항하니 깁스한 팔을 총으로 내리찍고 머리를 계속해서 내리찍었다. 그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른팔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맞고 있는데 멀리서 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른 팔로 한명을 쳤는데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어 체중을 얹지 못해서 위력이 없었다.
한사람이 한대 맞고 눈주위를 감싸고 있을 때 오른 팔로 한사람을 잡아채 그가 바닥에 쓰러졌을때 총을 빼앗았다. 그것으로 그들을 겨냥하자 그들이 움찔 하면서 뒤로 물러섰고 나는 마치 내 차안에 누가 타고 있는 것같이 『야 모두 쏘아버려 얘들은 총알이 없어』하고 소리치자 모두 도망쳤다.
그뒤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고나니 나는 산밑에 있었고 머리에서는 싸이렌 소리와 경광등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앗다. 한 5분여를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리는 일곱군데가 찢겨서 피가 나고 있었는데 한곳은 크게 벌어져서 선지피가 나왔다.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피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다리는 땅에 댈 수도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고 손목은 제멋대로 돌아가 있었다. 빨리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그몸을 이끌고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개울을 따라서 계속 걸었고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20여㎞를 걸어서 갔는데 어지러움과 추위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통증은 저리가고 몸이 꽁꽁어는 추위를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옷이 모두 젖어 얼었고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얼었고 피가 얼어 겨울이 아니었고 여름이었다면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추위 때문에 피가 멈췄고 상처가 곪지않아 그나마 시간은 좀 걸렸지만 나을 수 있었다.
병원,약국에도 갈 수 없어 손목 부러진 것을 혼자서 맞추는데 손목이 3군데가 부러져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병신이 되지 않을려고 고통을 참고 뼈를 맞추면 혼자 깁스를 하고 붕대를 감을때 다시 어긋나고 팔이 퉁퉁부어 뼈가 만져지지도 않지만 8,9차례를 반복해서 울면서 뼈를 맞췄다.
깁스를 하고 3주만에 풀었다. 깁스를 하고 다니면 눈에 빨리 띄게 되기 때문에 두달을 추위속에서 바람만 막을 수 있으면 잤다. 너무 추우면 단전호흡으로 몸을 덮히고, 하루에 한끼도 먹지 못할 때가 많았고 농가에 들어가 몰래 표가 안나도록 밥통에서 밥을 조금씩 먹고 할아버지가 하는 가게에서 비스켓을 사서 하루에 하나를 먹으며 견디었다.
팔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어 김제에 가기로 했다. 집에 갈려는 목적이 아니라 곳은 내가 잘 알기에 되도록이면 잘 아는 곳, 지리를 잘 아는 곳이 나을 것 같았다. 청주에서 전주까지 자전거로 갔다. 브레이크도 잡을 힘이 없어 그곳까지 가는데 6,7번 넘어졌고 넘어질 때마다 팔의 통증 때문에 바닥에 그냥 누워 있었다.
김제에 도착해서 낮에는 낚시 밤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먹고 낚시 온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해가지고 온 밥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몇일이 지나고 어스름녘에 빵과 우유를 사려고 가게에 들렸다. 그 가게는 그때가 세번째 가는 거였다. 가게에 들어갔는데 주인의 안색이 평소와는 다르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빨리 물건을 사고 나가자는 생각을 했는데 내 뒤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태연하게 앞을 보고 있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사람이 내 앞으로 오더니『왜 그렇게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냐.얼굴좀 보자』하고 모자를 벗겼다. 그때 나는 주먹을 날려서 기절을 시킬까 생각하다가 그냥 태연하게 두고 보자는 마음에 가만히 있었다.
자기가 경찰이라며 나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 동네에 살고 있다고 했다.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하기에 집에 두고 왔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저기 차에 가서 얘기좀 하자고 했고 나라는 것을 짐작한 눈치였다.
지금은 나에겐 표정적인 것이 하나 있다. 전에 까스 총탄을 정면에서 맞아 눈밑에 큰 점이 문신처럼 되어 버렸다. 검은 점을 상징처럼 달고 다니는데 누가 못알아 보겠는가. 그래서 그걸 감추려고 남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다녔다. 그가 그 검은 점을 봤기에 나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기 혼자는 무리라고 생각하는지 어디에 연락을 하려고 했고 그때 내가 있는 쪽으로 4,5명의 사내들이 빠른 걸음으로 왔는데 형사들이라는게 확실했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그대로 행동했다. 옷을 두텁게 입었기에 그를 밀치고 뛰는데 스피드가 붙지 않았다. 뒤에서는 빨리 총을 쏘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 거리가 20여미터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겨냥을 못하게 지그재그로 뛰는데 뒤에서 총성이 나고 총알이 바로 내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개울을 넘어 뛰는데 거리가 차츰 멀어지는데 총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거기서 밤이 새도록 달려 아침이 될 때는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다른 사람을 나로 오인하고 신고한 덕을 톡톡히 봤다. 이곳 저곳에서 나를 봤다는 제보들이 많았지만 나는 제보가 들어갈만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서 밝힐 수 없지만 몇분, 정말 고마운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전주에서 벗어나 그분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은 내가 한번 간곳은 두번다시 가지 않는다. 어떤이들은『이렇게 살바엔 차라리 죽지』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의 환경이 교도소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한다.
얼마 있으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나는 성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팔이 부러지고 온몸이 얼어붙은 채 잠을 자며 비스켓 하나로 하루를 버티며 살 때도 나는 교도소 보다는 나았다.
왜 인줄 아는가? 지금은 그 가학성 변태성욕자같은 노리개감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왜 그들은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그들은 국가에서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받은 것인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그렇게 당해도 싸다고 하면 할말이 없다.
사람이 잘못 행동을 하고 있을 당시에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지난날을 생각할 때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나같은 놈은 짐승취급해도 좋다. 그만큼 나는 나쁜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도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밖에 있는 사람들 보다 순수함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게 한 번에 그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복 되는 것은 법무부에도 책임이 크다. 무조건 강압적으로 대한다고 사람의 성격이 바뀔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재소자들이 제일 불쌍하다. 올바른 가정환경 따뜻한 정을 받아보지 못하고 정에 굶주리면서 살아온 재소자들이 80% 이상일 것이다. 물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은 재소자도 있다. 러나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저런 사람이 왜 이곳에 왔을까 하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열심히 일하고 굳은 일 마다하지 않고 자기가 나서서 하는 사람들. 그런 재소자들은 자기가 받을 형을 모두 살고 나가는데 돈이 있다고 빈둥거리고 사는 사람은 특사를 받고 나가는게 너무 많다. 너무 돈만을 바라는 교도관들이 많고 재소자들을 벌레 취급하는 교도관들이 많기에 또 나와같은 전철을 밟게되는 순진한 이들이 계속 될 것이다. 재소자에겐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따뜻한 정, 포근한 말 한마디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얼마 안되는 봉급을 쪼개어 불쌍한 재소자를 돕고 진정으로 그들을 안타까워 하며 그들의 삶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교도관들도 많다. 그분들께 고마움을 표하며 싸잡아 비난한것같아 미안하다.
나와서 복수를 할려고 내가 반 혼수상태에 있을 때 나를 잦밟던 그를 찾아갔다. 부산에서 이틀을 기다려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평생 침대에서 살게 만들려고 차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 어느 부부와 아이들이 웃으면서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가족을 보면서 느낀점이 있기에 나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가 혼자라면 나는 몇번이고 내 계획대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가정이 있고 그 때문에 괴로워할 생각을 하니 차마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내 계획을 접고 편지를 썼고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 문틈에다 편지를 꽂아놓고 나왔다.
내용은 재소자에게 인간대우를 해주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당사자는 잘 알것이다. 또 한번 부탁한다. 편지의 내용을 잊지말길...
나는 말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을 해치지 않을려고 노력했다. 한번 사람을 해치면 두번.세번. 계속될 것 같고 나 자신이 살인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를 신고한다고 해서 그사람에게 복수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나를 알게되면 신고해라. 도피하는 생활을 해야 되기에 남을 속이고 돈을 훔치는 짖을 많이했다. 피해자들께 용서를 빈다.
다시 교도소 얘기를 하겠다. 도행정이 하루라도 발리 고쳐져야 하겠기에 쓰기 싫지만 적겠다. 재소자들이 아프면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 면회를 오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몸이 아파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병을 키워서 출소하던지 아니면 그곳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받지 못한다.
「교도소에서 무료로 치료를 해주는데」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이 치료를 하는 것이지 형식적이다. 진찰을 교도관이 한다. 약 처방도 교도관이 하고 주사도 재소자가 놔준다. 의무과장이라고 사회 의사가 있는데 정말 많이 아픈 사람만 그에게 진료를 받는다. 80,90프로는 교도관이 한다. 교도관이 병에 대해서 뭐를 알겠는가. 의사도 각 교도소마다 다르겠지만 산부인과 정형외과 같은 전문의들이 많다. 내과 전문의는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약 처방을 할때 약명을 적는 것을 본다.
나는 영어공부를 오래해서「잘은 모르지만」조금은 안다. 7,8가지의 약을 처방을 했는데 약봉지를 열면 2,3개정도 나머지 3,4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의무과,용도과,작업과,분류과 비리가 수없이 많다. 잘 사는 사람거라면 모르지만 얼마되지 않는 예산이지만 재소자들을 위해 써야할 돈이 그들이 주머니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행위가 아닌가.
나는 지금 거짓말도 과장도 하지 않는다. 사실 그대로 적고 있을 뿐이다. 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살다 나온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봐라. 헌 담요를 몇년째 사용하고 거의가 자신이 구입한 담요를 쓴다. 모든 물품을 공급해야 하는데도 거의 지급이 없다. 1년 예산에 포함된 물품들, 그 물품을 지급해야 하는데 지급 받지 못했으니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교도관에게 얼굴이 멍들고 상처가 나도록 맞아도 어디에 호소할 데도 없다. 그곳에서 맞아 죽어도 모를 것이다. 사실 그런적도 청송에서 있었고 청송에서 함께 있던 재소자들은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들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법무부에서 교도관들의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 감사가 나온다. 교도소끼리 서로 직원들을 다른 교도소에 보내 대 교도소를 감사를 하곤 하는데 모두 형식적이다. 몇일전부터 감사가 나온다는 것을 연락받고 감사받을 준비를 끝내놓고 기다리고 있다. 감사를 받는데 비리가 발견되겠는가. 감사를 하는 사람들도 잠깐 시찰하는듯 마치 견학온 것처럼 둘러보고 그냥간다.
상부에서 아무리 좋은 지침을 내려보내도 교도소안에서 재소자가 받는 것은 매 한가지다. 왜냐하면 그 지침이 재소자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도소도 개혁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재소자를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이 바뀌어야만 재범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전과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에게도 하나같이 사랑으로 대해주는 교도관들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꾼것은 매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억누른다고 고쳐지겠는가.
가슴을 짖밟으면 밟을수록 적대감과 반항심이 커질 뿐이다. 진정한 것은 따뜻한 정이었다. 정에 굶주린 사람들 그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누가 정을 조금만 줘도 푹 빠져드는 그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폐쇄된 공간, 치외법권 지역에서 계속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고 어디에 호소도 할곳이 없다. 그들이 죄인이기에 당해야 한다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잘못을 할 수 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들은 환자고 교도관은 의사나 간호사가 아닌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치료해서 깨끗히 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더욱더 악화시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에게 고통을 가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는건 절대 아니다. 앞으로 내가 겪은 지옥같은 생활을 다시 경험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 배움이 짧아 내가 쓰고 싶은 말들을 다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도 나뻤지만 지금 나는 몇배 더 나쁜놈이기에 나에 대한 변호는 하지 않겠다. 내 형제들, 나 때문에 힘들게 살고 있을 동생들, 그리고 나와서 만난 두 여인에게 정말 미안하다. 특히 성경이.그 착하고 정많고 순진한 아이.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내가 해야할 일이 하나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나는 당장 죽어도 원이 없다. 첫사랑 선화를 잊는데 6,7년이 걸렸다. 내가 처음 교도소에서 나와 찾아갈려고 했던 사람은 를 밀고한 사람이 아니고 그의 매형이었다. 내가 밀고로 잡히던날 그곳에서 밀고한 사람(친구의 선배였다)의 매형이 선화를 보면서 하던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그 매형이 청량리588에서 색시집을 한다고 들었다).
『제 귀여운데,내 가게에 데려다 놓으면 장사 잘 되겠다』그 소리를 듣고 그에게 다가가려다 형사들에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맞았다. 어디 그게 남자가 할 소리인가?
전에 신문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쓴 걸 봤다. 「청량리,천호동 사창가에서 기행하면서」라는 대목이었는데 그것 읽고 화가나서 편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썼다가 부치지 찮았다. 내가 천호동에서 살았고 청량리에서 잡혔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했던것 같다.
나는 돈을 주고 여자와 관계하는 것을 싫어한다. 애정이 없는 sex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여자를 이용하려고 했으면 교도소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부자가 됐을 것이다.
나에게 미쳐있던 돈 있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얹혀살든지 아니면 그들을 이용해서 돈을 욹궈냈다면 부자가 됐을 것이다. 선화에게 한번 물어봐라 내가 그 불쌍한 여자들을 등쳐먹을 사람인지. 내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평생을 피해 다닐수는 없다. 언젠가는 총을 맞고 피를 뿌리며 끝나겠지만 항상 준비가 되있다.
그때가 오면 내 마지막을 담담히 맞겠다. 그러나 나는 모든 수완을 동원해서 피해 다닐 것이며(아무리 급한 상황이 오더라도 일반인은 절대 해치지 않겠다) 도저히 힘든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경찰도 나에게 당하게 될 것이다.
총이 무서운 무기임에는 분명하지만 안전장치를 풀고 홀즈터에서 뽑아 겨냥을 했을 때의 얘기지 그러기 전에는 쇠붙치에 불과하다. 아무리 빨라도 3초는 걸릴 것이고 초면 내 주먹이 15번쯤 나갈 수 있고 칼이라면 그 보다는 느리겠지만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분명하다고 생각되면 내 머리를 먼저 쏘고 내 몸을 가져가라. 나를 사로 잡으려고 하다간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는 복싱을 했지만 도,씨름,격투기를 선수들 정도는 아니지만 2,3단짜리들하고 해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내 말을 명심하길 바라고 더이상 내 형제들과 아버님,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세 여인들을 힘들게 하지 말기 바란다.
만약 이들중 한명이라도 잘못됐다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때는 엄청난 결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절대 가족이나 그녀들에게 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든 일이니까 나 하나면 되지않은가. 더이상 가족과 여인들에게 고통을 주지 말길 바란다. 건 나의 부탁이고 경고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 마음을 내가 자제하고 남자가 해서는 안될 짓을 절대하지 않고 있다. 도피자금 때문에 돈을 훔치지만 지금 나의 처지로선 어쩔 수 없다. 부탁한다. 내가 만든 현실 나하고 끝내자! 나 하나만…
나는 언제라도 죽을 자세가 되어있다. 절대 자수는 없을 것이며, 교도소에 살아서 들어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단 하루도 그들의 노리개감이 되어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998년 07월 16일 19시 07분 |
출처: 貪 嗔 痴 원문보기 글쓴이: 멧돼지
첫댓글 자료 찾아서 올려주시니 고맙습니다. 자료찾는 수고는 학생들이 해도 되는데요. 너무 고생하셨네요.
윤샘등에 빨대 꽂기 ㅋ